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 후기 풍속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1758~?)의 그림으로 알려진 <사시장춘(四時長春)>도 다
그림속엔 봄을 상징하는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은 봄을 빙자한 야릇하고 노골적인 춘화도(春畵圖)다.
그렇다면 화가는 어떤 장치들로 춘정을 표현했는가를 살펴보자
그림의 배경은 어느 주막 후원쯤으로 짐작되는 공간에서 댓돌도 아니고
쪽마루에 가냘픈 여자 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그 옆으로 남자 신이 놓여 있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가지런히 벗어놓지 못한 채
신발 한 짝은 비딱하게 벗겨져 있다. 보아하니 저 방 안에는 남녀가 있을 터다.
마루 높이가 제법 높아 보여 긴치마를 입은 여자 혼자 오르기 쉽지 않아 보이는데
남자가 먼저 마루에 올라 여자를 부축해 위로 끌어올려 방 안으로 들인 후 급한 마음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을 여유도 없이 문을 닫아버렸을 것이다.
비딱하게 놓인 신발 한 짝에
방금 전 황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남자의 들뜬 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런 남자의 검은 마음을 표현하듯 남자 신은 검은색으로,
여자 신은 한껏 달아오른 마음의 빛깔인 붉은빛으로 그렸다.
색의 선택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한
화가의 뛰어난 색채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화가 중 이렇게 뛰어난 색채 감각을 자랑하는 화가가 누가 있던가?
바로 이런 세련된 색채 감각이 이 작품을 신윤복의 그림이라 추정하는 이유 중 하나다.
신윤복은 색깔의 표현을 매우 치밀하게 계산한 화가였다.
남녀가 들어간 방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증은 더해가는데 오른쪽
후경을 보니 실낱같이 흐르는 계곡이 굽이굽이 흘러 폭포를 이루고 있다.
무심코 보면 그냥 그런 배경이려니 하겠지만 가운데 물이 흐르고 주변은
거무튀튀하니 바보가 아닌 이상 여체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노골적으로 이렇게 대놓고 여성의 중요 부위를 그려놓고는 배경인 양
시치미를 떼고 있다.
기발함과 기량에 자신감이 없으면 그릴 수 없는 장치다.
아마도 화가는 천하의 강 심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 그림의 주인공은 술병을 들고 서 있는 어린 종(奴)이다.
운우지정에 술이 빠질 수 없었는지 술을 가지고 오라는 명을 받아
조그마한 손으로 술병을 들고 문 앞에 섰는데,
아이코, 마음 급한 남녀는 벌써 일을 벌였는지 야릇한
소리가 들리고 문을 통해 요상한 열기가 전해진다.
어린 종은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이고, 그렇다고 술을 가지고 오라는 명을
저버릴 수도 없는 그 난감한 순간을 앞으로 내민 손과 뒤로 엉거주춤 뺀
엉덩이의 대조를 통해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다.
엉덩이를 살짝 빼는 듯한 표현도 이 그림을 신윤복이 그린 것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신윤복의 그림에서 여인의 이중적인
심사를 나타낼 때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당혹스러운 것이고, 열 살이 넘으면 결혼하는 것이 그리 드문 일도 아닌
시절에 남녀 간 춘정은 부끄러우면서도 맹렬한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주제다.
부끄러우면서도 야릇한 호기심. 어린 종의 고조된 흥분이 붉은 댕기로 잘 표현되어 있다.
자, 이쯤 되면 어떤 분위기를 그린 것인지 그림은 다 말해주었다.
하지만 화가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주련에 ‘四時長春’이라고 떡하니 적어놓았다.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문구)
남녀 간 춘정은 나날이 봄날이란다. 하하하, 정말 조선시대 춘화도의
으뜸으로 꼽히는 그림답지 않은가? 남녀의 벗은 몸도, 얼굴이나 발가락 끝
하나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춘화도의 후끈대는 열기를 전부 보여주며
‘나날이 봄날’이라니. 한껏 열기를 부풀어 올려놓고
보란 듯이 마지막 펀치를 날린 셈이다.
흠뻑 젖은 앞 녹음과 뒤쪽 꽃나무도 아무나 쉽게 그리는 경지를 넘어서 있다.
특히 앞쪽 습한 나뭇잎의 묘사에서 안개 속처럼 깊이감 있게 그려낸 솜씨는
화가의 기량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봄날이여 영원하라
이 그림의 뛰어남은 무엇보다도 남녀의 운우지정을 ‘사시장춘’이라고 표현한 해학성이다.
완고한 유교적 도덕 사회에서도 잊지 않던 우리 민족 고유의 넉살과 천연덕스러움,
금기에 대한 도전, 비꼬면서도 우리의 또 다른 모습임을 살며시 알려주는 재치,
그림의 주인공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삼고
새롭게 부각되는 중인(中人) 계급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는 창조성. <사시장춘>은
이런 치열한 예술적 고민 속에서 탄생한 조선식 일급 춘화도인 것이다.
글 손태호<미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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