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징크스/전 성훈
“ 덕수궁 돌담길을 언제 걸었는지 생각나세요. 그때 혼자 걸었나요, 아니면 누구랑 함께 걸었나요. 뜬금없이 갑자기 웬 덕수궁 돌담길 타령이냐고요. 글쎄요, 덕수궁 돌담길을 언제 걸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서 한 번 여쭤 본 거예요. ”
몇 년 만에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건 아니었다. 아는 분의 딸이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결혼식을 한다기에 모처럼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볼 기회가 생겼다. 가을이 익어가는 토요일 오후 덕수궁 정문 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렸다. 시간을 보니 덕수궁 정문 수문장 교대식을 할 때가 되었다. 수문장 교대식 구경을 할까 생각하다가 혼자 멀뚱하니 서 있는 게 쑥스러워 그만 두었다. 결혼식장에 도착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 천천히 돌담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을 하였다. 마침 남녘 어느 고장에서 돌담길에 좌대를 만들어 놓고 그 고장 특산물을 전시하며 판매하고 있었다. 지나던 사람들 중 일부는 어떤 물건을 파는지 궁금하여 매장을 들여다보거나 무료로 시음하는 대추알 크기만 한 앙증스런 사과, 과일 주스, 젓갈류 등을 부담 없이 맛보며 웃고 있었다. 돌담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니 네다섯 살 돼 보이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여학생들도 친구들과 함께 무슨 수다를 즐겁게 떠는지 웃음소리가 가을 하늘 꼭대기까지 닿을 듯했다. 그런가하면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발을 맞추며 걸어가는 젊은 남녀도 보였다. 우리 세대의 젊은 시절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한 모습을 하면서 걷는 커플도 있었다. 서로의 팔을 등 뒤로 감싸 안고 아주 다정한 듯이 어깨를 맞대며 웃으며 걷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보자 갑자기 덕수궁과 관련된 옛 속설이 떠올랐다. 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애인이나 연인과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그 말을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젊은이들 사이에 속설이 맞는지 안 맞는지 내기를 한다며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도 하였다. 어떤 짝들은 나쁜 건 피하는 게 좋다며 돌담길 근처에서 돌아서기도 했다.
오랜만에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추억에 잠기자 가을의 정취에 어울리는 미소가 입가에 살며시 스치듯 떠올랐다. 덕수궁 정문에서 법원청사가 있었던 곳으로 가는 돌담길부근에 돌체라는 다방이 있었다. 그 곳에서 그녀와 데이트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1979년 10월, 무르익어가는 가을의 무게를 못 이겨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며 막춤을 추던 시절이었다. 터질 듯 한 꽃봉오리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20대 초반의 그녀를 돌체 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덕수궁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맑은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지는 화창한 가을 토요일 오후였다. 덕수궁 어느 벤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언제쯤 마음을 털어놓을까 고민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하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고 장미꽃이 수놓아진 검정색과 붉은 색이 섞인 원피스를 입었던 그녀. 까만 눈동자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그윽한 분위기를 내품는 그녀에게 완전히 내 영혼을 빼앗겼다. 그녀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말없이 내 손등을 잡고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녀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한 평생을 기약하였다.
징크스는 재수 없거나 불길한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는 ‘머피의 법칙’을 연상하기 쉽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의 ‘샐리의 법칙’도 있다. 그런가하면 집단적으로 징크스를 믿는 사람도 있다. 특히 운동선수들이 그렇다. 운동선수들은 큰 경기나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서 징크스에 시달리는 선수들이 많다. 어느 선수는 턱수염이나 손톱과 발톱을 깎지 않고, 어떤 선수는 양말을 심지어 속내의도 갈아입지 않는 선수도 있다고 한다. 남녀간에 연애를 하다보면 헤어지는 커플도 훗날을 기약하는 연인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징크스는 징크스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그 말처럼 들어맞기도 한다. 머피의 법칙도 샐리의 법칙도 인간의 연약한 마음이 꺼림칙하여 회피하거나 기대고 싶은 신기루의 하나다. 징크스는 징크스를 의식하는 사람에게 똬리를 틀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건 아닐까? 그녀와 내가 하나가 되기로 약속한 그 날 이후,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생뚱맞게 혼자서 다시 찾은 덕수궁 돌담길, 어디를 둘러보아도 돌담길 징크스는 보이지 않는다. 여름날 그토록 푸르렀던 나뭇잎이 가을이 깊어 가면 노란 색과 붉은 색으로 옷을 갈아입듯이, 그녀와 나의 삶 또한 인생이라는 굴곡의 세월을 마주하며 손잡고 걸어간다. (2018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