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知性)으로 잘 고친, 말 안되는 성경말씀들
인간의 의도와 목적과 뜻이 감염되지 않도록 성서 본문은 반드시 지성에 의해 여과되어야 한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시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25:22)
위의 구절은 다윗이 나발에게 푸대접당하고 나서 분을 삭이지 못해 나발가(家)에 속한 남자들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식식대면서 옹골차게 벼르며 하는 말 중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본문에 의하면 위 구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다윗에게”라는 말 안에 꺽쇠가 걸려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이 꺾쇠는 우리말 번역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KJV 에 보면 “다윗에게”라는 "to David" 안에 꺾쇠가 걸려 있음이 분명히 나타난다. KJV의 본문에 따르면 우리말의 “다윗에게”라는 표현이 "to David"이 아니라 to [the enemies of] Daivd 라고 되어 있다. “다윗[의 원수들]에게”라는 뜻이다. NASB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다윗[의 원수들]에게”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NIV에는 “다윗에게”라는 표현을 좀 더 의역하여 “deal with David”로 되어 있어서 역시 보이지 않는 꺾쇠를 걸어 놓았음을 볼 수 있다. “의 원수들”이라는 표현이 빠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원전에 있는 말씀을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이 히브리어 원전을 번역하면서 히브리어 원전에 나와 있는 단어를 생략해 버렸기 때문에 생긴 차이이다. 우리말로 성서를 번역한 대한성서공회의 개역한글판 성서나 개역개정판 성서나 모두 “다윗[의 원수들]에게”에서 “[의 원수들]”을 생략하고 “다윗에게”로만 했다. 심지어 표준새번역은 말할 것도 없고 신구교가 공들여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조차도 히브리어 원전에는 분명히 들어 있는 이 “의 원수들”이라는 단어를 생략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 의도적으로 고쳐서 오히려 더욱 이상해진 구절
히브리어 원전에 따라 “의 원수들”이라는 단어가 있는 채로 본 구절을 읽으면 내용이 매끄럽지 못하고 몹시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의 원수들”이라는 단어를 넣고 본 구절을 읽으면 이렇게 된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은 다윗이 나발에게 푸대접당해 갖게 된 상한 감정과 격앙된 복수심을 갖고 나발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 중에 남자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며 흥분해서 식식대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 속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것은 다윗의 보복이 매우 잔인하고도 철저하게 이뤄지리라는 그림이다. 그러나 나발가에 그렇게 잔인하고도 혹독하게 철저히 보복이 가해짐에도 불구하고 어쩌다가 그만 남자가 한 명이라도 남게 될 경우에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무슨 일을 그 따위로 어설프게 처리했느냐고 문책할 것이라며 응징에 대한 결단의 강도를 대단히 강하게 곧추세우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표현에 의하면 나발에 대한 다윗의 보복성 응징은 결코 경고의 수준에서 끝날 수 없다는 것이 나타나며 동시에 그 응징은 철저하고도 잔인하게 이뤄질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전에 따라 “의 원수들”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본 구절을 읽게 되면 나발가에 남자가 한 명이라도 남게 될 경우 하나님은 다윗의 원수들에게 벌을 내리시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내용이나 문맥상에서 본 구절이 갖는 뜻이 매우 우습게 된다. 나발가에 응징을 가했는데 남자가 남게 되면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 감히 하나님의 원래의 말씀인 히브리어 원전에 손을 대다니...
이렇게 내용의 흐름이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앞뒤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며 정상적인 흐름이 되게 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전이 경전으로 굳어진 이후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원전에 수정을 가해 “의 원수들”을 생략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문맥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내용도 일관성있게 되기 때문이다. 감히 인간의 지성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킨 범상치 않은 일을 저지른 셈(?)이다.
그렇지만 번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히브리어 원전에 있는 “의 원수들”을 생략했음을 떳떳히 밝힌다. 그래서 우리말의 개역개정판 성서를 보면 “다윗에게”라는 단어 앞에 2)를 표시하고 해당 페이지 맨 아래에 2) 히, 다윗의 원수에게 라고 표시해 놓았다. 히브리어 원전에는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지성으로 본 구절을 읽을 때 영 앞뒤가 맞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말이 되지를 않아서 말이 되게 손 좀 보아 고쳤다는 지성의 양심선언(?)인 셈이다.
그러면, 왜 히브리어 원전에는 “의 원수들”이라는, 문맥상으로 보나 내용의 흐름으로 보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들어 가게 된 것일까?
• 적대적으로 의심말고 수용적으로 질문하라!
구약 히브리어 원전이 아직 정경으로 굳어지기 이전에 구약 본문을 상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다윗 왕가에 대한 존경과 경의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다윗 왕가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가 다윗에게 직접 떨어진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구약본문이 아직 정경으로 확정되기 이전, 구약 본문의 유용성과 필요성에 의해 원본이 사본으로 필사되던 당시에 유동상태의 본문이 서기관들의 손에서 다른 서기관들의 손으로 넘어가며 베껴지던 과정에서 있었던 약간의 무리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윗가에 대한 경의로움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의 대상을 다윗에게서 다윗의 원수에게로 전이시키려는 목적으로 오히려 원래는 없었던 “의 원수들”이라는 단어를 첨가했던 것을 후대의 지성들이 문맥의 흐름과 내용에 맞게 제대로 재수정한 것이다. 그 경우들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말 성서이다.
• 맹신이 되지 않기 위한 여과 필터-지성(知性)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없는 경외심을 갖는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 경외심으로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의미가 오도된다거나 납득하기 어렵게 된다거나 앞뒤의 흐름이 끊어지게 된다거나, 혹은 전혀 생소한 뜻으로 해석될 소지가 발생하게 된다면 그런 경우는 지성을 통해 반드시 점검받아야 한다. 그래야 맹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의 예가 욥기에도 나온다. 욥 1:11과 욥 2:5는 사탄이 하나님에게 욥을 시험해 보자고 제의하는 장면이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다고 칭찬받을 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면 그는 당장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중지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소유물을 치면 그는 주를 “욕할 것”이라고 했고 또 그 다음에는 그의 뼈와 살을 치면 주를 “욕할 것”이라고 하여 결국 두 번에 걸쳐 욥의 신실한 믿음을 점검해 보자는 제의가 하나님께 올려졌다. 그리고 욥 2:9에는 욥의 부인이 욥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고통당하는 욥을 위로하고 눈물로 격려하기는 커녕 모질게 냉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 원전에 따르면 욥의 부인이 욥보다 더 믿음이 좋을 수도...
그런데 히브리어 원전에 따르면 이 구절들은 한결같이 “찬양하라(바라크)”로 되어 있다! 욥의 부인의 말의 뜻은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을 필요도 없고 믿을 이유도 없으니 차라리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향해 화풀이성 저주나 실컷 퍼붓고 죽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의미와는 상관없이 본 구절을 원전에 따라 읽는다면 욥의 부인의 믿음이 욥보다 더 좋은 믿음으로 오해될 소지도 생긴다. 이런 고통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찬양하고 죽으라(?)”는 말이 되는 것이니 이 얼마나 좋은 믿음인가?
분명히 위의 구절들은 모두 히브리어 원전에 “찬양하다”로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을 비롯한 독일어 성경이나 우리말 성경은 전혀 다른 의미로 번역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하고, 또는 저주하고”의 의미를 “찬양하고”라는 말로 바꾸어 원전 그대로 읽으면 욥의 부인의 경우에는 대단히 좋은 믿음을 가진 여인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지만 다른 경우에서는 매우 우스꽝스런 내용의 구절이 되고 만다. 사탄이 하나님에게 제의하길, “하나님이 욥을 치면 그는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고 욥의 믿음을 보증하는 말처럼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히브리어 원전에는 “찬양하다”로 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을 비롯하여 독어성경마저도, 그리고 우리말 성서도 “욕하다, 저주하다, 거부의사를 표명하다, 눈 앞에서 달아나다”의 의미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기지 않게 되리라는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들로 바꾼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그러면 어떻게 감히 인간의 지성으로 히브리어 원전에 손을 대어 말씀을 가감하고 변경할 수 있단 말인가!
이유는 이렇다. 본 구절에서 “욕하다, 저주하다”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유대인들의 경건한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불경스럽기 그지 없는 당치도 않는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히브리어 성경이 정경으로 굳어지기 이전에 사본으로 베껴지던 때에 이런 불경스런 표현들이 억제되고 수정되고 가감되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후대의 사람들, 특히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런 표현을 대할 때에는 유대인들의 경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성경의 흐름에 오히려 왜곡이 생기고 내용상 의미 전달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다시 재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 신앙과 지성의 관계
그렇기 때문에 성경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양 숭배되듯 하면 안된다. 성경자체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문자로 나타내는 도구일 뿐이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본문에 나타나는 인간의 말, 심지어는 귀신의 말로 표현되는 구절을 통해서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의 계획과 뜻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므로 성경의 본문은 주의깊게 묵상되어 글자 자체가 맹신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도록 일찌기 사람에게 지성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수세기라는 시간을 통해 지금 현재의 정경으로 결정된 본문에 인간의 의도와 목적과 뜻이 감염되지 않도록 성서의 본문은 반드시 지성에 의해 여과되어야만 한다. 바로 그 작업이 성서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며 그 재해석의 결과가 설교와 성서교육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박 경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