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1765~91, 죄와 속죄의 치유적인 특성과 법정적 특성의 조화)
1. 역사적 배경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정숙주의자들과의 논쟁, 예정론자들과의 논쟁, 열광주의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그의 신학을
성숙시켜 나갔다. 또한 1760년대 중․후반부터 그의 신학의 핵심인 구원의 길(via salutis)이 보다 명확하게 정립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저작들을 쓰고 출판해낸다. 이 시기에 쓰여진 웨슬리의 중요한 설교와 교리적 에세이는 “구원의 성서적 길
(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1765)”, “주님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1765)”, “기독자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1766)”, “성령의 증거, 담화 2(The Witness of the Spirit, Discourse Ⅱ,1767)”, “신자의 회개(The Repentance of Believers,1767)”등이 있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신학의 두 축인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거룩한 삶’의 성숙한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의 인간 상황의 변화와 책임성을 조리 있게 이끌어내고 있다.
특히 “구원의 성서적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1765)”, “주님 우리의 의(The Lord Our Righteousness,
1765)”는 웨슬리의 이정표적인 설교들이다. 이 설교들에서 웨슬리는 구원의 믿음과 성화의 믿음을 조화롭게 연결시키고
그 연결의 고리로서 주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ord)가 우리에게 덧입혀지고 심겨짐을 말하고 있다.
1760년대 말에 웨슬리는 토플레디(Augustus Montague Toplady)라는 당시의 영국 국교회 복음 성가 작사자와 예정론에 관한 문서 논쟁에 휩싸인다.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니안들 사이에 존재했던 긴장은 이 논쟁으로 인해서 감리교 운동
진영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1760년대에는 보다 넓은 범위인 영국 국교회까지 퍼지게 되었다.
웨슬리와 토플레디는 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하였다. 특히 1770년에 웨슬리는 가장 극단적이고 매력 없는 형태로 칼빈주의의 관점을 소개하면서 서론과 결론에 다음과 같은 자신의 의견을 첨가한 토플레디의『
절대적인 예정』(Absolute Predestination)을 요약 출판했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0명중에 1명이 선택되고 20명중에 19명이 유기가 되었습니다. 그
들이 무엇을 하든지 선택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더라도 유기된 자들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독자들이여 이것을 믿습니까 혹은 지옥에 있겠습니까. 저를 보십시오. A--- T---.
토플레디의 예정론적인 경향에 대해서 웨슬리가 반대한 이유는 토플레디의 견해가 지나치게 인간의 응답 가능성을
무시하여 결국에는 율법폐기주의적인 경향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정에 관한 가장 파괴적인 마지막 논쟁이 1770년대에 발생했다.
이 논쟁은 그의 설교자들과 함께한 웨슬리의 1770년 연회록과 관련하여 발생하였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1770년 연회의 “그것(신도회)이 침체되어 가는 곳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28번 물음에 대한 대답의 6번 항목인 “당신의 교리에 주의하라”였다.
그는 여기서 신도회의 쇠퇴의 원인을 과도한 칼빈주의적인 경향으로 보았다.
그러하기에 웨슬리는 성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의 응답적인 행위의 측면인 행함과 보상의 문제를 강조하였고 행위와 현재의 내적 기질이나 외적 기질에 따라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거나 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신실함과 행함에
힘쓸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일단의 칼빈주의자들은 웨슬리가 ‘행위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works)’의
교리를 퍼뜨리고 있다고 오해했다.
사실 이 논쟁의 중심은 헌팅턴 백작부인(the Countess of Huntingdon)과 존 플래처(John Fletcher) 목사였다.
헌팅턴 백작 부인은 1770년 연회에서 지적한 성화의 과정 속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행함에 대한 웨슬리의 교리적인
이해에 강한 반발을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며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웨슬리의 목사들을 자신의 교회에서 배제시켰으며, 그의 삼촌 월터 셜리(Walter Shirly)의 충고에 따라서, 기독자의 완전을 주장한 자신의
학교 선생인 벤슨(Joseph Benson)을 해고했다.
그러자 당시 그 학교의 학장이었던 플레쳐는 쟁점이 되었던 웨슬리의 1770년 연회록이 율법폐기주의를 향해 있기에
율법주의자의 위험한 오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변증적인 어조와 완곡한 표현으로 웨슬리의 교리적 견해를 지지하는 12페이지의 소논문을 쓰면서 학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와 칼빈주의적 경향의 사람들을 화해시키고자한 플레쳐의 노력으로 1771년 연회에서 웨슬리와
칼빈주의자들은 타협점을 찾게 된다. 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53명이 “1770년 8월 7일 런던에서 작성되었던
연회 회의록은 교리적 논점이 행함에 의한 의인화를 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현재 그 연회에 참석했던 웨슬리
목사와 다른 참석자들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고 행함에 의한 의인화의 교리를 혐오하고 있으며. ...
행함이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처음과 나중의 구원의 공로가 되지 않는다”라는 요지에 선언에 동의를 한다.
헌팅턴의 삼촌 월터 셜리가 이 결과에 만족하였기 때문에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과 일시적인 화해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리챠드 힐(Richard Hill)은 1771년 6월에 파리에서 마틴 메던(Martin Madan)과 발쉬(Father Walsh)신부를
만나서 1770년의 감리교 연회록을 보았을 때 웨슬리와 그 추종자들이 너무 펠라기안적이다라고 공격한다.
1772년에 펴낸『웨슬리 목사에 의해 가르쳐진 모든 교리들에 대한 개관』(A Review of all the Doctrines taught by the Rev. John Wesley)에서 힐은 웨슬리 목사와 플레처 목사가 전적으로 트렌트 공의회적인 관점 속에서 행위에 의한 두 번째
의인화를 주장하고 있으며 그의 완전에 대한 입장은 펠라기안과 아나벱티스트, 그리고 진젠돌프처럼 ‘죄없는 완전
(sinless perfection)’이라고 분류하며 공격하였다. 그리고 1773년 겨울 힐은 Logica Wesleiensits, or Farrago Double-
Distilled를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이전의 웨슬리에 대한 공격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힐의 공격에 웨슬리는 이전의 온건한 대응에서 급선회를 하게 된다.
힐의 공격에 웨슬리는 1772년 9월 9일에는『힐 씨의 ‘존 웨슬리에 의해 가르쳐진 모든 교리에 관한 개관’에 관한 언급들』
(Some Remarks on Mr. Hill's 'Review of All The Doctrines Taught by Mr. John Wesley)를 1773년 3월 14일에
『힐 씨의 'Farrago Double-Distilled'에 관한 언급들』(Some Remarks on Mr. Hill's 'Farrago Double-Distilled')을
출판한다. 웨슬리는 이 두 작품에서 완전에 대한 교리를 변호함으로서 기독자의 성결에 대한 그의 입장을 강화한다.
그는 조심스럽게 율법에 대한 의지적인 위반들로서의 죄와 의지적인 요소가 없는 하나님의 완전법에 대한 위반으로서의
‘연약성들’을 구별한다. 그는 장성한 신자는 전자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지적이면 죄가 되고 무의지적이면 죄가 되지 않는 분류하기 어려운 ‘놀람의 죄들(sins of surprise)’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완전을 다름 아닌 성 요한이 말한 완전 사랑 즉 우리 주 하나님을 온 마음과 지성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완전해 진 이들이 구원으로 견인됨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10년 전부터는 완전을 경험한 이들도 다시 타락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웨슬리는 같은 해 여름에 “예정에 관하여(On Predestination,1773)”라는 설교를 출판하였다.
1774년에 웨슬리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옹호로서『필연에 관한 고찰』(Thoughts Upon Necessity)을 출판하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대적자들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자인가?”라는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그가 보았을 때 잠재적인 율법폐기론적 경향이 있는 칼빈주의로부터 인간의 응답가능성을 보
호하기 위함에 있었다. 웨슬리는 모든 필연주의자의 관점이 하나님을 죄의 주인으로 만드는 논리적 귀결로 연결되어지며
또한 “그것은(필연의 교리)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 만들어 인간 행동의 모든 도덕성을 파괴하기”에 칼빈주의의 결정주의적인 관점을 반대했다. 그리고 그는 이 교리적 에세이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택의 힘을 주시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관점은 분명하게 그의 선재적인 은총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관점이다.
1776년 연회에서 웨슬리는 칼빈주의자들의 성도의 최종 견인의 교리를 하나님 사역의 지대한 방해물로 지적했다.
그리고 웨슬리는 설교가들에게 자신과 플레쳐(Fletcher), 샐론(Sellon)의 작품들을 읽고 보편적 구속(universal redemption)을 지속적으로 설교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그 연회록 마지막에 웨슬리는 참석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역병(칼빈주의적 예정론)을 중단시킬켜 달라고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기도하라는 권면하였다.
그러나 1777년에 출판된『하나님 주권에 관한 고찰』(Thoughts Upon God's Sovereignty)에서 웨슬리는 보다 온건한
어조로 칼빈주의와 화해를 시도한다. “한 훌륭한 사람에게, 저는 전체 문제가 단 한가지의 요점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조자로서 그 분은 단지 그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서 행동하십니다.
그러나 통치자로서 그는 단지 주권으로만이 아닌 의와 자비에 따라서 행동하십니다.”
영국 국교회와 39개조가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웨슬리는 예정의 교리를 ‘
핵심 교리(essence)’가 아닌 하나의 ‘의견(opinion)’의 범주에 위치시킴으로 칼빈주의자들과 화해를 시도하였지만
1770년대 이후 칼빈주의자들과의 보다 밀접한 협력의 모든 희망은 사라져갔다.
카피지는 이 사실을 감리교도들과 영국 국교회와의 보다 넓은 분열의 한 요소로 해석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감리교 신도회 내부의 사람들 중에는 이전의 가난으로부터 중산층으로의 경제적인 지위가 향상되어진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공동체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돈의 사용(The Use of Money,1760)”의 앞의 두 규칙은 잘 받아들였지만 세 번째 규칙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웨슬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부가 죄의 치명적인 입구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Nations,1776)의 증대해 가는 영향력에 힘을 얻었기에 그들은 더욱 자신들의 부를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려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웨슬리는 “부의 위험성(The Danger of Riches,1781)”, “부에 관하여
(On Riches,1788)”, “세상적인 어리석음에 관하여(On Worldly Folly,1790)”,“증대해 가는 부의 위험성
(The Danger of Increasing Riches,1790)”의 설교들 속에서 잘못된 목적의 잉여물 축적이 죄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나눔이 없는 잉여물의 축적은 웨슬리의 실천적인 시각에 있어서 죄의 항목에 들어가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구원에 대한 기독자의 소유와 희망에 심각하고 긴급한 위험이 된다.
따라서, 웨슬리는 기독교의 무능의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를 잘못된 목적으로 축적된 부로 보기도 한다.
기독교, 성서적인 기독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신을 손상시키고 파괴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왜입니까? 왜냐하면 참 기독교는 그 자신이 퍼지는 곳마다 근면과 검소의 원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자연적인 법칙에 따라, 부를 당연히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부는 자만심,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기독교를 파괴하는 모든 기질들을 잉태했습니다.”
1780년대 초의 설교들인 “보편적 구원(The General Deliverance, 1781)”, “타락한 인간에 관하여(On The Fall of Man,
1782)”,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God's Love to Fallen Man, 1782)”, “그의 작품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
(God's Approbation of His Works,1782)”에서 웨슬리는 악과 창조와 타락 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1784년은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에 기점이 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 해에 있었던 세 가지 사건은 웨슬리의 감리교 운동과 영국 국교회와의 관계에 큰 변화를 의미하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로 웨슬리는 1784년 2월 28일에 포고령(Deed of Declaration)을 선포하여 ‘100명의 법적 위원회
(Legal hundred)’를 세웠다. 이것으로 감리교 운동은 사실상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신도회들은 행정체계와 교리적 지침, 연합조직과 규율, 사역, 예전 양식을 모두 갖춘 단체로서의 독립된 교회가
되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된다.
두 번째 사건은 성직 안수였다.
웨슬리는 1784년 9월에 미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코크(Coke)에게는 연합 감리사(Joint Superintendents) 안수를 주어
프랜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와 함께 미국 감리교 운동을 주도하게 하였고, 왓코트(Whatcoat), 베지(Vasey)에게는 장로 안수를 주어 이들을 돕게 했다.
그러나 미국 감리교 운동은 1784년 볼티모어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연회에서 애즈베리가 감독(bishop)의 명칭을 취하면서 새로운 자율적인 교단인 감리교 감독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세운다.
세 번째 사건은 같은 해 웨슬리가 영국 국교회의 『공동 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을 개정해『다른 특별 예배에 따른, 북아메리카 감리교도들의 주일예배』(The Sunday Service of the Methodists in North America, with other
occasional service)를 출판하여 영국 국교회의 39개 조항을 25개조로 축소해서 미국 감리교 운동에 개인편지와 함께
코크의 손에 들려서 보낸 사건이었다. 베이커의 말대로 이 사건들은 모두 영국 국교회와의 분열의 전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 자신은 결코 영국 국교회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을 누차 밝히고 있다.
“저는 공개적으로 그날 저녁에 제가 40년 전보다도 지금 현재 더욱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선언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웨슬리는 “목사에게 순종함에 관하여(On Obedience to Pastors,1785)”, “교회에 관하여(Of the Church, 1785)”, “분파에 관하여(On Schism,1786)”, “예언자들과 제사장들(Prophets and Priests,1789)”의
설교들 속에서 영국 국교회와의 분리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다.
2. 후기 웨슬리의 죄 이해
죄의 법정적 의미와 치유적 의미의 긴장관계로 의미되는 칭의와 거듭남 후의 신자에게 남은 죄에 대한 문제가 웨슬리에게서 해소되는 전조가 보인다. 그 전조는 웨슬리가 보다 명확한 은총에 대한 이해 속에서 ‘믿음에 의한 구원’과 ‘거룩한 삶’을
조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성서적 구원의 길(The Scripture Way of Salvation,1765)”에서 기독자의
모든 삶 속에서 선재적 은총, 의인화의 은총, 동반의 은총, 성화의 은총을 강조한다.
참 종교의 목적은 구원이며 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현재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기독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적 양심(natural sin)’으로 불리는 선재적인 은총(preventing grace)에서
시작된다. 선재적 은총은 하늘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역사로 인간의 마음속에 형이상학적인 지향점을 가지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 즉 아담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준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사실상 원죄의 죄책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역을 잊어버리든지 부인하게 된다.
또한 웨슬리는 선재적인 은총 다음에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구원인 칭의와 성화를 위치시킴으로서 그의
구원론의 완성되어져가는 틀을 제시하고 있다.
칭의(또는 義認)라는 말은 용서와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 우리를 위하여 획득되는 값은(일반으로 말하는 우리의 칭의의 공로가 되는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義)
입니다. ... 칭의에 따르는 즉각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 곧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평강”,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베드로 전 1: 8)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입는 순간에, 그렇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성화(sanctification)가 시작됩니다.
그 찰나에 우리는 거듭납니다. 위로부터 납니다. 성령으로 납니다. 여기에는 실질적인 변화와 상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내적으로 갱신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이 사랑은 우리에게 세상과 향락, 안위, 명예, 돈에 대한 사랑을, 우리 속에 있는 자만, 분노, 고집이나 그 외의 여러
가지 악한 성질과 함께 내쫓으며, 한편으로 모든 인류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일으켜 줍니다.
즉 한 마디로 말씀드려 이는 우리의 땅에 속한 감정적이요 악마적인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 즉 단지 죄가 일시적으로 정지된 것이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은 다시 오고 죄는 살아납니다. 죄가 전에는 단지 기절하였던 것이지 죽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저들은 자기들 속에 두 가지 세력 곧 상반되는 두 세력이 있음을 느낍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에 거슬리는 육성(肉性)이 있어 하나님의 은총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힘을 느끼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저들의 영과 더불어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함을 느끼지만, 저들은 아직도 속에서 느껴지는 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이 자기 안에 있음을 부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이기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종종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도우시는 까닭(시편 118: 13 참조)입니다. ...
그러나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한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다시 죄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들 속에 죄가 없노라고 긍정하는 정도로 은혜를 체험하였다는
예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드디어 저들이 그런 죄에서는 완전히 자유함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속에서 올라오는 부패성은 새로이 일어나서 거의 불붙는 상태에 들어가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때부터 성화의 점진적인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의 행위와 악한 성질에서 나오는 행위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삽니다. 우리는 악의 모든 모양을 조심하여 피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총에서 은총으로 나아갑니다.
또 흠 없는 하나님의 규례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우리는 다시금 은총에서 은총으로 계속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도가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말한 대로 온전한 성화 즉 우리들의 모든 죄-자만, 고집, 분노,
불신앙 등-에서 완전한 자리로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입니까? 이 완전이란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마는 여기서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뜻합니다. 이는 죄를 내쫓는 사랑이며 또한 그 영혼의 모든 능력을 취하여
그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이 곧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랑입니다.
웨슬리는 선재적인 은총, 칭의, 거듭남, 성화, 완전으로 이어지는 구원의 과정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총에 대한 강조이다. 이러한 강조는 그의 목회적이며 신학적인 고민, 즉 모라비안적인
정숙주의와 칼빈주의와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의 율법폐기주의의 단점인 ‘믿음에 의한 구원’의 극단적인 강조로 인해서
‘거룩한 삶’의 왜곡된 측면을 바로 잡고자한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총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 가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에 대한 확신, 즉 자신의 죄악을 직시하게 한다.
이러한 확신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의 믿음을 가지게 되며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된다. 칭의의 순간에 자신이 과거에 범한 자범죄의 죄책이 사해진다.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믿음과 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이 아닌 간접적인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유일한 조건은 믿음이다. 여기서 칭의에 합당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요 확신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지자, 제사장, 또한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성화가 시작된다. 따라서 칭의와 마찬가지로 성화의 유일한 조건도 믿음이다.
어떤 사람도 믿음 없이는 성화될 수 없다. 성화 또한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지만 성화의 시작인 거듭남이 신자의 최종
목표는 아니다. 웨슬리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기독자의 최종적인 목표가 온전한 성화, 즉 완전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완전 또한 과정으로서의 완전이기에 현실에서 기독자는 항상 과정 속에 있게 된다.
중기 웨슬리가 고민했던 죄의 남음의 문제가 바로 이 부분과 관련이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할 일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자는 악의 모든 모양을 조심하여 피하며 기회 있는 대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착한 일에 열심을 내면서 은총에서 은총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걸으면서
성령과 함께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모든 향락을 부정하면서
다시금 은총에서 은총으로 계속하여 나아가야 한다. 즉 믿음의 열매로서의 ‘성결된 삶(holy living)’이 필요한 것이다.
성결의 삶이 가능해지는 것은 은총에 의해 심겨지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다. 은총에 의해 심겨진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신자들은 성령과 함께 걸으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순종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가(그리스도가) 의를 덧입힌 모든 사람들에게 의를 심어주시는 것(implant)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할뿐만이 아니라 성화하게 만드신 다는 것을 혹은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 모두를 의롭게 할뿐만 아니라 성화케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의로와 지고 의와 참 성결 안에서 피조되어진 하나님과의 유사성인
하나님의 형상이 갱신되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러한 기독자의 여정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자리잡고 있다. 웨슬리는 이 은총을 용서의 권능으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기쁨을 의도하고 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선한 기쁨을 의도하고 행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의미에서) 은총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지각할 수 있는 대상들이 지각되어지는 것처럼 (그 은총이 확신시키고, 새롭게하고, 정화시키며,
밖으로부터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그 은총을 마음으로 느낍니다.
이러한 은총 이해는 웨슬리가 끊임없이 죄와 속죄의 법정적인 의미와 치유적인 의미와 씨름을 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악의 기원과 악에 대한 선택의 결과로서의 인간의 현실과 관련 있다.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오용함으로 하나님을 떠난다.
인간은 불순종을 택하였다. 이러한 불순종은 인간 자신이 값을 수 없는 죄책을 인간에게 가지고 왔으며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영이 병들어 죽게되는 상황 속에 처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상태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갚아야 할 법적인 채무 관계 속에 처하게 되었고 그 자신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치료를 받아야할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자신만의 힘으로서는 이 모든 현실을
해결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은총을 내려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요 3:16)
여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치료책이 있습니다. 그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죄를 범한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는 아버지 앞에 우리의 본성의 타락(부패)을 위한 치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고’(살전 4:8) 우리를 지식과 그의 근원적인 모습
안에서 새롭게 하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필요한 우리의 명철과 밝히 볼 수 있는 눈을 모든 지식들과 함께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그의 도덕적인 모습들 즉 의로움과 진실한 성스러움 안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행해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됨’(롬 8:28)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행복한 경험을 통해서 모든 자연적인 죄악들이 본래의 모습에서 선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슬픔, 아픔, 고통은 우리의 정신적인 괴로움을 치료하기 위한 모든 약품들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유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유익이 되어 우리를 보다 충분한 그의 거룩함의
참예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에 남아 있는 동안에 ,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예비된 왕관에 많은 별들을
더해 갈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현실의 이해가 웨슬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 열매로서의 ‘거룩한 삶’의 조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은총에 의해서 신자가 성령과 함께 동행함으로 가능해진다.
성령과 동행하는 신자는 성화의 과정 가운데 은총에 의해서 자기 자신에게 남아있는 죄악성을 치유하고 죽이는 과정의
동참에 대한 가능성과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중기 웨슬리가 고민했던 신자의 남은 죄의 문제로 인한 죄의
해결에 있어서 속죄의 법정적인 의미와 치유적인 의미의 긴장관계가 해소된다. 결국에 칭의와 거듭남 후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한 지속적인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병을 알아야 치유가 가능한 것처럼 칭의와 거듭남 후에도 신자에게
남아있는 죄악성(자만, 자기 의지,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악한 부끄러움, 탐심등)을 깨달아야 치유가 가능해진다.
곧 의롭다 하심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도 어느 정도 육에 속한 마음이(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에게 “너희는 육에 속하였다”
하였듯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즉, 타락의 경향에 있는 마음, 아직 계속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려는 마음입니다. 또는 자만, 고집, 분노, 복수심, 세상사랑 또는 갖은 악을 사랑하는 그런 성벽인 것입니다.
환언하여, 순간이라도 굴레를 벗기면 곧 솟아오르려는 “쓴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부패성은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밝은 빛 없이는 알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자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런 모든 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신자들에게 속하는 회개입니다.
죄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면 이 죄가 또한 우리들의 모든 말과 행실에 나타나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남아있는 죄악성으로 인하여 칭의와 거듭남 이전의 가장 악한 죄를 부끄러워했던 것보다 더욱 자신의 최선의 의무를 부끄러워한다. 이러한 자기인식은 신자가 자신의 죄책과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복음적 회개로 인해 신자는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권능을 받음으로
마음이 정결해지고 우리의 손이 깨끗해진다. 또한 복음적인 회개 속에 있는 신자는 자신을 향한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위대한 의사이며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깨끗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은총으로 인해 우리 본성의 온전한 치유 과정이 가능해진다.
신자가 이런 복음적 회개 속에서 성령과 함께 걸으면서 다시 타락의 순간에 빠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두 번째 축복
(second blessing)’이 신자 안에 남아 있는 모든 악의 근원인 육의 본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축복’을 받은 신자에게는 더 이상 생래적인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행위를 억제하며 안과 밖의 죄를 대항하고 정복하여서 우리의 원수를 매일 매일
약화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마는, 우리가 그것들을 완전히 내어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받은 은총을 가지고는 우리들은 그것들을 근절시킬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그저 깨어서 열심히 기도한다 하여도 우리의 마음과 손을 전적으로 깨끗이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우리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다시 한번 곧 두 번째로 “깨끗해져라!”고 말씀하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 때에만 그 문둥병은 깨끗하여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만 그 악의 뿌리, 육의 본성이 멸절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야 이 생래의 죄는 생존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은 모든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단지 죄책만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죄의 힘과 죄의 뿌리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에게 구원의 과정, 기독자의 순례의 과정 속에서의 죄와 은총의 관계는 중요한 목회적, 신학적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다. 우선 그의 피의 속죄를 통해 죄책으로부터, 다음은 당신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죄의 힘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뿌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