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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21일 1.21사태로 출입이 통제된 북악산이 2006년 2월 12일(정월대보름)을 기해 전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신청한 39명의 일반인들과 노무현대통령 권양숙 여사가 북악산 정상까지 2.3킬로에 이르는 구간에 걸처 시범 답사후 그해 4월 1일 개방된 북악산 탐방 코스를 그동안 수도권 산행 구간은 거의 빼지않고 다닌듯 한데 사실 등산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북악산 서울 성곽 탐방 코스가 너무 짧은 코스이기도 하지만 북악산을 마주 보고 있는 인왕산을 거쳐 자하문 그리고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형제봉까지 이어지는 코스 산행을 경험한 바 있어
사실상 북악산이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었다 하여도 별 흥미를 끌지 못하였지만 번거롭게 인터넷으로 제한된 인원에 국한되어 신청을 하여야 등산이 가능하여 조금은 귀찮은 생각이 들어 산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금년들어 북악산 서울 성곽 탐방코스가 와룡공원에서 숙정문, 백악마루를 거쳐 창의문까지 전면 개방이 되면서그동안 인터넷 신청으로 제한된 인원에 한하여 입산을 허용하던 방법이 이제는 인터넷 신청을 하지 않고 바로 오전 10시 30분에서 오후 2시까지 종로 구기동 창의문위 입산통제 관리소 또는 숙정문 입산통제관리소에 직접 주민등록증 지참하고 방문하면 북한산 서울성곽 탐방이 가능케 되어
2달전인가 조대장에게 북악산 산행 스케쥴을 부탁하였더니 드디어 2008년 11월 19일 금년들어 가장 추운날 수요산행으로 북한산 서울성곽 탐방 일정이 정해져 우리들은 이 코스만 산행을 하면 너무 짧아 경복궁역에 집결하여 사직공원 사직단을 경유 황학정 코스를 올라 먼저 인왕산 산행을 하고 다시 성곽을 따라 하산하여 자하문 (창의문) 구간 경유 북악산 서울 성곽 탐방로 연계 산행을 하기로 하고
평소 산행일 보다 집에서 조금 늦은 8시 30분 출발하여 9시 50분에 경복궁역에 집결키로 되어 있어 늦지 않게 출발을 하였는데 하필이면 가는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철도 파업과 관련이 있는지 1호선도 4호선도 하나같이 모두다 느림보 거북이 운행을 하는 바람에 약속시간 보다 10여분이 지나서 경복궁역에 도착을 하니 나만 늦은것이 아니라 이날 수도권 전철을 이용한 회원들 대부분이 시간이 조금씩 늦게 도착을 했다.물론 코레일이나 서울 매트로측 종사자님들 입장에선 이해가 될는지 모르지만 요즘같은 세계적 불황속에 국민들의 출근길 발목을 잡고 불편을 주는 집단행동에 대하여선 조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쪼록 사측과 사용자측 모두 이 불황 경기를 염두에 두고 더 이상 국민들 볼모로 불편을 주는 집단 행동이 완만하게 잘 타협이 되기를 기대를 한다. 나의 경우만도 40분 정도 늦게 도착을 한 경우이다.
경복궁역 구내에서 일행들이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사직공원 방향으로 이날 산행이 시작된다.
사직단 가는길 은행나무 가로수에는 잎은 단풍져 하나도 보이질 않는데 이상하게 이 구간을 지나는데 마치 시골에 인분 냄새가 진동을 하기에 은행나무를 올려다 보니 세상에 떨어지지 않은 은행이 다닥다닥 가지가 휘어지도록 붙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직단에 도착하여 조대장으로 부터 사직단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국토의 주인인 사(社)와 오곡의 우두머리인 직(稷)의 두 신위(神位)에 제사드리는 곳.
사적 제121호. 이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단이라고 한다. 보통 도성의 서쪽에 위치한다. 사단(社壇)은 동쪽, 직단(稷壇)을 서쪽에 설치한다.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 되므로 고대에는 국가와 민생의 안정을 기원하고 보호해주는 데 대한 보답의 의미에서 사직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사직은 왕실의 조상들을 제사 지내는 종묘와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시되어, 국가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직단이 설치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인 것으로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에도 991년(성종 10)에 사직을 세웠는데, 1014년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수축되었다. 조선 왕조가 들어선 1393년(태조 2)에는 한양 천도와 관련된 종묘·사직의 지형도를 만들었다. 그 이듬해에 사직의 터를 잡았는데, 경복궁 서쪽의 인달방(仁達坊)으로 정했다. 1395년 사직단의 축조공사가 시작되어 단의 설치가 완성된 이후 담장을 둘렀으며, 담장 안에는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1474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사직단은 정4각형의 평면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2장 5척 즉 25척, 높이는 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단의 사방 중앙에는 3층의 섬돌이 설치되어 있으며, 사단과 직단 사이의 간격은 5척으로 되어 있다.
신사임당과 율곡선생님 동상
황학정(黃鶴亭)
[역사의발자취】서울 사직동 황학정- ‘국궁의 1번지’ 서울 종로구 사직공원 뒤쪽 인왕산길에 들어서면 아담한 정자와 뜰 한채가 보인다. 사찰인가 싶기도 하지만 이 곳이 우리나라 「국궁의 1번지」로 불리는 활터 황학정(黃鶴亭)이다. 황학정은 원래 대한제국 광무2년(1898)에 고종황제가 경희궁 안 회상전 북쪽에 지었다.
임진왜란 이후 번성했다 갑오경장(1894) 때 근대식 무기체계가 도입되면서 활이 배제되자 쇠퇴 일로를 걷던 활쏘기를 다시금 민족 전통무예로 부흥시키기 위해서였다. 이후 일제시대인 1922년 경희궁이 헐릴 때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궁술에 뜻깊은 인사들이 일제의 폐쇄 압력을 물리치고 현 위치로 옮기게 됐다.
현 위치도 조선시대 유명했던 서울 서쪽 5대 활터중 하나인 필운동 등과정(登科亭) 자리다. 황학정 약수터 위 암벽에는 이전 당시 수려했던 주변 경관을 읊은 「황학정 팔경(八景)」이라는 제목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구름이 맑게 갠 날의 인왕산(白岳晴雲), 자하문 문루위의 맑은 가을 달(紫閣秋月), 사직단의 늙은 소나무(社壇老松) 등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 볼 수 없게 된 것이 많다.
하지만 한 여름에도 시원한 산바람이 불며 한가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정자와 뜰은 여전히 매력을 갖고 있어 한번쯤 들러볼만하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25호로 지정된 이 곳은 현재 국궁 동호회격인 「황학정 사우회(射友會)」가 관리를 맡고 있다. 사우회는 정자 입구에 주민 누구나 강습료 5만원을 내면 시위대에 오를 수 있을 때까지 훈련받을 수 있는 궁도교실을 마련하고 있다.
황학정을 지나 택견 훈련장을 지나 오르면 왼편으로 인왕산 코스가 있지만 현재는 공사중으
로 통행을 불허하여 순환도로를 따라 내려오단 인왕천 약수터 이정표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인왕천 약수터 지나 오름코스는 계단길로 이어지고 있으며 등로 한켠으로는 군 작전용 철조망이 처 있어 마치 최전방지역 산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철책을 따라 오르다 다시 군사용 철조망에 달린 문을 통과 하여야 한다.인왕산을 오를 수 있다.
정상 방향을 따라 간다.
철조망에 달린 문을 통과한다.
기암 선바위옆에 바위는 꼭 돼지머리를 닮은듯 하다.
이곳 등산로 계단길에는 내내 백색 현광페인트 표식이 되어 있다. 아마도 야간
근무 군인들 안전을 위하여 야광 페인트칠을 하여둔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등살로 보수 공사로 중간 지점으로 오르고 보니 좌측에 범바위가 보이고 우측으로 인왕산 정상이 보인다.
인왕산 정상 가는길
멀리 건너편에 군부대 시설도 보인다.
헬기장을 지나면
멀리 전방에 안산도 보이고
줌으로 당겨 청와대 모습도 보인다.
멀리 인왕산에서 바라본 기차바위
건너편 뾰족한 산이 북악산이다 우리들은 그 산에 보이는 서울 성곽 코스를 따라 오르게된다.
인왕산 정상 삼각점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지역 보현봉 문수봉이 한눈에 보인다.
남산타위도 가까이 보이는데 역광이라 사진이 신통치 않다.
인왕산 정상을 돌아본후 창의 자하문 방향으로 성곽길을 따라 내려간다.
성곽길따라 가는길
수도서울의 도성
서울의 도성은 북악, 인왕, 목멱산(남산), 낙산의 산마루와 산줄기를 서로 연결해 가면서 꾸불꾸불하게 쌓아놓은 포곡식 산성이다. 성을 쌓을 당시는 말도 많았던 모양이다. 인왕산에서 무악으로 뻗어 만리재에서는 다시 남산으로 잇자는 주장도 나오는 등, 도성을 어느 규모로 어떻게 연결시켜 쌓아야 할지 결정을 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눈이 수북하게 내려 쌓이고, 날이 밝자 신기하게도 도성자리 안쪽은 눈이 말끔히 녹았고 바깥 쪽만 하얀 눈이 그대로 남아 그것을 곧 하늘의 계시로 그어진 선이라 믿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은 것이 오늘의 도성자리라는 것이다. 조선 태조이 교서에서는 '성곽은 곧 나라의 울타리이나, 포악함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터전이니라'라고 말했다.
비록 천민일지라도 백성이거늘 성밖의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일까. 도성을 쌓는데 왕사인 무학대사는 인왕, 무악, 남산으로 연결시키고자 주장했고 정도전은 인왕에서 남산으로 바로 이어져야 한다고 맞섰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무악을 연결시키자고 주장한 무악대사는 현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다른 이름으로는 길마재, 무학재, 모래재, 추모현 등으로 불리고 있다. 이 태조가 도읍 자리를 물색하는데 하륜이 무악 남쪽으로 추천하니 일부에서는 명당이 좁다고 반대했다. 이때 태조가 몸소 무학대사를 불러 자문을 구했고 이 바람에 무악재가 무학재로도 불리게 됐다.
고개의 모양이 소의 갈마같다 하여 길마재로, 또는 모래내의 이름을 따사 모래재라고 불렀다. 뒷날 영조 45년(1769년) 영조가 그이 아버지 숙종의 능은 명릉을 구미고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명릉쪽을 바라 본 뒤부터는 추모현이란 이름도 붙었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 동월이 이 고개를 보고는 '하늘이 천 길의 관문을 지어서 한 군사가 가히 천군을 누를만 하다'고 감탄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무악재의 이름을 딴 것이 무악동이요, 무악재의 이름을 딴 것도 무악동이요, 이 무악동 뒷산이 인왕산이다. 인왕산 정상에서 사직단으로 흘러 내인 능선 중턱의 도성 밖 서쪽에 선바위가 있다. 마치 장삼에 고깔을 쓴 모양의 바위로, 언뜻 보아 불심 깊은 거인이 바위로 굳어진 모습이다. 그래서 선암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위가 우뚝 서 있다는 의미의 선바위가 선암이란 불교식 이름으로 미화된 것 같다. 도성을 쌓을때 무학대사는 이 바위을 성 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이 바위를 성밖으로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 이 바위를 성 안네 넣을 경우 불교가 융성하고, 성 밖으로 할 경우 유교가 왕성하게 된다 "는 정도전의 충고를 들은 태조 이성계가 용단은 내려 오늘처럼 선바위가 성밖에 자리하게 됐다. 무학대사는 태조이 이 같은 결정을 두고 "앞으로 중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우할 신세로구나"라고 크게 한탄했다고 한다
성곽길을 따라 내려가다 좌측으로 기차바위 방향으로 갈 수
있고 직진을 하면 청운 어린이집 방향으로 진해을 한다.
점점 더 가까이 보이는 북악산
군인들이 부식을 지게에 지고 수령하여 인왕산을 오르고 있다.
ㅋㅋㅋ 아니 이럴수가? 산행을 다니다 보면 최 전방 지역 산을 가 보아도 요즘은 대부분 보급품을 과거와 달리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운반을 하는데 세상에 서울 장안하고고 수도를 지키는 군인들의 보급품을 사병들이 1960년대 70년대 전방 군인들이 보급품 수령을 하듯 지게에 물건을 지고 1개 분대 정도 군인들의 인왕산을 향하여 오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양복입고 갓을 쓴듯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상상이 쉽지 않은 모습을 만나게 되어 너도 나도 남자들은 현역 제대를 한 회원들이 되어 그 옛날 이야기를 하며 길을 가고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성곽길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고 이곳 작은 문을 통하여 빠져나와
청운 어린이집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순환도로 인근 공원에는 인왕산에서 모아온 돌을 모아 현대식 돌탑을 쌓아 놓았다.
창의문(자하문)
창의문 현판글
고 최규식 경무관 동상
종로 경찰서장으로 근무중이던 1968. 1. 21. 22시10분경 “CIC대원이라는 거동 수상자 30여명이 세검정에서 자하문쪽으로 도보 행진 중인데 검문에 응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감안, 타격대 출동명령과 동시, 현장으로 달려가 괴한들의 앞을 가로막자 “우리는 CIC부대원들인데 훈련갔다 오는 길이다”고 소리치며 계속 밀고 내려오자 “나 종로서장인데 도대체 누구냐?”고 고함치면서 완강하게 진출을 막았다. 이때 괴한들이 최서장의 멱살을 움켜잡으려 하자 현장에 있는 대원들에게 괴한들을 무조건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는 순간 뒤쪽에서 연이어 총소리가 나자 최서장과 맞서고 있던 괴한 1명이 뒤로 물러서며 외투 속에 숨겨둔 기관단총을 난사하여 최서장은 왼편 가슴에 3발을 맞았으나 권총으로 응사하면서 “수류탄이다, 엎드려”하고 전투지휘를 하다 전사하였다.특별지역을 관할하는 치안책임자로서 투철한 사명감과 호국정신의 귀감을 보여 주었고 1968. 1. 25. 경찰청 장례로 제17묘역 5번 묘에 안장되었으며 그가 쓰러진 청운동 자하문 고개와 경찰종합학교 교정에는 동상을 세워 그의 높은 애국 충절을 기리고 있다.
청계천 발원지
현위치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쪽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
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의 발원지로 정하였다고 한다.
창의문 입산통제 관리소
이 건물에 들어가 이곳 북악산 서울 산성 탐방 신청서 작서을 하고 주민증을 제시
하면 확인을 하고 출입증 목에 걸 수 있는 표식을 받아 탐방을 시작하게 된다.
이곳 북악산 서울성곽 역사탐방 코스 계단길에도 역시 근무 병사들 야간
보행을 돕기 위하여 백색 야광페인트칠이 전 구간에 걸쳐 되어 있다.
역사 탐방 시간표를 참조 하시길
돌핀 바위
돌핀바위에서는 촬영이 허가 되는데 하필이면 종로구청 녹지과에서 이 바위를 가려 산불방지 현수막을 설치 하여 놓았다.모처럼 성곽 탐방길에 나선 국민들이 이 돌핀바위 사진촬영을 모처럼 하게 되는데 현수막이 바위를 가려 앞 부분만 사진 촬영을 하게 된다. 해당 관청의 공무원님들 도대체 생각이 있으신 분들이신지요? 왜 하필이면 유일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에 현수막을 설치를 하시다니요? 조금위나 아래에 설치하여도 무방한데 ....쯔쯔쯔 이런 모습 보면서 아직도 우리나라 공무원님들의 사고는 어떤 채널에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하게 된다.
보현봉(제일높은 봉우리)과 문수봉 방향일대 조망
향로봉(좌측끝) 비봉(가운데) 사모바위 지역 조망
고도를 높이는 북악산 서울 성곽 역사 탐방코스길
다소 빡쎄게 이어지는 성곽 계단길을 오르며 느낀점은 그 추운 날씨에도 곳곳에 평복(등산복장) 차림으로 이곳을 오르고 있는 탐방객을 감시하고 있는 현역 군인들 어쩌면 하나같이 그렇게 친절하고 인물들이 잘생겼는지 .... 나도 아들 둘을 군에 보냈던 애비 입장에서 볼때 그 현역병들의 모습이 부럽기 까지 하다.다가가 춥지 않냐? 혹시 이곳 지역으로 배치 받기 위하여 인물 테스트를 받고 왔냐 등등의 농담으로 물어 보아도 추운 사람은 춥다 이야기 하고 인물 테스는 안받고 왔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렇게 미남들만 내 눈엔 보이는지 딸 있으면 묻지 않고 사위 삼고 싶은 내가 좋아하는 인물형들이다. ㅎㅎㅎ
이곳은 북한군의 공중 위협으로 부터 청아대를 방어하기 위해 1979년 10월 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이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 하였다.민족의 정기가 서려있는 이곳 북악산을 우리가 살고 후손들이 살아 가야할 영원한 쉼터로 가꾸기 위해 옛 모습으로 복원하다.민족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길 기원하며...2001년 새해 아침
성북동 일대 주택단지
1.21사태 소나무
"우측에 소나무에 1.21 사태 당시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아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였을때 우리 군 경과 치열한 총격적이 벌어졌다.이때 수령 200년이 된 이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자국이 남게 되었다.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고 적고 있는데 총탄 자국을 살펴보면 아직 까지도 그 탄두 구멍이 생생하게 나타나 당시의 긴박한 모습을 상기하게 된다.
청운대에서
백악산을 탐방하고 난후 다시 우리들은 숙정문 입산통제 관리소 방향으로 마치 하산을 하듯 성곽길을 따라 진행을 하다 보면 능선위에 넓은 공터가 있고 노송지대가 보이며 이곳에서 바라 보면 광화문 경복궁 지역 복원공사 현장까지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는 청운대에 도착 이곳에서는 사진촬영이 허락이된다. 사진을 찍으며 가능하면 군부대 시설을 피하여 찍는것은 허용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은 이곳 북악산 서울 성곽 역사 탐방 코스 개방을 하였으면 사실 이곳을 탐방하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성곽을 나름대로 적당히 사진을 찍는것 까지 촬영을 금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촬영 단속을 하려면 인왕산에서 청아대를 향하여 사진을 찍는것을 단속 한다면 몰라도 이곳 역사탐방 성곽길 코스에서는 일체 청아대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데 왜 무엇 때문에 성곽 탐방코스 개방을 하고 성곽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것 까지도 금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은 위성 시대가 되어 웬만한 지역은 사실상 보안 문제 때문에 촬영을 금하는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지가 오래인데 ....군부대 시설을 촬영하는것을 단속을 한다면 몰라도 성곽탐방길에 나선 국민들이 수십년동안 통행 금지 시켜두었던 북악산 서울 성곽을 배경 정도로 기념 사진을 찍는것까지도 금지 하고 있다는것은 어딘가 개방 목적과 동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광화문과 경복궁 복원공사 지역
청운대
청운대에서 기념 사진을 찍으며 조망을 한 후 우리들
은 다시 숙정문 방향으로 성곽길을 따라 하산을 한다.
숙정문
숙정문(肅靖門) 또는 숙청문(肅淸門)은 조선 시대에 건축한 서울 성곽의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대문' 으로 부르기도 한다.조선 개국 당시 건립되었으나 건립된 지 18년 뒤인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풍수상의 이유로 폐쇄되었다. 그 후 1504년 동쪽으로 옮겨 지었는데, 그 때는 석문만 세우고 문루는 건축하지 않은 것을,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이란 편액을 걸었다.1968년1·21 사태 이후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의 발길이 차단되었다가 2006년 4월에 개방되었다
숙정문 현판
숙정문 밖에 저 아래로는 그 이름도 잘 알려진 삼청각이
보이는데 이곳 지역으로는 아직 개방이 되지 않았다.
멀리 건너편에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이 보인다.
삼청각
이곳은 7.4공동성명 직후 남북 적십자 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역사의
장소로 널리 알려 져 있는데 최근에는 영화 식객 촬영 장소 이기도 하다.
가기전에 떠나기전에 다시 한번 더 돌아본 팔각정 그리고 그 너머에 보현봉이 보인다.
숙정문 지구 북악산 서울성곽 역사 탐방 입산 통제 관리소
이곳을 빠져 나오는것으로 이날 북악산 서울 성곽 탐방 코스는
모두 끝을 맺게 되고 우리들은 삼청동 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삼청근린공원을 지나 버스 정류소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우리들은 시청앞에 하차하여 시청 인근 빌딩에 근무 하시는 우리산내음 회원님의 소개로 한 식당에 들어가 추운날씨 산행을 마치고 가벼운 뒷풀이를 하고 이날은 평소 수요산행 보다 이른 오후 5시 반 정도 조금 지나 귀가를 한다.매스컴과 기상청에서는 금년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하였지만 막상 추운날이지만 산행을 하다 보니 두툼하게 입었던 옷들을 모두 벗어 배낭에 넣고 짚티 차림을 산행을 할 수 있는 날씨였다.추울땐 추워야 하고 더울땐 더위에 자연적으로 적응을 할 줄 아는 우리의 신체 리듬이 참으로 신기하게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