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 지정 ( 최필규 ) 문경 봉천사 주지 상주함창문경 고녕가야 선양회 대표
1. 건국이야기
1 ) 옥려봉 회합
경자 7 년 3 월 3 일, 서기 1 세기 초엽 함창강 ( 咸昌江 ) 열두부족이 옥려봉 ( 玉興峰 ) 에 회합하여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제단에 모인 사람들은 본성인 함녕의 고로 (古露 ), 이안의 이로 ( 利露 ), 은척의 은로 ( 銀露 ). 상 주의 상로 ( 商露 ). 사량의 사로 ( 沙露 ), 낙동의 낙로 ( 洛露 ),화령의 화로(化露 ).농암의 농로(龍露 ).가은의 가로(加露 ). 문경의 문로 聞露 ),호계의 호로(虎露 ).용궁의 용로(龍露) 등 로(露)자 돌림자 로 이름지은 12 촌장들이다.
천지의 조화를 주관하는상제시여! 오늘 함창강 주변의 대소촌장이 모여 한마음으로 아뢰나이다. 강건너 서라벌 세력들을 물리치고 산너머 내려오는도적들을 제압 하여 함창강의 촌민들이 한마음 되어 나라를 세워 자손만대 창성 코자 하나이다. 신명이시여.오늘 저희들이 옥려봉 제단에 무릅꿇고 성배를 올리는것은 훌륭한 성군을선출하여 튼튼한 나라를 이룩하고자 하는 뜻을 고 하고자 함이나이다.
신명은 저희들의 뜻을헤아리어하해같은 아량으로살펴주소서!저희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조상대대로 살아온지 수 천년이지나
인구는 불어나고 외적은 시시 때때 침략하여 강산을 붉게 물들입니다.언제부터 강건너 서라벌족들이세를 키워 대처하면서 삼년이 멀다않고 전쟁이 일어나백성들심이 난폭하여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 습니다. 북쪽 산 너머에는 찬바람과 함께 말타고 창들고넘어오는도적의 숫자도 부지기수로 늘어나 아녀자들이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처지이옵니다. 이제까지 함창강 유역의부족끼리 부단히 싸웠지만 오늘부터 우리끼리의 다툼은 끝내고함창강 서편에 하나의 나라를 이룩하고자 하나이다.
신명은 오늘모인 촌장들의어려운 심경을 헤아리시고 이 고을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좋고 좋은 방안을 내리소서. 12 촌장들은 깊이 읍을 하면서 하늘의 가호를 빌었다.
옥황상제님의 구름수레가 하강한다는 옥려봉은 이곳 함창읍덕통리 뒷산의 낮으막한 봉우 리를 말한다.
2 ) 머리메 회동 열두 부족장이 모여 제를 울리고 간곡한 청을 하고 몇 달 후 그들은 다시회합을 하였다. 이번에는 옥려봉 에서 한마장 떨어진 윤직리 머리산에 모였다. 옥려봉에서의 간절한 서원을 떠올리며 머리산에 모인 열두 부 족장의 얼굴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결연함이 서려있다.고로(古露 )족장은 일찍이 부족민을 동원하여 낮고넓직한구렁에 많은사람들이 운집할수있는
동산을 조성했다. 그리고 한가운데 커다란 돌덩이를 운반하여 제레상으로 쓸 요량으로 장정들을 동원했다.상제님께 감사의제사를 올리고족장을 비롯한 많은 주민들이 절할 수 있는 동산 겸 제단을 만들 었다. 구릉이름은 머리메(山) 이고 가운데 안치하여 북두칠성을 새겨놓은 바위이름은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조상석(祖上石 ) 이라 지었다.
이 거룩한 장소에 오늘 열두부족이 각자시녀와 시자를거느리고 구세의 일념으로 모였다. 용 궁의 용로는 풍채도 울긋불하게 치장하고 건장한키에좌우시중을 대동하고 맨먼저머리산에올라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 았다. 가히 도읍할만한 지세인지 눈위에 손을 얹어 햇빛을가리며 가는눈을 뜨고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다.20 리 밖에 있는 용궁하늘에는 흰구름이 등실 흘러가고 있다. 용로가 주인으로 있는 용궁에는 회룡포가 있어 서리서리 태백산맥과소백산맥 을 휘감으면서 내성천이 흘러 낙동강에 합수한다. 뭐니뭐니해도 용로의 머릿속에는 물길이 사람이 살아 가는 근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용로의 가는눈으로 들어오는것은 하천이 어디서 흘러와서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고수량은 풍부한지 그것이 제일 관심사다.
보아하니 머리산 앞으로흘러가는 물은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마성면 진남교에서 주홀산에서 발원 하는 주홀수를 만나 머리메로 흘러온다. 머리메 뒤로 흘러오는 하천은 이안천으로 역시 속리산 언저리 형제봉에서 시작하어갈령재에서 발원하는 갈령수와이안면예주리에서 만나흘러오고있다.이 양대천인 영강과 이안천이 머리메를 돌아 5 리 아래서 한몸이 되어 퇴강의 낙동강까지 2십리를 더 흘러간다.
이만하면 사람이 먹고마시는물뿐 만아니라 농사짓고 마소를 키우는데 부족함이 없겠다고생 각했다. 아무래도 함창강 일대 수는 머리메를 중심으로하는함녕일대가 좋을듯하다고 속으로 어림짐작하고 있었다.한편 오늘 이자리가 수장을 뽑는 자리 라고 몇 달전부터 공고 했으므로 오늘 모이는 인사는 누구나 할것없이 포부와 꿈을 가슴에 안 고 있다. 로자신이 누구보다도 대권에 욕심이 있어 우격다짐으로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원가를 낚아채야겠다는 육단심에 벌써부터 얼굴에 열기가 후끈거린다. 용로가 지세를 충분히 접검했다는 듯 한 발짝 물러서면서 천하의 물길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남해로 들어가니 앞으로 만세의 번성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게거품을 물고 창찬한다.
뒤따라 오던 문경의 문로촌장이 작은키를 발돈음하여용로의하는 짓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다. 자고로 명당은 배산임수라 하지 않던가. 물길이 아무리 잘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북 풍을 막아주고 오랑캐들의 침략에 방어진지가되어주는 산맥이없다면 어찌그곳을일러 길지 라고 할 수 있으랴? 머리산 언저리에는 수백명의동남동녀가 열을하고 있는중에장정 30 여명 이 조상석을 질머지고 영치기를 외치면서발맞춰올라오고 있다.문로족장은 작은키에 잔뜩근엄함을 드리우먼서 길게 손을 한번 내젓고멀리 북쪽으로 막대기로 가르키면서 좌중을 호령 한다. 저기 태산준령의 백두대간이 뻗어오면서 오정산이맺히고 그뒤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동로면 천주봉이고 그 왼쪽은 사불산이지. 그 왼쪽은 조령산과 희양산이 이어지고 그 앞에 보이는 산이 이안면 뒤편에 있는 제약산이며 그 왼쪽이 뭉개미산으로 그 너머에 가은 농암이 있지, 그렇게 말한 다음 문로는 몸을 돌려 남쪽을 가리키면서 일장연설을 이어간다.
멀리 속리산줄기가 내려오고공갈못너머 천마산이 보이고 그 아래 천봉산과 노음산이 이어지며 정남에 우뚝솟은 것은갑장산이고 그 왼쪽은 의성의자미산이지, 그리고 동북방향에영주의 학가산까지 해서 모두이곳 머리메를 향해 읍을 하고있는 형국이야. 이만하면 배산의 조건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오정산이나 제악산국사봉만 해도 명산을 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조건이야. 이땅의 풍요롭고 위엄있는 제산을두루 아우르고 있는머리메산은분명 뭇 산이 경배 할만한 충분한 기골을 갖추고 있는 산이지,이로써 용로가 장담한 물길에다가 문로가 침을 튀겨가면서칭찬한 산줄기를 더하여 배산임수의 구비조건은완료되었다.
주위에는 조상석이 산정에 도착하였지만 영치기 영차의 고함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땅을 울리고 모여있는 사람들의 가슴까지 울렸다.자리에는 지난번 옥려봉에올라갔던 열두촌장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여 본성의 고로를 제외하고 모두 시동을대동하고
자리를 잡았다. 열두 촌장은 시동 뿐만아니라 청년들까지 동원 하여 한 사람 당 보통 100여명의 수행원을 대동하였으므로머리메 주위에는 본성사람까지합쳐 수천명의 사람들이모여들었다.
대부분 남루한 행색이지만눈빛만은 초롱초롱한 것이 한판 싸움을 벌여도 충분히 감당할 기세들이다. 문로가 산을 평정하고 자리에 들어가자 이번에는 이웃고을인 사랑벌의 사로가일어나서 들판을 점검하겠다고마른기침을 한번하고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사람이 모여살고 도읍을 정해서 국가를형성하려면 산도좋고 물만 좋아서는 부족하지, 아무래도 많은사람이 모여 살자면 제일 중요한 것이 식량이 풍부해야 하는데 함창들판이 얼마나사람을수용할 수 있을지 살펴보지 않으면 후해가 막급이라.우선 머리메 주위 동침마에서 이어지는 점촌.마성.용궁. 산양들이 많은 사람을 살릴 수가 있어. 가까이 사랑벌 들녘도 결코작은 것이 아니며 함창에서 병풍산으로 이어지는 상주들도결코 좁은땅은 아니지.서쪽으로 나아가면 은척.공검 등도 들판이 넓으며 상주로 이어지는 들에는 물이 적어 나락농사가 어려우면 공검에저수지를 만들면 물 문제는 해소되겠지.
병풍역할을 하는 소백산맥이 주위를 애워싸고 그 사이로내성천.금천.영강.이안천.북천이 흘러가며 넓은 들녘을 적셔주니 천해의 길지가 여기로고.이곳 머리메와 옥려봉을우리의소도역할을 하는 성지로 삼아이곳에 도읍을 삼았으면 천하의 운세가 도래할거야. 한가지염려되는 점은 물길이 발달하고 들판이 넓어 자칫 외적의 기습침략에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걸세.사랑벌촌장 사로가 함창고을의이점에대하여 강한의견을 먼저개진했다.
그럭저럭 고로족장도 자리에 임하고 조상석을 나르던청년들도 좌석 중앙에 돌을 안치하고뒤로 물러나 앉았다. 이어 40대중반의 호계촌장 호로가좌중을둘러보고 허리를 숙여 한 말씀을 올린다.지난 날 옥려봉에서의 결의에 이어 오늘 이곳 머리메산의 회합은 도읍의 적합성도 논할뿐 아니라우리의대표족장을선출하는 중요한 안건이 있으니 그에 대해 기탄없는의견을 제시해주기를 바란다는 인사를하고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어 가슴까지 내려오는 흰수염을 쓰다듬으며 은자산아래 은로족장이 천천히 일어서면서 좌중을 죽 둘러보았다.3 ) 고로왕 등극
오늘 우리가 이곳 머리메(山)에모인 것은 머리에가 이 고장의 중심인 끼닭이며 이곳을 조상 때부터 다스러온 본성의 고로족장이 오늘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산과 물과 들의 중심에 위치 하고 이곳을 다스러온 고로족장을 우리의 대표로천거하는바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신지? 사전에 상주의 상로,용궁의용로 등과 사전 상의가 있었으며 고로에게도 귀띔을 해 둔터라 별다른 반응 없이 상로의 재청이 이어지고 이안 이로족장의 삼청이 이어졌다.사랑벌의 사로는 은근히욕심이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세가 고로족장에게로 기우는 바 그대로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족장들을 제치고 사청을 외쳤다. 이어 용로와 화령의 화로족장 까지 가세하면서 만장일치로 대표족장으로 본성인 함녕의 고로족장을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미리 준비해둔 통돼지 10 마리 황소 3 마리를 잡아 그중 제일 살찐 부위를 도려내어 시루떡두말과 함께 제단에 올리고 제사를 올렸다. 모두 무릅을 꿇고 읍을 한 채로 고로족장은 흰 도포를 입고축문을 읽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함창강 유역에 사람이 살면서 전쟁과 고난을 딛고 일어서서 문명을 발달 시켰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족속은 먼 복방에서 이주해온 조상으로 시작하여 원래이곳에정착한 이들과 함께 살아왔다. 함창강 건너편에는 서라별의신라가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산너머 서쪽에는 비류 온조가 백제를 세워 성장하고 있다.죽고 죽이는 전쟁의 여파는 인류가 생긴이래 늘 있어온 일상인바 항상 임전의 준비태세를 게을리할수없는 것은 당연하다.
다행히 북쪽은 높고 험준한 산맥이 가로놓여 서북의 백제나 고구려가 함부로 넘볼 수 없지만 함창강 건너편에서성장하는 신라는항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비록 부족한 제가 여러분의 추 천으로 대표족장으로 뽑혔지만 열두 부족장은 두가대표족장라는 신념을 가지고나라일에협조해주기를 부탁드린다. 나라이름은 고녕가야라고 할것것이며 함창강 가야나루를이용하여 배를 띄워 여타 가야제국과소통하고 번영을 꾀할 지이다
. 배를 이용하면 안동까지 한 나절. 성주 성산가야까지도 한나절이면 도착하지만 수레를 이용하거나 마소를 이용하여 짐을 나른다면 최소한 3 ~ 4일이 족히 걸린다.그런만큼 함창강은 우리가야제국의 대동맥이므로 특히가야나루를 잘 정비하여 물류를 이동하고 군사를 움직인다면충분히 국세를 널리 떨칠 수 있을것 이다. 하늘은 오늘의 이 거룩한 맹세를 증명하시고 무궁토록지혜와 복락을 내리소서. 고로는 땅 위의 모래알처럼하잖은몸이지만 함창강 백성을 대신하고 이땅의 생령들을 대신하여일심으로 상제님전에 청하나이다. 이날 9 월 9 일을 기하여 나라이름을 고녕가야국이라 천하에 선포하고 수도를 함녕으로 정하고개국시조로 대표족장 김벽진 태조 고로왕을 선출했다. 이때가 서기로 42 년으로 주위의 신라는 서기전 57 년에 건국하였으므로 80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동시대에 건국한것으로간주한다.
이렇게 3 월 3 짓날 덕통리옥려봉에서 천제를 올린후열두부족장이 머리산에서 회합을갖고고로왕을 선출하여 고녕가야국을 개국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 현재의 함창읍에 소재하고 있는 옥려봉과 머리산에서 역사에길이 남을 고녕가야국의 역사
시대가 개막되었다.기록으로는 그 후 3 대 왕까지 사초가 남아있으며 신라에멸망당한 뒤 사민정책 ( 徙民政策) 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중지금의 영덕군영해면 괴시마을로 알려진 당시 지명인 사 도성으로 강제이주 당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손 중에서 고려말 찬성공의 벼슬을 한 김택이 출현하고 그의 사위가 유명한 가정 ( 嘉靖 ) 이곡이며 외손자가 조선성리학의 효시인 목은 ( 牧隱 ) 이색이다.
2.삼국사기
1)고녕가야와 3속현
그림6삼국유사 고녕가야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항창고녕가야에 관해 비교적자세하게기록 해놓았다.「고녕군은본래고녕가야국으로 신라가 이를 취해서고등 람군으로 삼았다.한편 고릉현이라 불렸다.속현이셋 있으니 첫 번째가 가해현으로 원래는가선현이였다가 경덕왕이 개명을 해서 지금은 가은현이라 부른다.둘째는 관문현으로서 다른이름으로 관현이라 고도 했으며 경덕왕이 개명을 해서 지금은 문경현이라 부른다. 셋째 는 호계현으로 호측현이라고도불렀다.
경덕왕이개명하여 지금 그대로호계현이라 부른다! )」고 삼국사기에 적시되어있다.이를 보면 함창의 지명변화와 그 주변지역의 지명변천사까지도 자세히 서술하 고 있다. 특히 함녕, 항창, 가은, 문경,호계지명은 지금도 그대로사용하고있으며 호계현은 지금 호계면으로 변하였으며 필자의 현주소지이기도 하다.가은현 역시 필자가 처음출가한 봉암사의 주소지 이며 가은이라는 지명 역시불교와의관계에서 변천되어왔음을 유추 할 수 있으며 지금은 가은읍으로 변했다. 문경현은 문경세재로도 유명하며 관현과 관련해서는 제 1 관문에서 부터 제3관문까지 새재에 지금까지설치되어있으며 지금은문경읍이되었다.
이를두고 이병도는 함창고녕가야는 여타 가야연맹과멀리떨어져 있으므로 진주고녕가야를 임의로 설정하여 그렇게교과서에 실 없으니 하루빨리 시정해야 할 과제다.
2 ) 사벌국은고녕가야국의신라식 지명이다.
고녕가야는 고로왕 마종왕이헌왕 3왕만 사료에 기록되어 있으며ad248년에 사벌국을 멸하고몇해 뒤 사벌주 호민80호를 사도성으로 이주시켰다는 기사가나온다. 신라가 고녕가야를 멀하고 사벌국이라 불렀는지 아니면 사벌국이 독립적으로있었는지는 더 연구해봐야 안다.필자의 생각으로는 신라가 고녕가야를 나서 신라 언어로 사벌국이라 칭명한 것이라 사료된다.
그 이유로 사도성으로 확실시되는 영덕 괴시마을에서 함창김문일족인 김택선생이 조상대대로 살았다는 사실과 부인은 영덕
영해에 묻힌 사실이다.
다른 예로 우리가 발해라고 하는 국명은 당나라에서 칭명한것이고 발해의 원래 이름은 대진국이며 발해는 승전국에서 패전국을 하대한 용어다.또 다른 이유로 고녕가야국에 비해 사벌국에 대한 기록이 거의 유명무실하다. 신라말기 박언창을 사벌국왕으로 칭했으며3~4세기에 나오는 사벌국 내용은 없으며 전후 내용은 다분히 고녕가야의 이칭 일 충분한개연성이 있다.
현재 함창과 사벌면은 같이 붙어있으며 낙동강을 축으로 함창은 영강과 이안천이 합수하는 곳이며 사벌국으로 유추하는 병풍산주위는 남천과북천이만나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곳으로 두 지역의 직선거리는 불과10km에 지나지 않는다.아마 신라가 이들을 병합하고나서 상주함창지역을 서라벌처럼 신라언어로 칭명하고 나서나라국자를 붙였을 개연성을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인들의 학명이나 이론은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우리사료에대해서는 조금도 융통성을발휘하려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사료에 대해서 근거없는불신론을 재기하는것을 들여다보면그 뿌리는 일제총독부판 조선사를 수용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고녕가야는 사료상 1세기 초에 건국되어 3세기 중엽에멸망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2천여 년 전 찬랕한 문명을개척했연성이 충분한데도사료의 상당부분을 인위적으로처분하거나 아니면 전쟁와중에소실되었다.다행히 남아있는 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기혹을검토하면 고녕가야는200여년 간 건재했으며 그후 신라 첨예왕 대에 멸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근래들어함창고녕가야사에 대해 무자비한 파괴작업이 진행되었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고 무시할 수없는 사료와 사적이전해온다.
3)왕릉정비작업
사료로는 고녕가야기록이 삼국사기 권34지리지. 삼국유사5가야조2). 고려사.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전해온다. 조선시대 선조임금과 숙종임금 때에는왕명으로 고로왕릉을 정비하라는조칙이 내려졌다.현재 고로왕릉과 왕비릉이전해오고 있으며 후손들에 의해 주변도 말끔히 관리되고 있다. 왕릉에서 직선거리1.5km 떨어진오봉산에는 수많은 고분이도굴된 상태로 흩어져 있다.
그것이 자그마치700여기가 되며 대부분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있다. 책임을 갖고관리 해야 할 정부나 지자체 그리고 국사학가 철저히 외면한 채 현재까지 내려왔으니 왜 이런 야만의 상황이 발생했는가?파괴된 고분은 오봉산만이 아니라병풍산에도 지표조사된 것이1000기가 되며 조사되지 않은 것까지 합치면 1500여기에 달한다고 한다.
그 외에도 경천대 맞은편 구릉지,마공리고분군 등 이루 해아릴 수 없는 고분들이 일제이후도굴되고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일제 식민학자를 비롯하여 그들의사주를 받은도굴범들에 의해 유린당한 상태로 현재까지 방치되 상태다.?수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고굴되고 도난당한 유물들이 어림 잡아도100만점은족히 되지 않겠나하는 추측을한다.
그 유물들을 모두 전시하려면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규모가 필요하지 않겠나하는 말들이 오고간다.
4유물 유적.
2천년 전 열두 부족장들이 모여하늘에제사를 지내며 축원을 올렸던 옥려봉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옛 재단이있던 산정에 올라가면 일제 강점기 인기가요'사의찬미'로 널리 알려진 윤심덕의 연인인 김우진의 조부이며 김성규의부친인 문경의 동포 태생 김병욱의무던이 있다.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고전라도 장성군수를 지낸 김성규는괴산 연풍현감을 지낸 부친 안동김문 김병욱의 산소를 화려하게 조성하였다. 구 한말 안동김씨의 세도에 힘입어 고녕가야의 성소로 열두부족이 하늘에 제사지낸 이후 면면히 이어온 자리에 무덤을 쓴 것이다.
현재 원래의 재단은 뒤로 밀어내고 김병욱 무덤이 왕릉만큼이나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다.옥려봉 옆봉우리로 옛날 열두 부족장이회합을 하고 족장을 선출하던 머리메(山)는 찾는이없이 잡초가 우거녔지만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다.산정에는 거대한 돌은 아니지만 아담한 반석이 북두칠성을 닮은 구멍이 파인 채 수천년의세월을 지키고 있다. 이 돌을 지고 온다고 수십명의 장정들이영치기 영차를 외치면서목도를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이돌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얕은 산의 형태는 분명 조산이라는 느낌을 가지게끔 한쪽 언저리는 원래의 모습이지만 반대쪽은 인위적으로 쌓아올린 흔적이 역력하다. 지배층을 비롯 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합을가지고 연회를 배풀기 위해 머리산 공사를 대대적으로 했던것이다.
어힌시절 이마을에서 자란최경덕씨의 말을 빌리면 초등학교소풍은 주로 이곳 머리산으로왔다고 한다. 한해는 머리산 그 다음해는 옥려봉으로 번갈아 가며 어린시절 소풍을 갔다고한다. 그 시절 동네 꼬마들과 소를 몰고 머리산에 와서 뛰놀다 보면 조상석 근처에 쿵쿵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속이 비어있어 울림소리가 났다는 것인데 아마도고분이었을 가능성을유추할 수있다. 그후에는 쇠 꼬쟁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수명씩 짝을 지어 다니면서 들락거렸다고 한다. 그들 역시 도굴꾼들로오봉산 고분을 뒤지던 무리들의 일부였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찾는이 없고 아이가 귀한 지방 도시답게 머리산으로 소풍오는 학생도 없다.쓸쓸한 머리산 언덕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 수십리가 그림처럼 눈에 들어온다. 분명머리산에는 고녕가야의 우두머리 산이었음이 분명하다.
1)왕릉과 왕비릉
창의 중심주택지인 증촌리에는 고로왕릉이 잘 정비되어 있다.주택지보다는 30여m 높은 위 치에 모셔저있으며좌측 300여
m 지점에는 왕비릉이 조성되어있다. 왕릉은 함창읍의 중심지로 멀리 우측에 있는 제악산 줄기가 감고 내려와 기운맺흰 형
국이다.
조선시대 선조임근 당시 묻혀있는 비석을 발견하고 왕명로 정비를 하달하였다. 그후 숙종때에는 묘역을 더 조성했으며 근래까지 능지기가 능을 보호하면서 살았었다. 능지기라고 하지만 족친 가운데 외로이 살거나 집안이 어려운 사람들이능과 관련된 전답을 경작을 하면서 능을 관리하는 정도로 동네 동네아이들에게는 위험스르운 존재가 아니라 친근한 아저씨로 여겨젔다.
왕릉은 수십년 전만해도 동아이들의 놀이동산 이었다. 온동네 아이들이 이곳에서 썰매를타고 숨박꼭질로 해지는 줄 모르면서 어린시절을 보냈었다. 증촌리라는 한자지명이 생기기전에는 이 동네를 일러 징거ㄹ0미라고 불렀다.찍부터 이곳을 중심으로사람
들이 모여살고 나라가 처음 발생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이같이 전해오는 가야왕릉으로는 김해 금관가야의 김수로 왕릉, 허황후릉.그리고 마지막 왕인 산청군수동면에있는 구형왕릉이 있으며 더불어 고녕가야 고로왕 내외분의 릉이전해오고있다.
왕릉주위 함창읍내에는 가야라는 상호를 단 가게들이많이 보인다. 가야식당.가야주유소.가야카쎈타.가야농장,가야농기구 등 누구의 지시나 압력 아니라 자연스레 내려오는 고녕가야에 대한 무의식의발로다. 그뿐 아니라 가야리, 가야정, 가야나루의 지명도 지금껏 전해온다. 이것이 어찌 우연이나 인위적으로 작명했다고하겠는가?
2)성혈석
징거래미 동네를 벗으나오봉산고분군 아래 감나무밭에는거석에 구멍을 새긴 구멍들이 수십개 박혀있다. 오봉산 북쪽면에있는 구멍들은 감나무밭 가운데 있으며 비교적 평평하고 각진 거석위에 크고 작은 구멍이283 개가 새겨져 있다. 무게가 100 톤을 훨씬 웃도는 거석으로 가로 5 m. 세로 3 m. 높이가 낮은곳은 1 m, 높은곳은 3 m 정도다.바닥표면은 평평하여 재단으로 사용하여도 충분할 규모다. 거석에 뚫어놓은 돌구멍이무엇을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떤뜻으로새겼는지 의견이 분분 하다. 하늘의 별자리라고 하는사람도있고 오봉산의 고분위치를그려놓았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재단으 로사용 하면서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의미의 표를 했 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시기적으로 어떤이는 청동기시대일것이라고 하고 어떤이는고녕가야의 산물로 고분들과 각별한 관계를 갖고 있을것이라는주장
을 내놓았다. 가 야시대 사람들 인식으로는 사람이 죽으면북두칠성으로 회귀한다는벌 신앙을했을 개연성이 짙다. 북극성이나 북두칠성 등별자리를 새겨 조상들의 승천을 빌었을가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구멍돌이 오봉산에만 20 여개 있으며 고녕가야권역으로 표기되어 있는 호게. 문경, 가은에도 즐비하다. 특히 금천이 시작되는 산양에서 산북면 서중리 주암정까지 하천옆으로 20 여 개가 흩어져 있다. 구멍돌을 성혈석이라 부르기도 하며 함창 뿐아니라 5 가야에 들어가는 함안과 고령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특히 함안 박물관 마당에 전시되어 있는 성혈석은 무덤 덮개돌에 새겨진 벌자리가 특이하다. 판석용으로 구멍을 새긴 것 인지 아니면 구멍이 새겨진 돌을 우연히 판석으로 사용 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분 덮개들의 목적을가지고 제작하지 않았겠냐는주장이 더 일리가 있다고 본다. 역사사료나 유물유적은 제작자 의 의도가 개입됨을 알수 있다. 이를 두고 후대사람들이 건강부회격으로 짧은지식으로 선불리 재단하여 재작자의 의도 를 무시하는 경향을 가끔본다. 이는 필히 경계해야하며 당시 상황지식도 갖추지 못한상태에서 학자라는 권위의식에 취해 진실과 사실을 호도하지 말아야한다.
함창 외 여타 가야국에도 이러한성혈석이 전해오고 있으며 가야의 공통된 유물로 사료된다. 가야유적의 공통점으로는 성혈석 외에 무덤을 산능선에 안장하는 것, 낙동강을 축으로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연꽃이번성했다는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3 ) 남산고성
오봉산 성혈석과 고분군을지나가면 남산고성이 나온다. 요은즘은 답사하는 사람을제외하고는 남산고성을 찾는이가 거의없을 만큼 세인들의 관심 밖이다. 남산고성은 오봉산 끝자락에 위치 하고있으며 고분군과 이어지는 곳에 낙동강을내려다
보고 반대쪽으로는 함창읍과 고분군을 바 라보고 있다. 포곡산성과 태메성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어 딱 부러지게 한쪽 이름을 선택하기에는망설여진 다. 오봉산 끝자락의 두 봉우리를 감싸면서 가운데 분 지 지역에는 군영 자리와 우물자리가 지금까지 혼직을 드러내고 있다.
산성둘레 길이는 2 km 내외이며 주로 흙을 이용한 토성이지만 간간히 돌을 섞어 쌓아올린 흔 적도 있고 치성도 몇 군데 지어져 있다. 시기적으로 고녕 가야 시기라고 예상하지만현재학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삼한시대나 삼국시대라고 걸른내려놓은 상태다.
삼국시대와 고녕가야가 다른 시기가 아니며 같은 시기에 출발했기 때문에 딱 잘라 구분하는 학 계의 판단에는 석연치 않는 복선을 느낄 수 있다. 억지로 함창고녕가야를 부정하려면 그에 준 하는 근거를 제시해하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사료와 사적이 명명백백한것을 부정하려면그와 대비되는 다른국가나도시에도 그에 준하는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것은 무슨 방식을 동원하더라도 삭제하려하면서 일본서기의 것은 아닌것도억지논리로 삽입시키려는 식민사학자는 추해야한다. 남산고성은전체적으로 두 봉우리를아우르면서성벽혼적이 뚜렷하며 간간히앞뒤 마을과 도로사정에 의하여 멸실된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 윤곽은 확연하다. 나중에시설된것으로 추측되는 봉수자리는 봉우리에 마련되어 있으며이는훨씬 뒤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예상된다.가야시대의 산성은 고분을지킬 뿐 아니라 왕을 비롯한 지배층이 거주하고 있는도읍을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오봉산의 남산고성 외 여타 가야지역으로 함안, 고령. 성주, 창녕에도공통적으로 산성이 고분군과 붙어있다.
4)공갈목은고녕가야의저수지다
머리산 회합에서 용궁의 족장 용로가 상주함장의 수량이발달하였음을 말한 말미에 저수지가 필요함을 역설했었다 .머리산의 회합이 있은 후 축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갈못은 비록 규모 가 축소 되었지만 지금까지 그 유지를 간직하고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물막이둑길이가현재단위로 800여 m 둘레가 10 여 km 나 된다. 지금은 일제의 식민정책인 조선지맥끊기와 근대화과정에서 식량증산정책으로 못 을 메우고 논을 만드느라 본래 면적보다 많이 줄어들 었다.
근래 발굴과정에서 삼국시대 목조 물막이 등 여 러 가지 목부재가 발견되었다. 저수지 득의 축성방식은 낙엽과 황토를적당히 배합하여 물새기와 못터짐을 예 방하는축조방식을체택했다. 이러한 축성방식은 일본의 협산 저수지 축조방식과 흡사하며 그것은 바로 고 녕가야의 선진기술이 어떤 형태로든바다를 건너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얼간이 식민사학 자들의 주장을 빌리자면 왜의 선진기술이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를 지껄 인다. 공갈못과 고녕 가야의 관계에 대해서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어원을 가지고 자세 히 설명했다. 3 ) 공갈이라는 용어는 고녕가야에서 음운이 번화했다고 주장한다. 고녕이 고닝으 로 변했다가 다시 공이 되었으며 가야가 갈로 변했다
는 것이다. 고녕과 공은 크다는 의미며 가야와 공갈은 물웅덩이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를 합쳐 큰 저수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설명 이다. 단재 신채호의 고녕가야와 공갈못 관계성의 음운물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념가야와 공갈의 연관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5 ) 병풍산의 동곡소리 들린다
병풍산은 상주시 범성리에있는산이며 지표조사 된 고분이 1000 여기, 조사되지 않은 고분이 약 500 여기가 전해온다. 화장장이 있는 병풍산뒤편으로올라가면 파해처진 무덤이산능선을축으로 즐비하게흩어져있다.족히 100 여기가 화장장뒤편으로 산재해 있다. 동굴형태로 파헤 처진 고대 고분들이 황망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혹은 엎구리가 터진형태로 방치되어있다.
필자는 ' 21 세기의 야만'을 상주시 병풍산에서처절하게확인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산소 자리는자리는 주로 능선을 피해 남향으로 섰으며 뒤로 바람막이 언덕이 없으면 인공으로 조성하였다.
그래서 능선에 있는고분을 들어내고 고분을 축성한 돌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무덤의 축대 를 쌓은 모습을 심심찮게 불수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덮개석이 파괴된 수백기의 고분들이 아무렇지도 많은 듯 노출되어있다. 반면에 병풍산 앞쪽 헌신동 쪽에서 올라가면 봉분은 그대로 둔 채 무덤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도굴한 무덤이 수십기 방치되 어있다. 그야말로 21 세기의 야만을 상주병풍산에서 적나 라하게확인하는 순간들이다. 지역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상주 병풍산이나 합창오봉산에서의 도굴은 70 년대 중 반까지 진행되었으며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고 한다. 심지어학생들 마저도 심심찮게 무덤에 들어가서도굴범
들이 남기고 간 토기나 청동제 칼 등을 수거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환두대도를 단돈 2 만원을 받고 전당포에 팔 아 넘겼다고 한다. 당시 고분에서 나온 평범한 토기는 너무 흔한 물
건이라 돈으로 값을처 사 가지 않았다고 한다. 집집마다 개밥그릇이나 비누곽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가난한 집안에서는 심
지어 요강으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마을집에 서너달 씩 방을 얻어놓고 낮에는 빈둥거리다가 밤만 되면 산에가서 도굴울 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장날이면 매장도굴품들 을 가지고 나와서 거래를 하는가 하면 몇주일 단위로 주기적으로 마을을 돌면서 도굴물건들을 거두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턴이는 무덤에서 나온 물건중 귀한 것은 가져가고 버려 둔 것을 리어커에 싣고 군청에 갖다주었다고 한다. 군청 창고에 너무 많은 부장품이 쌓여있어 공무원들이받기를귀찮아 했다고 한다.80 년대 초까지 서울 인사동의 지하 출토 유물의 70 ~ 80 % 가 상주함창에서 올라간 물건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랜 기간 함창 출신 인사가 인사동의 한국고미술가 협회장을 맡았으며 그의집에는토기류 등이 3 층 베란다 까지 꽉 차 있었다고 전한다.
한편 다른 지역보다단속이허술하여 매장품 도굴의 실장이 상주합창고분군이었다고 도굴꾼들 사이에는 정평이 나 있었다.
이 밖에도 여러 제보를 종합해 보면 상주와함창지역의매장품 도굴과 밀매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심지어 고위경찰간부들의 이취임 때에는 으레히 매장 금동제품을 수수했다면서 비밀로해달라고 귀띔해주는 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지역에서 선대부
터 장례업을 하는 70 대 초반의 어느 장례사 말을빌리자면함창과 사벌근교에서 금관이출토되어 밀매하는현장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뿐 아 니라 함창지역의 고분도굴로 유치장에 몇 번 갔다 온 사람의 입을 빌리면 경찰이 적극적으로 단속하지 않았으며 밀수사건에 연루되었거나 도난신고가 들어오면 수사를했다고한다. 그 사 람은 직접 금관을 도굴하여 처분을 하려는데감정사 로 참가한 고고학 교수가 뇌물을 먹었는지 가짜라고 하는 바람에 돈은커녕 물건마저빼앗겼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 이말외 에는 일체 입 을 열지 않았으며 말할 수 없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 으로 보었다.
지금이라도 교계에서 고녕가야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고학자료를 연구할 의지가 있다면 이들을 잘 활용 한다면 상당한 진척이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뿐 아니 라 경북대박물관, 영남대박물관 등에소장 되어있는 봉산과 병성산 4 차선도로개통 때 수습한 유물만 제대로 연구해도 큰 소득이 있으리라생각 한다. 단지 일본식민사학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계의 추한 기득권을 포기해야 바른고고학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2022 년 처음으로 상주와 함창의 도로공사가 아닌 정식 고분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물론 99 % 난당한 고분을 대여섯개 선정하여 조사한 결과 그나마 50여점의 철기와 토기등이 발굴되었다. 관계자들의 발표로는 6세기 이후 신라의 유물이므로 고녕가야와는 관계없는유물들이라고 한다.이발굴과정을 더듬어 보면 여러사람들의 제안이 있었겠지만 2 년전 국내 유수의 원 로학자들과 고고학관계자들이 대거 오봉산을비롯한 고녕가야 유적을 여러번 답사하였다. 상주시 관계자들과 박물관장을 비 롯한 관계자들도 동행하였다
.그러한원로학자들의 동참과지역정치인들의 건의로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발굴에 착수하 였던 것으로 짐작한다.
14 오봉산 토기
5.식민사학의 후예들
1)고학자 부재론
조선총독부 사학자들과 그 후예들이 여태껏 함창고녕가야를 부정하는 여러가지 학설을 제지만 그 내용들은 설득력이 전혀없고 논리가 빈약하다. 마지막으로 부정하는 근거로 아직 고고학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면피성 핑계거리를 내놓았다. 사료와 유물유적이 많아도 아직 고학자료가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함창이 고녕가야의 옛 터전이라고 확정하기 어렵다는 지난번 전라도 광
주에서 가야학술 발표과정에서 수로왕릉은 수로왕의 유골을 수습하 하였으므로 수로왕릉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는 가야사 전공 교수의 발언이 화제가 되 었다.
수천기의 고분이 도굴되도록 여태껏 방치한 것은 보존과 연구를 최선두에서 지휘하고책임져 할 사학계를 비롯한 정부의 책임이다. 상주의 유물성격이 신라와의 개연성이 있었다면 그들은 벌써 연구에 착수했을 것이다. 행여 가야 유물이 발견되어 발표된면 그들이여태것주장하고 분칠한 정한론 (征韓論)의 근거인 임나일본부논리가 와해될까 두려웠던것이다. 그들은 상주의고고학자료들이 한시라도 빨리 그리고 전량이 도굴되고 유출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상주함창에서 가야 유물이발견되어 발표되는 순간일제의 식민사학으로 박사가 되고 교수 가 되어 명리를 쌓아온 기반이 와르르 무너진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떻든지 가야의 유물이 발견되어서는 안되고 설사 출토되어도 그렇게 발표할 수 없는 태생적 모순을 안고 있다. 같은 철제 마구와 투구가 발견되었만 함안에서 출토된것은아라가야 유물로 분류하고함창오봉산출토는 삼국시대 유물로 분류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상주문경에서는 구석기, 신석기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구석기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 는 한 번도 공백없이 사람이 살아왔다. 고녕가야 유물을 진짜 발견 못했는지 발견해도발표를못하는 건지 그것은 예단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료에 완벽히나와있는함창고녕가야를 억지논리로 부 정하려는 사람들에게 객관적인 고고학 자료의 판단을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유물의 객관성을 기대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순사들에게 조선을위해 정의를실천
해주기를 바라는것과 조금도다르지않다.
만에 하나 고녕가야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나올때까지 예산을 투입하여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수순이다. 고고학자료 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중에서 고녕가야를 삭제하는 것이 가당한지 현재 가야학자들에게 물어본다. 위지동이전의 구야한국의 자료가 김해에서 발견되어김해를구야한 국이라고 규정했는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안라국의고고학자료가 함안에서 발견되어함안을 안라라고 규정하는지 김태식이나 이영식에게 물어본다.
신라가 서라벌에서 출발 하여 낙동강 상류인 상주를병합하기까지는 수백년의 시간이 경과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 라가 상주함창세력을침공하여 통합할 때역사서에나와있는객체가 호로국도 사로국도아닌바로 고녕가야국인 것이다.
그림 16 김택 산소
2 ) 이병도의실증사학은매국사학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현재까지 살아있는 고녕가야역사의 실체를 외면하고 삼국지 위지동이전 진한조를 뒤 적거리며 ' 호로국'이라 했다
가 일본서기의 어떤 지명을 대입시길까를 놓고 고민하고있다. 40 년 가까이 피식민지로 지낸결과 국가의 역사, 철학, 건
국까지 부정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자력 이 아닌 타력에 의해 일제 식민지 굴레를 벗어났지만 오랜기간 타성에 젖은 사고를 여태껏 떨처내지 못했다. 속담에 ' 혼빠진할망구 강건너 딸네 집 처다보는' 격으로 피식민지에 살았는지 식민사학에 길들여졌는지도 인식 못하고 오로지 본능적인 명리만 쫒아갈 뿐이다. 오봉산아래 금구재 ( 金龜齋 ) 라는 정자가 관리가제대로되지않아 잡초 우거진 가운데 우두커니 있다. 그 현판 첫 구절에 ' 고녕지남 검호지북 ( 古寧之南 儉湖之北 ) 험준한 언덕에 한 산이있어 오봉산이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금구재는 안동권씨 문중의정자로써 조선시대 지어졌으며현판역시 그때 만들었다.
위치상 오봉산 아래 함창 즉 고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현판의 글귀가 제 시하는 것은 이 고을 사람들의 인식에는 고녕가야라는 의미 가 의식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조작이니 식민이 니 하는 말이 나오기 전부터 고녕가야는 이 고장의 정체 성임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고녕이 가짜니 거짓이니 식민사학이니 하는말들은일본이 우리를 점령하고나가통세의 바턴을 이어받은 이병도가 억지논리를 만든 이후에 비로서 벌어진 일들이다. 그림 15 오봉산출토 투구 6 사도성과 고녕가야국 사민정책 1 ) 김택 무덤과 목은 ( 牧隱 ) 부자 ( 父子 ) 지금은 사벌국면으로 지명이 바뀐 구(舊) 사벌면 덕가리에 가면 사도성인 괴시마을에서 일생 을 보낸 뒤 부인은 그곳에 묻고 본인은 조상의 땅에 힌 김택의 묘소가 있다.
그는 고려말 찬성공 벼슬을 지냈으며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에서출생하여 영양남씨 집안의 딸을 부인으 로 맞이하였다. 영덕지방에서 명망높은 거유로 그의사위는 고려말 문장가가정(稼亭) 이곡이며 외손자는 조선성리학의 비조 목은 ( 牧藤 ) 이색이다. 성공 김택이 영덕의 괴시마을에 살다 죽어서 함창에묻힌 것이나 충청도 서천을 본관으로 하는 이곡이 김택의 사위가 되고 이색이 김 택의 외손이 된 사연은 간단치 않다.
2)사민정책지 사도성은 영해면괴시마을이다.
신라 유례왕시절 사벌주 호민 80호를 사도성으로 이주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4).당시 사도성은 왜구의 침입이 많은 해안지역으로 성을 수축했다는 기록이 수차 등장한다.그 기록. 들을 종합적으로 유추해보면 동해안 에서 왜구가 출물할 만큼 들녘이 넓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 으로는 영덕영해 지방을 꼽을 수 있다. 동해안에서 포항 위에있는흥해지방이 들이 넓고 물산 이 풍부지만 경주와 근접 거리에 있다.
그에 비해 영덕영해는 경주에서 비교적 멀리떨어져있으며들이 넓고 내륙으로는 안동으로 이어지며 북으로는 울진으로 이어진다.영덕군 영 해면 괴시마을이 당시의 사도성으로 확실시 되며 그곳에 사벌주 호민 즉 지배층 80호를 집단 이후 시킨 것이다.
그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부흥운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지배층을 격리시킨 것이다. 함창김씨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그 당시 귀족은 영덕의 사도성뿐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천 타천으로 전국 열두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로 알려진사도성이다. 이주 후 그곳에서 함창김씨들이 천년이상 살았으며 지금 은 김택의 처족인 영양남씨 들이 득세하고 있다.
당시 고려말 김택의 인물됨은 영남일대에 자자 하였던지안동에서 벼슬살이를 하든 이곡이 김택의 명성을 듣고괴시마을로찾아들게 되었 다. 김택은 장년이고 이곡은 청년으로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몇일간학문을논하면서 의기가 투합하였다. 마침 김택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었으므로 사위 장인이되기로했다. 이후 3 년간 이곡은 김택가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이색을 생산한 것이다.
후에 이곡은 원나라에서 시행한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고려에서는 사관으로 발탁되고저서로 '죽부인전'이 있다. 그는 처 가의 본향인 함창에서 잠시 머물렀으며 현재 이안면 목가리에 가면 그가 심었다는 느티나무 고목이 건재하다.
목은 이색은 여말 선초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비판하여이방원세력으로 부터 목숨의위협을 받았다. 이성계의 만류로 가
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나외가의본향인 함창 으로 귀양을 왔으며 오늘날까지 이안면 예주리에 가면 그와 관계된 정자가 강
가 언덕에 자리 하고 있다.
7. 가야불교와 가야나루
가야문화가 불교와 깊은관계가있으니 오봉산 고분군 아래 받에는 탑지와 절터가 있고 우물 터가 남아있다. 근년에 땅주인
이 경지 정리하는 가운데 충주에 사는 모대학 교수의 부탁으로 막걸리 값을 받고 탑의 부재를 넘겨주었다는 후담을전해주
었다.우물터 옆 대나무밭 구릉아래는 누대로 내려오는치성드리던웅덩이가 전해오고 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의 용화사 터는 숲
에 뒤덮혀 오래된 석불 과 탑재가 흩어져 있는 것을 함창김문 일족들이 잘 다듬고 전각을 일으켜 새로운 도량으로발전시켜
오고 있다.지역의 오랜 토호로 살아온 함창김문의 페사복원은 함창을사랑하고 책임지려는 가상한일이아닐 수 없다.
그림 17목은이색
함창들을 흘러가는영강과 이안천이 만나는 지점 언저리에 가야나루가 있었으니 예로부터고녕가야의 물류가 여기서선적되어 낙동강을 타고 운반되었다. 결코 합창고녕가야가 벽지에 있어 다른 가야제국과 왕래가 소원했다는 '나가 미찌오'나 이병도의 견가 졸견이었다는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고대로부터 동서고금의 물류이동은 수운과 해운이 단연 으뜸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나가는 말
그림 19 이병도 가야지도
이상과같이 고대국가 함창고녕가야는 오랜세월 면면 이어져 오며 오늘날까지 함창김문의후예들은 때가되면 어김없이대제
를 올린다. 나라가 인정하든 부정하든 그것과 관없이그들만의축제행사는 근엄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행해졌으며때가되면 불원천리하고몰려든다.한번은 필자가 고녕가야역사회복을 위한 학술대회기금을요청한 적이 있다. 1 차대회는 전체 예산의 25 % 를 도와달라고 요 청했다. 2차는 건너뛰고 3 차에도 최소한 1 회만큼의 경비는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문중의 김홍희 부회장이 이르기 스님께서 고녕가야역사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 무나 고맙지만 문중에서 많은 돈을 들여서까지 선양사업을할
의향은 없습니다. 함창고녕가야 역사바로세우기는 국가가 나설 일이고 상주시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국가가 외면하고 상주시가남의일처럼 대한다고 해도 우리가 조상 지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설사 고녕가야가 진주가 아니라 평양에 있다한들 함창김문이 조상대제 올리는데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라고 재정을 보태주지 못하는답답함을 토로했다.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역사를 바로세우고발전을꾀하는 것이 당연지사지만외면하고 귀찮아하니 문중관계자의애증어린 말이 전혀 틀린 소리는 아니다. 국가는 각 문중과 개인이 각자의 위치에서역할을충분히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지원해야하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다.수천년의 문중역사와 나라역사를 지키고 계승하려는함창김씨문중의의 대제 행사는김씨문중의 행사이기도 하지만 국가적으로도 너무나 중요 한 행사라는 것을 정부나 지자체는 물론이요 사학계에서도 분명히알아야 한다. 당연히 정부와 학계에서는 깊은 인식을 갖고 지원하 고 독려해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학계가 나서서 거짓역사니 꾸며낸 역사니하면서 식민사학을 근거로문중행사에훼방을 놓고있는 형국이다. 이들을 일러 토착왜구라고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한시라고 빨리 이땅에서몰아내야할 매국집단이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림 18 용화사
1 ) 나가통세와 이병도의 조선
그동안 학계와 정부에서는일제와 그들의 이론을 전수받은 이병도의 권위?로 함창고녕를 부정하고 외면했다. 여기에는 학
문의 잣대가 아니라 일제 정한론이론의 근거로 만들어진일본부설과 이병도의 입신출세욕이 야합한 결과다.여기에 빨대를 대고있는국내학계의 카르텔이 방점을 찍으며 또 한몫을 하고있다. 이병도는 그의 스승 ' 나가 미찌오'의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모방하면서 더 나아가 함창고녕가야국의역사를 왜곡하고 부정하였다. 나가 미찌오는 함창고녕가야가 여타가야제국과 멀리 떨어져있
어 서로간에 격조했을 것이다고 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중국사서에 나오는휴인국과 발음이 비슷하다는뚱딴
지같은 소리를 내놓았다.
이에 이병도는 함창고녕가야는 다른 가야제국과 멀어 잘못된 지정인 듯하니 아마도 진주를 오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며진주
고녕가야를 주창했다 5). 진주 가 고녕가야의 터전이라고확신을 하더라도 충분한 연구와 고증이 뒤따라야 한다.이병도는 확신도 아니고비정도아니고'비정하고 싶다' 했다. 경주와 대비되는고 상주의오랜역사가 조선총독부 소속의해30대 젊은 학자가 '정하고 싶다'고해서 정할 수있는 코메디 같은 역사학이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학현실이다. 이병도는진주고녕가야 설의 이유를 세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나가미찌오 이론대로다른가야와 거리가 너무 멀다는 말같지 않는 논리를 대입시켰다.두번째는 역시 나가 미찌오의
말처럼 발음을 가지고 진주의고명이 거열이므로고녕과 발음이 비슷하므로 그렇게정한다는괴감을 늘어놓았다.
서얼은 진주가 아니라 거창의고명으로 밝혀졌으며 거열과 고녕이 발음이 비슷하지도 않으며 설사 발음이 비슷하다고해서 그렇게 지정하는 사람이제정신인가? 세 번째 는 지역 의 중요성 즉 웅주거목(雄州巨牧)에 비추어 진주로 비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 거목이란 물산이 풍부한 큰고을을의미하는데 상주의 강역 이 예전 보다 많이 축소된 요즘의 기준으로 도 쌀 생산량이 진주의 2배이며면적은 1.7배에 달한다 . 세가지 이유중 어느것하나논리에 부합 되는것이 없건만 그대로 따르는 한국학계의 국사를 대하는 자세가 정상 인지 의심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에도 괴이하리만치함창고녕가야를 부정하는 근거를제시하는 소위 교수학자라는 일제 식민사학 추종자들이 줄을이었다 .
2 ) 조선 총독부
그들 에게는 함창이 고녕가야 가 되어서는 안 되는 긴박한 이유가 틀림 없이 있다 . 그것은 일본 총독부 가 제작 한 조선사 는 조선을 병합하여 통치하기위한 수단으로 기획 재작된 것이다. 일제 정책에 반하거나 조선의 기상을 살리고일본에 해로운 역사 근거는 철저히 거세한 상태다 . 우리나라 는 해방 후에도 여과 없이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역사관을계승하여지금껏 내려 오고 있으니 '등신들의집합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 우리 를 정복 한 세력이 우리 를 통치하기 위해 만든 역사를 해방 후에도그대로 답습 한다는 것이 이성 있는 국민이라면 수용 할 수 있는가?이러한등신들의 집합체를교묘히속이면서 범의 아가리 로 인도 하여 끌고가는 집단이 한국의사학계라 하면 곧이들을 사람이 몇 이나 될까?
한국 사학계 는 목숨 걸고 식민사관을 답습하고공고히 하려고 안간 힘을쓰고 있다 . 아무리 명리에 눈 멀었다 해도 조국 과 민족을 숙이고 배신 하면서 까지 식민사학을고수해야하는지 묻고싶다 . 그들은 전 국민을 상대로 100년 동안 기만극을벌였으며지금도 중단없는 가면극을 떨치고 있는 중이다 . 이병도의 뒤를 이어 합창고가야를 부정하는억지이론 을 만들어 발버둥 치는 저들 의 작태에 분노를 넘어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이 일어난다 . 저들은 일본서기를 근거 하여 삼국사기 초기기록과삼국유사를 믿을 수 없으니 김부식 이나 일연 선사가 임의 대로 각색했다는 것이다 .
어떤 이는 삼국사기 를 지을 때 경덕왕 시절의 지명이 아닌 당시 의 문중 족보 나 개인 문집 을 근거로 함창고녕가야를 가십거리 로 집어 넣었다 는 것이다6) . 또 어떤이는 대가야 멸망 후 우록 일행이 충주로 이주했 듯 함창으로 이주하여 신라 에 병합 되면서고녕가야라는명칭을 참칭했다는 것이다 .
그림 20 식민 사학 가야지 도
이렇게 무리 하게 말도 안되는 주장 을 펼치는 자들이 한국고대사를 대표 하는 주자로 활동 하고 있으니 이 나라가 장차 어
디로 가려는지 경계하지 않을수 없다. 현재처럼 역사가 집행된다면 머지않아 우리는또다시임진왜란 때 김성일의 재판을
목격할 것은 명약관화하다.일본식민사학 자들은 일본서기의 지명을 우리나라남부에갖다붙이기 위한 전초작업으로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삼한(三韓)조 와 왜(倭)조를 철저히 악용했다. 삼한조에 나오는 변진구야국 또는 변진구시국을 한국의 김해금관가야라고 확정하고 가야사를국 비롯한 우리고대사를서술하고 있다.7) 변진구야국이 김해금관가야국이라는 근거는 눈을 백번 씻고 좌도 찾아볼수 없는 그랴말로 뜬 구른잡는잡담에 불과하다.잡는 잡담에 불과하다.
그들이 근거로 하는 삼국지 위지동이전 내용그대로라면 부여는 사 방 2 천리 인구는 2 만호, 고구려는 사방2천리인구가4만호인데 비해 삼한은 사방 4 천리에 인구는15만호에이른다. 이를 근거로 할 때삼은고구러보다 단순영역으로도 4 배나 크며 인구역시 5배 이상이지만 저들이 그리는 지도에는 삼한이 고구려영토의 삼분지일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은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변진구야국을 가야사를 설명하는 최초근로 삼고 있다. 변진구야국의 구야가 가야와 발음이 비슷하다고 김해로정했다고 하는데 가야는김해뿐아니라 고령, 함안과 함창도 가야다.
구야와 가야가 발음이 비슷할지 모르지만 전하는 내 용은 전혀 다르며 시대와 구역을 직시하지 않았다. 변진구야국을 김해금관가야로 지정해서 가야사를 서술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가? 심지어 변진구야국을 기준으로 우리 사서의 구체적인 가야역사를 부정하는 행태를보면서 그것이 바로 식민사학의 출발이며 최종 도착지는일본서기임을 암시한다.변진구야국 등 삼국지위지동이전을 인용한 근본원인은 다라. 안라, 기문 등일본서기의 수많은 지명을 한반도에 배치하기 위한 정지작업에 불과하다. 변진구야국과 호로국등위지동이전의 지명이 들어왔는데 일본서기의 다라. 안라, 기문 등이 등장 못할이유가없다는식이다.
이들은 실증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사학을 이 땅에 심어놓았으며 한국 사학계가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괴이한 현상이 이땅에서 100년이넘도록 진행되고 있다. 3 ) 한국사학계는 환골탈태하라 이에 나는 한국사학회와 국사편찬위원회에 정식공문을 보냈다.1. 이병도의 진주고녕가야를 해명하라 2.함장고녕가야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라3. 2 의 기준에 준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변진구야국이 김혜 금관가야국이라는 근거를 제 시하라 4. 2 의 기준에 준하여 일본서기의 다라국이 한국의 경상남도 합천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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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 三國史記 」권 34 잡지 3 편 < 地理志 > " 古寧郡 本 古寧伽倻國 新羅取之 爲古冬攬郡 一 云 古陵縣 、 景德 王改名 今咸寧郡 領縣三 加善縣 本 加害縣 景德王 改名 今 加恩縣 。 冠山縣 本 冠縣 一云 冠文縣 景德王 改名 今 開慶縣 、 虎溪縣 本 虎側縣 景德王改名 今 因之"
2)「三國遺史」권1異1편
<五伽耶條>"阿羅伽倻 今咸安
古寧伽倻 今咸寧 大伽倻 今高
靈 星山伽倻 今京山 一云碧珍
小伽倻 今固城"
3 ) 신채호,「 朝鮮上古史 」( 朝鮮日報 ). 1931. . 06. 10. ~ 25 일간 연재 .
4)「 三國史記 」 < 本記 > 信禮王編 " 儒禮王十年 春二月 改築沙道城移沙伐州 豪民八十餘家"
5)이병도,「韓國古代史 硏究
博英社」.1976,p313
6)김태식.「삼국사기지리지 신라초의 사료적 검토」
7) 「 三國志 」 < 魏志東夫傳 > 夫餘 四方二千里 人 ロニ 萬戶 、 高句麗 四方二千里 人口四萬戶, 三韓 四方四 千里 人口十五風戶.三韓四方四千里
人口十五萬戶
[참고문헌]
「 三國史記 」
「 三國遺事 」
「 新增東國輿地勝覽 」
「 三國志魏志東夷傳 」
「 滿洲源流考 」
「 日本書紀 」
신채호, 「 朝鮮上古史 」, 조선일보, 1931.
이병도, 「 韓國古代史研究 」 博英社, 1976.,
김태식, 「 伽倻聯盟史 」, 일조각, 1993.
천관우, 「 伽倻史研究 」, 일조각, 1991.
이영식, 「 伽倻帝國史研究 」, 생각과 종이, 2016.
김현구, 「 任那日本府 는 허구인가 」, 창비, 2010. 이영호, 「 상고기 상주지역 정치체의 성격 」, 「 신라문화 」41, 신라문화연구소,20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