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조선왕릉 탐방 후기 [화성 융릉과 건릉] <1>
<2023년 10월 14일>
열 번째 조선왕릉 탐방 [화성 융릉과 건릉]으로 가는 날, 비가 온다네.
중부 곳곳에 요란한 가을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이를 어쩌나, 곳에 따라서는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내리고 우박도 내린다니, 바람도 불고 ~~~.
기상청 날씨누리 외에 웨더채널이나 아큐웨더까지 한결 같다.
어쩔 수 없지, 비가 오면 비를 맞을 수 밖에 ~~~.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엄혹한 현실 앞에,
하릴없이 생모 영빈 이씨는 '세자에 대한 대처분'을 영조에게 권하고,
윤오월 중순, 염천 무더위에 휘령전(문정전) 앞마당 뒤주에 갇힌 남편을
굳게 닫힌 전각 문을 붙들고 서서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던 세자빈,
며칠째 목이 타들어가는 아버지에게 물 한잔 드릴 수 없었던 세손,
저간의 사정을 모두 알면서도 종사를 위하여 자식을 죽였던 영조,
속절없이 가을비가 마구마구 쏟아진다면 이는 누구의 눈물일까.
정조의 효, 사도세자의 비통함, 혜경궁의 단장의 아픔, ~~~~.
그런 생각에 잠겨있다 잠이 들었는데 ~~~, 이렇게 고마울 수가!
융릉과 건릉이 있는 화성시 안녕동은 탐방하기에 딱 좋은 날씨,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릉 [융릉]과
제 22대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합장릉 [건릉] 탐방을
하늘의 축복 속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음에 무한감사!
장조(1735~1762)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로, 출생 이듬해에 왕세자로 책봉,
15세인 1749년(영조 25)부터 대리청정하였으며, 영조와의 불화와 울화병증,
노론세력과의 대립 등으로 인하여 결국 폐서인,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곧바로 세자로 복위시켜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리고,
정조 즉위 후 장헌세자라는 칭호를,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광무 3)이
장종으로 추존 후에, 다시 황제로 추존하고 묘호를 장조라 하였다.
헌경왕후 홍씨(1735~1815)는 홍봉한의 딸로 1744년 왕세자빈으로 책봉,
사도세자 사후 혜빈으로 책봉되고, 아들 정조 즉위 후 혜경궁이 되었다.
남편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회고록 [한중록(閑中錄)]을 남겼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헌경왕후로 추존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 배봉산에 수은묘를 조성,
정조 즉위 후 영우원으로 격상 후, 1789년(정조 13) 현재의 화산으로
천장하면서 격을 높여 조성하고 현융원으로 개칭, 1815년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융원에 합장, 1899년(광무 3) 능으로 격상, 융릉이 되었다.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홍씨의
둘째 아들로 1759년(영조 35) 왕세손에 책봉, 1775년(영조 51)는 대리청정,
다음해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당파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위주 인재 등용, 규장각을 통한 학문 진흥, 장용영 설치 등 군사력 강화,
수원 화성 건축 등 업적을 남겼으며, 묘호를 정종, 광무 3년 정조로 바꾸었다.
효의왕후 김씨(1753~1821)는 김시묵의 딸로서 1762년 왕세손빈에 책봉,
정조 즉위로 왕비에 올랐으며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황후로 추존되었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곁인 현릉원 동쪽 언덕에 건릉을 조성,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건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정조 초장지는 풍수지리상 흉지)
탐방코스는 매표소 ~ 재실 ~ 곤신지 ~ 융릉 ~ 건릉 ~ 산책로 ~ 점심(식당가)
오전 10시, 병점역 3번출구. 조금 전까지 내리던 비도 그치고, 마치 날씨가 우릴 축복하는 듯, "감사합니다!"
*** 병점(餠店)이라는 지명은 옛날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가던 과객이나 물건을 팔러가던 상인들이 지나가던 길목에
떡을 팔던 가게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떡전거리가 형성되면서 붙혀진 지명인데, 작년 10월에도 떡전거리 축제가 있었다 .
화성 융릉과 건릉 정문
정문 우측, 오래된 향나무.
병점역 후문에서 버스로 이동(34, 34-1, 35-1, 46, 50번 등등 15분 소요. 요즈음은 '융건릉' 접근성이 엄청 좋아졌다.
매표소.
종합안내도 앞에서 코스 안내 및 일정 설명
재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개비자나무]
*** 주목과의 비자나무와 닮아 '개비자나무'로 불리지만, 실상은 개비자나무과로 족보가 다르다.
※ 전에는 '개'가 붙는 게 그리 좋은 것(개살구, 개망신, 개자식, 등등)은 아니나, 요즈음은 다른 듯(개이뻐, 개똑똑, 개맛있다).
비자(榧子)나무의 나뭇잎이 '아닐 비(非)' 字를 닮아서 비자나무로 부른다는데 ~~~.
뒤뜰의 산수유 나무, 매년 많은 열매를 맺기로 소문나기도 했었는데 ~~~.
뒤따라올 친구도 기다릴 겸, 전시 중인 멋진 사진들을 여유롭게 감상.
사진 속의 물방울일까, 사진 위에 내린 빗방울일까?! ㅎ ㅎ ㅎ.
범부채 열매, 붓꽃과로, 여름에 피는 황적색의 꽃도 아름답지만, 까만 열매 또한 아름답다. 햇살이 강하면 흑진주처럼 빛날텐데~.
언덕 정원에서 내려다본 재실
우측은 융릉, 좌측은 건릉, 직진하면 산책로. 우리는 먼저 융릉으로 간다.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 숲에서 떨어지는 도토리가 지천으로 많다.
도토리를 모으는 통.
[금천교] 원래는 황구지천에 놓여 있던 다리인데, 수원비행장 조성으로 다리 역할을 잃어 1970년 이곳으로 이설했단다.
*** 전면에는 한자로 [원대황교(元大皇橋)] - 반대편에는 한글로 '융능교'라 음각,
좀작살나무
[곤신지] 융릉이 풍수지리 상 [반룡농주(盤龍弄珠) ]의 길지라 여의주를 상징. 원형으로 조성, '곤신지'는 남서서 방향이라 명명.
*** 반룡농주(盤龍弄珠)는 용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 여의주를 갖고 논다는 의미.
참고로, 24방위표를 퍼왔다. 곤은 남서쪽 곤신이면 남서서 방향.(융릉 기준)
[융릉]
[수라간]이 있어야할 자리에 [수복방]이 있다. 수라간의 위치나 흔적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향로와 어로 양쪽으로 아주 넓은 변로가 놓여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은 일직선이나, 능침은 비껴앉아 있으며, 방향도 틀어지게 조성.
*** 풍수지리에 의한 것이라는데,
흔히들 8일간이나 깜깜한 뒤주 속에 갇혀 있었던 답답함과 영조에 의한 감옥에서 벗어나시라는 의미라고 하기도 한다..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에서 영우원을 여기로 옮겨 현륭원으로 조성할 때 세운 표석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
1899년(광무 3) 장헌세자를 장조의황제로 추존한 후 이듬해 새로 세운 표석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
'만남'의 반가움! 남북이산가족 상봉에 못지않다.
혹시라도 이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융릉]에서 [건릉]으로 건너가는 길, 들꽃마당 억새밭을 보고 갈 심산이다.
[들꽃마당]
들꽃마당 모퉁이에 있는 파고라 쉼터.
요즈음은 쉼터에 볼 만한 책들을 비치한 곳이 많다. 정조에 관한 책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띤다.
가을이 일렁이는 억새밭,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은빛 물결, 가을 물결을 한껏 즐긴다.
[건릉]으로 가는 길
[건릉]
[건릉]에도 [융릉]처럼 수라간이 있을 만한 자리에 수복방이 있고 수라간은 없다. 변로는 [융릉]보다 더 넓고 ~~~.
1900년(광무 4) 고종에 의해 정조가 황제로 추존된 후, 기존에 세웠던 표석을 갈아서 다시 만든 표석.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
통상 기신제 제향일을 기재하는데 여기도 융릉처럼 제향일을 기재하지 않았네.
*** 양력으로 융릉은 7월 12일(승하일 1762년 음력 윤5월 21일), 건릉은 8월 14일(승하일 1800년 음력 6월 27일)이라는데 ~~~.
정자각에서 바라본 홍살문
사전 답사 때 돌아보았던 [정조대왕 초장지] 사진을 올립니다.
산책로 걷기 기록은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조 임금은 누구나 다 좋아하는 왕이지요.
좀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으련만...
아쉬움이 크네요^^
상세한 후기와 사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조대왕, 개혁군주로서 그 원대한 꿈을 모두 실현하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안타깝습니다.
최소한 5년만 더 살았다면, 15살의 순조에게 왕위가 이어져
대리청정으로 인한 폐해는 없었을텐데 ~~~.
참으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