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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인물열전>진원(陳原)/진평(陳評) /陳林/陳瑄.陳宣長
해송(海松) 陳玉洙
자료출처- [다음] 진씨사랑방 주소 http://cafe.daum.net/jinssisarangbang
후삼국 인물열전
▶진원(陳原)/진평(陳評) /진림(陳林)/진선(陳瑄).진선장(陳宣長)
인물은 범고려권 229명 + 태봉 73명 + 백제89명 + 신라 64명 + 호족 121명 + 승려 +20명 = 596명 총 596명 입니다.
이 인물들은 99% 실존했던 인물입니다.
열전은 우선 고려사,고려사절요,삼국유사,삼국사기,삼국사절요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아 정리했으며, 여기에 네이버,다음,엠파스,야후등의 검색사이트도 참고했으며, 각종 가문의 족보, 비문, 문화재, 도서관 서적등을 참고로 하여 제맘대로 정리하였습니다.^^
열전은 웹검색을 통해 1/3을 작성했고, 1/3은 각종 족보의 내용을, 나머지 1/3은 사서를 참고해 제가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열전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잘못 알려져 있는 여러 사실들도 알게 되었고, 오류가 있는 부분도 찾아내는등의 나름대로 역사공부에 대한 재미를 톡톡히 즐기며 작업했습니다.
벼락치기로 열전을 작성하는 바람에 잘못된 점이라든지, 오류가 분명히 있을터이니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또 삼한공신에 책록된 이중 확실한 기록이 없는 <이견원,안락,김지,김래,오금길,이부율,윤신복,궁열,장원지,최정헌,이극인,이서,조정,방수홍,유덕용,영장>은 제외하였습니다. 이 인물들에 대해 혹 알고 계신분이 계시면 답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각 인물마다 능력치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역시 제 마음대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수정요청이 있을경우 수정가능합니다. 능력치는 제가 즐겨하는 전국몽환 시스템에서 빌려왔습니다.
등급은 SS>S>A>B>C>D 이며 SS는 몇 없습니다. 주로 A~D에서 평가되었습니다.
육전 : 지상에서의 군사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주로 게임상에는 통솔과 무력으로 표현되곤 하지요.
수전 : 수상전에서 군사적인 능력을 뜻합니다. 사서에 기록된 수상전에 참여한 무장들은 높게 책정했습니다.
정치 : 백성들을 잘 다스리느냐의 능력을 뜻합니다. 보통 게임상에서 표현하는 처세술과는 상관없습니다.
모략 : 후삼국시대에서의 외교술, 군사적인 책략, 호족들을 포섭하는 모략등을 뜻합니다.
명성 : 주로 왕족이나 승려, 유명한 장수들이 높게 책정되었습니다.
축성 : 사서에 기록된 축성에 참여한 인물들을 높게 책정하였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 이정도로 후삼국 인물을 짜집기하고 모아논 자료는 없을것으로 판단됩니다. 관심 있으신분께 유용한 자료가 되었으면 좋겠구요. 덧붙여서 유독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 역사 인물에 관한 카페는 굉장히 많고 볼만한 정보공유도 쉽게쉽게 되는 편인데 반해, 정작 우리역사에 인물들에 관한 것들은 활성화가 안되어 있는듯 싶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특히나 16세기 전국시대 인물들을 소설,게임,영화,드라마등을 통해서 쉽게 접하고, 정보공유도 쉽게 되는 것을 보면 정말 부럽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확실한 사서가 있는것도 아니고, 각가문의 기록이나 서신,비문등을 토대로 소설,TV등을 통해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보면, 혹 우리나라는 고려사부터 시작하여 조선왕조실록까지 1천여년간의 너무나 완벽한 사서로 인해, 상상의 나래의 싹을 스스로 제한하는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서점에 가면 품격있는 우리나라 역사소설이 많이 나왔으면, 게임매장에 가면 우리나라 역사게임이 너무 재밌고 많아서, 꼭 돈주고 사서 즐기고 싶은 그런 때가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
> 많은 답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4월28일 길공구-
P.S 작년 9월에 혁신의 삼국지화 작업을 하면서 첫째 돌잔치를 맞이했는데, 이번엔 둘째가 곧 태어납니다. 퇴근해서 틈만나면 이 작업을 하는 통에 만삭아내 눈치를 계속 살폈는데, 별말없이 하라고 나둔 마눌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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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고려권
왕건(王建) 고려 육전(A)수전(A)정치(S)모략(B)명성(SS)축성(A) (877~943)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이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왕융(王隆)/용건(龍建)/용융(龍隆) 태봉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B)
(?~897) 고려사 세계에 따르면 작제건(作帝建/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의 아들로 모(母)는 용녀(龍女/원창왕후元昌王后)이다.
초명은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후에 융(隆)으로 바꿨다. 송악의 호족이었는데, 젊을때 송악 영안성(永安城)을 거닐다 한 몽부인(夢夫人)을 만나 혼인하였다. 후에 삼한의 어머니라 하여 성을 한씨로 하고 위숙 왕후(威肅王后)로 추증하였다. 개성(開城)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살았는데 궁예(弓裔)가 군왕을 자칭하고 일어섰을 때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서 군졸을 이끌고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 궁예는 그를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송악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수축하고 아들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요청하자 궁예가 그 말대로 따랐다. 왕건이 고려 태조가 되자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P.S>왕건의 가계도
< 1.강효경→2.강충→3.강보육>신천강씨 → 진의(강보육의 딸)+당선종→<작제건→용건/용륭(왕륭)→왕건>개성왕씨
최응(崔凝) 고려 육전(C)수전(C)정치(SS)모략(S)명성(A)축성(B) 898~932 본관 황주(黃州). 시호 희개(熙愷). 오경(五經)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궁예(弓裔) 밑에서 한림랑(翰林郞)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장주(掌奏)로 그 자리에 있던 최응이 붓을 일부러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내려가,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왕건에게 귀띔, 굴하게 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왕건이 즉위하자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를 지내고, 이어 광평낭중(廣評郞中)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廣評侍郞) 등을 지내면서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대광 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 ·사도(司徒)에 추증,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유금필(庾黔弼) 고려 육전(SS)수전(A)정치(C)모략(C)명성(S)축성(S) ?∼941(태조 24). 고려의 무장. 평주(平州)사람으로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920년(태조 3) 3월 북계(北界)의 골암진(#골16巖鎭)이 거듭하여 북적(北狄)에게 침략당하자 개정군(開定軍) 3, 000명을 거느리고 가 골암진의 동산(東山)에 성을 쌓고 북번(北蕃)의 추장 300인을 복종시켰다.925년 10월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이 되어 후백제의 연산진(燕山鎭)을 공격하여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또 임존군(任存郡:예산군 대흥면)을 공격하여 군사 3, 000여명을 살획하였다.또한, 조물군전투(曹物郡戰鬪)에서는 불리한 처지에 있던 태조의 군사를 도와 견훤(甄萱)을 곤란하게 하였다.928년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고 있다가 후백제군사가 청주에서 태조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어 이를 쳐부수고 독기진(禿#기39鎭)까지 추격하여 300여기를 살획하였다.929년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안동군)을 포위, 공격하자 많은 장수들이 진군을 망설였으나 홀로 결사적인 태도로 임하여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돌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931년에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을 갔다.이듬해 후백제의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략하므로 귀양지의 장정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전함을 수리하여 방어하니, 태조가 그 충성에 감동하여 다시 불러들여 중용하게 되었다.933년에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 되어 의성부(義城府)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후백제군사로부터 신라의 서울을 구하라고 하므로 장사 80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신라사람들을 안심시켰다.돌아오는 길에 후백제의 신검(神劒) 등을 만나 싸워서 크게 승리하고, 장군 금달(今達)·환궁(奐弓) 등 7인을 사로잡고 살획함이 매우 많았다.934년 태조가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를 칠 때에는 경기(勁騎) 수천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000여명을 살획하였으며, 술사 종훈(宗訓)과 의사 훈겸(訓謙), 용장 상달(尙達)·최필(崔弼) 등을 사로잡아 웅진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항복하게 하였다.935년 나주가 후백제의 공격을 받자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이 되어 이를 경략하였으며, 이듬해 고려와 후백제가 결전을 벌일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홍유(洪儒)/홍은열(洪殷悅) 고려 육전(S)수전(C)정치(B)모략(C)명성(A)축성(B) ?∼936(태조 19). 고려의 무신. 남양부(당성) 사람으로 남양홍씨의 중시조이다. 태봉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태조 즉위 후 청주(靑州)에서 변란이 일어나므로 유금필(庾黔弼)과 함께 진주(鎭州: 鎭川)에 주둔하며 이에 대비하였다.이듬해인 919년(태조 2)에는 오산성(烏山城)을 고쳐 예산현으로 하자 대상(大相) 애선(哀宣)과 함께 유민(流民) 500여호를 옮겨 안정시키기도 하였으며, 이어 대상에서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의 딸은 태조의 26번째 부인인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이 되어 의성부원대군을 낳기도 할 만큼 태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936년 후백제를 쳐 후삼국을 통일할 때 일리천(一利川)의 전투에서 마군을 거느리고 우군(右軍)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994년(성종 13) 태사가 추증되었으며, 태사개국충렬공(太師開國忠烈公)으로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의성부사람 홍술로 잘못 알려져 있다.
배현경(裵玄慶) 고려 육전(S)수전(C)정치(D)모략(C)명성(A)축성(C) ?∼936(태조 19). 고려 태조 때의 무신. 경주인(慶州人)으로 초명은 백옥삼(白玉衫, 白玉三). 군졸의 신분으로 담력이 있어 관위가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궁예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특히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즉위 후 일등공신에 녹훈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918년(태조 1)에는 청주인(靑州人) 현율(玄律)을 순군낭중으로 임명하는 데 반대하여 현율을 병부낭중으로 삼게 한 적도 있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그뒤 마전(麻田)의 숭의전(崇義殿), 평산(平山)의 태사사(太師祠), 나주의 초동사(草洞祠)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왕만세(王萬歲) 고려 육전(B)수전(S)정치(C)모략(C)명성(B)축성(C) 태조의 종제로 위계는 정2품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해전(海戰)에 능하였던 듯하며 932년(태조15) 후백제의 상귀(相貴)가 이끄는 수군(水軍)이 저산도(猪山島) ·대우도(大牛島)를 공략하자 이를 맞아 싸웠다. 935년 견훤(甄萱)이 고려에 귀순하기를 청하자 장군 검필(黔弼)과 함께 병선(兵船) 40척을 이끌고 가서 해로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신숭겸(申崇謙) 고려 육전(SS)수전(C)정치(C)모략(D)명성(S)축성(C) ?∼927(태조 10). 고려 태조 때의 무장.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본래 전라도 곡성현(谷城縣)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고려사》 열전에는 그를 광해주(光海州:현재 春川)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되어 그의 묘도 여기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 건국 때 큰 공을 세웠으며, 이로 말미암아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7, 8년 동안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긴장관계는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견훤(甄萱)이 신라에 대하여 공세를 펴게 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마침내 큰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즉, 927년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현재 永川)를 습격한 뒤 신라 왕도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감행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 000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자, 이때 신숭겸은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같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로써 태조는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고,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능길(能吉)/신길(申吉)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신숭겸(능산能山)의 동생으로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이 태조 대신 전사하자 태조가 애통해하며 신숭겸의 동생 능길과 신보(申甫)를 원윤으로 삼아 중용했다.
신보(申甫)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B) 신숭겸의 아들로 신숭겸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이를 애석히 여긴 태조가 신보를 원윤으로 삼고 평산에 녹읍을 주었다.
박술희(朴述熙/朴述希) 고려 육전(S)수전(C)정치(A)모략(C)명성(A)축성(C) ?~945 면천박씨(沔川朴氏)의 시조. 시호 엄의(嚴毅). 대승(大丞) 득의(得宜)의 아들. 18세 때 궁예(弓裔)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태조를 섬기면서 대광(大匡)이 되었다. 혜종을 태자로 책봉하는 데 공이 컸으며, 936년(태조 19) 보기(步騎) 1만으로 후백제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943년 태조가 죽을 때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다. 혜종이 병으로 눕자 왕규(王規)가 역모를 품어 서로 사이가 나빠졌다. 신변보호를 위해 호위병 약 1백을 거느리다가, 즉위한 정종의 의심으로 갑곶(甲串: 江華)에 유배되었다. 뒤에 왕명을 사칭한 왕규에게 살해되었다.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 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복지겸(卜智謙)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A)명성(B)축성(B)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무장. 면천복씨(沔川卜氏)의 시조. 초명은 사귀(沙貴) 또는 사괴(砂#괴08). 태봉의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서 궁예(弓裔)가 민심을 잃자, 918년(태조 1)에 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와 함께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개창하고 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그뒤 환선길(桓宣吉)이 난을 일으키자 태조에게 알려 진압하게 하였으며,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을 평정하는 등 공을 세웠다. 994년(성종 13)에 태사(太師)에 추증되고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염상(廉湘) 고려 육전(A)수전(C)정치(C)모략(B)명성(A)축성(SS) 궁예 때의 마군대장군으로 궁예의 횡포가 심해져 민심이 이탈되자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며, 태조가 마산성 통해진성 등 사방을 정복할 때 공이 커 고려 개국2등공신에 올랐다. 특히나 많은 성을 쌓았는데 고려사 절요에 따르면 안북부,안정진,영청현,마산,안수진,흥덕진,통해진등 수없이 많은 성을 쌓는 역활을 했다.또한 청주호족 경종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발각되었을때, 태조가 경종이 매곡성주 공직의 매제임에 처벌하기를 꺼려하자 염상이 일벌백계하기를 청함으로 이에 처형하였다. 왕규.박수문과 함께 태조의 임종시 유언을 받들었고 태사에 이르렀다.
전이갑(全以甲) 고려(정선호족) 육전(A)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 ( ?~927 ) 정선호족출신으로 자는 자경(子經), 호는 도원(桃源),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고려 개국 때 태사공(太師公)으로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다. 정선전씨의 중시조이며 정선군 전휘선(全諱宣)의 7세손 전우상(全禹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라면서부터는 용모가 빼어나고 지용이 절륜하여 문사에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동생 전의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이라 불리었다. 태봉의 기랑(騎郞)일때 왕건을 만났는데 왕건이 그 임물됨을 알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세상의 영웅이라 삼수의 창생들이크게 구제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그후 왕건을 왕으로 모시고 고려를 세우니 무우년(戊牛年)에 양주(楊洲)를 정벌하여 평정하고 경신년(庚申年)에 광주,청주를 정벌하여 적을 전멸하고, 병인년에 견훤을 상주에서 몰아 내고 그 땅을 개척하였으며 정묘년에 또 견훤을 나주에서 대파하여 진을 설치하고 돌아오니 그때에 태조(왕건)의 이름이 크게 떨치어 조정과 백성이 모두 그를 따르게 되었다.태조3년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므로 신라의 사신 금율이 와서 도와줄 것을 간청하여 태조가 전이갑과 신숭겸에 명하여 구원케하니 견훤이 그 소문을 듣고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이때 전이갑이 신숭겸에게 이르기를 견훤이 강폭해서 항상 변방의 우환꺼리가 되니 이 기회에 그를 전멸시킴이 좋겠다 하고 그를 끝까지 쫓아 추격하니 그의 군사는 거의 전멸하고 견훤만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태조8년에 태사에 임명되었으며 태조10년에 다시 견훤과 달성 공산 오동나무 숲에서 격전하다가 드디어 패하여 궁지에 몰리었다.견훤이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므로 사태가 위급한지라 신숭겸이 태조와 옷을 바꾸어 입어 왕을 탈출시키고 전이갑은 동생 전의갑, 사촌동생 전락과 더불어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후 태조가 크게 슬퍼하시며, 전이갑에게 정선군(旌善郡) 봉호와 시호를 충열(忠烈)이라 내리고 후손에게는 조세와 각종 국가의 부역(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전의갑(全義甲) 고려(정선호족) 육전(A)수전(C)정치(C)모략(C)명성(A)축성(C) ( ?~927 ) 정선호족 전우상(全禹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형 전이갑과 더불어 정선의 두영웅으로 불리었다. 형 전이갑(全以甲)과 더불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죽산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강(忠康)이다.
전락(全樂) 고려(정선호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927 ) 고려의 장수로 환성군 전섭의 16대손이며 천안 전씨의 시조이다. 전이갑의 사촌 동생으로 삼사 좌복야에 임명되어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호위하다 전사했다. 천안군 봉호를 받고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호의(扈義)/호원보(扈元甫)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927) 신평호씨(新平扈氏)의 시조이며, 고려 태조 1년 건국에 공을세워 개국공신에 책록되었고, 서기 927년(고려 태조 10년) 평장사(平章事)로서 공산(公山)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후백제 견훤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태조 왕건을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구출하고 전사(戰死)하여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희개(禧開)라 시호(諡號)를 받았다. 배현경,신숭겸, 복지겸, 홍유, 유금필와 함께 6태사로 불리운다.
금강(靲剛)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고려의 문신, 한찬으로 태조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2등 공신에 책록되고, 태조원년 918년 내봉령(內奉令)으로 임명되었다. 내봉성은 황명을 시행하는 관청이다.
염장(閻萇)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태조 원년 한찬(韓粲)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직에 있었는데, 이흔암이 웅주를 버리고 황도로 올라오자, 잃은 것에 대한 처벌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게 반란의 뜻이 있음을 밀고하였다. 의형대는 나라의 법률관계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귀평(歸評) 고려 육전(D)수전(B)정치(B)모략(D)명성(D)축성(C)
태조원년 618년 6월 인사에서 한찬 도항사령(都航司令)을 제수받았다. 도항사는 수군의 함대를 건조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손형(孫逈)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본관은 밀양으로 시호는 문렬(文烈), 태조원년 618년 한찬으로 물장성령(物藏省令)을 제수받고 후에 대상(大相)을 지냈다. 물장성은 나라의 보물을 맡아 관리하는 관청이다.
진경(秦頸)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D)축성(D)
태조원년 618년 소판(蘇判)으로 6월 인사에서 내천부령(內泉部令)을 제수받았다.
어중익(魚重翼)/지중익(池重翼) 고려 육전(D)수전(B)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충주 어씨(忠州魚氏)의 시조로 본성(本姓)이 충주지씨(池氏)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에 세개의 비늘(鱗)이 있어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어씨(魚氏)로 사성(賜姓)했다고 한다.
왕유(王裕) 고려(왕족) 육전(D)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강릉왕씨(江陵王氏)의 시조로 고려 태조의 왕자이다. 통일후 강릉에 식읍을 받고 강릉왕씨가 되었다.
양능길(梁能吉)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고려 건국때의 무인이며 충주양씨의 시조이다. 타고난 품격이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육체적인 힘도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장상이 될 재능이 있었다. 따라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에 태조를 도와 통합삼한대장군이 되어 국가의 대업을 이룩하여 그 공훈이 일세에 빛나므로 예성군에 봉하고 예성(충주)을 본관으로 삼게 하였다.
최영휴(崔英休) 고려 육전(C)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 충주인으로 고려 건국시 삼한공신으로 삼한공신증태위(三韓功臣贈太尉)으로 추증되었다.
신정 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A)축성(D) 황주인(黃州人)이니 태위 삼중대광 충의공(太尉三重大匡忠義公) 황보제공(皇甫悌恭)의 딸로 대종(戴宗) 및 대목 왕후(大穆王后)를 낳았다. 처음 명복궁 대부인(明福宮大夫人)을 봉(封)하였는데 성종(成宗) 2년 7월에 훙()하니 성종(成宗)이 일찍이 선의 태후(宣義太后)를 잃고 후(后)에게서 자라났으므로 애모하고 예(禮)를 다하여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빈전(嬪殿)에 나아가 시호(諡號)를 올려 신정 대왕태후(神靜大王太后)라 하였다.
능식(能式) 고려 육전(B)수전(A)정치(C)모략(C)명성(B)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장군. 지방호족출신으로서 927년(태조 10) 해군장군(海軍將軍)으로 영창(英昌)과 함께 왕명을 받들어 후백제를 치기 위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강주(康州:지금의 晉州)의 전이산(轉伊山:지금의 南海)·노포(老浦)·평서산(平西山:지금의 南海)·돌산(突山:지금의 順天) 등 네 고을을 공격하여 많은 인원과 물자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계가 후대의 토성(土姓)과 전혀 관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국초의 왕권쟁탈과정에서 도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능식(能寔) 고려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의 개국공신. 918년 7월에 광평랑(廣平郎)에서 순군낭중(徇軍郎中)이 되었다. 8월에 태조가 조서를 내리고 건국의 공훈에 따라 공신을 정할 때 2등에 녹훈되었다
능식(能植)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B) 태조원년 당시 마군장군으로 청주에서 비밀리에 후백제와 서로 화호(和好)를 통하며 반역의 기미가 보인다는 도안군(道安郡=충청북도 괴산)의 보고를 받고 군을 이끌고 청주지역을 진무함으로써 청주세력이 쉽게 반역하지 못하게 하였다.
견권(堅權) 고려 육전(S)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의 장군. 왕건(王建)과 함께 궁예(弓裔)의 막하에서 활동하였으며, 918년 왕건을 도와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이 컸다. 이 공으로 태조 즉위 후의 논공행상에서 능식(能寔)·염상(廉相)·김낙(金樂) 등과 더불어 이등공신이 되었다. 921년(태조 4)말갈의 별부(別部)인 달고적(達姑狄)171인이 등주(登州:지금의 安邊)를 거쳐 신라의 북변을 침입하자, 태조의 명으로 삭주(朔州)에 진주하여 기병을 이끌고 이들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936년(태조 19)에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대상(大相)으로서 견훤(甄萱)과 더불어 마군(馬軍)1만을 거느리고 본강(本綱)으로 참전, 크게 공을 세웠다.
권신(權愼)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B)명성(A)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의 개국공신. 918년 6월 고려 건국 후 8월에 견권(堅權)·능식(能寔)·염상(廉湘)·김락(金樂)·마난(麻煖)과 함께 이등공신으로 책록되어 금기·은기·비단 등을 상으로 받았다.
김락(金樂) 고려 육전(A)수전(C)정치(D)모략(D)명성(A)축성(C) ?∼927(태조 10). 고려의 개국공신.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서경(평양) 속촌(屬村)인 중화현(中和縣) 출생으로 918년(태조 1) 고려가 건국되자 이등공신이 되었다.927년 원보(元甫) 재충(在忠)과 더불어 대량성(大良城:지금의 陜川)을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후백제의 장군 추허조(鄒許祖) 등 30여인을 사로잡았다. 같은해에 견훤(甄萱)의 군사가 신라를 쳐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견훤의 군사와 공산(公山:지금의 大邱)에서 크게 싸울 때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함께 위급해진 태조를 구하고 전사하였다.태조는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으며, 아우 철(鐵)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1120년 예종은 그와 신숭겸을 추도하여 향가 〈도이장가 悼二將歌〉를 지었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김철(金鐵)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D) 고려의 개국공신 김락의 동생으로 김락이 공산전투에서 전사하자 태조가 애통해하여 김철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일리천 전투에
벼슬은 대상으로 홍유, 수향(守鄕),왕순(王順),준량(俊良)과 함께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우익(右翼)을 맡았다.
김철(金哲) 고려 육전(C)수전(B)정치(D)모략(D)명성(C)축성(D) 태조의 삼한공신중 한명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김락과 같은 서경출신이라 하였으며, 전북대 박천식 교수의 논문에는 순천인이라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과 김철(金哲)을 혼동했는지는 알수없다.
수향(守鄕)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고려의 대상으로 일리천 전투시에 김철,홍유등과 우익 3만을 맡아 참전했다.
왕순(王順)/왕삼순(王三順)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D) 고려의 왕족이며, 보천군(褓天軍) 대장군 겸 원윤(元尹)으로 일리천 전투에서 수향,왕순,준량등과 우익 3만을 맡았다.
길강충(吉康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고려의 6품 정조(正朝)로 일리천 전투시에 원윤 삼순(三順), 준량(俊良)의 휘하로 영유(英儒),흔계(昕繼)와 보군 1만을 이끌고 우익이 되어 참전했다.
영유(英儒)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고려의 6품 정조(正朝)로 일리천 전투시에 우군 원윤 삼순(三順), 준량(俊良)의 휘하로 길강충(吉康忠),흔계(昕繼)등과 보군 1만을 이끌고 참전했다.
흔계(昕繼)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고려의 6품 정조(正朝)로 일리천 전투시에 길강충(吉康忠),영유(英儒)등과 보군 1만을 이끌고 우군으로 참전했다.
연주(連珠)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A)축성(C) 생몰년 미상. 전주연씨(全州連氏)의 시조.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918년(태조 1) 8월 고려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을 선정하여 포상할 때 견권(堅權)·능식(能寔)·권신(權愼)·염상(廉湘)·김락(金樂)·마난(麻煖)과 함께 이등공신이 되어 금·은 그릇과 비단을 받았으며, 936년에는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이었던 일리천(一利川:경상북도 선산 부근) 싸움에 원보(元甫)로서 대상(大相) 김철(金鐵)·홍유(洪儒)·박수경(朴守卿), 원윤(元尹) 훤량(萱良)과 함께 마군(馬軍) 1만명을 거느리고 3군(軍) 중 우군(右軍)에 소속되어 참전하였다.
구진(具鎭)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C)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관인. 시중(侍中)을 지냈으며, 918년(태조 1)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전왕(前王) 궁예(弓裔)에게 오랜 노고가 있기 때문에 이를 사양하였다. 이에 유권열(柳權說)이 징계해야 함을 주장하고, 또 태조가 노하므로 이를 두려워하여 부득이 취임하였다.
구족달(仇足達)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A)축성(D)
고려 태조 때의 서가(書家). 특히 구법(歐法)의 대가이다. 벼슬은 사찬(沙粲)·흥문감경(興文監卿)을 지냈다. 충주(忠州) 정토사(淨土寺)의 법경대사자등탑비(法鏡大師慈燈塔碑)와 강릉 보현사(普賢寺)의 낭원대사오진탑비(朗圓大師悟眞塔碑)는 그의 필적이며, 후자에는 북조(北朝)의 서풍이 보인다. 보현사는 낭원대사를 기리기 위해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글은 구법의 대가인 구족달이 썼다.
유권열(劉權說) 고려 육전(D)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문신. 918년(태조 1) 구진(具鎭)이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으려 하자 왕이 불쾌히 여겨 묻기를 “예전에 내가 모든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도 일찍이 수고로웠다는 말을 아니한 것은 준엄한 왕위(王威)를 두려워함이었는데, 지금 구진이 굳이 사양하여 가지 않으니 옳다고 하겠는가.” 하므로, 시랑(侍郎)으로서 “상으로써 선을 권장하고 벌로써 악을 징계하는 것이오니, 마땅히 엄한 형벌을 가하여 여러 신하를 경계하소서.”라고 대답하여 마침내 구진으로 하여금 부임하게 하였다. 922년 명주장군(溟州將軍) 김순식(金順式)이 복속하지 않으므로 왕이 근심하자 “아버지가 자식을 타이르고 형이 동생을 훈계함은 천리(天理)입니다. 김순식의 아비 허월(許越)은 지금 중이 되어 내원(內院)에 있사오니 그를 보내어 타이르도록 하소서.”라고 진언하여 마침내 김순식을 귀부하게 하였다.
왕식렴(王式廉) 고려(왕족) 육전(B)수전(C)정치(A)모략(S)명성(A)축성(SS) ?∼949(정종 4). 고려 초기의 공신. 개성왕씨(開城王氏). 아버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평달(平達)이며, 태조의 종제이다. 처음에 군부서사(軍部書史)가 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쳤다. 918년(태조 1)에 태조가 황폐한 평양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대도호부로 삼고 담당관원을 파견할 때 그 책임자로 등용되어 평양을 지키면서 안수진(安水鎭)·흥덕진(興德鎭) 등에 성을 쌓아, 그 공으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佐丞)이 되었다.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서경을 기반으로 한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혜종의 이복동생 요(堯:뒤의 定宗)와 제휴하였다. 945년(혜종 2)에 왕규(王規)의 혜종 암살음모 등 중앙의 정정(政情)이 어수선해지자 서경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가 왕규와 그 무리 300여명을 제거하여 정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으로 대승(大丞)이 되어 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호기위 태사 삼중대광 개국공(虎騎尉太師三重大匡開國公)으로 추증,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위정(威靜)이다.
열평(列評) 고려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A)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관리. 태조의 역성혁명에 공을 세워 개국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918년(태조 1) 병부경(兵部卿)으로 있다가 순필(荀弼)이 병으로 면직되자 광평시랑(廣評侍郎)이 되었다. 이어 황폐해진 평양(平壞)에 황주(黃州)·봉주(鳳州)·해주(海州)·백주(白州)·염주(鹽州) 등지의 백성을 이사(移徙)시켜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할 때, 태조의 당제(堂弟)인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가서 다스렸다
애선(哀宣)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D)명성(C)축성(B) ?∼924(태조 7). 고려의 무신. 919년(태조 2) 오산성(烏山城)을 고쳐 예산현(禮山縣)으로 삼을 때 대상(大相)으로서 홍유(洪儒)와 함께 유민 500여호를 안집(安集)시켰다.924년 견훤(甄萱)이 그의 아들 수미강(須彌康)·양검(良劒) 등으로 조물군(曹物郡:지금의 경상북도 북부)을 공격해오자 장군으로서 왕충(王忠)과 함께 구하러 가서 싸우다 죽었다
혜종(惠宗) 고려(왕족) 육전(S)수전(B)정치(B)모략(C)명성(SS)축성(B) 914(신덕왕 1)∼945(혜종 2). 고려 제2대 왕. 재위 943∼945. 본관은 開城(개성). 이름은 무(武). 자는 승건(承乾).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吳氏)이다.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며,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921년에 박술희(朴述熙)를 후견인으로 하여 태자에 책봉되고, 943년 태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를 노리는 강력한 적대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특히, 강력한 호족출신이며 왕실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던 왕규(王規)의 노골적인 암살음모를 가까스로 모면한 뒤에는 늘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정치에 뜻을 두지 못하였다.한편, 그의 이복동생인 요(堯: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지금의 平壤)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하여 은근히 왕위를 엿보고 있었으므로 혜종대의 정치정세는 더욱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그가 병석에 눕게 되자 왕위쟁탈 음모는 더욱 노골화되어, 서경의 왕식렴은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에 들어와 왕규와 그 무리 300여명을 죽였다. 이무렵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갑곶(甲串:江華)에 유배된 뒤 곧이어 살해되었는데, 요 일파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혜종이 죽은 뒤에 요가 새 왕이 되었는데, 그 절차가 혜종의 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군신(群臣)의 추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혜종의 죽은 원인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혜종 때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치적 불안과 갈등은 강력한 호족세력과 미약한 왕권관계에서 빚어진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는 여러 견해가 나와 있다.능은 순릉(順陵)이며, 시호는 의공(義恭)이다.
왕충(王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B)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장군. 924년(태조 7) 7월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 수미강(須彌康)과 양검(良劍) 등을 보내어 조물군(曹物郡:안동 부근)을 공격하게 하였을 때 장군 애선(哀宣)과 함께 왕의 명령을 받고 나아가 후백제군을 물리쳤으며, 928년에는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자, 명지성(命旨城:경기도 포천 부근)의 원보(元甫)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물리쳤다.
영창(英昌) 고려 육전(B)수전(A)정치(D)모략(C)명성(B)축성(C) 생몰년 미상. 고려의 장군. 927년(태조 10) 해군장군(海軍將軍)으로 장군 능식(能式)과 함께 후백제 강주(康州:晋州) 관하의 전이산(轉伊山)·노포(老浦)·평서천(平西川)·돌산(突山) 등 네 고을을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이어 대야성(大耶城:陜川)을 정복하였다.
공훤(公萱)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B)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장군.927년(태조 10)신라가 후백제의 공격으로 위급하여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시중(侍中)으로 군사 1만여인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그리고 929년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지금의 安東)을 포위하자 대상으로서 태조 및 홍유(洪儒)·유금필(庾黔弼) 등과 함께 이를 구원하였고, 936년 태조가 삼군(三軍)으로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상으로 대장군이 되어 원윤 능필(能弼), 장군 왕함윤(王含允) 등과 함께 삼군의 원병을 구성하여 일리천에서 신검(神劒)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로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색상(索湘)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927(태조 10). 고려의 장수. 관등은 정조(正朝)였으며, 군대의 지위는 도두(都頭: 중국에서 쓰이던 고급장교의 칭호로 일명 都將이라고도 하였다.)였는데, 927년 10월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이 부하 장수를 보내어 벽진군(碧珍郡: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침략하고 대목군(大木郡)과 소목군(小木郡)의 농작물을 베어버릴 뿐만 아니라, 이해 11월 다시 벽진군의 도곡(稻穀)을 불사르자 색상은 고려의 군대를 이끌고 이에 대항하다가 전사하였다.이 전투가 있은 직후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색상을 성산전투(星山戰鬪)에서 물리쳐 그의 손을 묶었노라고 자랑한 바 있다.
김상(金相)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B)축성(C) ?∼928(태조 11). 고려 태조 때의 충신. 928년 강주(康州:지금의 晉州)를 구하러 가다가 초팔성(草八城:지금의 합천군 초계면)의 성주 흥종(興宗)에게 크게 패하여 전사하였다.
직량(直良) 고려 육전(C)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고려의 정조(正朝) 벼슬을 하다 태조 11년 928년 강주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한 원윤 김상(金相)의 휘하에서 군사 3천을 이끌고 출진했으나 초팔성의 성주 흥종에게 크게 패하였다.
홍경(洪慶)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승려. 928년(태조 11)에 후당(後唐)으로부터 대장경(大藏經) 1부를 얻어 배에 싣고 예성강(禮成江) 하구에 이르자 태조가 친히 마중 나와 환영하고, 대장경은 제석원(帝釋院)에 모셨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928년에 묵화상(默和尙)이 당나라에 가서 대장경을 싣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둘이 같은 연대이고 같은 곳에서 대장경을 가져온 것으로 되어있므로 홍경과 묵화상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능선(能宣)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시대의 관인. 935년(태조 18) 6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나주에서 고려에 투항을 요청하자, 충질(忠質) 등과 함께 군선 40여척을 거느리고 견훤과 그의 가족들을 맞아들였다.
충질(忠質)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관리. 935년(태조 18)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왕위계승의 내분으로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탈출할 때, 태조의 명을 받아 소원보(小元甫) 향예(香乂)·오염(吳琰) 등과 해로로 견훤을 맞아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안내하였다.
향예(香乂)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D)축성(D)
935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그해 6월에 수로로 견훤이 고려로 귀부를 청하자 태조의 명을 받아 유금필, 왕만세, 오담, 능선, 충질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오염(吳琰)/오담(吳淡) 고려 육전(C)수전(B)정치(B)모략(C)명성(D)축성(D) 935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그해 6월에 수로로 견훤이 고려로 귀부를 청하자 태조의 명을 받아 유금필, 왕만세, 향예, 능선, 충질등이 군선 40여척을 거느리고 견훤과 그의 가족들을 맞아들였다.
낙랑공주(樂浪公主)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C)명성(A)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맏딸. 본관은 개성(開城). 신라 경순왕의 처이다.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하며,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 불렸다. 어머니는 충주지방의 호족 긍달(兢達)의 딸인 신명태후 유씨(神明太后劉氏)이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11월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태조에게는 9인의 공주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낙랑공주와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朴氏)소생의 공주를 김부와 혼인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종실과 혼인시켰다. 고려왕실에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주가 타성(他姓)과 혼인한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김부에게만은 낙랑공주 등 2인의 공주를 혼인시켰다. 이는 신라를 들어 귀부(歸附)한 김부에 대한 감사의 뜻과 태조 자신이 신라왕실에서 신성태후(神成太后)를 맞아들임으로써, 이중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고려왕실의 신분을 신라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통일된 한반도를 용이하게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보장받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준량(俊良)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936년(태조 19) 9월 왕건(王建)이 견훤(甄萱)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리천(一利川)에서 친히 후백제 신검(神劍)의 군사를 칠 때, 원윤(元尹) 삼순(三順) 등과 보군(步軍) 1만을 거느리고 우강(右綱:三軍, 곧 左綱·右綱·中軍의 하나)이 되어 후백제군을 대파하였다.
김극종(金克宗)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무신. 936년(태조 19)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후백제와 마지막 결전을 할 때 간천대장군(杆天大將軍)이 되어 원보(元甫) 조간(助杆) 등과 함께 보군(步軍) 1천인을 거느리고 중군(中軍)으로 참가하여 일선군(一善郡:지금의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후백제의 신검군(神劒軍)을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김길(金吉)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신라왕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광산(현 전남광주)으로 은거한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 김흥광(신무왕의 3왕자)의 손자로 후백제 성립의 혼란기때 금산군(錦山郡/나주)으로 피신했는데, 왕건의 나주 공략시 공을 세웠으며, 금산(나주)의 왕자대(王子臺)에서 백제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후 왕건을 따라 역성혁명에 참여하였으며, 태조(太祖) 17년(934)에는 후당(後唐)에 사신(使臣)으로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삼한통일후 사공(司空)·삼중대광(三重大匡)·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임명되었다.
왕희순(王希順) 고려(왕족)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D) 왕족으로 삼한통일후 삼한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그후 세계는 알수 없다.
최언위(崔彦僞) 고려 육전(D)수전(D)정치(S)모략(S)명성(A)축성(C) 868(경문왕 8)∼944(혜종 1). 신라말 고려초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신지(愼之)·인연(仁#연24). 치원(致遠)의 종제이며, 문하평장사 항(沆)의 할아버지이다.885년(헌강왕 11) 18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예부시랑 설정규(薛廷珪) 아래에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42세인 909년(효공왕 13)에 귀국하여 집사성시랑 서서원학사(執事省侍郎瑞書院學士)를 제수받았다.935년(태조 18)에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가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받았으며,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元鳳大學士翰林院令平章事)에 이르렀다.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글을 잘하여 태자사부로 있을 때 궁원(宮院)의 액호(額號)는 모두 그가 찬정(撰定)한 것이었으며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최치원·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한 것으로도 그의 문명은 짐작되는 바이다.또한, 서법(書法)도 남달리 아름다워 성주사(聖住寺)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朗慧和尙白月#보12光塔碑〉와 같은 비문을 쓰기도 하였으며, 〈낭원대사오진탑비명 朗圓大師悟眞塔碑銘〉·〈법경대사자등지탑비명 法鏡大師慈燈之塔碑銘〉 등을 찬하기도 하였다.아들로는 광윤(光胤)·행귀(行歸)·광원(光遠)·행종(行宗) 등이 있었는데, 광윤은 진(晋)에 유학을 가던 중 거란에게 붙잡혀갔으나 재주를 인정받아 오히려 관직에 등용되어 구성(龜城)에서 근무하던 중, 거란군이 고려를 침범할 것을 알고 고려에 서신으로 알려와 광군(光軍) 30만을 설치하게 하였다. 행귀도 오월국(吳越國)에 유학하여 비서랑(#비58書郎)이 되었다.정광(政匡)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능윤(能允)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태조원년 918년 8품벼슬인 일길찬(一吉粲)이었는데, 자기집의 동산에서 상서로운 지초(芝草)한 포기를 바쳤다. 지초는 영지를 말하는데 아홉줄기에 세줄기는 아주 빼어났다. 태조가 기뻐하며 상으로 내창(內倉)의 곡식을 내려 주었다.
순필(荀弼)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918년 7월 계사일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이었는데 병을 얻어 면직(免職)되었다.
직예(職預)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B)축성(D) 태조 원년 918년 7월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제수받고 10월에 능률(能律)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내시서기(內侍書記)을 제수받았다.
진경(珍景) 고려 육전(C)수전(C)정치(D)모략(D)명성(D)축성(D) 928년 5월에 강주(康州)의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고자군(古子郡=고성군固城郡)으로 양곡을 운반하는데, 견훤이 몰래 군사를 보내어 강주(康州)를 습격하니, 급히 돌아와 싸웠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3백여 명이었고, 장군 유문(有文)은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유문(有文)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C) 강주성주로 928년 원보(元甫) 진경(珍景)이 고자군으로 양곡을 운반하러간 사이 견훤군이 갑자기 군을 이끌고 성을 공격함으로 백제에 항복하였다.
진경(進慶)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928년 졸하였때 이찬(伊餐)이었는데 대광(大匡)을 증직(贈職)하였다.
진정(秦靖)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국 파진찬 벼슬을 지냈는데 태조가 혁명을 이을킨 태조원년 개각때 진각성령(珍閣省令)에 제수되었다. 진각성(珍閣省)은 국가 문서와 도서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진원(陳原)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봉국 소판(蘇判) 벼슬을 지냈는데 태조가 혁명을 일으킨 태조원년 개각때 창부령(倉部令)에 제수되었다. 창부(倉部)는 국가 재정에 관한 일을 하는 관청이다.
마란(麻煖)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B)명성(A)축성(D) 영평마씨의 시조로 태조원년 918년 견권(堅權),능식(能寔),권신(權愼),염상(廉湘),김락(金樂),연주(連珠)와 더불어 개국 2등공신으로 책봉되었다.
훤식(萱寔) 고려 육전(C)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918년 9월에 병부경(兵部卿)으로 재직하다 내봉경(內奉卿)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문률(楡問律)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918년 9월에 광평낭중(廣評郎中)을 제수받았는데 그달에 상주 아자개가 고려로 귀부할 뜻을 밝히자, 아자개를 맞이할 의식을 갖추기 위해서 구정(毬庭)에서 연습을 하던중 직성관(直省官) 주선길(朱瑄吉)과 자리의 높고 낮음을 다투다 태조가 이를 듣고 “사양은 예의 으뜸이 되고 공경은 곧 덕의 근본인 것인데, 지금 손님을 예절로 맞이하려고 장차 그 의식을 보려 하는데 문률과 선길이 위차를 다투니 어찌 공경하고 근신하는 것인가. 마땅히 변방으로 귀양보내어서 그 죄를 드러내라” 하여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주선길(朱瑄吉)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918년 9월 직성관(直省官)으로 상주 아자개를 맞기 위한 행사 연습중 광평낭중 유문률과 위차를 놓고 다퉈 대노한 태조에 의해 변경으로 유배되었다.
길환(吉奐)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고려전기 청주인근 출신의 인물로 928년 왕건이 견훤에 보낸 답서에 간단히 언급된 인물이다. 즉 연산군 지역에서 길환을 목베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길환은 친견훤의 정치적 입장을 보인 인물로 고려의 왕건에 의해 죽음을 당했음을 알수 있다.
김악(金岳)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A)명성(B)축성(D) 태조7년 924년 조산대부창부시랑(朝散大夫倉部侍郎)직에 있었는데 태조의 명을 받아 후당으로 사신이 되어 갔다. 후당황제 장종(莊宗)이 김악에게 조의대부시위위경(朝議大夫試衛尉卿)을 제수하였다. 943년에는 원봉성학사(元鳳省學士)로서 태조가 죽을 때 신덕전(神德殿)에 불려가 태조의 유조(遺詔)를 기초(起草)하였으며, 얼마 뒤 상정전(詳政殿)에서 국상(國喪)이 발표되자 유조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3대 황제 광종의 황권강화정책을 지지하여 손소(孫紹), 최행귀(崔行歸)와 더불어 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965년(광종 16)에 건립된 문경 봉암사(鳳巖寺)의〈정진대사원오탑비 靜眞大師圓悟塔碑〉에 의하면, 광종 4년(953)에 관등은 태상(太相), 관직은 수병부령(守兵部令)으로서 광종의 조서를 받들어 윤제(綸制)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876년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했던 김악(金渥)과는 연대상으로 다른인물이며, 백제의 김악(金渥)과도 역시 다른 인물이다.
백제의 김악이 고려에 사로잡힌 때는 태조 13년인데, 삼국사절요에 보면 태조 7년 고려의 사신으로 후당에 간것으로 되어 있다.
정악(廷#악17)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C)명성(B)축성(D)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학자. 930년(태조 13) 12월 태조가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학교를 설치할 때 서학박사(書學博士)에 임명되고, 학원(學院)을 창건하여 6부(部)의 생도들을 모아 가르쳤다.그뒤 학문을 일으킨 공로가 인정되었고 의과(醫科)·복과(卜科)가 증설되게 하였으며, 곡식 100석을 하사받아 이를 학보(學寶)로 삼아 학문진흥에 전력하였다.
왕신(王信)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B)축성(D) ?∼926(태조 9). 고려 초기의 왕족. 개성왕씨(開城王氏). 송악호족 왕평달의 아들이며, 왕식렴,왕육과는 형제지간이다. 925년(태조 8) 10월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조물성(曹物城)전투 뒤에 화의를 맺을 때 왕건의 당제(堂弟)로서 후백제에 인질로 보내졌다. 다음해에 견훤의 조카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이 옥에 가두었다가 죽이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927년 1월 시신이 고려에 보내지자 그의 동생 육(育)이 맞아들였다. 태조는 930년 원당(願堂)으로 안화선원(安和禪院:뒤의 安和寺)을 창건하였다.
왕육(王育)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B)축성(D) 송악호족 왕평달의 아들이며, 왕식렴,왕육과는 형제지간이다. 태조 10년 927년 1월 백제에서 참형당한 형 왕신의 시신을 맞이했으며,
광종때에는 정광(正匡)에 임명되었다. 황족으로써 대우를 받아 저택이 크고 아름다웠는데, 광종 12년 961년 4월에는 송악에 큰 홍수가 생겨 궁궐이 피해를 당하자, 궁궐을 수영(修營=고치는)하는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광종은 임시로 왕육(王育)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행훈(行訓)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조3년 920년 1월 강주호족 윤웅이 고려에 항복을 청해오자, 태조의 명에 의해 윤웅의 아들 윤일강을 경(卿) 행훈(行訓)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춘양(春讓)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D) 태조3년 920년 정월 강주호족 윤웅이 고려에 항복을 청해오자, 춘양은 낭중(郎中)벼슬에 있었는데 태조의 명에 의해 강주로 내려가 윤웅을 만나 위유(慰諭)하였다.
찬행(撰行)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조4년 920년 9월에 낭중(郎中)직에 있었는데 왕건의 명에 의해 변방 고을을 순시(巡視)하고 백성을 위안하고 무마(撫摩)하였다.
이언(利言) 고려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A)축성(D) 고려 오관산(五冠山 경기장단)의 중으로 920년 10월에 서경(평양)에서 돌아온 왕건이 이언을 왕사로 삼았다.
함필(含弼)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고려의 경(卿)으로 대신이었다. 경은 2품이상의 관리를 뜻한다. 922년에 진보(眞寶청송)성주 홍술(洪術)이 귀부를 원하므로 원윤(元尹) 왕유(王儒)와 함께 위유(慰諭)하였다.
재충(在忠)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D) 고려의 원보로 태조 10년 7월에 태조의 명을 받아 김락과 더불어 군을 이끌고 백제와 신라의 요충지인 대량성(대야성)을 쳐서 장군 추허조(鄒許祖)등 30여 명을 사로잡고 그 성(城)을 부수고 돌아왔다. 손행(孫幸)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B)명성(B)축성(D)
고려의 대상(大相)으로 태조10년 9월 백제가 고울부를 점령하고 경주에 다다르자, 신라는 급히 연식(蓮式)을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태조이 명을 받고 손행은 시중 공훤(公萱)과 더불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갔으나 때가 늦어 신라 황도는 이미 점령된 후였다. 이에 태조가 급히 기병 5천을 더해 원군으로 내려오자, 공산에 합류하여 견훤과 대결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능강(能康)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A) 고려의 경(卿=2품이상 대신)으로 태조 11년 2월에 대상(大相) 염상(廉相)과 함께 안북부(安北府)의 성을 쌓았다.
박권(朴權)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 11년 안북부에 새로 축성한 성에 개정(開定) 군사 7백명을 이끌고 부임했다.
양지(楊志)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C) 고려의 장군으로 태조11년 11월에 오어곡성(烏於谷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견훤이 가려뽑은 강병을 몰고 쳐들어오자 치열하게 교전하여 고려군 1천명이 전사하니 장군 명식과 부장넷과 함께 백제에 항복하였다. 이례적으로 태조는 크게 분노하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여러 군사 앞에서 조리돌리고, 저자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명식(明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고려의 장군으로 태조11년 11월에 오어곡성(烏於谷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견훤이 가려뽑은 강병을 몰고 쳐들어오자 치열하게 교전하여 고려군 1천명이 전사하니 장군 양식 및 부장넷과 함께 백제에 항복하였다. 이례적으로 태조는 크게 분노하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을 여러 군사 앞에서 조리돌리고, 저자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충인(忠仁)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 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1년 태조가 북계(北界)에 순행하여 진국성(鎭國城 平南 肅川)을 옮겨서 쌓고, 이름을 「통덕진」(通德鎭)이라 고친후 진두(鎭頭=진의 우두머리)로 부임했다.
언수고(彦守考)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 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2년 염상(廉相)이 쌓은 안정진(安定鎭 平南 順安) 성에 성주로 부임하여 북방의 변경을 지켰다.
장필(長弼) 고려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B)축성(D) 태조 12년 6월에 원보(元甫)에서 대상(大相)으로 승진했다.
흔평(昕平)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C)축성(B) 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2년 9월에 왕식렴이 쌓은 안수진(安水鎭)의 진두로 부임했다.
아차성(阿次城)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B) 고려의 원윤(元尹)으로 태조12년 9월에 새로 쌓은 흥덕진(興德鎭)의 진두로 부임했다.
제선(제宣)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B) 고려의 정조(正朝)로 태조 10년 8월에 새로 쌓은 배산성(拜山城)의 수비를 명받고 군사 2대(隊)를 거느리고 지켰다.
공선(公선)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B)명성(B)축성(C) 고려의 대상(大相)으로 태조 12년 12월 백제군이 고창군을 포위하였음으로 태조가 구원군을 이끌고 남진했지만,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백제의 강성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패배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신하들에게 물으니 공선이 나서서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마땅히 샛길로 갈 것이요, 죽령(竹嶺)으로 갈 수는 없읍니다”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아뢰기를, “신(臣)이 듣자옵건대, 군사는 흉한 것이요,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하니, 죽을 마음만 가지고 살려는 계책이 없어야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의 3천여 명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태조가 그 말에 따랐다. 유금필이 이에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태조가 승전후 고창군에 들어가서 유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경(卿)의 힘이다”라고 하였다.
서필(徐弼) 고려 육전(C)수전(C)정치(A)모략(A)명성(B)축성(C) 901(효공왕 5)∼965(광종 16). 고려의 문신. 본관은 이천(利川). 출생에 있어서는 아버지 신일(神逸)이 화살 맞은 사슴을 구해준 은덕으로 80세에 낳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벼슬은 도필(刀筆)을 거쳐 내의령에 이르렀으며 아들 희(熙), 손자 눌(訥)이 모두 재상을 지냈다.가문의 배경에 대해서는 개국공신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이천지방에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던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처음 관계에 진출할 때 도필로 나아갔다는 것 등을 보면 그가 정계에 등장할 무렵에는 그리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정치적 성격에 대해서는 광종의 정치개혁에 반대한 인물로 보는 견해와 친광종계 인물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광종이 쌍기(雙冀)와 같은 귀화중국인들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나섰던 것에서 보여지듯이 직언과 간쟁(諫諍)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들을 근거로 들고 있다.즉, 훈신세력(勳臣勢力)의 입장에서 광종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의 건의나 직언이 광종에 의해 전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고, 내의령이라는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만큼 중용(重用)되고 있었으며, 또한 임금과 신하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을 피력하여 광종이 추진해 나가던 개혁이념에 부합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이렇게 비판적이었던 만큼 임금의 개혁의지를 지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높이 등용되고 있었던 것이다.결국 그는 개국공신이면서도 광종과 밀착되어 임금의 정치개혁을 지지해주고 있던 인물로 보여지는 것이다.죽은 뒤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윤봉(尹逢)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C)명성(B)축성(C) 수안현 사람으로 고려 내봉성의 최응의 동료였다. 태조가 최응을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임명하자, 최응이 사양하여 아뢰기를, "동료(同僚) 윤봉(尹逢)이 신(臣)보다 나이 십년이나 많으니, 그 사람에게 먼저 임명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이에 태조가 윤봉을 광평시랑에 임명하였다. 관직이 내사령(內史令)에 이르렀고 삼한공신으로 임명되었다. 내사령은 내사문하성의 으뜸벼슬로 종일품 벼슬이다.
최준옹(崔俊邕)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동주 최씨(東州 崔氏)/철월최씨(鐵原崔氏)[동주는 철원의 옛이름]의 시조로 신라 개국공신 소벌도리(蘇伐都利)의 25대 손이다. 태봉국 수도인 철원을 근거지로 하였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때 태봉국의 벼슬직에 있다가 역성 혁명과정에서 왕건에게 협조하여 삼한공신에 임명된것으로 본다. 태조에 의해 개국벽상공신에 책록되어 벼슬이 삼중대광, 태사에 이르렀다.
이욱(李煜) 고려 육전(D)수전(D)정치(C)모략(D)명성(D)축성(D)
태안이씨(泰安李氏)의 시조로 본시 중국 송(宋)나라 사람이다. 925년(태조8년) 난을 피해 고려(高麗) 들어와 농서공(瀧西公)에 봉해졌으며, 그의 7세손인 기(奇)는 고려 광종(光宗) 때부터 태안(泰安)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후 후손 이천(李蕆)이 태안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고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태안(泰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신천호족 강기주의 딸로 태조의 제22비가 되었다. 태조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어릴적 요절한이후, 광종을 아들로 삼아 훈육했다.
금용식(琴容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C)명성(D)축성(D) 봉화금씨(奉化琴氏)의 시조로 태조의 사업을 도와 고려개국삼한벽상공신(高麗開國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식읍으로 김포를 사적(賜籍)받았다. 후손 금우공(琴遇工)대에 경북 동북단에 위치한 봉화(奉化) 상운면(祥雲面)면으로 터를 옮겼다.
김훤술(金萱術) 고려 육전(C)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C) 해평김씨(海平金氏)의 시조로, 본이름은 훤술이었으나, 왕건에게 김씨성을 하사받아 김훤술이 되었다. 고려개국시 공을 세워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해평군(海平君 현 경북 선산군)을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해평(海平)으로 하게 되었다. 시호는 장렬(莊烈)이다.
방계홍(房係弘)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남양 방씨(南陽房氏)의 시조로, 방계홍의 9대조는 당나라 8학사중 한명인 방준이다. 방준이 신라로와 남양에 정착하여 예학을 가르쳤다. 남양(南陽)은 지금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이고 고려초에는 당은군(唐恩郡)이라 불리었다. 방계홍은 삼한통일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아들 방의강(房儀康)이 금자광록대부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손자 진유(珍儒)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府使)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김홍술(金弘述)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C)축성(D)
동국여지승람 제25권에 김홍술(金弘述)에 대해서 적혀있길 모사태조(貌似太祖)라 하여 태조와 생김새가 아주 비슷하였다고 쓰여있고 태조를 대신해 백제와 싸우다 전사했다고 적혀 있는것으로 보아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팔공신중 한명이 아닐까 추측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팔공신은 전이갑,전의갑,전락,호의,김락,신숭겸등 6인이다.
진보성 성주 홍술(洪術)과 고려 마군장군 홍술(洪述/홍유(洪儒)의 초명)과는 다른 인물이며, 또한 의성김씨의 시조(김석/경순왕과 낙랑공주의 아들)로 잘못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길권(李吉卷) 고려(용구호족)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용인이씨(龍仁李氏)의 시조로 용구(龍駒 용인)의 토호(土豪)였고, 태조의 역성혁명을 부터 같이 하였으며, 특히 북쪽지역 옛 동예(東濊)지역(현 강원북부~함경남도)의 고부이오환(古扶伊梧桓)등을 정복하였다. 공으로 태조의 부마가 되었다고 만력년간고적(萬曆年間古蹟)에 전해진다. 삼한통일후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 太師)에 임명되었으며, 구성백(駒城伯용인)에 봉작되었다.
조맹(趙孟)/조암(趙岩)/조바우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A)명성(B)축성(C)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로 원명은 조암(趙岩)이다. 풍양현(현 남양주군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지맥인 독정산(獨井山)의 암굴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다. 당시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는 고려와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태조 왕건이 영해지방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후 휘하의 장군들을 모아놓고 중지를 모았을때 한결같은 대답은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것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이었다. 이때부터 백제정벌의 길에 올라 뛰어난 지략으로 고려통일을 이루자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리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했다.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암굴(巖窟)이 있으며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수호하여 온다.
장금용(張金用)/(長金用)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인동장씨(仁同張氏)의 시조로 옥산(玉山) 출신이다. 옥산은 현재의 경북 구미의 인동의 옛이름이다. 장금용은 고려 중앙군에서 활약을 하였다. 본성은 장씨(長氏)였는데 활을 잘 쏘아 태조가 친히 궁(弓)자를 더하여 장(張)씨를 하사하였다.<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삼한통일후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인동장씨 족보에는 신호위 상장군을 지냈다고 하나, 신호위와 상장군의 명칭은 삼한통일후 50여년후에나 등장하는 명칭임으로 잘못된것으로 추측하고, 장금용의 아들 장선(張善)이 금오위 상장군을 역임했는데 이와 연관이 있는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안동장씨 장정필의 원손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정예(鄭藝) 고려(강주호족) 육전(C)수전(C)정치(B)모략(B)명성(C)축성(C) 진양정씨(晋陽鄭氏)의 시조로 호(號)는 백곡(栢谷), 시호(諡號)는 영절(英節)이다. 진양(晋陽)은 강주일대의 지역이다. 후삼국시대에는 강주(康州)였고 고려 태조 23년(940)에 진주(晋州)라 개명했다. 정예는 고려초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 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 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 光祿大夫 門下侍中平章事)>
이대평(李大平) 고려 육전(B)수전(B)정치(D)모략(D)명성(C)축성(C)
강화이씨(江華李氏)의 시조로 고려의 무장이다. 중랑장(中郞將)과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역임였으며 일리천 전투후에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하음(河陰 강화)에 정착 세거(定著世居)하게 되자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화(江華)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가 후손이다.
홍규(洪規) 고려(홍주호족)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B)축성(C)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로 홍주(홍성)호족이다. 태조 17년 934년 9월 운주전투에서 백제가 예상을 깨고 대패하자, 공주 이북의 30여성이 모조리 고려의 깃발을 내걸었는데, 이때 가장 큰 세력인 홍성도 고려에 귀부했다. 이때부터 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역전되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홍규의 딸을 비로 삼으니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다. 홍규는 삼한통일후 삼한삼중대광 벽상익찬공신(森韓三重大匡壁上翊贊功臣)에 책록되었고, 해풍부원군에 봉해졌다.
홍유후(洪儒厚) 고려(홍주호족) 육전(D)수전(D)정치(B)모략(D)명성(C)축성(D)
홍주호족으로 홍규의 아들이다. 934년 고려에 귀부한이후 태사익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아들 홍욱(洪旭)은 문하시중 평장사까지 역임했다.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고려(왕족) 육전(D)수전(D)정치(D)모략(D)명성(B)축성(D)
태조의 제12비로 홍주호족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로 태자(太子) 왕직(王稷)과 공주(公主) 일후(一後)를 낳았다.
배은우(裵殷祐) 고려 육전(B)수전(C)정치(D)모략(D)명성(B)축성(D)
삼한1등공신 배현경(裵玄慶)의 아들로, 태조19년(936년) 배현경이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며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하고 나가자 죽었다. 태조가 부음을 접하자 가마를 멈추고 통곡하였다. 이후로 배은우는 높은 벼슬을 얻고 역시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최지몽(崔知夢)/최총진(崔聰進) 고려 육전(D)수전(D)정치(SS)모략(S)명성(A)축성(C)
907~987, 초명은 최총진(崔聰進)이며 아버지는 영암호족 원보 최상흔(崔相昕)이며, 천성이 총명,온화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대광 현일(玄一)에게서 유학과 역사를 배웠으며 천문과 점복(占卜)에도 능하였다. 태조(太祖) 7년(924) 18세의 나이로 태조에게 불리워 태조의 꿈에 대해 장차 삼한(三韓)을 통일 하게될 징조라고 해몽하여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태조의 측근에서 보좌하며 정치적 자문에 응하였다. 혜종(惠宗) 대에는 사천대 공봉(供奉)의 직으로서 혜종의 시해 음모를 예측하여 혜종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암살의 위기를 모면케 하였다. 정종(定宗), 광종(光宗)으로부터도 후대를 받았으나 왕권강화를 적극 추구하던 광종 말년에는 미움을 받아 한동안 폄출(貶黜)되기도 하였다. 경종(景宗) 5년(980) 내의령(內議令)의 직으로 복귀하고 성종(成宗) 원년 좌집정(左執政) 수내사령(守內史令)의 직위와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의 호와 함께 왕의 지극한 존숭을 받았다. 성종 6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증직하고 시호를 민휴(敏休)라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출신의 대표적 문신 관료이며 주로 국왕의 측근에서 정치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왕평달(王平達) 고려(왕족) 육전(C)수전(B)정치(B)모략(B)명성(A)축성(B)
개성왕씨로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의 둘째 아들로 母 민의(旻義)/용녀(龍女)/원창왕후(元昌王后)는 왕평달을 낳다가 산고로 죽었다. 형 용건(龍建)/용륭(龍隆)/왕륭(王隆)과 더불어 송악의 호족이였으며, 이어 태봉때까지 조카 왕건을 보필했다. 아들로는 왕식렴,왕신,왕육 3형제가 있었다. 삼한통일후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임명되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었다.
제궁(帝弓) 고려 육전(B)수전(C)정치(C)모략(C)명성(B)축성(C)
고려 개국 2등 공신으로 태조 13년 925년에 대상(大相) 벼슬로 조물군(曹物郡) 전투당시 고려군의 상군(上軍)을 지휘하였으나 백제군에게 패하였다. 그러나 하군(下軍)을 지휘하던 박수경의 활약으로 고려군은 승리하였다. 그해 8월엔 천안부도독(天安府 都督)으로 임명되었다.
은녕(殷寧)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3년 925년 조물군에서 백제군과 큰 전투가 벌어졌을때 박수경과 함께 하군(下軍)을 지휘했다. 제궁의 상군과 왕충의 중군은 백제군에게 무너졌으나 하군만이 독전하여 결국 승리를 하여 전공을 세웠다.
사도귀(思道貴) 고려 육전(C)수전(D)정치(B)모략(C)명성(C)축성(D)
벽진군호족 이총언이 고려로 귀부할 마음을 품고 아들 이영(李永)을 고려로 보냈는데, 왕건이 크게 기뻐하며 당시 대광(大匡) 벼슬이던 사도귀의 딸과 이영을 혼인시켰다. 이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방회(李芳淮)는 추밀원사(樞密院使)을 지냈다.
영준(英俊)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B)명성(C)축성(C)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 원년 918년 병부경(兵部卿)에 제수되었다.
조정(趙鼎) 고려(고창군) 육전(A)수전(C)정치(D)모략(C)명성(C)축성(C)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시조로 본시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왕 6년에 두 동생 조부(趙釜)와 조당(趙當) 그리고 절강성 사람인 장길(안동장씨 시조) 부자와 함께 신라로 넘어와 안동에 터를 잡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장길의 휘하무장으로 출전하여 백제군을 대파하는 전공을 세워 고려 조정에 무관으로 출사하였으며, 대장군에 오르고 삼한공신에 책록되었다.
조부(趙釜) 고려(고창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와 6년에 형 조정, 동생 조당과 함께 신라로 건너와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 황도로 올라가 무관을 지냈다.
조당(趙當) 고려(고창군)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D)축성(D)
당나라 출생으로 892년 진성여와 6년에 형 조정, 조부와 함께 신라로 건너와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 931년 고창전투에서 공을 세워 고려 황도로 올라가 무관을 지냈다.
배운태(裵運泰)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D)명성(C)축성(C)
태조가 역성혁명을 성공하고 고려를 개창한 태조 원년에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배현경과 일족으로 추측한다.
엄식(嚴式) 고려 육전(B)수전(D)정치(C)모략(B)명성(C)축성(D)
태조13년 당시 원보(元甫)직에 있었는데, 8월에 태조가 대목군(大木郡)을 행차하여 동서 두솔(東舌率)을 합쳐서 천안부도독(天安莩督)에 대승(大丞) 제궁(弟弓)을 사(使)로 하고 엄식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삼았다. 사(使)는 지방관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흔행(昕幸)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C)명성(C)축성(B)
태조 13년에 정조(正朝)직에 있었는데, 8월에 태조의 명을 받은 대상(大相) 염상(廉相)이 마산(馬山)에 성을 쌓고 안수진(安水鎭)이라 이름했으며, 흔행을 진두(鎭頭)로 삼아 수비하게 하였다.
선규(善規)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D)축성(D)
태조 14년에 보윤(甫尹 8품) 벼슬에 있었는데 8월에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신라왕에게는 안장을 얹은 말과 능라(綾羅), 채금(綵錦)을 선사하고, 아울러 신라 백관에게는 채백(綵帛)을 내려 주며, 군인과 민간인에게는 차(茶)와 복두(복頭)를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평환(平喚)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B)
태조 14년 원윤(元尹)직에 있었는데 11월에 태조가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주진을 순시하고 돌아와서 명하기를 "북번(北蕃) 사람은 얼굴은 사람꼴이지만 마음은 짐승이어서 굶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버리며, 이익을 보면 부끄러움도 잊으니 지금은 비록 우리에게 복종하여 섬기고 있지마는 마음두고 배반함이 일정하지 않다. 마땅히 지나가는 주(州),진(鎭)에는 관사(館舍)를 성 밖에 지어서 그들을 접대하라"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명한후 안북부(安北府)와 강덕진(剛德鎭)을 설치하고 평환을 진두(鎭頭)로 삼았다.
왕중서(王仲瑞) 고려 육전(D)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D)
태조 15년에 대상벼슬에 있었는데 후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재훤(才萱) 고려 육전(B)수전(D)정치(D)모략(B)명성(C)축성(B)
태조 17년 원보(元甫) 벼슬에 있었는데 태조의 명을 받은 대상(大相) 염상(廉相)이 통해진(通海鎭 평남 평원)에 성을 쌓게 한후 재훤으로 하여금 진두(鎭頭)로 삼아 수비하게 하였다.
왕철(王鐵) 고려 육전(D)수전(D)정치(A)모략(B)명성(B)축성(D)
태조 18년에 섭시중(攝侍中)이었는데, 그해 10월 임술일에 신라왕이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항복할뜻을 청하였다. 이에 태조는 왕철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등을 신라로 보냈다. 11월 갑오일에 신라왕 김부(金溥)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혔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 구경꾼들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일에 김부가 왕철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와 항복을 청하였다.
한헌옹(韓憲邕)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태조 18년에 시랑(侍朗)직에 있었는데 10월 신라왕이 항복을 청하니, 태조가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에게 명하여 신라로 회답하는 국서를 가지고 가게 하였다. 11월에 신라왕 김부와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형순(邢順) 고려 육전(D)수전(D)정치(B)모략(B)명성(C)축성(D)
진주형씨(晉州邢氏)의 시조로, 태조 18년(935년)에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되었다. 태조20년(937년)에는 석경당(石敬瑭)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왕규와 함께 축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후에 밀직사에 추봉되었다. 석경당의 후진은 거란의 신하를 자처하고 굴종외교를 펼쳤으나 건국한지 10년만에 946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강유영(康柔英) 고려 육전(A)수전(D)정치(C)모략(B)명성(D)축성(D)
태조 19년 원윤(元尹)으로... 이하 -略- 진씨사랑방에 오셔서 확인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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