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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萬難(만난)을 무릅쓰고 해 냈다! 숨 막히는 惡戰苦鬪(악전고투)끝에 서울~ 해남의 땅끝마을~완도 청산도까지 라이딩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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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라이딩은 서울에서 해남의 땅끝 마을을 거쳐 완도의 청산도까지 리이딩을 하면서 공주의 백제 유적지,부여의 백제 유적지,익산의 백제 유적지,정읍의 전봉준장군 유적지,강진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해남의 고산 윤선도 유적지,땅끝 마을, 완도의 장보고 유적지및 청산도의 서편제 길을 큰 축으로 라이딩 하였다
*답사 라이딩 코스(총584키로:3박 5일)
1.공산성(옛 웅진성:사적12호)
2,공주 박물관:*공주 대통사 석조(보물 148호,149호),*뒤꽂이(국보 159호),*귀걸이(국보 157호),*두침(국보 164호),*족좌(국보 165호),*무령왕릉 진묘수(국보 162호),*수문경(국보 161호).*계유명 삼존 천불비상(국보 108호),*서혈사지 석보여래좌상(보물 979호),*금동 보살입상(국보 247호)
3,송산리 고분군 5,6,7호(무령왕릉):사적13호
4,우금치 전적지(사적 387호)
5,부여 부소산성(엣 사비성:사적 5호):*삼충사,*사자루,*영일루,*군창지,*수혈병영지,*궁녀사,*반월루,*고란사,*고란사 약수터,*고란사 요사체 벽화,*조룡대,*백화정(낙화암)
6,정림사지 5층석탑(국보9호)
7,궁남지(사적 135호)
8,관북리 유적지(기념물 143호)
9,능산리 고분군(사적14호)
10,부여 박물관:*백제 금동 대향로(국보 287호),*석조 사리감(국보 288호),*금동 관음보살 입상(국보293호)
*당유인원기공비(보물 21호),*보광선사비(보물 107호),*부여석조(보물 194호),*산 경치무늬 벽돌,*산경치 봉황무늬 벽돌,*봉황무늬 벽돌,*연꽃 무늬벽돌 *용무늬 벽돌(보물343호),*칠지도모형(일본 국보)
11,신동엽 생가
12,구드래 나루터(명승 43호)
13,백제나성(사적 58호)
13,익산 왕궁리 5층석탑(국보 289호)
14,미륵사지(사적150호),미륵사지석탑(국보11호),당간지주(보물236호)
15,무왕릉(익산쌍릉)
16,익산 고도리 석조 여래상(보물 46호)
16,만석보 유지비(기념물 33호)
17,만석보 혁파비
18,말목장터(기념물110호)
19,전봉준 생가(사적 293호),전봉준 생가 우물터
20.황토현 전적지(사적 293호_)
21,백산성(사적 409호)
22,고부 관아터(기념물 122호) 23,강진 다산초당(사적107호):*다산초당, *동암,서암,*다산4경(정석바위,약천,연지석 가산,다조),*천일각
24,사의재
25,영랑생가(민속자료 252호)
26,백련사
27,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녹우당:민속자료167호)
28,김남주 시인 생가
29, 땅끝 마을
30,완도 대교
31,장보고 유적지(청해진, 장도, 장보고 기념관)
( 32,완도 청산도:*느림의 종,*서편제 길,*봄의 왈츠 셋트장,*범바위,*화랑포길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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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추 한 알*
*장 석 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장석주 詩人(시인)님의 이 짧은 "대추 한 알"이란 詩(시)를 가끔 읽을 때 마다 이 시는 언제나 나에게 강렬한 메세지를 던져주어 나를 省察(성찰)하게 하고
내가 人生(인생)을 살아 가면서, 지치고, 힘들고, 忍耐心(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때 마다 警句(경구) 役割(역할)을 해 주는 詩(시)이다
이 시는 작고 하찮은 微物(미물)에 해당하는 대추 한 알도 成熟(성숙)하는데
온갖 試鍊(시련)을 견디는 忍苦(인고)가 따른다는 平凡(평범)한 眞理(진리)를 담고 있는데
世上(세상)의 어떤 冊(책)보다 더 深奧(심오)한 哲學()철학)이 들어 있다고 힐 수 있다
한 알의 대추가 祥瑞(상서)로운 붉은 빛을 띄기 위해서는
무서운 천둥, 颱風(태풍),그리고 벼락을 온 몸으로 막아 내야하는 처절한 試鍊(시련)과 酷毒(혹독)한 忍苦(인고)의 歲月(세월)이 必要(필요)로 하고
한 알의 대추가 모나지 않고 둥글어지기 까지는
수 많은 무서리 내리는 밤, 땡볕 내리쬐는 한 여름의 무더위,그리고 몇 번이고 초승달이 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며,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떨어야하는 時間(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 詩(시)에 含蓄(함축)된 메세지는
우리 인간에게도 그대로 適用(적용)되지 않나 생각되어 진다
즉, 대추나무가 대추 한 알을 붉게 익히기 위해
모든 情熱(정열)을 쏟아 부었듯이
장석주 시인은 몇 줄 안되는 이 詩(시)로, 인간도 세상의 온갖 逆境(역경)과 試鍊(시련)을 견디어 내야만, 비로소 본인이 원하는 結實(결싷)을 얻을 수 있다는 省察(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삶에 대한 강렬하고 뜨거운 熱情(열정)을 쏟아 부으라는 메세지를 오롯이 담아낸 이 詩(시)가 나는 참 좋다
(참고:대추는 祭祀床(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 가는데, 그것도 맨 앞줄,맨 처음에 올라간다. 그 이유는 대추는 열매에 비해 씨가 커서, 옛부터 王(왕)을 象徵(상징)한다 하였고
또한 상서로움,희망,위엄, 벼슬을 상징한다 하였다.
그리고 벼락맞은 대추나무는 단단하기가 돌보다 더해, 도끼나 톱으로도 쪼개지지 않을 뿐더러 물에도 가라 앉지 않는다 한다. 그래서 옛부터 대추나무로 만든 도장는 最上品(최상품)으로 여겨졌다
한편 孟子(맹자)의 告子編(고자편)에도 이와 비슷한 메세지를 던져주는 글이 있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천장강대임어시인야)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일을 맏기려 할 때
必先苦基心志(필선고기심지)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勞基筋骨 餓基體膚(노기근골 아기체부)
신체를 고단하게 하며,배를 굶주리게 하고
窮乏基身 行拂亂基所爲(궁핍기신 행불난기소위)
생활을 곤궁에 빠뜨려 하는 일 마다 어지럽게 하나니
所人心忍性 曾益基所不能(소인심인성 증익기소불능)
이것은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해내지 못하던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즉, 인간에게 고통과 시련을 주는 이유는 그 사람의 器局(기국:사람의 도량)과 力量(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즉, 이유없는 苦難(고난)과 試鍊(시련)은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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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하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꿈을 향해 나아가는 힘은 理性(이성)이 아니라
강인한 意志(의지),豊富(풍부)한 想像力(상상력),불타는 熱情(열정)이며
차거운 頭腦(두뇌)가 아니라
뜨겁게 搏動(박동)하는 心臟(심장)이며, 안이함을 뿌리치는 冒險心(모험심)이라 했거늘......
누군가가 말하였다
Now Or Never......무슨 일이든지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할 수 없다고.....
不狂不及(불광불급)...이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愚公移山(우공이산)..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努力(노력)해 나간다면, 결국 뜻을 이룰 수 있다고...
磨斧作針( 마부작침)...무슨 일이든지 끈기있게 하면 반드시 이루게 된다고...
이런 말들은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데 좋은 格言(격언)이 아닌가 싶다
자전거 라이딩을 좋아하는 라이더들에게는 "3대 로망" "꿈의 라이딩" "自矜心(자긍심")이라고 하는 달리고 싶은 길이 있다 나도 자전거 라이딩계에 入門(입문)한 후에
이 3대 로망의 꿈의 饗宴(항연)을 펼치는 라이딩을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꿈과 期待(기대)를 가지고 熾烈(치열)하게 달려 왔다
그것은
첫째는전국 자전거 길(국가 공인 인증센타가 있는 곳))을 모두 완주 라이딩 하는 소위"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것이고
(즉, *인천 서해 갑문에서 부산 낙동강 하구언까지의 국토종주, * 4대강 종주(한강,낙동강,금강, 영산강), *섬진강 종주, *오천 자전거길 종주, *동해안 종주, *섬진강 종주, *제주도 종주등을 모두 완주하는 것)
둘째는 강원도 진부령,미시령,한계령에서 시작하여 험준한 山岳地帶(산악지대)를 누비며, 白頭大幹(백두대간)을 따라 智異山(지리산)의 정령치, 성삼재까지 자전거로 넘을 수 있는 모든 봉우리를 縱走(종주)하는 소위 "백두대간 종주 52개령"을 완주 라이딩 하는 것이고
셋째는 서울에서 위험한 國道(국도)릏 따라 韓半島(한반도) 남쪽 땅끝인 해남 땅끝마을까지 完走(완주) 라이딩 하는 것이다
위 "3대 快擧(쾌거)"는 모두 어느것 하나 손쉽게 達成(달성)할 수 없는 꿈의 旅程(여정)인 동시에, 難攻不落(난공불락)의 여정이요, 험난한 苦難(고난)이 뒤따르는 挑戰(도전)의 旅程(여정)인 셈이다
또한 자신의 不屈(불굴)의 鬪志(투지)를 試驗(시험)하는 여정이요, 乾坤一擲(건곤일척:원래 하늘과 땅을
걸고, 즉, 운을 하늘에 맡기고 한판 勝負(승부)를 건다는 뜻)의 눈물겹고 굵은 땀방울과 피나는 努力(노력),처절한 忍耐(인내)가 요구되는 旅程(여정)이기도 한다
또한 時間(시간)과 執念(집념)과 幸運(행운)이 뒤따라 주어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艱難辛苦(간난신고)와 千辛萬苦(천신만고)의 길인것이다걸고 , 즉,운을 하늘에 맡기고 한판 승부를 건다는 뜻)
나는 이 나의 로망을 達成(달성)하기 위하여 지칠줄 모르는 鬪志(투지)와 情熱(정열)을 쏟아 부으며, 라이딩 길목마다 도사리고 있었던 수 많은 難關(난관)을 克服(극복)하고, 헤치면서, 그 동안 틈틈히 시간 나는대로 全國 各地(전국 가지)를 누비며 힘겨운 라이딩 여행을 계속 해 왔다
그 결과, 올해 초,전국 자전길을 모두 완주 라이딩을 하는 소위 "그랜드 슬램"은 뜻을 이루었고
백두대간 종주 52개령의 라이딩은 이 중, 險難(험난)한 白頭大幹嶺(백두대간령)은 모두 라이딩을 끝냈고, 현재 쉬운 코스만 10여개의 嶺(령)만 남아 있는 상태여서, 이번의 서울에서 땅끝 마을까지의 라이딩은 나의 라이딩 생활중 그야말로 "畵龍點睛(화룡점정:중국 양나라 때, 화가 장승유가 龍(용)을 그린 뒤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려 넣었더니, 그 용이 忽然(홀연)히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가버렸다는 古事(고사)에서 나온 말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마쳐 일을 完成(완성)한다는 意味(의미)이다 )"에 해당하는 大尾(대미)를 裝飾(장식)하는 꿈의 饗宴(향연)을 펼치는 라이딩이였다
이른바 짐승급 라이더들에게는 비할바가 못되지만 나로서는 이번 라이딩이 興奮(흥분)을 감출 수 없는 라이딩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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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번 포기를 할려고 하였다
라이딩 일행중 뜨거운 地熱(지열)이 얼굴을 덮쳐 화상을 입었고,모두 다 약간의 열사병 증상이 나타나고....
땅끝 마을을 지나, 완도 청산도까지 라이딩 여행을 하느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인 듯 했다
허나, 나는 드디어 해냈다, 결국 꿈을 이루었다!
歷史 發展(역사 발전)의 動因(동인)으로 작용하는 挑戰(도전)....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力著(역저)인 "역사의 연구"에서
역사의 본질은 "挑戰(도전)과 應戰(응전)"이라고 간결하게 한마디로 정의 하였다
挑戰(도전)!
얼마나 가슴을 콩당 콩당 뛰게 하는 말인가?
안락한 환경의 剝製(박제)된 日常(일상)에서 벗어나 자신 스스로를 苛酷(기혹)한 環境(환경)에 내 던지고, 허우적거리고, 발버둥치는 酷毒(혹독)한 試鍊(시련)을 克服(극복)하고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그 무엇인가를 爭取(쟁추)했을 때의 기쁨이란 억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喜悅(희열)이다
나는 求道者(구도자)의 행색으로, 오직 자전거의 희미한 前照燈(전조등) 하나에만 의지한 채
까마득히 먼, 이 나라 대한민국의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해남의 땅끝마을을 향해 大望(대망)의 꿈의 饗宴(향연)을 펼치기 위해 까만밤을 새하얗게 지새우며 , 내 자신의 몸뚱아리를 熱情(열정) 덩어리로 삼아, 밤낮을 쉬지 않고,살인적인 중복 더위의 暴炎(폭염)도 뚫고 내 달리고 내 달렸다
꿈의 라이딩.....서울에서 한반도 제일 남쪽 땅끝...해남의 땅끝 마을까지 라이딩 여행....그리고 더 나아가 완도의 청산도까지...... 이 얼마나 興奮(흥분)되고 멋진 일인가?
인긴은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위해 땀흘리는 열정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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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같은 여름 休暇(휴가)를 맞아
나는 드디어 그동안 벼르고 별렸던 大望(대망)의 畵龍點睛(화룡점정)의 가슴 벅찬 꿈의 饗宴(향연)을 펼치는 壯途(장도)에 오르는 해남 땅끝마을 까지의 라이딩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그 出發點(출발점)에 섰다
무엇이든 實踐力(실천력)이 擔保(담보)가 되어야 하거늘......
完走(완주)를 장담할 수 없는,너무나도 치열한 血鬪(혈투)가 豫想(예상)되는,
오직 인간의 힘으로만 자전거 바퀴를 굴려서 달려가야만 하는 여정인 것이다
서울에서 한반도의 맨 끝 땅덩어리인 해남의 땅끝 전망대까지 라이딩 旅程(여정)은
고된 旅程(여정)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宿題(숙제)였으며,역사 탐방도 동시에 해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것 처럼 라이딩 길목 길목에 묻혀있는 선조들의 숨결과 체취, 哀歡(애환)을 더듬는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며 지그재그로 달려야 하기 때문에
장장 500키로가 훨씬 넘는 엄청난 장거리인 것이다
역사 유적지에서는 역사의 흔적들이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설사 망각의 저편으로 흘러 가버렸다고 해도, 探脈(탐맥)하고, 採掘(채굴)하여 그들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면서 달릴 참이었다
즉, 공주, 부여의 백제 문화권,전봉준 장군의 유적지, 그리고 강진의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엄청난 저술활동을 하였던 다산 초당등 크게 세축을 중심으로 지그 재그로 달려갈 계획을 세웠다
땅끝 마을까지 이제 1키로....거의 한숨을 놓았지만....마지막 예상치 못한 깔딱고개가 또 기다리고 있었으니...
나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여기까지도 거의 기어서 달려 왔는데.....
그래서
歷史冊(역사책)에서나 보아왔던 百濟(백제)의 燦爛(찬란)한 문화의 實體(실체)를 公州 博物館(공주 박물관)과 扶餘 博物館(부여 박물관)을 찾아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確認(확인)해 보리라!
그리고 公山城(공산성),武寧王陵(무령왕릉),宋山里 古墳群(송산리 고분군),扶蘇山城(부소산성),定林寺址(정림사지),宮南池(궁남지),관북리 遺跡地(유적지),익산 彌勒寺址(미륵사지),왕궁리 遺跡地(유적지),武王陵(무왕릉),구드레 나룻터등 수 많은 百濟(백제)의 遺跡地(유적지)를 일일히 探訪(탐방)하여, 破片(파편)으로 조각 나버리고,虛空(허공)으로 흩어져 버린 백제의 흔적들을 희미하게라도 퍼즐을 맞추듯 꿰어 보리라!
또한 妻(처), 子息(자식)을 손수 칼로 목을 베고 背水陣(배수진)을 친채, 결연하게 悲壯(비장)한 심정으로 新羅軍(신라군)과 一戰(일전)을 치루기 위해 황산벌(지금의 논산시 연산면)로 5천 決死隊(결사대)를 이끌고 나선, 臨戰無退(임전무퇴)의
階伯 將軍(계백 장군)의 憂國衷情(우국충정)의 심정도 먼 발치에서나마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며 헤아려 보리라!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羅, 唐(나, 당) 聯合軍(연합군)에 굴욕적인 敗北(패배)를 딩한 후, 그 결과로
백제의 멸망을 가져와, 의자왕을 비롯한 王族(왕족)과 15,000명이 넘는 수 많은 百姓(백성)들이 줄줄히 손,발이 묶여 머나먼 타국인 당나라의 洛陽(낙양)으로 처참하게 끌려갔던 치욕스럽고도 통탄스러운 역사의 길목에 서서 백제의 역사를 대충이라도 더듬어 보리라!
또한 더욱 남녘땅으로 내 달려가
收奪(수탈)과 抑壓(억압)에 짓눌리던 全琫準(전봉준)을 비롯한 高阜(고부)지역의 農民(농민)들이
輔國安民(보국안민)의 旗幟(기치)를 내걸고 세상을 향해 竹槍(죽창)을 들어 한바탕 시원하게 反封建(반봉건),反外勢(반외세)의 革命(혁명)의 불꽃을 치켜 올렸던 東學農民革命(동학농민혁명)의 遺跡地(유적지)인 萬石湺 遺跡地(만석보 유적지), 萬石湺 革罷碑(만석보 혁파비),전봉준 장군의 生家(생가)터,農民軍(농민군)의 첫 集結地(집결지)인 말목장터,농민군이 첫 大勝(대승)을 거둔 黃土縣(황토현) 戰績地(전적지),東學農民革命(동학농민혁명)의 運命(운명)을 갈랐던 우금치 전적비를 차례로 踏査(답사)하여
東學農民革命(동학농민혁명)이 갖는 意味(의미)와 전개 과정을 파 헤쳐 보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朝鮮時代(조선시대)의 偉大(위대)한 思想家(사상가)이자, 實學 思想(실학사상)을 集大成(집대성)하였고 500권이 넘는 尨大(방대)한 著述(저술)활동을 하셨던 茶山 丁若鏞(다산 정약용)선생의 流配地(유배지)인 강진의 茶山 草堂(다산초당)과 四宜齋(사의재)를 찾아가 선생님의 위대한 사상을 더듬어 보고,선생님의 痕跡(흔적)과 體臭(체취)를 느껴 보고, 선생님의 마음의 갈피를 조금이라도 더듬어 보리라!
그리고 ,반드시 暴炎(폭염)을 뚫고,땀에 흠뻑 젖어가며 이번 라이딩길에 보고 느꼈던 것을 온몸으로 一筆揮之(일필휘지)의 大敍事詩(대서사시)를 멋지고 웅대하게 휘갈겨 써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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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窮理(궁리)를 하면서 우리 일행 3인은 역사 유적지를 차례 차례 답사하면서 목적지인 땅끝마을을 향해 남으로 남으로 페달을 밟아 가며 질주를 하였다
허나 라이딩이 계속되면, 계속 될수록 豫想(예상)보다 훨씬 難(난) 코스가 많았고, 想像(상상)하기 조차 싫을 정도의 엄청난 長距離(장거리)여서 아연 실색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들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쳐다 보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왔다 더구나 연일 34도를 웃도는 폭염으로 대지는 펄펄 끓고 있었고, 이글 이글 타고 있었다 뜨거운 地熱(지열)로 火傷(화상)이 염려될 정도였다 鎔鑛爐(용광로) 처럼 달아 오른 地熱(지열)로 때문에 苦戰(고전)이 계속 되었고.......
결국에는 모두가 지칠대로 지쳐가고 있었다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은지 오래 되었다
체력 고갈로 내 자신이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음을 느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 이상 타는 목마름을 어떻게 견뎌 내야 한단 말인가?
너무나 氣盡脈盡(기진맥진)하고 힘겨워 暴炎(폭염)아래에서 땅끝마을까지 完走(완주)하는것이 나로서는 力不足(역부족)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기 시작 하였다
수 없이 抛棄(포기)하고픈 마음이 간절했지만 도저히 抛棄(포기)하는것은 自尊心(자존심)이 許諾(허락)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수 없이 참을 忍(인)을 새겼고 忍耐(인내)의 塔(탑)을 끝없이 계속 쌓아 나가면서
알 수 없는 呪文(주문)을 닥치는 대로 외우며
수시로 무너져 내리는 내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추스리고,다둑거려 가면서 달리고 달리면서 戰意(전의를 불태웠다
心臟(심장)이 터질 듯 하고 呼吸(호흡)이 점차 거칠어 지고,허벅지 筋肉(근육)이 터질 듯 하고,
意識(의식)은 점점 昏迷(혼미)해져 갔다
엉덩이의 살갗은 벗겨져 빨갛게 달아 올라, 심한 통증 때문에 도저히 안장에 앉아 버틸 수가 없었다
마지막 단 한방울의 땀마저 쥐어짜고, 쏟아내며, 인내하고 견뎌 내야만 한다
기진맥진할 수록 더욱 더 두 눈을 부릅뜨고, 단 한바퀴라도 전진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이제는 단 한바퀴라도 페달을 밟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버렸다
안간힘을 다하여 忍苦(인고)의 시간들을 버텨 내야 하는데...
나의 意志(의지)는 바닥을 헤메고 있었다
허나 無意識(무의식) 상태에서도 페달을 계속 밟아 나가지 않으면 않된다!
이럴수록 정면 돌파를 시도 하며, 눈물겨운 死鬪(사투)를 벌여야 하느니라!
이렇한 苦戰(고전)중에도 라이딩 길목에서 눈치없이 간간히 나타나는 업힐코스 구간은, 나로 하여금 세파랗게 질리게 하였다
뚝심과 執念(집념)의 突破力(돌파력),끈기와 覇氣(패기), 두려워 할 줄 모르는 膽力(담력)등 온갖 美辭麗句(미사여구)의 말로 치장을 한, 끝,끝내 땅끝 마을까지 傲氣(오기)로라도 밀어 붙이겠다는 결연한 初心(초심)은 사라진지 오래다
苦難(고난)을 벗삼아 苦行(고행)길을 自招(자초)한 나의 모습은 흡사 求道者(구도자)의 행색, 그 자체였다
苦難(고난)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先祖(선조)들의 위대한 삶에 대해서 생각을 떠 올리며 나 스스로 自慰(자위)를 해 보았다
高句麗(고구려)의 遺將(유장)인 高仙芝(고선지)장군은 일 만명의 軍事(군사)를 이끌고 인간이 도저히 넘을 수 없다는 해발 4500미터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 역사상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서역지방을 평정 하였고
한나라의 張騫(장건)은 匈奴(흉노)에게 여러번 捕虜(포로)로 잡히고도 죽음을 무릅쓰고, 실크로드를 開拓(개척)하였고
唐(당)나라의 현장스님은 佛經(불경)을 구하러 온갖 苦行(고행)끝에 인도에 도착하여 17년만에 佛經(불경)을 갖고 중국에 되돌오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섭씨 40도~60도를 웃도는 殺人的(살인적)인 暴炎(폭염)속의 沙漠(사막)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랠리를 즐기는 인간도 이 지구상에는 있지 않은가?
오래전 보았던 영상에서 티벳트인들은 그들의 靈魂(영혼)의 도시에 있는 "라샤의 조캉사원"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수 천키로의 온몸을 던지는 五體投地(오체투지)로 "옴마니반 메훔"을 수 없이 읊조리며 순례길에 오르는 영상의 殘像(잔상)도 머리에 떠 올라 나를 어자럽히고 있었다
*정읍과 장성간 1번 국도에서 새벽 3시경 드디어 자전거 펑크가 났다
이번 "나의 국토 대장정"에 道伴(도반)을 자처하고 선뜻 길을 나선 양희설 사장과 이재두군에게 이기회에 감사 말씀 드린디*
유럽 전 지역에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어 스페인의 갈라시아 지방의 산티아고까지 800키로가 넘는 순례길을 무려 1000년동안 힐링의길로 脚光(각광)을 받으면서 연간 10만명의 순레자가 순례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아!
내가 지금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어떤 가치 판단은 일단 保留(보류)하자
나중에 나의 이 행위가 徒勞(도로:헛 수고. 쓸데없는 일)라고 判明(판명)될지라도......
단지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目的地(목적지)인 땅끝 마을까지 완주하는 일만 생각을 하자!
나는 나 스스로에게 呪文(주문)을 외우기 시작 하였다
이 글 처음에 언급한 장석주 시인님의 "대추 한 알"이란 시를 마음의 갈피에서 꺼내 조용히 읊조려 보았다
이렇한 과정, 과정을 통해서
수 없이, 결기를 다지고 다졌다
알 수 없는 뜨거운 感動(감동)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솟구쳐 올라 온다
이것을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 전진하고, 전진 해 나가자!
허나 과연 나의 이 壯大(장대)한 꿈의 라이딩을 中途(중도)에 抛棄(포기)하지 않고 完走(완주)가 가능할 수 있을까?
中伏(중복) 더위의 鎔鑛爐(용광로)같은 살인적인 暴炎(폭염)을 뚫고,成功(성공)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不安感(불안감)이 또 다시 순식간에 나의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허나 나의 얼굴 表情(표정)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交叉(교차)되고,그리고 緊張感(긴장감)과 비장함이 함께 묻어 나고 있었다
반드시 뚝심과 執念(집념)과 끈기의 愚公移山(우공이산)의 정신으로 정면 突破(돌파)해 나가리라!
멧돼지 같이 猪突的(저돌적)으로 難關(난관)을 헤쳐가며 無我之境(무아지경)으로 달려 보리라!
내 몸뚱아리를 熱情(열정)의 불꽃으로 태워가며 굴러 가보리라!
한 여름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疾風怒濤(질풍노도)처럼 바람을 가르리라!
이렇한 自信感(자신감)으로 새롭게 武裝(무장)한 나는 어느새 결기에 찬 단호함의 얼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최종 目的地(목족지)인 땅끝마을까지 먹이감을 쫒는 사냥개 처럼 집요하고 끈기있게 攻略(공략)하다가
너무나 힘겨워 氣盡脈盡(기진맥진)하여 쓰러진다 한들 기어서라도...........
엄청나게 힘든 挑戰(도전)끝에 찾아오는 成就感(성취감)은 항상
나의 삶의 무게 중심을 업그레이드 하여, 새롭게 再設定(재설정)하는, 動因(동인)으로 作用(작용) 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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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이글 이글 타고 있다, 펄펄 끓는 地熱(지열)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남으로, 남으로 우리는 끝없는 길을 달렸다!
이번 라이딩 旅程(여정)에 同參(동참)한 3인의 라이더들은 나를 先頭(선두)로 先導 車輛(선도차량)의 안내도 없이
점점 어두워진 하늘을 뒤로 뒤로 밀쳐 내면서 남으로 남으로 땅끝마을을 향해 내 달렸다
점점 四圍(사위)는 어둠속에 파 묻히기 시작 하였다
고요한 寂寞感(적막감)만이 무겁게 내려 앉고 있는 가운데
우리 3인의 勇猛(용맹)한 戰士(전사)들은 무너져 가는 몸을 계속 추스리며, 어둠컴컴한 國道(국도)를 희미한 헤드라이트를 켜고, 쏜살같이 疾走(질주)하는 車輛(차량)들을 道伴(도반)으로 삼아 두눈을 번뜩이며,더욱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독수리 같은 視野(시야)를 確保(확보) 해가며 사정없이 靜寂(정적)과 어두움을 부수며 앞으로 앞으로 疾走(질주) 하였다
한 밤중의 새깧만 어둠을 직시하며, 달리는 渦中(와중)에도, 온몸을 휘감으며 堪當(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이 밀물처럼 수시로 밀어 닦치면서, 나 자신을 괴롭게 하였다
내 가슴 팍 속으로 화살처럼 알알이 박혀오는 외로움을 나즈막한 콧노래로 달래 보았다
노곤한 몸을 누이고 곤히 쉬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도로는 깁작스런 칩입자인 우리들의 등장에 놀라 벌떡 벌떡 일어나 우리들에게 길을 비켜 주고 있었다
............
.............
.................
정말 달려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수 없는 忍耐(인내)의 塔(탑)을 계속 쌓고서야
겨우 끝이 보이기 시작 하였다
신기루가 아니길 제발 빈다!
정말 신기루가 아니었다
드디어 우리나라 최남단의 해남의 땅끝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해 낸것이다
내가 해낸것이다
내가 이번 라이딩의 최종 목적지인 땅끝 마을에 힘겹게 골인한 것이다!
모든 신에게 感謝(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감사 합니다! 무조건 감사 합니다!
어느새 나는 마음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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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學 農民革命(동학 농민혁명)
東學敎徒(동학교도)및 民衆(민중)인 農民(농민)들의 武裝蜂起(무장봉기)인 東學 農民革命 (동학 농민혁명)은 貪官汚吏(탐관오리)들의 搾取(착취)와 腐敗(부패), 그리고 당시 社會混亂(사회혼란)에 대한 不滿(불만)이 쌓이고 쌓이다가
結局(결국) 全羅道 高阜郡(고부군)에 赴任(부임)한 조병갑의 萬石湺(만석보)의 水稅(수세) 徵收(징수)등 橫暴(횡포)와 虐政(학정)이 導火線(도화선)이 되어 드디어 農民(농민)들의 不滿(불만)이 暴發(폭발)한 일대 大事件(대사건)이었다
腐敗剔抉(부패척결)과 內政改革(내정개혁), 反封建(반봉건), 反外勢(반외세)를 旗幟(기치)로 내건 東學農民革命(동학 농민혁명)은
明成皇后(명성황후)와 閔(민)씨 勢力(세력)을 逐出(축출)을 위해 大院君(대원군)과도 손을 잡았는데
민씨 세력은 東學 農民軍(동학 농민군)을 鎭壓(진압)하기 위하여 청나라와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 들여
마침내 淸日戰爭(청일전쟁)의 직접적인 原因(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東學 農民革命(동학 농민혁명)은
後世(후세)에 韓半島(한반도)에서 勃勃(발발)한 모든 民族運動(민족운동),革命(혁명),抵抗權 行使(저항권 행사), 그리고 抗爭(항쟁)들의 典範(전범)으로
남을 歷史的(역사적) 大事件(대사건)이었다
(프랑스 시민 혁명,독일 농민혁명,중국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세계 4대 근대 민중혁명으로 일컬어진다)
*展開過程(전개과정)*
(만석보가 있었던 자리:만석보 유지비)
1,1894년 음력1월 1차 高阜 蜂起(고부 봉기)
全羅道(전라도) 高阜 郡守(고부 군수)인 조만갑은 貪官汚吏(탐관오리)의 典型的(전형적)인 인물이었다
旣存(기존)에 萬石湺(만석보:동진강의 상류,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가 있었음에도 시급하지도 않은 萬石新湺(만석신보:동진강의 하류)를 새로 築造(축조)하여 水稅(수세)로 700여섬을 거두어 개인적으로 착복을 하였고,
무리한 稅米(세미)를 거두어 들였으며,
農民(농민)들에게 誣告(무고)한 罪名(죄명)을 씌워 2만냥 넘는 돈을 收奪(수탈) 하였고,
자신의 부친의 頌德碑(송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냥을 강제 징수를 하는등
조만갑의 虐政(학정)은 날로 심해져 갔다
이에 綠豆將軍(녹두장군:체격이 矮小(왜소)하여 綠豆(녹두)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훗날 녹두 장군이란 칭호가 붙었다) 全琫準(전봉준)은 조만갑의 虐政(학정)에 憤怒(분노)하여 檄文(격문)을 붙이고, 農民(농민)들과 함께 蜂起(봉기) 하였다(전봉준의 아버지인 창혁도 고부 군수 탄압에 저항하다 모진 곤장을 맞고 한달만에 죽었다)
*檄文(격문)*
우리가 義(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本意(본의)가 단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塗炭(도탄)중에서 건지고
, 국가를 盤石(반석)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貪虐(탐학)한 官吏(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橫暴(횡포)한 强敵(강적)의 무리들을 몰아 내고자 한다.
兩班(양반)과 富豪(부호)앞에서 고통받는 民衆(민중)들과,方伯(방백: 조선시대의 지방장관) 수령밑에 屈辱(굴욕)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怨恨(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時刻(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後悔(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말목 장터:농민군의 1차 봉기때 집결장소
더 이상 조만갑의 虐政(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憤怒(분노)한 농민들은 녹두장군을 先頭(선두)로
머리에 흰수건을 동여 매고 손에는 몽둥이와 竹槍(죽창)과 낫을 들고 말목 장터(만석보에서 2키로 떨어진 정읍 이평면 면사무소 앞 도로)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怒濤(노도)와 같이 喊聲(함성)을 지르며, 高阜 官衙(고부 관아)를 襲擊(습격) 하였다
高阜 官衙(고부관아)를 占領(점령)한 農民軍(농민군)들은 武器(무기)를 奪取(탈취)하고, 불법으로 徵收(징수)한 稅穀(세곡)을 倉庫(창고)에서 꺼내어 모두 貧民(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收奪(수탈)의 象徵(상징)이었던 萬石湺(만석보)로 달려가 萬石湺(만석보)를 破壞(파괴)하고 때려 부수어 버렸다
高阜 郡守(고부군수)인
조만갑은 황급히 전주로 避身(피신) 하였으나, 중앙에서 그의 罪狀(죄상)을 알고, 그를 逮捕 押送(체포 압송) 하였다
이에 中央(중앙)에서는
民心 收拾(민심 수습)을 하기 위하여 안핵사(지방에서 발생한 民亂(민란)을 收拾(수습)하기 위하여 퍄견된 임시 벼슬)로 이용태를 내려 보냈는데,
고부관아를 占領(점령)했던 농민군은 안핵사인 이용태를 믿고, 일단 解散(해산)하였다 허나 안핵사인 이용태는 이 기회를 東學 敎徒(동학교도)의 彈壓(탄압) 기회로 삼았고, 농민들과 동학교도들에게 온갖 惡行(악행)을 저질렀다
2,1894년,음력 4월 2차 전주성 봉기
1차 농민군의 蜂起(봉기)를 수습하러 고부에 내려온 이용태는 민란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와 농민들에게 전가하는등 오히려 事態(사태)를 惡化(악화)시켰다
안핵사인 이용태가 민심 收拾(수습)은 커녕 도리어 東學敎徒(동학교도)들을 彈壓(탄압)하자,
이에 激憤(격분)한 전봉준등은 "倡儀文(창의문:茂長縣(무장현)에 모여 발표했기 때문에 "무장 동학 포고문"이라고도 함)을 발표하였는데 내용은 貪官汚吏(탐관오리)의 肅淸(숙청)과 輔國安民(보국안민)이었다
전봉준이 사발 통문을 돌리자, 각 지방의 접주들이 병력을 이끌고 모여드니 그 수가 1만명을 헤아렸다 한다
이 창의문에 호응한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高阜(고부)의 白山(백산:고부 관아의 북쪽에 있는 높이 50미터도 안되는 작은 언덕)속속 집결하였다
이 때 죽창을 손에 든 농민군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앉으면 죽산,서면 백산"이란 말이 생겨 날 정도로 였다 한다(약 일만명 정도가 집결 하였다 한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말은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이 빼곡하여 죽산이요, 일어서면 흰옷이 촘촘해 백산이란 말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東徒大將(동도대장)으로 추대되었고,손화중과 김개남은 각, 각 總管令(총관령)으로 전봉준을 보좌케 하였다
이때부터 농민군의 민란은 지역적인 民亂(민란)에서 反侵略(반침략),反封建(반봉건)을 지향하는 외세와 집권층에 대한 도전과 개혁운동으로 성격이 변화하게 되었다
동학 농민군은 고부관아와 부안관아를 破竹之勢(파죽지세)로 점령하여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하였고,
잇따라 전주로 진격하던중 황토현에서 官軍(관군)과 대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황토현 전적지: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黃土峴(황토현): 시뻘건 황토흙이 온산을 뒤덮고 있는 산으로,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악리에 있는 해발 고도35.5미터의 야트막한 언덕이다. 주변에 산이 없어, 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 오는데, 농민군은 거짓 패한 채, 이곳 까지 후퇴하여 황토재 마루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새벽이 되자 고개 아래 주둔하고 있던 관군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 황토현 전투의 대승은 관군과의 최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관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 시켰고, 동학 농민의 봉기의 전개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황토현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농민군은 전주성을 무혈 입성하게 되었는데,
이에 중앙정부의 구원 요청에 의하여 청군이 출동하고 일본군도 출동하는등 외세가 개입함에 따라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숙청등 13개항의 弊政 改革案(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것이 받아 들여진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관군과 농민군은 협상끝에 執綱所(집강소: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민관 합동 자치기구.전라감영 관할 대부분의 군, 현,면, 리에 집강소가 생겼고, 치안관리, 탐관 오리의 징벌등,실질적인 개혁 작업을 하였다 )설치등 소위 "전주 화약"이 성립되어 전봉준 장군등은
이에, 이른바 6월 11일 전주성을 점거한지 10여일만에 전격적으로 철수 하였다
농민군이 휩쓸고 간 일대는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되어 동학군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유지가 안될 정도였다
3,1894년 음력 9월 3차 全州, 光州 蜂起(전주, 광주 봉기)
개혁 정치의 실현을 꾀하고 있던 전봉준은 일본군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고 항일 투쟁을 벌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동학 농민군과 정부와 체결한 전주화약이 조선 朝廷(조정)의 미온적인 태도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3차 봉기를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특히 일본이 경복궁 쿠테타를 일으켜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또 다시 蜂起(봉기)를 하였던 것이다
전봉준은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에게 합류해 줄것을 요구 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그 대신 북접의 손병희와 논산에서 합류하여 총 2만군의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를 총 공격하는 우금치 전투를 벌였다
*공주의 우금치 전적지(사적387호)*
허나 朝, 日, 연합군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을 하여 우세한 무기와 포탄으로 농민군을 거의 전멸시키다 시피하여 대패 시키고 말았다
농민군의 패배원인은 잘 훈련 받지 못한 농민군,전투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자질 부족, 불리한 지형 조건,농민군의 손화중, 김개남이 여러가지 이유로 참여하지 못한점이 패배의 원인이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관군과 일본군에 비하여 무기의 화력이 월등히 열악하였던 것이다
全琫準 將軍(전봉준 장군)의 絶命詩(절명시) 동학 농민 혁명군의 리더 전봉준 장군은 재기를 꾀하던 중 붙잡혔는데, 처형 직전 피를 토하듯, 시 한 수 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때를 만나서 천지가 모두 힘을 합치더니
運去英雄不自謨(운거영웅불자모)
운이 다해 영웅도 스스로 도모할 길이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백성을 사랑하고 의를 세움에 나 또한 잘못이 없건마는
爲國丹心誰有知(애국단심수유지)
나라를 위한 붉은 마음을 누가 알아줄까?
*우금치 전적지*
牛禁峙 戰鬪(우금치 전투)
우금치는 호남 지역에서 논산, 부여를 거쳐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 시내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주미산 자락에 있다 이 "우금치 전적지:사적 387호"는 공주 지방에서는 우금티라 불리는데, 東學 농민 전쟁의 가장 격전지였으며, 가장 큰 전투로 승패의 분수령이 된 전투였다(농민군:남접:1만명, 북접:1만명 총 2만명, 조선군:3200명, 일본군2000명 총병력 5,200명)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농민군 해산과 진압의 원인을 제공 하였다
북접의 崔時亨(최시형)과 손병희는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의 南接(남접:전라도 지역의 동학 조직을 남접, 충청도 자역의 동학 조직을 북접이라 하는데 동학조직은 각처에 接所(접소)를 두고,그 지방의 유지를 執綱所(집강소)의 接主(접주)로 삼아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북접은 동학 농민들의 거사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았으나, 동학 중진들이 擧事(거사)에 同參(동참)하기를 권고하자
각처의 동학의 접주들에게 통문을 띄워는데, 북접의 손병희는 1만여명의 농민군을 인솔하고 논산에서 남접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충청 監營(감영:지금의 도지사격인 관찰사가 상주하여 업무를 보던 관청)우금치 전투에 참여 하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어서 바삐 날아가라 댓잎 솔잎 푸르다고
하절인줄 알았더니 백설이 펄펄
엄동설한 되었구나
(전봉준 장군의 생가에 세워져 있는 이 詩碑(시비)는 "監獄(감옥)으로부터의 思索(사색:이 책의 존재는 우리 시대의 축복이라 할만 할 정도로 名著(명저)중의 名著(명저)인데, 이 책을 읽었을 때의 신선한 감동은, 감당키 어려운 잔잔한 감동의 물결로 다가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일렁일 정도로 그 파장은 길다 )"이란 이 시대의 名著(명저)를 쓰신 성공회대 석좌 교수였던 "신영복"선생님의 글씨로, 이 글씨체는 선생님이 무기형을 宣告(선고)받고 監獄(감옥)에서 完成(완성)시킨 獄中書體(옥중서체)로 "쇠귀체"라 부르며, 선이 굵고,힘이 있으며 造形美(조형미)가 있는것이 特徵(특징)이다
이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동학 농민군의 아내들이 전사한 남편들의 靈魂(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울부짖으며, 추모했던 輓歌(만가:죽은이를 애도하는 노래로,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나아 가면서, 부르는 구슬픈 노래이다)이며,아이들의 입을 빌린 어른들의 童謠(동요)였다
여기서 녹두밭은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고 불리어서,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농민군을 의미하고,
파랑새는 당시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을 입었기 때문에 농민군의 적인 일본군을 의미하고,
청포장수는 동학군이 이기기를 소망하는 당시의 민중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전봉준의 全(전)의 破字(파자)가 八(팔)과 王(왕), 즉 팔왕이란 發音(발음)이어서 이것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뭏튼 이 노래는 동학 농민군의 실패에 대한 아쉬움과 추모가 잘 드러나 있어
이 노래를 들으면 시체가 산을 이루었던 우금치 전투가 생각이 나 마음이 숙연해진다
*黃土峴(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김남주 시인)*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 가운데 말뚝처럼 햇불처럼 우뚝 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한 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 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없는 투쟁
어떤 불행도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 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히 동의했던 사람
보아다오 이 사람을
거만하게 깍아 세운 그의 콧날이며, 상투머리는 죽어서도 풀지 못할 원한,원한!
압제의 하늘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죽어서도 감을 수 없는 저 부라린 눈동자
눈동자는 불타는 도화선이 되어
아직도 어둠을 되쏘아 보면 죽음에 항거하고 있지 않은가
보아다오 보아다오
이 사람을 보아다오
이 민중의 지도자는 학정과 가렴주구에 시달린 만 백성을 일으켜 세워
대지의 힘찬 목소리가 되게 하였다
(중략)
전봉준은 변장을 하고 서울 사정을 알아 보는 동시에, 농민군을 다시 결집 할려고 순창으로 나갔다가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1894년 11월 민병에게 붙잡히고, 관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었다(그의 목에는 1천량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그는 비록 죽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불멸의 위인으로 후세에 남아 있다
(역사서에 가마를 타고 압송되는 사진은 체포할 당시에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효수형으로 그 이듬해인 그의 나이 42세되던 해인 고종 32년 3월 2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未曾有( 미증유)의 광범한 민중의 봉기로 1년동안에 30~40만명이 희생자를 내고 동학혁명은 끝이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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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의 생가(부여)*
*금 강(2장)*
*신동엽*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나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 놓았다
1894년쯤엔 들에도 나무 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나던 당신은 금새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太陽(태양)과 秋收(추수)와 戀愛(연애)와 勞動(노동)
東海(동해),원색의 모래밭
사기 굽던 天竺(천축) 뒷길
방학이면 등산모 쓰고, 절름거리며 찾아 나섰다
없었다
바깥 세상엔 접시도 살점도 바깥 세상엔 없었다
잠깐 빛나던 당신의 얼굴은 영원의 하늘
끝나지 않는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
*신동엽 시인은 한 시대의 激情(격정)을 그 시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장중하게 펼쳐 내었던 시인으로 그의 *금강이라는 대서사시*는 1894년 동학 혁명과 1919년 기미독립 운동,1960년의 4월 혁명을 하나로 연결하여, 하나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연속적인 현실로 일깨우는 분노의 저항시이다
4800여행이나 되는 어마 어마한 장시이다
집앞 둠벙에서 붉은 연꽃을 딴다
추적 추적 비기 내리는
옛 백제의 서러운 땅에
그가 남긴것은 무엇인가
*시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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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造 舍利龕(석조 사리감;국보 288호)...부여 박물관*
부여의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이 사리감(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를 말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감으로 백제 제27대 왕인 위덕왕(창왕)이 그의 아버지인 성왕의 冥福(명복)을 빌기 위하여 만들었다 한다
百濟 昌王銘(백제 창왕명)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부여 규암리 금동 관음보살 입상(국보 293호)...부여 박물관
미소가 자연스럽고, 몸의 전체적인 형태의 균형감이 뛰어나다
*金銅 菩薩立像(금동 보살입상:보물330호)*...부여 박물관
통통한 얼굴에 눈을 지긋이 내려 뜨리고, 미소 지은 표정이 돋 보인다
*산경치무늬 벽돌:보물343호*...부여 박물관
文樣塼(문양전)이란 "文樣(문양)이 새겨져 있는 벽돌"을 말하는데,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절터에서 出土(출토)된 무늬가 새겨진 백제시대의 벽돌은 총 8종류로 모두 보물 제343호로 지정되어, 현재 부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蓮花雲紋塼(연화운문전:연꽃구름 무늬벽돌)
2,蓮花紋塼(연화문전:연꽃 무늬벽돌)
3,蟠龍紋塼(반용문전:용 무늬벽돌)
4,山水山景紋塼(산수산경문전:산경치 무늬벽돌)
5,蓮花鬼形紋塼(연화귀형문전:연꽃 도깨비무늬벽돌)
6,山景鬼形紋塼(산경귀형문전:산경치 도깨비무늬벽돌)
7,山水鳳凰紋塼(산수봉황문전:산경치봉황무늬벽돌)
8,鳳凰紋塼(봉황문전:봉황무늬벽돌)
백제 사비 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이들 문양전은 백제 미술의 傑作(걸작)으로 손 꼽히고 있다
*산 경치봉황무늬 벽돌:보물 343호*...부여 박물관
*봉황무늬 벽돌:보물 343호*...부여 빅물관
*용무늬 벽돌:보물 343호*...부여 박물관
*연꽃무늬 벽돌:보물 343호*...부여 박물관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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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너무나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허나 도전은 게속됩니다
이번에는 서로가 의지할수있는 동행인이 있어서 다행입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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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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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속, 그럼에도에 불구하고 무사완주
수고 많으셨습니다.
초주검이 되어 기어서 돌아왔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출발을 했는데
소중한 "겸손"을 배우고 돌아 왔습니다
허나 또다른 힘든 여정이 또 기다리고 있네요!
세분이서 오붓이 잘 다녀 오셨네요~~더운 폭염에 고생 많으셨어요..저두 해남.청산도 다녀온 기억이 새롭네요~~유채꽃 필때 갔었는데...길이 엄청 예뻐요~~!!!!
萬難(만난)의 고행이 저희들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해남 땅끝마을에서 완도 청산도 까지는 그야말로 사투, 그 자체였습니다
허나 지금 생각을 해보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