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을 빼놓고 제주도를 말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제주도를 방문한 뒤 십여년이 지나는 동안 제주도에 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해외여행 가기 바빴던 대학생 시절, 해외여행에 버금가는 비용이 들며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제주도는 항상 외면받았다. 그런 내가 제주도에 가게 된 건 추석 연휴 때 첫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였다. 명절 때만 되면 집에서 쉬다가 영화보는 걸로 시간 때우는 게 지겨워 여행을 떠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다들 흔쾌히 수락을 한 것이다.
추석이라 그런지 항공권 가격은 평소에 가까운 일본에 가는 것과 맞먹을 정도였으며, 괜찮은 숙소를 찾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그럼에도 가족들과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첫 여행이었기 때문에 준비하는 동안 입가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부모님은 비행기를 타는 것도 처음이라 제주도 여행을 떠나는 게 그동안 고생하신 부모님께 효도해드리는 느낌도 들었다.
한라산 국립공원 사무소
제주도 첫 여행인만큼 제주도의 유명한 관광지 위주로 여행 일정을 짰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만장굴과 성산일출봉은 물론이고, 서귀포의 유명한 폭포인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도 둘러보았다. 제주도 구석구석을 다 둘러보려면 4박5일의 일정도 짧아 몇몇 유명한 곳은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대신 제주도 여행 일정의 마지막 날에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국립공원 이야기 30 - 한라산 (漢拏山)
한라산 국립공원은 백록담을 중심으로 넓이가 153.332㎢에 달하며 91.654㎢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백록담・영실기암 등의 화산지형, 물장오리 분화구습지, 1100고지 습지 등의 고산습지, 산벌른내, 탐라계곡 등의 용암하천지형 등은 한라산의 독특한 지형・지질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온대・한대・아고산대의 수직적 분포에 따른 다양한 식물상은 생태계의 보고 한라산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한라산은 백두산・금강산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영산 (靈山)으로 꼽히고 있으며, 높이는 해발 1,950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식생 분포를 이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고 동・식물의 보고로서, 1966년 10월 12일에 천연기념물 제182호인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 및 보호되고 있다.
한라산은 지금으로부터 2만 5천년 전까지 화산분화 활동을 하였으며, 주변에는 360여개의 ‘오름’들이 분포되어 있어 특이한 경관을 창출하고 있다. 제주도 중앙에 위치해 섬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한라산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자애로우면서도 강인한 기상을 가슴에 품고 있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형형색색의 자연경관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며, 1970년 3월 24일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7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한 한라산과 아름다운 땅 제주는 신이 우리에게 선물한 최고의 보물이자 세계인이 함께 가꾸어야 할 소중한 유산으로 인정받아 2007년 6월 27일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우리나라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0년 10월 4일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한라산의 대표적인 탐방로, 어리목과 영실
한라산을 오르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정상인 백록담을 보지는 못 하지만 ‘오름의 천국’인 제주도를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윗세오름으로 가는 탐방로들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정상인 백록담으로 오를 수 있는 두 개의 탐방로다. 백록담까지 오르려면 최소 8시간 이상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평소에 등산을 하지 않던 부모님을 데리고 백록담까지 오르는 건 무리라 판단되어 어리목탐방로를 통해 윗세오름에 오른 뒤, 영실 탐방로로 하산하는 일정을 짰다.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 도착하니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보인다. 국립공원 사무소가 백록담으로 오르는 입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리목 탐방로 입구에 있다는 것은 어리목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탐방로라는 의미일 것이다. 관리사무소 뒤편으로는 어승생악으로 가는 탐방로가 있다. 혼자 왔다면 어승생악에 오른 뒤 윗세오름으로 향했을 테지만 일행이 있어 곧장 어리목 탐방로를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해발 970m에서 시작하는 어리목 탐방로는 보기보다 쉽지 않다. 윗세오름이 백록담보다 낮다고 하지만 높이는 1,700m로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 향적봉 (1,614m)보다도 높다. 어리목 탐방로 초입은 온통 숲으로 이루어져있어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숲으로 이루어진 탐방로가 갑자기 키가 낮은 초목들로 이루어진 오르막길로 변했다. 한라산이 얼마나 다양한 식생을 보유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윗세오름에서 바라본 풍경
윗세오름에 올라 뒤를 바라보니 제주도는 가히 ‘오름의 천국’이었다. 별 기대를 안 하고 오른 터라 한라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늠이 안 되었지만 윗세오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왜 한라산이 제주도의 상징인지 알 수 있었다. 제주도 일정 중 몇 군데를 못 들려 아쉬웠던 마음이 싹 가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가까이 보이는 어승생악부터 바다 저 끝까지 군데군데 솟아오른 오름을 보면 제주도가 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 알 만하다.
주목을 비롯해 고산지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나무들을 보니 한라산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한라산의 다양한 식생은 대한민국 생물자원의 보고이며 후손을 위해 깨끗하게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자연이다. 여타 다른 국립공원의 모습과 비교해도 특이하다고 느껴질 만큼 한라산은 국립공원 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자랑하고 있다.
영실기암
윗세오름에서 영실 탐방로를 따라 하산하며 보는 풍경은 어리목에서 보는 풍경과 다른 색다른 모습이다. 영실 탐방로는 한라산의 노루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길이자, 주상절리 못지 않게 신비한 모습을 자랑하는 영실기암을 가지고 있다. 영주십경 중 하나로 꼽히는 영실기암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탐방객을 맞이한다. 영실기암은 백록담과 함께 한라산의 대표적인 기암괴석 풍경으로 꼽힌다.
영실 탐방로를 따라 하산하는 길
영실기암을 지나면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 나온다. 선작지왓같은 고산식물과 한라산에서만 자생하는 흰그늘용담과 섬바위장대 등을 관찰할 수 있다. 3.7km 정도 걸으면 영실탐방로 입구가 나오며, 탐방안내소까지 2.5km 구간은 자동차도로이다. 자동차를 타고 탐방로 입구에서 시작하면 어리목보다 훨씬 짧은 시간을 들여 윗세오름에 오를 수 있다. 영실에서 어리목 또는 어리목에서 영실로 가는 택시는 많으니 윗세오름에 오른 뒤 반드시 원점회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어리목과 영실은 전혀 다른 풍경을 선사하니 가급적이면 시간과 발품을 들여 두 코스 모두 관찰하는 것을 추천한다.
한라산의 또 다른 모습, 백록담
윗세오름이 한라산의 전부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누가 뭐래도 한라산의 상징은 백록담이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부터 본 한라산의 대표적인 풍경은 백록담이며, 백록담을 보지 않고서는 한라산에 갔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서는 윗세오름에 오르는 거보다 배 이상의 고생을 해야하며, 백록담을 제외하면 어리목이나 영실과 달리 다양한 풍경을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이 흠이다. 게다가 비가 오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백록담은 기껏 고생해서 올라도 물이 차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위험이 있다.
말라버린 백록담
그럼에도 백록담에 올라 분화구 안을 바라보면 힘들여 여기까지 왔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백록담에 물이 차 있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윗세오름에 오른뒤 백록담에 가게 된 건 2년이 지난 뒤다. 윗세오름에 오를 당시 초가을이라 시원했던 것과 달리 백록담에 오를 때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한여름이었다. 장마가 끝난 피서철이라 백록담에 물이 없는 건 알고 있음에도 고생해서 오른 결과는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