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충성 된 자를 기뻐하신다. 2013. 10, 06.
오늘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 1- 2절과 디모데후서 2장 2-4절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미국에 어떤 사람이 어렸을 때, 넓은 잔디밭 정원을 가진 큰 부자 집, 이웃에 살았습니다. 하루는 부자 집 여주인이 이 소년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너, 우리 집 잔디를 깎아주지 않겠니? 내가 생각해서 보수를 주마!” 소년은 기쁜 마음으로 잔디를 깎았습니다. 여주인이 와서 보고는 “너 잔디를 잘 깎았는데, 1달러 밖에 못 받겠구나!”하면서 1달러를 주었습니다. 1 주일이 지난 후에 부자 아줌마가 또 그 소년을 불러서 “너, 우리 집 잔디를 깎아주지 않겠니? 지난 번 보다 좀 더 잘 깎아보렴!” 소년은 다시, 기쁜 마음으로 전 보다 좀 더 잘 깎았습니다. 여주인이 보고서 “아, 수고했다. 지난주보다 조금 좋아졌구나, 그러나 2달러 밖에는 줄 수 없다”하면서 2달러를 주었습니다. 그 후 1주일이 지났을 때, 다시 소년을 부르더니 “애, 너 우리 집 잔디 좀 깎아다오. 아주 열심히 성의를 다해서 잘 깎아보렴!” 이번에 그 소년은, 진짜 마음을 다하여 성실히 잘 깎았습니다. 긴 풀이 하나도 없이 깎았고 낫으로 잘 다듬었습니다. 여주인이 나와서 보고는 기쁜 얼굴을 하며 5달러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이 다음부터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5달러짜리 일을 2달러나, 1달러자리 일처럼 하지 마라”고 말해 준 것입니다. 이 소년은 여기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자기가 정성을 들여 잘 하면,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그는 모든 일에 성의를 다하는 충성된 일꾼이 되어, 크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제자 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려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오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곧,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제자의 삶을 살게 해 주는데 꼭 필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은 충성됨입니다.
충성(忠誠)이란, 글자의 의미는 (心)(中) 말씀(言) 이룰(成)이 결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는 것이 곧, 충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엔 임금을 향한 마음을 가리키는 문자입니다. 오직 군주(君主)를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영혼의 임금 되신 주(主) 예수님의 지상 대 명령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충성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 하였고,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 말씀했는데, 이 말은 <충성이 곧, 그리스도의 일꾼의 표지이다>는 겁니다. 이처럼 충성이란, 이 땅의 모든 국가와 사회단체와 모든 기관에서 첫 번째로 요구되는 기본 덕목입니다. 이 충성이 무너지면, 국가도 사회도 단체도- 다 무너지게 됩니다.
지난여름에 우리나라가 왜, 전력난에 시달려야 했습니까? 전력생산 시설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충성된 일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 정품이 아닌 가짜부품을 납품받아서 가동하니까, 자주 고장이 발생하여 전력생산 수급에 차질이 생겨서 그런 것입니다. 국가적 손실이 얼마나 컸던 일입니까?
예수를 안 믿어도, 성품이 충성된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분입니다. 이순신 장군님은, 왜군에 비해, 전력도 열세였고, 조정의 다른 신하의 모함 속에서, 지원도 별로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23전 23승을 이끌어낸 최고의 명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원균의 모함으로 사형언도를 받았던 장군은, 원균이 참패를 당하자, 급하게 다시 임용되어서, 겨우 남은 12척의 함선으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쳐부수는 명량대첩을 이루셨습니다. 이 때, 절대적인 열세에서도, 군의 사기를 고취시켰던 명언이 있습니다. 必生卽死 死必卽生 (필생즉사 사필즉생)입니다. 곧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 놀라운 충성심이 곧, 이 나라를 지킨 것이라고 봅니다.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충성은 거듭난 영의 열매, 곧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곧, 거듭난 우리의 영속에 충성됨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환경과는 상관없이, 어떤 형편 속에서든 믿음으로 충성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환경이 좋으면 충성하고, 상황이 안 좋으면 충성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보디발 시위대장의 집에서 노예로 일할 때도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랬기에 주인의 눈에 들어, 가정 총무로 발탁이 된 것이 아닙니까? 요즘으로 말하면, 엄청난 승진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환경이 180도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시위대장의 부인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죄로 누명을 쓰고서, 다시 나오기 힘든 시위대 감옥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거기서도 변함없이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한 일은 전옥이 다시 체크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그는 일처리를 온전하게 했던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성폭행 미수범으로 억울하게 들어온 감옥생활이 뭐가 좋다고 맡은 일에 충성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환경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충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거기서 요셉은, 여러 정치범들을 섬기면서 거기서 정치를 배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필요한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놀랍게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애급의 총리로 세워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환경과 상관없이 충성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를 높이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어떻게 충성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까?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즉, 원망과 불평에 빠지도록, 우리의 생각의 관점을 구부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시면, 1달란트 받은 종이 왜, 충성하지 못했던 것입니까? 그는 주인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가져왔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주인에 대한 생각이 삐뚤어졌던 것입니다. 아마 사탄이 1달란트 받은 종의 귀에다 속삭였던 것 같습니다. “야, 너도 똑같은 종인데 왜, 다른 종은 5달란트 2달란트를 주었는데, 너만 1달란트의 작은 자본금을 준 것이더냐? 너의 주인이 참 나쁘다. 참으로 인색한 사람이야, 이 작은 자본으로는- 어떤 장사를 하여도 이를 남길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이것마저도 잃어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니 차라리 땅에 묻어두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느냐?”라고 속삭이면서 두려운 마음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사탄의 이런 방해공작에 동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생각을 타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아니, 내 나이에 이제 와서 무슨 제자훈련인가? 다른 할일도 바쁜데, 무슨 에너지가 남아돈다고 제자훈련인가?” 사단이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집어넣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제자의 부르심에 응하지도 못한 체! 시도조차도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까?
1).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그의 말씀에 충성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영어로 충성은 Faithful입니다. 문자의 뜻은 믿음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곧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Faithful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 하나님은 선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믿기 가졌기 때문에- 그 중심의 흔들림 없이, 그 분의 말씀을 지켜내는 마음의 태도가 곧 충성인 것입니다.
실례로 욥의 경우를 보면, 그 중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더라.”고 한 것을 봅니다.
그래서 1장 8절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닙니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나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느라” 그 후 사탄이 어떻게 했습니까? 욥의 모든 소유에 손을 대어 풍지박살을 내고 만 것입니다. 이 때, 욥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장 20-22절을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한 것을 봅니다.
욥의 시련에 대해선,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욥의 중심과 태도를 보시면, 충성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중심이 요동하지 않았던 것을 봅니다.
욥기 23: 10-12절을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는 욥의 고백을 보시면, 욥의 충성됨은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서 그 중심이 바뀌지 않고, 그의 입술의 말씀을 귀히 여기는 충성됨을 볼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맡겨진 직분과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까? 성경의 답은 우리를 충성되게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나를 충성되게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고 난 후,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책임자를 임명할 때, 하나냐를 선택했습니다. 왜 그를 선택한 것입니까? 느헤미야 7장 2절을 보면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 2장 2-4절을 보면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무책임한 사람들에게 맡겨지면 거기서 흐지부지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되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이 복음이 묻히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복음에 있어서 충성된 사람입니까? 제자로서 잘 배우고, 배운 그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충성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귀중한 일이 계속 이어지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받은 자들이-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은 자라면, 마땅히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충성된 사람이 그리 많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군사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충성된 자가 많지 않다는 겁니다. 이것이 제자 삼는 사역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이미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상 대 명령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이미 성령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상속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면,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영광을 받기 위해선,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자처하지 않으면, 이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 결코 전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충성되게 여겨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분을 충성된 자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 말은 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밖의 말은 다 마귀의 소리입니다.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무엇입니까?” <충성입니다> 진실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로서의 충성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제자 삼는 사역은- 장차 천년왕국에서 받게 될 상급에 비하면, 작은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5달란트를 받았거나, 2달란트를 받았거나 다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 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대접을 받고 추앙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희곡을 쓰고 싶어서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가 극장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일자리는 고작, 관객들이 타고 온 마차의 말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기꺼이 맡아 일하다 보니까, 극장과 연극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는 거기서 영국이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세워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처음부터 유능한 일꾼들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져 갔던 것처럼, 우리도 한 단계 두 단계 훈련 과정을 충성되게 따라가게 되면, 사람 낚는 어부로- 준비된 일꾼으로- 변화 되어 질 것입니다. 주님은 충성된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충성된 자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충성하는 자에게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성경에 보면 충성된 자에게 반드시 상급이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21)했고,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도 심고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지금 충성과 신실함의 씨앗을 심고 있는 자는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놀라운 상급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딛2:11,12)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차 받을 상급을 바라보고,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날에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영광이 주어질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는 자기의 후계자를 찾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회사 중역들 중에 두뇌가 명석하고 탁월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카네기는 일찌감치 ‘쉬브’라는 사람을 점찍어 두었던 것입니다. 쉬브 씨는 초등학교 졸업자에 불과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충성된 자였기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낙점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정원 청소부로 입사했습니다. 그는 정원만 쓸면 되는데, 공장 안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청소하였습니다. 간부들이 그를 정식직원으로 채용하였습니다. 남달리 충실하게 근무하자 곧 사무직으로 발령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신임 받는 비서로 카네기 사장의 손발이 되었던 겁니다. 그는 늘 메모지와 펜을 들고, 카네기 사장의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카네기가 어느 날 밤늦도록 연구하다가 퇴근하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그 때까지 쉬브씨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장이 깜짝 놀라 “왜 아직 퇴근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사장님께서 언제 저를 부르실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자리를 비웁니까?” 이렇게 충성된 쉬브씨를 카네기는 후계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삼으셨고,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으셨던 것은, 하나님은 저들의 충성됨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을 보면, 충성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숙해진만큼 그 열매의 크기와 질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충성됨도 계속 자라나고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2장 19절에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보시면, 장차 우리에게 어떠한 시련과 어려움에 봉착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환난을 만나게 될 때, 누가 죽음을 불사하고, 순교까지라도 할 수 있는 자로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평소에 삶 속에서 충성됨을 키운 자라야 그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환란을 당할 때, 자칫 마귀의 위협으로나,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6장 4절을 보면, 바울사도의 동역자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는 기록을 보면, 이들은 실제로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죽도록 충성을 다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의 세용사가 그들의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여 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바쳤던 것을 봅니다. 이처럼 실제의 삶 속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죽도록 충성하는 실제의 삶을 발휘한 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실제로 목숨이 위협 당할 때, 순교할 수 있는 충성된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5-6절을 보시면,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주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하시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도였는지 누가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눅22:44)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그러시기에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주님을 높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충성된 믿음을 키워서, 어떤 형편에서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날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킴으로 그 날에 의의 면류관을 함께 받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영국의 한 왕자가 신하들을 데리고 깊은 산 중으로 사냥을 나갔습니다.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푸른 목장에서 양을 치고 있는 존 제임스란 소년을 만났습니다. 왕자가 사냥하다가 길을 잃었으니 길 안내를 하라고 명하자, 소년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저는 남의 집의 양을 돌보는 목동입니다. 내게 맡겨진 양 떼를 놓고 길을 안내하러 갈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이 나라의 왕자이다. 네가 오늘 길을 안내하면 3개월 봉급을 주겠다.” “아닙니다. 저는 이 양 떼를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왕자가 화가 나서 제임스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쏴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네, 저는 죽을지언정 양을 지키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왕자 일행은 자기들끼리 길을 찾아서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왕자는 그 날 제임스의 충성됨에 감동을 받았고, 후에 그를 불러서 영국의 제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런 충성된 자가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도 이 복음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충성된 자들을 통하여, 또 다른 제자들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함께 이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기꺼이 받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충성된 자를 기뻐하십니다.
첫댓글 충성된 일꾼으로 사명 감당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