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은 고장
조 흥 제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1751)은 주거지(住居地)를 선정하는 기준으로 지리, 생리, 인심, 산수를 들었다. 생리는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유리한 위치라고 했다. 물이 잘 빠지고, 들의 형세, 산의 모양, 흙 빛, 물의 흐름, 앞산과 앞 물을 본다. 이러한 곳을 명당이라고도 불렀다. 명당(明堂)은 양택(陽宅)과 음택(陰宅)으로 나누는데 양택은 살기 좋은 자리이고, 음택은 좋은 산소 자리다. 하지만 명당하면 으레 산소자리를 떠올리는 것이 우리네 정서다. 그 원인은 조상의 묘를 잘 쓰면 자손들이 잘된다는 풍수학에서 나온 기복(祈福) 사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산소의 명당자리는 많이 소개되었기에 제외하고 양택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내가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본 곳은 양평군에 있는 양수리라고 보았다.
양평 세미원(洗美苑)에서 연꽃 축제가 열린다고 하여 인근에 있는 두물머리도 볼 겸 갔었다. 양수리역에서 세미원으로 가는 길은 좌측에 큰 내를 끼고 오른쪽에 상가가 있으며 앞쪽에는 강 건너에 부드러운 산들이 있어서 아늑한 감을 준다. 우측 동산 너머에도 큰 강이 있다. 그쪽은 개발이 덜 되어 밭의 흙이 보였는데 검붉은 색이다. 택리지에서 말하는 흙이 이런 빛이었을 것 같다. 강물이 들어온 넓은 습지를 개발하여 연꽃 단지를 만들어 이름을 세미원이라고 불렀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크고 아름다운 꽃이고, 잎도 식물 중에 가장 커서 음식을 만들 때 그 안에 넣고 만들기도 한다. 붉은 연꽃, 흰 연꽃을 구분하여 심었고, 중간에 둑길을 만들어 가운데서 사진도 찍게 했다. 옆에 많은 항아리에서 물이 솟구치는 항아리 분수도 있다. 징검다리도 있어 어렸을 때 딛고 개울을 건너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세미원에서 다리를 이용하여 두물머리로 건너가는 지름길이 생겼다. 작은 배 여러 척을 가로로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 판자를 깔고 만들어 배다리라고 한다. 배다리는 정조(正祖)가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참배하러 갈 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고 건넜다는 기록이 있지만 요사이 배다리를 건너는 체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두물머리 앞에 느티나무가 있다. 수고 26m, 수령 400년이 넘는 큰 보호수다. 이곳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두물머리, 혹은 양수리(兩水里)’라고 부른다. 밑에 댐을 쌓아 바다같이 넓어졌다. 팔당댐이다.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두물머리에 음식점이 없고 리어카에 얼음물이나 칡차를 파는 것이 고작이다. 유원지를 깨끗하게 보전하려는 관계당국의 의지가 담겨있다. 축대 밑에 팔뚝만한 고기 떼가 유유히 헤엄친다. 이곳은 낚시 금지구역이어서 고기들의 천국이다. 서울과 수도권 주민의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수원(水源)이기에 깨끗이 보존하기 위해서다.
강 안쪽 가운데 동산이 있어 개발되기 전에는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앞뒤에 넓은 들이 있어 거기서 나온 소출로 먹고 살기엔 부족함이 없었을 것 같다. 양수리는 3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반도같이 톡 튀어 나온 지역이다. 우측 강 건너 운길산, 좌측에 청계산, 강 건너에 검단산, 남한산성, 검단산의 부드러운 산이 감싼다. 그 가운데 '산 뺑뺑, 물 뺑뺑'의 지형이어서 내가 이상향(理想鄕)으로 그리던 고장에 가깝다.
내가 살고 싶은 고장은 뒤에 산이 있고, 앞 들 가운데 내(川)가 있으며, 옆에는 강이나 바다가 있는 마을을 그려 보았다. 마을은 산기슭에 십여 호가 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부엌 바닥에 시커먼 솥뚜껑 젖혀 놓고 호박전을 부치다 앞뒷집 담 너머로 접시가 넘어가야 한다. 내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글을 썼으면 좋겠다. 가족은 부모님 모시고 자녀는 3남3녀는 되어야 한다. 2㎞ 정도 떨어진 곳에 초등학교가 있고. 유치원은 없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형제-자매가 어울려 놀고 싸우다 화해도 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인성(人性) 교육이 거기서 이루어진다.
봄에는 산에 올라 백화(百花)가 만발한 속에서 주안상(酒案床)을 앞에 놓고 문우들과 시회(詩會)를 열고, 여름에는 강에서 수영하다 물에 담가 두었던 참외와 수박을 꺼내 쪼개 먹는다. 복날에는 냇가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반두로 고기를 잡아 끓이다 수제비를 뜯어 넣어 어죽을 만들어 마을 주민들이 모여 몸보신과 화합을 다진다. 우리 집 울타리는 앵두나무이고, 마을 뒤 산기슭에는 복숭아, 살구, 밤, 대추, 사과 등 과일 나무가 둘러 싸 탐스러운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 아이들이 따 먹어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앞들에는 벼 뿐 아니라 오곡(五穀)이 형형색색을 이룬다. 여름에는 원두막에서 참외와 수박을 먹고, 가을에는 아이들이 논둑에서 메뚜기를 잡아 정종 병에 넣어 와 솥에다 볶으면 아삭아삭하니 맛있다. 겨울에는 어린이들이 논에서 썰매를 타고 팽이 돌리며, 눈사람을 만들면서 떠들썩해야 한다. 운동이 놀이이고 놀이가 운동이다.
나의 고향이 그랬다. 뒤에는 동산이 있고, 앞에는 들이 있으며, 옆에는 강이 있었다. 장마가 지면 강물이 불어 마을 앞까지 들어 왔다. 물이 줄면 여기저기 둠벙이 생기는데 거기에는 시꺼먼 고기 지느러미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주민들이 삼태기 들고 들어가 건지면 팔뚝만한 잉어와 숭어가 들어 있었다. 겨울에는 강 얼음 위에 천막을 치고 그 안에 구멍을 뚫고 불을 켜 놓으면 잉어들이 몰려들어 작살로 찍어 잡았다. 아침에는 고기들이 얼음 밑으로 올라오는 습성이 있어 떡메(나무망치)로 얼음을 때리면 깨지면서 치솟는 물과 함께 고기도 올라 와 얼음 위에서 퍼덕였다. 해방 전까지 살았던 고향을 떠 올리고 그와 비슷한 양수리를 이상향으로 그려 보았다.
나의 생활은 어때야 하나. 농사는 아버지가 주관이 돼서 하시고, 머슴을 두고 하여 나는 손에 흙을 안 묻혀야 한다. 밤에는 등잔불 심지 돋우면서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작품 쓰기에 몰두해야 하고, 여름 방학 땐 책을 읽다 머리가 아프면 밀짚모자 푹 눌러 쓰고 강에 나가 낚싯대 드리울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굿불굿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어디서 '고향의 봄' 노래가 들려 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