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태동 역사 제 25회 -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영감을 받은 이들
25.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영감을 받은 이들
엘렌 화잇은 이스라엘의 어머니와 같이 진실한 어머니였다. 그녀가 그의 남편과 함께 주의 부름에 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의 아이들을 요리사와 집을 지키는 이에게 돌보도록 하여 떠남이 그녀에게는 끊임없는 관심의 요소가 되었다. 아이들은 종종 그러하듯이 재임스 에디슨과 그리고 작은 아이인 윌리에게 비행에 대한 끊임없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특히 재임스에게는 더 하였다.
에디슨의 나이 16세가 되기 방금 전에, 그의 어머니는 많은 탄식함으로 그에게 열렬한 편지를 기록하였다. 나의 주위의 모든 것들이 무기력 상태에 갇혀 있을 때에, 나는 그대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염려로 깨어 있으며, 조용히 기도함으로 유일하게 안위함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있을 때에는 그대는 우리의 바람을 승낙하나 그러나 그대는 우리가 없음에서 우리에게 불복종하고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의지와 계획들을 여러 번 따랐으며, 우리들로부터 모든 것들을 숨기고, 우리의 근면과 충고와 금지들에 직접 역행하여 우리가 그대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위안을 얻게 된 대신에, 그대는 고통스러운 염려의 대상이 되었다. 가시와 찔레가 나의 동산에서 돋아나서 내가 심고자 하였던 씨를 질식케 하였다. 더욱 나쁜 것으로는 윌리에게 그대의 영향에 관하여 우리 마음의 덮개를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그늘이 있다. 그대는 그를 불복종과 숨기는 것과 거짓말하는 습관으로 인도하고 있다.
“오, 에디슨아, 이런 것들이 나를 지치게 하고, 나로 나의 공중 봉사를 떠나게 하는 실망을 가져오는 것이 되고 있다.”1
엘렌 화잇은 부모들에게 부모로서 깊은 겸손함, 성실한 기회,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것을 성경의 야속에 굳게 손가락을 가져가 심도록 할 것이며, 음성으로 탄원을 하기 위하여 저들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도록 권면하였던바 그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았다.2
그녀는 그의 경험에 의하여 자신을 포함하여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학교의 학생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바울과 델버르토와 안과 매리와 그 밖의 다른 젊은이들에게 쓰고자 하는 것들을 알았으며, 주께서는 이들 젊은이들에게 저들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주며, 그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준비하며, 저들보다 더 타인을 섬기도록 호소할 때에, 그녀가 젊었들 때에 보았던 것으로 구원함에 대한 깊은 관심을 왜 소수의 젊은이들이 보이는가에 대하여 백 번이나 물을 수밖에 없었던 일이 발생되었다.
엘렌의 아이들에겔 가보자. 밤 늦게 하몬 부인과 함께 몰래 살금살금 침실의 문으로 가서 엘렌은 그녀의 쌍둥이 엘리자베스 놀며 듣고 있었다.
“오, 하나님, 마르다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방에서 속삭이는 음성이 들리며, “제발 내가 그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내게 알려줘요.”
“그대는 이미 여러 명의 나의 친구를 데려옴으로 나를 도왔다. 잠시 순 다음에 음성이 들려왔는바 레베카, 라헬 그리고 수잔나. 비올라오와 그녀의 남편, 안나와 그녀의 남편, 로이스, 패니 그리고 페티엔스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행복하다. 나는 그대에게 정말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예수께서 오고 있음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러나 마르다는 준비하여야만 한다! 부디 내가 그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알려주오.”
하몬 부인이 된 엘렌은 엘리자베스가 잠이 들기를 기다림을 알았으며, 그때에 그녀는 침대 커버로 살며시 가서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그녀가 온 밤을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탄원할 것을 열시 알고 있으며, 내일 밤에도 그녀의 나이가 위인 사라 언니와 함께 마르다의 가정에 갈 허락을 취하여 그녀는 밤을 지샌다 하더라도 마르다가 주님께 마음을 드리기까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력은 엘렌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말았다. 그러나 소녀는 마음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에는 그녀가 믿기에 모든 사람에게는 새로운 몸이 있는바 예수께서 오시면 준비된 모든 자에게는 가하다. 그리고 중재는 마르다를 위한 것이며 다른 이도 끊임없이 중재하였다. 하몬 부인은 피로가 그녀를 압도함을 듣고 있었으며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방과 침대에서 넘엊 무릎을 꿇고 잠이 들었다.3
우리의 마지막 장은 재림운동에서 여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재림교회의 여인 중에 가장 저명한 이에 대하여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엘렌 화잇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가장 많은 것을 기여하였다: 저자, 선지자, 상담자. 기금 조성자, 기관을 창설한 자이다. 그러나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그가 기본적으로 어떠한 유형의 사람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희망하였다. 젊은이로가 아니라 그녀의 생애의 모든 기간에 걸쳐서 그러하였다.
그녀가 결혼하지 몇 년 후에 그녀나 재임스는 한때 숲에서 길을 잃었다. 한 정착자의 가족이 저들에게 음식을 주었고 갈 곳은 지시하여 주었으며, 그녀는 저들에게 책을 놓고 그녀의 믿음을 나누었다, 오랜 후에 그녀는 그와 같은 사람을 야영집회에서 만나 모두를 제칠일안식일예주래미교회의 신자로 획하게 하였다. 또 다른 경우로는 철도 정거장에 5시간이나 지연되었으나 그녀는 한 부인과 연장된 시간에 영적 방문을 가져 성경 공부를 다른 이에게 가졌다. 그녀의 시계를 스위스에서 수리하던 중, 그녀는 가게의 젊은 점원을 그녀의 집을 방문하도록 초청하였다. 그가 왔을 때에, 그녀는 그의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직업을 포기하도록 결정케 하여 주님께 그의 마음을 드리게 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목회를 교회에만 국한하여 생각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그녀는 교회의 요구를 제안하여 그녀의 참된 선교를 채우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자신은 영혼 구원에만 제한하였다. “나는 오스트랄리아 이 지역에 온 것은 아니다 라고 그녀는 새로운 믿는 자들이 있는 그곳에서 나의 시간을 바쳐 좋은 정신으로 그대를 지켜 힘을 얻게 함”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이 어두움 가운데 있고 빛을 지니지 못한 이들에게 종교를 넘어서 가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4 1901년 대총회에서 그녀는 모인 지도자들에게 나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영혼 구원을 동경하고 있다고 말하였다.5 그러나 잠시 그녀의 젊음을 돌아가 보자,
한 달이 지난 후에, 그녀는 17세가 되어서 엘렌은 첫 번 계시를 받았다.6 그것은 성도들이 실망에서부터 생명나무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천사들과 함께 할렐루야를 찬양하였으며,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이전보다 더 하였다. 그녀는 하늘을 보았다! 그녀는 세상의 의상, 안락, 인기와 또는 재정적 고려와 하나님의 도성 안에서의 생명과는 비교할 수가 없음을 관찰하여 알았다.
그러나 영혼을 구원하는 선지자가 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십대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선지자로서 그녀는 더욱 더 성숙한 사업을 하도록 부름을 받게 될 것이었다. 선지자 요한과 같이 그녀는 하늘을 방문하는 기쁨을 가졌으며, 예수와 함께 대화도 가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사야와 같이 그녀는 나의 백성의 허물을 보도록 요구받았다. 예레미야와 같이 그녀는 때때로 그녀의 인기 없음에 대하여 울기도 할 것이었다. 바울과 같이 그녀는 많이 여행을 하여 위험과 불편을 종종 당하였다.
많은 이들에 의해여 사랑을 받으며 인정도 받았으나 그녀는 몇 사람에 의해서 그녀는 광신자, 간섭자, 사기꾼으로 조롱을 당하였다. 처음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람의 죄가 그에게 단순케 하도로록 위탁받았을 때에, 그녀는 때때로 책만을 부드럽게 하여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에 그녀 앞에서 엄숙한 진지함을 나타내보였다. 그녀는 주님의 용모에서 사랑하는 관심을 보았다. 그녀는 만일 사람들이 죄를 계속 지으면, 저들을 바르게 하는 데에 실패하였으므로 저들은 저들의 영혼을 읽게 될 것임을 보았다.7
* 설교를 하는 동안에 그녀가 당면하였던 위험 중에는 정신착란한 사람에 의한 네 가지의 육체적 공격이 있었다. 한 사람이 발코니에서 그녀 앞을 뛰어넘어 공격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녀를 해치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잠시 쉰 후에 설교를 재개하였으나 분명히 정상적인 상태로 조용하여졌다. 호레이스, J. 쇼 “엘렌 화잇의 설교 pp. 509,510.
그 기별은 적중하였다. 그녀는 백성들을 위하여 온 밤을 기도하였으며 저들을 위하여 온 밤을 탄원하였다. 저들의 죄가 저들의 구원에 기본적임을 말할 수 있다면 물론 그녀는 기도하는 일을 할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내키지 않음이 종종 특별히 그녀가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설득하여야 할지를 몰랐을 때에 나타났다. 존경 바든 자에게 그러나 쉽게 분노하는 목사들에게 그녀는 권면들을 때때로 반복하여 교정하였고, 그의 죽음의 침상에서도 그에게 전하였다.8
그러나 항상 그녀는 마지못해서 함을 극복하였으며, 하나님의 충실한 기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 희생이 만일 그것이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된다면 너무도 큰 것이 될 수가 없었다.
오늘날 엘렌 화잇은 그녀의 책으로 더욱 알려졌다. 그녀는 많은 책을 썼다. 그녀는 인쇄된 4만 페이지 이상의 글을 남겼으며 5만 장의 편지와 원고를 남겼다. 그녀는 도덕, 가정 생애. 신학에 대하여 썼다; 교육의 원칙에 대하여, 사업 경영, 건강, 역사의 번역, 성서의 해설, 그 밖의 많은 것들에 대하여서도 기록하였다. 시간을 내기 위하여 그녀는 종종 일찍 잠에 들었고, 집이 조용할 때인 5시. 3시 또는 아침 1시에도 일어났다.
책으로 잘 알려진 엘렌 하잇은 공중 설교자로서 더욱 알려지 필요가 있다.9 그녀의 젊었을 때에, 그녀는 자주 만성적인 목이 쉼에 의하여 지장을 받아 그녀가 믿음 안에서 회중에게 설교하기를 시작한 후에 몇 달 동안은 극적으로 자신을 떠나게 하였다. 이런 현상은 그녀의 생애를 통하여 종종 재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그녀를 고치셨으며, 그러나 그가 말하기 위하여 연단에 섰을 때에는 하나님이 가까이 함에 대한 증거가 분명히 있었다. 엘렌 화잇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남은 생애를 살면서 건강하게 사셨다. “주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습니다. 당신 자신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나는 당신이 홀로 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은사를 구한다.”고 기도하였다. 자주 그녀는 재임스에게 “만일 내가 전에 확신을 가질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선을 내가 하였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그는 답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말을 하기 위하여 설 때마다 축복을 줌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대의 느낌이 어떠하던지, 그대는 그대의 신뢰를 하나님께 두고 그대의 희망 없는 영혼을 그의 약속에 가져갈 것이다. 이것을 내가 시도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였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할 일의 분야를 하나님과 협력함으로 행동하여야 할 것을 배웠다. 그는 모든 의무를 위하여 힘을 주신다.10
그녀가 성숙한 때에, 화잇 자매는 괄목할 만한 분명하고도 능력 있는 음성으로 설교하였다. 마이크도 소개되지 오래 전에 그녀는 5천명의 군중에 의해서도 들을 수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1만 5천명과 2만 명에게서도 들을 수가 있었다.11 워싱톤 위생병원에서 한 환자는 숲 속 인근에 야영 텐트를 쳤던 집회 장소에서 설교하였을 때에, 2층 발코니 마루에 앉아 그녀의 음성을 들었었다.
그녀는 고함을 치지 않았다. 앞에서 듣는 자들은 그녀가 마치 저들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 하였으나 그녀의 능력을 기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과학적 도표를 지지함을 사용하였으며, 뚜렷한 자음 발음과 톤을 발성함에 세심한 주의를 가져갔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영적인 문제였다. 적당한 전달은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함에 있어서 그녀의 효능을 증가하였다. 깊은 호흡은 그녀의 폐를 강화시켰으며, 그녀의 봉사의 생애를 연장시켰다. 정확한 발성은 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데에 도울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도 공중 앞에서 만일 그가 공부하고 그녀가 했던 같은 규정을 준수한다면, 효과적으로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가르쳤다.12
그녀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후에 청중에 의하여 보여진 존경스러운 태도, 몰두하는 태도, 숨소리 없는 태도, 넋이 빠진 회중의 심원한 침묵과 그녀가 단상에 오를 때에, 회중들의 엄숙한 묵상에 대하여 비평하였다.
말하고 있는 동안에 그녀의 예의바름은 우아하고 진지하였으며,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즐거운 미소가 있었다. 유럽에서 영어를 말할 수 없어 통역관을 통하여 설교를 하고 나서 백성들은 감사의 눈물과 즉석에서의 애정을 지닌 채로 악수하고 있었다. 데트로이트 포스트의 한 기자는 미시간에서의 가졌던 대총회에서의 그녀의 설교는 놀라우면서도 스릴 있는 경험의 하나로 묘사하였다. 그녀의 유창함과 설득력 있는 능력은 청중에 의해서 잘 알려진 것이었으나 저들은 그녀가 보낸 능력 있고 반박할 수 없는 호소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녀는 참으로 항상 그녀가 죄인들에게 저들의 죄로부터 떠나라고 탄원할 때에는 거의 영감 받은 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자석과 같은 말씀의 효과와 태도는 거의 놀라왔다.13
그녀의 공중의 기도는 때때로 그녀의 설교보다도 더욱 효력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 80세가 되어서 가졌던 콜로라도에서는 그녀는 비가 철로 엮은 지붕 위에서 ‘엔빌 코로스“와 같은 소리를 내는 중에서도 복음전도 집회에서 분명히 들렸었다.14 마지막에서는 그녀는 모든 이에게 무릎을 꿇도록 하였다. 장로교인, 감리교인, 침례교인, 많은 교파의 인원들이 저들을 대신한 그녀의 탄원에 성실한 진지함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모두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한때 선원이었던 분운 그녀의 기도를 평하기를, ”그녀는 그곳에 하나님을 오른 편에 모셨고, 우리들에게 그의 축복에 대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였으며, 나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15
많은 경우에 그녀는 유모도 있었다. 그녀가 노년이 된 후에 성 헬레나 위생병원에서 작은 강당에서 말을 할 동안에는 그의 아들 W. C. 화잇이 강단 위에서 그의 옆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를 발견하고는 화잇 부인은 순간 멈추고 말을 하였다. 윌 리가 아이었을 때에, 나는 그를 단에 데려오곤 하여 강대상 옆에 바구니에 잠들게 하였다고 하였던바 그는 결코 그 습관을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평했다.
화잇 부인의 그녀의 아들에 대한 즐거운 경험은 가정적인 유모였으며, 이것은 우리들에게 그녀의 공중을 위한 수고 때문에 그녀의 생애는 가정을 지키는 자로서의 역할이 자주 등한시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저서인 자녀 지도법, 재림신도의 가정, 젊은이들에 보내는 기별은 그녀의 계시에서 나온 것으로 경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부모들에게 저들의 자녀들에게 고함치지 말고, 화를 내면서 때리지 말며(필요하다면 매도 때릴 수는 있었다), 몇 시간이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곁에 두라고 말하였다.16
그녀는 엄마로서 부엌에서 건강한 음식을 요리함이 목사가 강당에서 설교를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확실하게 하나님께봉사하는 것이라고 믿었으며17 그녀는 종종 여행과 설교하러 그렇게 많이 다니도록 요구받은 것 대신에 주를 섬기기 위하여 가정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셨다.
그녀의 첫 아이가 탄생하였을 때에, 그녀는 확실히 한 동안은 집에 머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녀와 재임스는 전도 여행 동안에 만났으며 그러나 저들은 그 이후로 항상 함께 여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흩어진 재림신자들에게 그 고난이 투쟁에 증거자가 되도록 필요로 한다고 말하였다. 슬프게도 그녀는 작은 헨리를 스턱브리지 호우랜드 씨에게 건너 주었으며 한나와 같이 일년 한 번 정도 그를 보기 위하여 선물을 가지고 돌아오곤 하였다. 그녀는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행하였던 것에 대하여 결코 불평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젊은 엄마로서 그녀는 사람들이 그녀가 가정에 머무르지 않고 기저귀도 갈지 않는다고 함으로 행복하였다고 말하고 있음을 들었다. 그녀는 불평을 하지 않기 위하여 그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18
저들이 함께 있는 동안에 재임스와 화잇은 거의 끊임없이 여행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명함 때문에 그녀가 놀라운 분과 결혼하였음이 종종 지나치게 된다.19
엘렌 화잇이 그녀의 남편에게 영감 받은 것으로 신문을 제작하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출판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공급받게 된 이는 화잇 장로로, 그가 재료를 모으고 그 진영을 조직한 것의 모든 일들을 다하였다. 그의 첫 번 신문은 리뷰 헤랄드 출판소로 자라났으며, 오늘날은 일년에 2천만 불로 팽창하여졌다. 재임스 화잇은 태평양출판소를 창설하였던바 오늘날 그 회사는 굉장히 크다. 그는 열성적으로 받들고 웨스턴 건강 개혁 기구를 지도하여 위대한 베틀 크릭을 자라게 하여 베틀 크릭 대학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초대 원장이 되기도 하였다.20
재임스 화잇은 강력한 저술가였으며, 효과적인 연설자였으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였다. 그는 역시 유능한 관리자이기도 하다. 1869년 한 해에 그가 너무도 아파서 리뷰 회사를 관리할 수 없었들 때에, 출판소는 3,000불의 적자를 내었다. 그가 다시 시도한 첫 해에는 7천불의 흑자를 내었다.21 때때로 그 사업이 완성되어 가는 것에서 지나친 과로와 열성이 그를 자극시키게 하였다. 병이 회개함을 갖게 하였다. 하나의 증언이 그의 깊은 통회함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다음의 말로 시작된다. “나는 1865년 1월 21일에 계시 중에 주의 종인 나의 남편 재임스 화잇의 경우에 대한 계시를 보았노라.”22
주의 종 재임스 화잇은 1846년 8월 30일에 엘렌의 남편이 되었다. 그는 그녀를 마이네 포트란드에서 목사가 그녀를 좋은 밀러주의자들의 활동하던 기간에 저들의 회중에게 증거하도록 요청하였을 때인 몇 해 전에 그녀를 보았었다. 그녀는 저들이 주께서 그녀에게 여행하도록 말하고 계시를 말하도록 한 연후에 마이네 오링톤에서 만날 때까지는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저들은 실망한 재림신자들을 방문하면서 많은 경험들을 나누었으며, 그러나 저들은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고 추정하였기에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복음전도자인 화잇은 결정을 위한 개인적인 부름을 갖고 다소 압력 같은 것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결혼아였다고 화잇 부인이 여러 해 후에 “나는 그가 여지껏 신발 끈을 함께 신었던 가장 좋은 자라고 느낀다고 애정어린 말을 발하였다.”23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잘 생각하고 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라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그를 증언할 수 있음을 1863년 B. F. 스눅 씨가 기록하였다. 그는 저들의 임금보다도 자신을 위하여 일을 한 사람에게 지불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실은 그는 자주 이자 없이 리뷰 회사에 빌린 돈을 이자를 가지고 가서 갚았다. 한 번은 어떤 가난한 목사로부터 이자 없이 돈을 빌렸으나 그는 10%의 이윤을 지불하였었다. 자주 그는 기증하는 사람이 어려운 중에 있음을 보면 기증을 거절하였다.24
그렇게도 관대한 자가 되기 위하여 또한 첫째 음식을 만들고,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에게는 저들의 봉사가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돈을 벌어 지불하기 위하여 엘렌은 글을 쓰며, 상담하며. 여행하며, 여분의 지친 시간으로 문방구용품과 책들과 다른 것들을 팔았다: 그러나 그의 박애 사상은 결코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화잇과 화잇 부인은 함께 마지막 산보를 하던 날에, 저들이 집이 없이 청소하는 흑인 여자의 경우에 대하여 서로 상의하였다. “부인, 화잇 장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이 가난한 부인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바쁜 일상 중에서 살기 위하여 그렇게도 열심히 일하는 영혼을 잊지 맙시다. 만일, 나의 운영자금에 돈이 있다면 나는 알맞는 집을 짓게 할 것입니다 ... 그래서 이 가난한 사람에게 집이 있게 하고 싶은 것이랍니다. 우리는 저들이 보다 더 안락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임을 볼 것입니다.25
재임스와 엘렌은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헨리는 그가 다섯 살 때에 가정으로 돌아왔으며, 아주 잘 훈련받아 기도하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호루랜드 씨는 저들을 잘 수용하였다.26 아이들은 의료적 무식이 있던 당시에 보통의 아이들에게는 흔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었다, 저들의 어머니는 가정 치료법과 순수란 물과 신선한 공기의 가치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녀는 그리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처하여 있는 아동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무엇임을 배웠으며, 같은 믿음으로 동반자가 됨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무엇인지도 배웠다. 여러 번 저들의 자녀는 기도의 응답 속에서 나음을 얻었다. 그럼에더 불구하고 저들 중에 두 명은 죽었다 -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죤 하버트는 네 번째 태어났으며, 그가 삼 개월 되었을 때에 죽었다. 헨리는 16세까지 살았다. 그는 상냥한 아이로 멋있는 노래하는 음성을 지닌 상냥한 소년이었으므로 저들은 그를 무척이나 그리워하였다.
윌리는 처음부터 바른 마음을 지닌 소년으로 보였다. 화잇 장로가 1881년 마랄리이와 과로로 죽을 때에, 그녀의 끊임없는 동반자인 윌리를 찾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계시로 하나님이 지혜와 건전한 마음을 지님으로 이 사업을 위하여 그를 준비하신 것을 보여주셨다.27 그의 아버지와 같이 그는 성공적인 행정가가 될 것이었다.
현대 진리가 생겨났던 시기에 태어난 아이는 에디슨으로 그의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고통을 받던 때였다. 그의 모친은 그에게 그가 열여섯 번째 생애를 맞기 전에 쓴 편지는 그렇게 그가 많이 변화되지 않은 듯이 보였다. 1870년에 베틀 크릭에 있는 믿는 이들의 양심이 작용할 때에 저들이 하여야만 할 것으로서의 화잇 장로와 그의 부인을 따른 데에 실패한 것을 공중 앞에서 사과할 때에, 에디슨도 자신이 잘못을 고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여야만 하였던 슬픈 일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그의 마음으로 바르게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에디슨으로 마음을 작정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인쇄를 시도하였으며, 그의 아버지가 하였던 것과 같이 자신의 출판소를 견고하게 세웠으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개인사업으로 유용하기 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그의 사촌 프랑크 벨덴과 함께 몇 개의 찬송집을 펴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실용화되던 때에 상업적 사진사로 변신하여 시도하였다. 그리고 한 동안 그는 강에서 증기보트에서 일하였다. 비록 재림신자이긴 하였으나 그는 자신을 전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어려움을 발견하였다.
그런 후에 즉시 어머니가 오스트랄리아로 떠난 후에 에디슨은 자신과 주님 사이에 새로운 길을 발견하였다.28
그는 화이 부인께서 미국 남주의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라고 쓴 증언을 소홀히 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이들 중언은 흑인들은 저들이 성경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읽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들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에디슨의 여러 가지 사업의 면에서 얻었던 경험들이 위대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는 수상 증기선을 고안하였으며, 인쇄하는 신문을 장착하였으며, 사진 현상을 갖고, 인쇄소와 자신을 위한 생활하는 숙소를 그의 조력자들과 함께 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미시시피를 따라 내려갔다. 그가 이러한 시도에 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그의 Gospel Primer의 매각을 추진하였으며, 그것은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재로 베틀 크릭에서 인쇄되었다. 그는 문학적인 청중에 대한 시선을 붙잡기 위하여 돕는 슬라이들을 준비하였으며, 선상에서는 자신의 작은 출판기로 소책자를 준비하였다. 바로 그는 흑인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쳤고 성경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쳤다. 오년 동안에 그는 50개의 교회들로 시작을 하였다.
그의 성공은 불행하게도 널리 찬양되지 않았다. 화가 난 백인 한 사람이 에디슨의 조력자가 죽음에 처하여 있는 상태에서 그는 친절하게도 총을 가지고 와서 그를 보호한 것이다. 1900년까지는 민족주의가 난무하여 여러 곳에서 백인들이 더 이상 흑인을 위하여 안전하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많은 사람들이 에디슨 화잇을 통하여 저들 자신의 종족에게 세 천사의 기별을 가져가 흑인 제칠일안식일교회를 갖도록 하였다.
에디슨의 배의 선실의 출판소는 닭장으로 바뀌어졌으며, 후에 남부 출판 협회로 발전되었으며, 미국에서 화잇 가족에 의항 설립된 세 번째 출판소가 되었다. 그의 Gpospel Primer는 백만 부가 팔리었다. 그것은 미국에서의 흑인 미국인들을 개발시키는 데에 재림교회가 공헌한 유일한 최초의 책을 전하여진다.
우리가 보아온 대로 화잇 부인은 그녀의 남편과 함께 북동부 주위를 여행하면서 보냈다. 1853년에 저들은 미시간 서쪽까지 방문하였으며, 1855년에는 베틀 크릭으로 이주하였다. 저들의 여행은 중부 서쪽으로 나아갔으며. 그리고 서부 끝까지도 갔다. 1872년에 저들을 처음으로 갤린포니아에 처 여행을 하였던바 그곳에서 1874년과 1875년에 저들은 시조와 남태평양 출판소를 시작하였다.
재임스 화잇은 1881년에 타계하였다. 4년 후에는 엘레 화잇은 유럽으로 2년간 선교사로 항해하였던 바 1885년 8월에서 1889년 8월까지의 기간으로 그의 아들 W. C. 화잇과 함께 하였다. 1891년에 그녀는 오스트랄리아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9년간 개척선교사로 봉사하였다. 그녀가 1899년에 돌아왔을 때에 그녀는 세인트 헬렌 위생 병원 가까이 정착하였으며, 그곳에 엠즈 헤븐의 고향집을 구입하였다. 그곳은 그녀의 비서들과 권면을 구하러 오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가 넉넉한 큰 저택이었다.
그녀의 최후의 70대와 80대에 그녀는 패라다이스 밸리 위생병원, 로마 린다에 있는 의료 복음 대학(지름은 로마 린다에 간호락과 의과대학이 있는 곳임)과 태평양 삼육대학은 창안하는 데에 일조하였던바 그곳은 그의 집으로부터 언덕까지 수마일 안에 있다.
엠즈헤븐에서 그녀는 대쟁투 시리즈를 완성하였으며 수많은 기사들과 편지들로 일곱 번의 책을 옆에서 준비하고 계셨다. 1909년에 그녀는 기차로 대총회 연석회의에 마지막으로 참석하여 대표자들에게 그녀는 분명한 음서으로 설교하기 위하여 여행했다. 같은 기차로 그녀는 어린 시절의 고향이며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께서 오신다고 기다리던 곳으로 몇 주 후에 첫 계시를 받았던 곳인 마이네 포트랜드로 되돌아 왔다.
나이가 든 노인으로 그녀는 책과 서신에 열심하였다. 그러나 한가한 시간에는 그녀는 저들이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는 동안에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를 좋아하였으며, 그녀의 이웃들에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방문하였다. 나파 벨리에 있는 가족들은 그 작은 나이 드신 흰 머리를 가진 부인이 항상 예수의 사랑스러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오래 동안 기억하였다.29 그녀는 아직도 영혼을 찾고 계셨다. 그녀는 믿음 안에서 승리한 채로 1915년 6월 16일에 해가 비치는 금요일 오후에 운명하였다. 그녀가 그의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나는 내가 믿는 이를 안다”이었다.30 그녀는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신자들이 137,000명의 얼마 되지 않은 수에서부터 발전될 것을 보셨다. 뉴욕 독립신문은 “그녀는 가장 가치 있는 선지자의 생애를 사셨고 사역을 감당하였다.”고 경하하였다.
그녀의 마지막 나타남은 태평양 삼육대학에서의 예배시간이었다. 약하고 연약한 몸으로 강단에 오르기 위하여 두 명의 목사에 의하여 육체적으로 부축을 받고 있었다. 그녀의 기별은 재림청년들에 일어나 영혼 구원의 사업을 완성하자는 것이며 그리하여 예수께서 다시 곧 오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