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 부인(引火婦人)
글-德田 이응철(春川産)
소나 말이 다닐 수 없는 좁은 곳을 다닌다. 항상 구겨진 인상을 펴주는 게 내 임무니 봉사치고는 참으로 성스러운 봉사가 아닐 수 없다. 내 짝은 누구인가? 늘 둘이서 잿불에 발을 담그고 특히 엄동설한이면 우리의 값어치는 그야말로 상한가이다. 아니 사람들 모두 내 손안에 있소이다니 그 주가가 오죽하겠는가! 그 맛에 산다. 화로 또한 우리가 없으면 울상이다.
냉기 서릴 때면 우리가 방안의 온도를 올리는데 일조를 한다. 또 석쇠에 절편이나 입찰떡, 가난한 집들은 옹기그릇에 주로 저장했던 조찰떡, 명절 때 빼다 얼긴 가래떡, 김을 굽기 위해 잿불을 활활 여는데 우리가 빠져서는 안 된다. 어디 그뿐인가! 겨울에 앉을뱅이 씨케토를 타다가 양말이 젖으면 들어와 말리고 읍내를 다녀온 어른들이 언 손을 녹이는데 주로 우리가 앞장선다.
항상 사람들이 겨울이면 내 어미를 껴안고 늘 내 볼을 자주 만진다. 되작인다. 애첩처럼 손안에서 논다. 앞가슴이 부푼 열여덟 처녀도 머리를 감고 와서 불꽃을 피워달라고 꼬드긴다. 머리를 털고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출렁거리며 향을 한껏 뿜어낸다. 싫지 않다. 순간 나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앞집 총각인 모양이다. 우람한 그 가슴에 폭 안기고 싶은 내심이리라. 사랑에 깊이 빠질 때 늘 나를 잿불 위를 몰고 다니며 사랑 표시를 그려댄다. 총각 이름을 쓰는지, 총각의 얼굴을 그리는지 순간 나는 선비들의 필묵과 종이 벼루의 문방사우(文房四友) 가 되어 몸 둘 바를 모른다. 내가 도화지를 만들고 부젓가락인 짝이 붓이 되어 쓰고 지우고 다시 쓰니 기분이 으쓱해진다. 이집 마님은 진정 나를 아낀다. 심야까지 나를 따뜻한 온기 속에 모셔두고 수시로 꺼내 동정과 옷고름을 펴 한껏 모양을 내신다.
나무 한 짐 해 온 이집 쥔 나그네 좀 보소, 북풍한설에 게으른 남편에게 새벽부터 나무가 없어 부엌에서 나무한다고 푸념을 하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앞산에 올라 무거운 청수와리를 한 짐 지고 와 앞마당에 부린다. 제대로 탈 이유가 없다. 피득피득 타는 청수와리로 불을 때려면 뭐니 뭐니 안주인이 천고생이다. 그 흔한 검불도 마른 장작도 없다. 마당에 닭들이 갑자기 놀라 난리를 친다. 짓궂게 눈보라가 게으름을 호령한다. 나무 한 짐 해오고 의기양양해 아내에게 큰소리친다. 밥 차려-.
어쩐지 아까부터 궁덩판이 펑퍼짐한 안주인은 그나마 마음을 내려놓는다. 잿빛 하늘이다. 구름장이 심상치 않다. 귀까지 눈이 빠지는 날이면 정말 큰일이다. 짚도 가린 게 몇 무데기 밖에 없다. 가장 큰 걱정이 땔나무다. 오늘 남편 달래 나무 몇 짐을 더 해 부엌에 끄들여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아내다.
부리나케 화로에 구녕새를 놓고 우악스럽게 나를 들어 잿불을 파헤친다. 마치 조자룡 헌칼 쓰듯 내 몸으로 불을 이리저리 헤치더니 물을 올려놓는다.
아내는 신바람이 났다. 찬장을 열고 찬밥덩이를 데워진 물에 말아 뚝뚝 꺼놓고, 방금 황순원 소나기 수숫대 같은 김칫광에서 얼음 섞인 무쪽을 허리 굽혀 꺼내온다. 생강냄새가 싱그럽다. 데걱거리는 바짓가랑이도 마다한 채 시장한 모양이다. 한손에 무쪽을 들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남편에게 다가선다. 곁에서 손도 씻지 않은 여편네는 닁큼 무쪽을 입으로 잘라 남편 숟갈 위에 얹어준다. 보기 좋다. 그래, 이게 사랑이겠지, 내 사랑 부젓갈을 곁눈질 한다. 빠짝 말라 기(氣)가 허한지 요즘은 통 밤으로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럽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그저 곁에서 침만 줄줄 흘릴 뿐이다.
무언가 집안에 우환이 있나보다. 대꼬챙이 같은 이 집 할머니는 어디 계신가? 문풍지를 쳐덕쳐덕 부친 건넌방은 문만 열어도 폭포같이 솨솨 소리가 난다. 마님 얼굴이 사뭇 구겨져 있다. 눈도 못 뜬 손녀딸을 무릎에 뉘이고 주문을 외운다. 미련한 인간이 무엇을 압니까? 우리 막둥이 어서 낫게 해 달라고 빌고 또 빈다. 간밤에 열이 불덩이 같아 들쳐 엎고 사관을 맞히고 왔나보다. 애지중지하며 불쌍한 똥강아지라고 무릎에 뉘이고 연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게 채근해 재를 거둬낸다.
천장이 높아서인지 유난히 외풍이 세다. 자주 화로 위에다 광산에서 탄을 쑤석거리듯 방안의 온도를 높인다. 다른 때 같으면 꼬맹이들은 한 시를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감자나 고구마를 굽기 위해 그 얼마나 나를 귀찮게 했던가! 겨울이면 나는 잿불로 알고구마와 감자 덮는 일을 주로 한다. 한참 후, 피-.신음소리가 나면 감자는 말랑말랑한 군 감자가 되어 좁은 방에 냄새가 구수하니 고랑내 나는 메주냄새는 잠시 어디론가 외출한다.
댓진냄새 진동하는 사랑방에 모여든 떠꺼머리총각들은 내기라도 하듯, 봉담배를 말아 퍽퍽 피운다. 그럴 때마다 요절숙녀로 가만히 있는 내게 화로 밑까지 들쑤셔댄다. 행랑채에서 해수병에 걸려 기침하며 어렵게 겨울나기를 한 바깥노인은 또 어떤가! 끓어오르는 가래를 연실 화로 주변에 묻는다. 싸늘한 숯덩이들이 조약돌처럼 가에 모여있는 곳을 나더러 파고 덮어 오만상을 찌푸린다. 나는 세월이 지나도 어미 곁이라야 몸을 달군다.
오늘 여러 사람 앞에 드디어 나는 배우가 된 기분이다. 와글와글하는 이곳은 어디인가? 봄내 춘천(春川)이라고 동료들이 수군거린다. 충주에서 새벽에 도착하였다. 유난히 메모지를 들고 우리 일곱 친구들을 둘러보는 못생긴 남자가 희한하다. 경매 초보생 같다. 왜 나를 아까부터 가까이 멀리서 눈여겨볼까!
" 자-. 시작합니다. 만원부터 시작입니다. 오늘 규중칠우(閨中七友)를 모셔왔어요. 자! 그중 인화(引火)부인 때깔 좋지요. 마음을 펴놓으세요. 구겨진 양반들은 곳곳 대려드립니다. 사막은 오히려 사람을 푸르게 한답니다. 양반도시에서 달려왔지요"
하면서 그 중 나를 닁큼 추켜 올리는 게 아닌가!
그 때였다. 맨 뒤에서 세 번째-. 그러니까 아까부터 심상치 않게 보던 남정네가 손을 중간쯤 들어올린다. 무슨 신호일까! 모르겠다. 자, 만원되고 이만 원-. 없어요. 하나, 둘, 셋 자! 만원에 낙찰되었습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에게 쪼르르 달려가 푸른 돈 만원과 바꿔치기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 덕전산방(德田山房)인 후석로에 와 있다. 하룻밤을 푹 자고 새벽을 맞았다. 춘천은 안개의 도시라고 말만 들었는데 정말 창밖은 온통 농무 천지이다. 무진기행이라도 온 것일까! 집주인은 나를 상 앞에 놓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인터넷을 두드린다. 수상하다.
그러나 아미는 시간이 갈수록 부드럽게 아니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대한다. 필경 귀한 몸이 된 게 틀림없다. 광둔(廣臀)의 울낭자 같은 부인도 시샘하지 않고 덥석 나를 애무한다. 어안이 벙벙하다. 필경 좋은 일인가보다. 낯선 집안을 둘러본다. 한쪽 모서리에 와! 해맑은 도자기들이 초등학교 입학식처럼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반긴다. 갑자기 뿔뿔이 헤어진 친구 여섯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세요각시, 척부인, 울낭자, 교두각, 청홍각시, 그리고 강토할미시여-.(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