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 30 행하시는 표적 - 요 6: 35 내게 오는 자
5. 생명의 떡 ( 6: 30-40 )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 30 행하시는 표적 -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
일찌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곧, 신학적 문제에 접촉하였고, 이제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문제 곧, 구원론에 접촉하여 각각 불신앙을 나타냈다(Godet).
1]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시는 "표적"을 행하셨으나, 그들은 그것을 통하여 표적다운 내용을 보지 못하였다.
고데이(Godet)는 말하기를,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할 때에 그의 거절하신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낙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메시야 아닌 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시 표적을 찾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격이 이 세상의 정치적 임금이 아닌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 이상의 무리에게 먹이신 표적(메시야 표적)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으니, 유감스럽다(26절).
2]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벳새다 들판에서 기적의 떡을 먹고 그 다음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모여온 무리에게 예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 즉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일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시자(요 6: 27-29), 그들은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 31 광야의 만나 -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주님의 가르치심을 이해하지 못한 무리들은 모세의 광야생활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었음을 변명한다.
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셨다. 함과 같이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인용한 것을 보니, 그들은 지도자들이었든지, 혹은 서기관인 듯하다(Belser).
그들은 메시야가 온다면 또다시 만나를 내려 먹게 해 줄 것으로 잘못 알았다(Midrash Koheleth, P.73).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간접적으로 청원한 것이다.
2]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 출 16: 15 –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 시 78: 24 – 그들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그들의 질문에는 여전히 떡 기적 같은 물질적 기적을 구하는 기적주의적 생각이 있어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리가 그를 믿을 만한 어떤 표적이 있는가?”
물론, 성경에는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들을 사람들에게 주셨고 그것들을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그를 확신할 수 있다.
요 6: 32 하늘로부터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
떡은 육신의 생명을 위해 필요하지만, 사람은 날마다 떡을 먹어도 결국 죽고 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않은 떡,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생명의 떡을 증언하고 입증함에도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유대인 무리에게 주님은 다시 진심어린 심정으로 가르쳐 주셨다.
2]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3]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다.
요 6: 33 하나님의 떡 -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광야의 만나만을 고집하는 유대인 무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참 덕에 대하여 강론하셨다.
1]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1) 하나님의
여기 "하나님의"(*)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한다(Goebel).
그렇다면, 이 어귀가 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고조한다.
(2) 하늘에서 내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교훈에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
그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
①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만큼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②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③ 만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다(Calvin).
④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은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내려온다.
2]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만나는 생명을 유지하도록 돕는 양식이라면 참 떡은 생명 자체임을 증언하셨다.
요 6: 34 항상 주소서 -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그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에 대해 말씀하시자, 무리들은 그 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물질적 떡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영혼의 구원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었다.
1] 그들이 이르되, 주여.
무리들은 비로서 랍비라는 호칭에서 주라는 호칭으로 변화를 시도하였다.
2]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이것은, 또 다시 유대인들의 불신앙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 떡"이 육신의 양식인 듯이 오해하고 욕심을 부린다.
여기서 그들은 그것을 "항상" 주시기를 청원한다.
오늘날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은 예수로 하여금 떡을 가져다 주고 왕이 되 달라고 요구한다. 해방신학이나 정치신학의 이름으로 예수보고 우리들에게 제2의 출애굽을 하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되라. 우리의 왕이 되어 우리에게 해방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라고 주장한다.
전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 왕으로 만들어서 그로하여금 제2의 출애굽을 이루는 분으로 한다. 해방신학은 해방을 출애굽에 두고 있다.
요 6: 35 내게 오는 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는가? 그것은 그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인간의 죽음은 죄 때문에 온 것이다. 죄가 없는 천국에서는 죽음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완전한 의(義)를 이루셨다.
* 롬 10: 4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이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 의를 입혀주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이 죽지 않고 살며 죽어도 다시 살게 하셨다.
* 롬 3: 24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마르면 결국 죽지만, 예수께 나와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떡이시다.
2]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1) 믿는 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이론만 알고 그를 내게 섭취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애석한 일이다.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하여야 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 주림을 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생활을 먹고 마시는 행동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
* 사 55: 1 –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계 3: 20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두었다. 목사인 그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하였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셨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다. 그는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했다. 그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그는 즐거운 식탁 교제, 즉 주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기는 자들은 심판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다.
20-1) 문밖에서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1) '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테카'(*)는 현재 완료 시상으로 이미 오셔서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
(2) '두드리노니'의 헬라어 '크루오'(*)는 현재 시상으로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죄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을 알리시는 모습으로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초청과 약속의 말씀이다(Mounce, Trench).
(3) '문'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세상이다(Swete, Beckwith).
* 마 24: 33 -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 약 5: 9 -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의미한다(Mounce, Johnson).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앞 절에서 현재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이다. 본문의 '문'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마음을 지칭한다(Ladd).
(4)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 회개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성도들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간절하심이 가슴 속 깊이 느껴져야 한다.
* 아 5: 2-4 -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 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 눅 12: 36-37 -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 요 10: 7 -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벧전 3: 20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0-2) 누구든지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1) 누구든지 -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 하나님의 말씀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회개 촉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의 결과를 나타낸다.
* 신 26: 7 -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 창 27: 22 -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 욥 37: 2 -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2) 문을 열면 : 주님을 영접하면
문을 열라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유명한 홀만 혼트의 예수님이 문밖에 서 계시는 그림을 다 보셨을 것이다. 그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문 바깥쪽에는 문고리가 없고, 안에만 문고리가 있다. 그러므로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요즘은 이웃 사람끼리도 마음의 문을 안 연다. 목사끼리도, 장로끼리도, 성도끼리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으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 밖에, 교회 밖에 계신다. 교회들이 타락하고, 혼합주의, 종교 다원주의가 성행하므로 예수님이 그 속에 계실 수 없다.
20-3) 더불어 먹고 :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1) 주님 -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 주님께서 직접 찾아가신다.
(2)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① '먹고'라는 헬라어는 저녁식사를 의미하는 데이프논[deipnon]에서 유래하였다.
단어의 시제로 볼 때 저녁은 종말을 상징한다.
② 식사의 방법으로 입증된다.
③ 본문의 문맥적 구분으로 입증된다.
* 눅 22: 29-30 -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 더불어 먹으리라
천국에서 누리게 될 가장 친밀한 교제의 약속으로 '먹고 마신다'는 말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① 아침은 '아크라티스마(?κρατ?σμα)'인데, 마른 빵 조각을 포도주에 찍어 먹는 것을 말한다.
② 점심은 '아리스톤(?ριστον)'으로 도로가나 가로수, 광장에서 먹는 도시락을 말한다.
③ 저녁은 '데이프논(δε?πνο)'인데, 오래 앉아서 이야기하며 먹는 친교의 식사를 말한다.
여기서 먹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마 24: 45에 보면 '때를 따른 양식'이다.
여기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저녁은 특징적으로 종말을 의미한다. 아침은 구약 시대를, 점심은 신약 시대를 예표 한다면 저녁은 종말 시대, 재림의 때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때 작은 책, 계시록이 열릴 것이며, 주님의 재림의 복음이 너희 안에 들어가서 이 말씀의 교제가 있겠다. 너와 내가 말씀으로 교제하고, 말씀으로 하나 되는 것을 얘기한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는 문을 열어야 하고, 열심히 믿어야 한다. 마지막 때는 계시록이 확 열릴 것(역사 속에 현실로 드러날 것)이다.
마지막 때에 일곱 영, 성령의 농사가 여물 때 늦은 비가 쏟아지듯이,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여 작은 책 요한계시록이 폭발적으로 죽은 영혼들을 살려내고 주님이 오신다. 따라서 지금은 열매 맺을 때다.
* 아 5: 1 -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 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 암 9: 14 -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을 먹으리라.
* 눅 17: 8 -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 약 5: 3 -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1) 여러 견해.
①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 교제를 의미한다.
지금도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영적인 교제를 말한다.
렌스키[Richard C. H. Lenski] : 이 잔치는 천국에서 열려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인 사상이 내포되지 않았다. [성경주석 계시록, p. 138]
존슨[A. F. Johnson] : 이것은 동양의 풍습으로 가장 가까운 친구와 격의 없는 친교를 나누는 중요한 기회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 위하여 오시는 일을 성령을 통하여 하신다.[요 14:23]. [엑스포지터스 요한계시록, p. 385]
② 현세에서 시작하여 재림으로 완성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미한다.
성도들이 회개로 주님을 영접하고 나누는 교제다. 현재로 시작하여 내세에서 온전히 누릴 때까지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본다.
핸드릭슨[W. Hendriksen] : 그리스도와 성도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특별한 우정과 언약의 관계를 의미한다. 즉, 성도는 구주시요 주인이신 분과 더불어 복된 교제를 갖는다.[요 14: 23. 15: 5. 요일 2: 24] 이 교제는 금세에서 시작하여 이기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으며 동시에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보좌에 앉을 때인 내세에 완전하게 된다.[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93]
③ 종말론적인 의미의 식사를 의미한다.
본문은 미래적인 메시아 왕국 안에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누리게 될 교제의 향연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한다.
로버트슨[A. T. Robertson] : 메시아왕국 안에서의 교제를 말한다.[눅 22: 30. 막 14: 25. 마 26: 29]. 고린도전서 6: 13에서처럼 비유적인 의미가 분명하다. [신약원어 연구해설 요한계시록, p. 205]
백위드[Beckwith] : 상징은 완전히 종말론적이다. 성만찬의 의미는 전혀 없다. [마운스,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152]
(2) 저자의 견해.
영적 교제를 포함하여계 10: 10에서 작은 책을 먹어버림으로 약속이 성취되는 미래의 것으로 해석한다.
① 원어적으로 입증된다.
'먹고'의 헬라어 '데이프네소'(*)는 교제를 나누며 즐기는 식사를 가리킨다(Morris, Ladd, Johnson, Mounce).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경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안에 거하셔서 그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시며 친밀한 관계를 이루신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현재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과 성령을 통해 교제하신다.
* 요 14: 23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② 식사의 방법으로 입증된다.
③ 본문의 문맥적 구분으로 입증된다.
* 계 22: 17 -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와 그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처음에 언급된 ‘오라’는 말은, 많은 주석가들이 이해하는 대로, 앞뒤의 문맥으로 볼 때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7, 12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된다.
즉 성령과 신부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화답한 것이다. 또한 주의 재림의 약속이나 그에 대한 화답의 말을 듣는 자들도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오소서”라고 화답의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자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요한복음 6: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1) 성령과 신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된 성도를 의미한다.
* 계 19: 7 -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성령과 신부'는 한 목소리로 초청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시며
* 계 19: 10 -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신부'는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를 가리킨다.
성령은 교회에게 예수에 대해 증언할 수 있도록 영감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설교나 전도의 과정 속에서 죄와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해 사람들의 양심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며 증언하신다.
* 요 16: 8-11 –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그러기에 성령과 교회의 증거는 한 가지이며, 둘이 연합하여 오직 예수에 대해 세상에 선포하며 증거하게 된다. (Beasley-Murray).
성령과 교회가 연합하여 행하는 초청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까지 지속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 요 14: 16-17 –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요 16: 13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다른 보혜사(保惠師)이니
* 요 14: 26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 요 16: 8-11 –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신부가 가지고 있는 진리가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신부는 하나요. 그들의 증거는 한 가지이며 그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啓示)하여 주시는 것을 말한다.
2) 오라. 하시는 도다.
은혜의 초청이다.
(1) 본문에서는 네 번의 초청이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앞의 두 가지 초청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뒤의 두 가지 초청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에의 초청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본문의 초청 전체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한다. (Johnson, Mounce).
그러나 이 주장은 문맥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본문에 나타난 네 번의 초청 중에서 뒤에 나타난 두 가지 초청에 비추어 전반부의 두 가지 초청을 해석하여 네 가지 초청 전체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에로의 초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Ladd, Morris, Beasley-Murray).
여기서 본문에 나타난 세 번의 '오라'는 현재 시제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더 이상 회개할 수 없을 때가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초청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지속적인 초청의 말씀을 듣고 갈급하여 생명수를 마시기를 원하는 자들은 무료로 생명수를 공급받아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
* 계 21: 6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 계 22: 1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 사 55: 1 –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 요 4: 14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요 7: 37-38 –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2) 성령과 신부가 오라 하신다. (계 22: 17)
① 성령으로 말하는 자가 돼라.
② 신부다운 행실을 가지는 자가 돼라.
③ 귀가 있어 성령이 하신 말씀을 바로 듣는 자.
(3) 초청받은 자
① 듣는 자:
② 목마른 자:
③ 원하는 자:
3) 값없이 생명수를 받아라.
이상과 같은 자들이 값없이 생명수를 받게 된다.
(2) 목마르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도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따라서 그와 일체(一體)가 되도록 밀접히 연합하게 된다.
그가 자기를 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 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란 말과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 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한 영적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 함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킨다(Grosheide,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