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경부고속도로 준공 54주년이다. 국토교통부가 경부고속도로 개통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기념비에 건설을 주도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름은 빠져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2020년 7월8일자 조선일보가 보도한 바 있다.
경북 김천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에 2020년 6월 30일 '(경부고속도로) 준공 5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 2개 중 왼쪽 것엔 김현미 국토부 장관 명의로 "본 고속도로는 5000년 우리 역사에 유례없는 대토목공사이며, 조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고 국가발전과 국민생활의 질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긍정적인 국민정신 고취에 크게 기여했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고 오른쪽 기념비엔 고속도로 발주처였던 건설부 관계자와 시공 업체 직원 등 531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단하였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도로공사는 "요즘 개통된 고속도로는 건설 공사 참여자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가 있는데, 경부고속도로는 이런 기념비가 없었다"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주역들이 모인 '7·7회'에서 이런 기념비를 세워달라고 요청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도로공사는 "기념비 바로 옆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문장이 새겨진 준공기념탑이 있는 점도 고려했다"고 했지만 조선일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단을 내린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인데, 이름조차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도로공사의 해명대로 1970년 7월 7일 세워진 준공기념탑엔 "서울 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라는 문구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 명의로 새겨져 있다. 새로 세워진 기념비 2개는 그 바로 옆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1970년을 상징하는 '1970' 숫자 조형물과 함께 서 있다. 기념비엔 "건설 당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땀과 열정을 쏟아 헌신한 건설역군들을 비롯한 설계 및 건설업체명을 새겨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는 취지가 적혀 있다. 주원, 이한림 등 공사 당시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이들 이름도 올라있다. 박 전 대통령 이름이 없는 것에 대해 국토교통부는 "당시 공사에 직접 참여했던 분들의 노고를 기린다는 취지"라고 했다. 하지만 박경부(80) 7·7회 회장은 조선일보와 한 통화에서 "우리가 건설 과정에 참여한 기념비를 세워달라고 요청한 것은 맞는다"면서도 "경부고속도로의 주역인 박 전 대통령 이름을 넣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도로 관리 주무 부처가 국토교통부라고 해 (김현미) 장관 이름이 들어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정희 父女 지우기가 문재인 정권의 핵심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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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장원재 씨의 글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고속도로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당시는 철도가 대한민국의 거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다. 하지만 철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미 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1962년터 추진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결과 급격한 생산량 증가, 기자재량의 폭주, 생활반경의 확대 등으로 수송량과 여객량이 폭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 물자의 수송의 상시적 차질은, 물자별 열차 및 화차를 배분하는 일이 경제장관 회의의 제1안건이 되는 지경까지 사태를 몰고 갔다. 매년 화물 10.2%, 여객 11.5%의 증가가 예상되었기에 교통수송 체계의 구조적 개혁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IBRD(세계은행) 교통조사단은 대한민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를 아예 무시했다. 한국의 국력과 장비, 기술 및 제반 여건으로 보아 고속도로의 건설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것이 그들의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당시 일본이 건설중이던 도메이(東名) 고속도로(도쿄-나고야)의 건설비를 기준하면, 경부고속도로의 예상 건설비는 3,500억원이었다. 1967년 국가예산이 1,643억원이었으니, 우리 국민이 2년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어도 겨우 완공을 할까 말까 하다는 계산이었다. 박대통령은 관계기관별로 추정 건설비를 조사하라고 했다. 갑론을박, 난상토론에 이은 수많은 더하기와 빼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공사비를 최대한 절약하면 공사기간 3년에 300억원의 건설비로 고속도로를 닦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였다. 이번에는 야당과 국민의 반대가 발목을 잡았다. 자동차도 없는 나라에 고속도로가 왠 말이냐. 놀러다니는 사람한테나 좋은 일 시키는 거지. 전 국민이 대대손손 빚에 허덕일꺼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와 다를 것이 없다. 돈 내고 길 다니라는 게 말이 되느냐. 사람은 못다니고 자동차만 다닌다니, 이거 차 안 가진 국민들을 차별하는 것 아니냐. 그 많은 돈을 들여 새 도로를 내느니, 기존도로를 보수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목청을 높여 반대를 하기는 쉽다. 그러나 묵묵히 일을 만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기야 휴지가 처음 만들어질 때도 버릴 물건을 왜 돈 들여 만드느냐, 화장실 뒤지로는 신문지면 충분하지 라는 비난여론이 들끓었단다. 박완서는 단편 <후남아, 밥 먹어라>에서 70년대 초 재미교포에게 시집간 새댁이 겪는 문화충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계단 밑을 이용한 깊숙한 창고에는 새하얗고 보드라운 화장지가 길길이 쌓여 있었다. 그건 그녀가 감히 꿈도 못 꿔본 부(富)티였다. 황홀했다. 친정에선 재래식 변소에서 신문지를 뒤지로 쓰다가 미국으로 시집온 거였다. 언니들은 어쩌다 가본 호텔 화장실에서 흰 두루마리 화장지를 둘둘 말아 핸드백 속에 숨겨가지고 와서 화장을 지울 때만 아껴가며 썼다. 크리넥스를 쓴다는 건 곧 부의 척도였다.” 외국 관광객용으로라도 필요하기는 하다는 논리가 아니었더라면 화장지의 생산은 불가능했을 터, 그랬더라면 반대자들은 여전히 신문지로 모든 것을 해결하셨을지.
1987년 대통령 선거, 고속도로를 만든 인물은 유명을 달리했으되,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사람들은 고속도로를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시중에 퍼졌다. 보고 겪은 일의 폭과 깊이가 얕고 좁은 사람은 그 범위를 벗어난 일을 도모하기가 불가능한 법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홀로 묵묵히 집단의 반대와 맞서며 일을 도모해가는 삶, 선구자들의 삶은 그래서 늘 외로운 투쟁의 연속이다.
1968년 2월 1일 서울 원지동. 대통령 부부와 건설 관계자,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부고속도로의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박대통령은 “우리의 꿈을 우리의 손으로 건설해보자”라고 연설했다. 막상 시작은 했지만 사방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우선 중장비. 단시 우리나라의 중장비 총 보유대수는 1,647대에 불과했고 그나마 거의 다가 6.25 전후에 도입된, 거의 사용이 불가능한 노후장비였다. 정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의 중장비업체에 사정 사정을 거듭하며 협상을 진행, 1969년 2월 외상이나마 필요한 장비를 겨우겨우 갖출 수 있었다. 전문인력도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도로 기술자가 없었다. 다급한대로 사명감이 투철한 육사출신 위관급 장교 22명을 선발해 혹독하게 교육했다. 지원 자격을 독신자로 제한한 건 그만큼 시도 때도 없이 전투같은 교육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곧이어 ROTC 장교 12명이, 3차로 공대 및 공고 토목과 출신 50명이 교육 후 곧바로 현장에 배치되어 기술을 습득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공기를 단축하는 것이 건설비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모든 사람들은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로 건설에 매달렸다. 언 땅 위에 짚을 깔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르고, 트럭 꽁무니에 버너를 매달고 반복운행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땅을 녹인 뒤 지반을 다졌다. 옥천에서는 무려 열 세 번의 낙반 사고가 있었다. 소백산맥에서는 수 천 명이 달려들어도 하루에 겨우 2미터 남짓밖에 터널을 파들어가지 못했다. 난공사구간에서 하루 종일 30센티미터를 가까스로 전진한 뒤에는 까닭모를 서러움에 바위벽을 붙들고 울기도 했다. 임시가교가 열 번 이상 떠내려가자 책임자들은 아예 공사현장에 야전침대를 가져다놓고 숙식을 해결했다. 전쟁(戰爭)같은 돌관작업(突關作業)을 거쳐 드디어 소백산맥 한 가운데 당제터널이 뚫린 날은 1970년 6월 27일 밤 11시였다고 한다. 터널 양 쪽에서 인부들이 만세를 불렀다. 하행선은 이미 한 달 전에 준공되어 있었다.
마침내 1970년 7월 7일, 공사 시작 2년 반 만에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가 완공되었다. 총 공사비는 당초 예정에서 불어난 429억원(그래도 역시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건설비였다), 개통식 행사 세 시간 전까지 도로 도색작업을 했을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대통령은 고속도로 테이프를 자른 뒤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렸다. 그리고 공사 관계자들을 일일이 치하했다. 대통령이 훈장을 달아주는 동안 젊은 위관급 도로 기술자들은 부동자세로 선 채 눈물을 흘렸다. 고속도로 아스팔트에 뺨을 비비고 감격에 겨워 꺼이꺼이 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대통령도 울었다. 한국인의 피와 땀과 집념으로, 우리나라의 재원과 우리나라의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짦은 시간에 가장 저렴한 공사비만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길을 닦은 것이다.
그 해 12월 8일,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정중간 214km 지점, 추풍령 고개에 기념물을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탑과 위령탑을 세운 것이다. 대통령은 기념탑 제막식에서 공사 중 유명을 달리한 77명의 넋을 기리며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라는 비문을 새겨 넣었다. 경부 고속도로 개통 이후, 철도의 화물수송 분담률은 1967년 54.6%에서 1975년 29.1%로, 여객수송 분담률은 44.4%에서 24.9%로 줄었고, 도로는 화물의 경우 같은 기간 47.5%에서 62.5%로, 여객의 경우 54.3%에서 74%로 증가했다. 1969년 289만대였던 경부고속도로 이용차량은 1975년 1899만대로 늘어났고 1978년에는 무려 4060만대의 차가 ‘우리의 도로’를 마음껏 누볐다. 화물차의 비중은 56.6%, 승용차는 26%였고 나머지 17.4%는 버스였다.
고속도로는 사람과 화물의 유통에 일대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주행비 절감, 주행시간 단축, 피로도 경감, 교통사고 감소 등이 고속도로가 가져온 긍정적 효과다. 기차역이 지나지 않는 소도시를 즉각 연결이 가능한 네트워크 안으로 끌어들였고, 문 앞에서 문 앞까지 배달이 가능한 특성을 살려 화물 운송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신속한 대량수송과 이에 따른 재고기간 단축, 하역과정 단순화로 인한 파손율 감소, 유통경로 단축에 따른 원가 절감 등이 가능해진 것이다. 수송시간의 단축으로 인해 대도시 근교에 비닐하우스로 상징되는 ‘온상재배 은색혁명’을 견인하기도 했다. 고속도로 축을 따라 공장들이 들어섰다.
오늘날, 경부 고속도로가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대한민국 경제의 대동맥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대전 간을 버스로 오가는 데만 무려 여덟 시간이 필요했다. 어지간한 도시는 최소한 1박2일로 일정을 잡아야 겨우겨우 왕복이 가능했다. 두 지역 사이를 오가는 이동시간이 줄어들면, 국민들의 공간개념 시간개념이 창조적으로 개선되는 법.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을 일일생활권으로 개편한 혁명의 전초기지였다. 고속도로 개통 이후, 대한민국은 공간적 심리적 문화적으로 ‘하나의 생활권, 하나의 공동체’로 완전히 거듭났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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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한 야당과 언론(나무위키)
이렇듯 고속도로 건설 자체가 당시 한국에서는 사상 초유의 거대한 사업이었을 뿐더러, 당시 아시아 최고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조차 1963년이 되어서야 최초의 고속도로를 개통한 판국에 5년도 지나지 않아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서 국토종단 고속도로를 놓는다 하니 각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야당의 비판이 쏟아졌다. 위에서 보듯 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기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없었기에 새로운 예산 승인 과정이 필요했는데, 예산 의결권을 가진 국회에서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반대를 쏟아냈다.
당시 야당은 지역 편중론 등을 들면서 건설을 반대했다.[44] 설상가상으로 1967~1968년에는 남부 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1968년 당시 야당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를 가뭄 대책비로 전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의 가뭄은 한해지구(旱害地區)가 선포되고 영호남 통틀어 장기결석 학생이 20만 명, 전국적으로 이재민 돕기 운동이 벌어질 정도였다.[45] 참고로 당시의 가뭄은 영호남을 아울러 발생한 것이었고 야당의 한해대책비 편성 요구도 당연히 영호남을 아우른 것이었다. 이처럼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정부는 건설을 추진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건설되었는데 경제 성장이 화두였던 시기에 빨리빨리식 공사가 일반적이었던 데다가 1971년 대선과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려면 빨리 성과를 내세워서 보여 주어야 했으니 별수 없는 일이기는 했을 것이다.[46]
당시 건설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소장파 의원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과 김영삼도 있었다. 당시 신민당 의원이던 김대중도 1967년 12월 8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가뜩이나 모든 투자가 경상도로 집중되고 전라도에서는 푸대접 운운하는 이때, 어찌 한쪽은 철도 복선(複線)이 있는 곳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파행적 건설을 할 수 있는가"라고 발언했다. IBRD 보고서를 근거로 "서울 - 부산은 철도망과 국도·지방도가 잘 갖춰져 있으므로 서울 - 강릉 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반대에 가세했다. 당시 유진오 신민당수는 1968년 1월 인터뷰에서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춰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일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도 대체로 비판 논조였다. 조선일보 등은 고속도로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추진하라는 '속도조절론'을 펼쳤다. 당장 사업비조차 제대로 추산이 안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선일보는 1967년 12월 7일 자 사설 '꿈의 고속도로 계획'에서 "부풀어오르는 꿈을 현실화시키는 데에 따른 그만큼의 난관을 각오해야 하고, 철저한 계획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공사비로는 국제적인 표준을 감안해 최소한이라도 600억(원)은 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런 방대한 자금을 어떻게 염출하느냐가 또한 커다란 문제"라며 "충분한 대책을 세워 전 국민의 협력을 얻도록 하는 여유 있는 건설의 자세를 바란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1967년 11월 21일 자 기사 '의욕만 앞선 경부 간 고속도로의 문제점'에서 "심각한 주택난 하나도 제대로 해소시킬 능력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 재정 형편에 어떻게 이처럼 방대한 사업을, 그나마도 4년 만에 완성시킬 수 있다는 건가"라고 했다.
한편 건설 당시 야당 의원들이 굴삭기 앞에 누워 공사를 방해했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나 이는 왜곡이다. 두 사람이 굴삭기 앞에 드러누운 흑백 사진을 뿌려 '김영삼, 김대중이 반대하며 드러누웠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합성이다.[49] 경향신문
5.3. 고속도로에 대한 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