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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완전정복]
Ep.13) 크루이프, 현대 축구의 전환점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을 딱 한 명만 고르라면 여러분은 누구를 택하겠는가? 축구황제 펠레, 월드컵 창설자 쥘 리메, 현시대 최고의 축구 선수인 리오넬 메시 등 많은 인물이 있겠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요한 크루이프가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가 축구 역사에 끼친 영향력이 실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크루이프가 월드컵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살펴보고 왜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인지 알아보자.
새로운 슈퍼스타의 등장
펠레가 떠난 첫 번째 월드컵이었던 1974 서독, 지구촌 축구 팬들은 펠레라는 슈퍼스타의 부재를 염려했다. 하지만, 영웅이 떠나면 새로운 영웅이 등장하는 법. 요한 크루이프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크루이프는 70년대 초반 아약스를 이끌고 현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끌며 화려하게 축구계에 등장했다. 특히 1971-72 시즌에는 아약스의 트레블(리그, 유러피언컵, 국내 컵 대회)을 이끎과 동시에 세 대회에서 모두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이에 유럽 최고 선수에게 주어지던 발롱도르 트로피를 1971년, 1973년 두 차례나 수상하기도 했다.
1971 발롱도르를 수상한 요한 크루이프(우측 첫 번째)의 모습이다. (출처: 영문위키)
그렇게 유럽 무대를 정복한 크루이프는 1974년, 조국 네덜란드를 이끌고 월드컵에 참여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단 한차례도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하며 긴 암흑기를 보냈다. 무려 36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등장한 네덜란드에게 기대를 거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아약스의 유러피언 컵 3연패를 이끈 미헬스 감독과 그 전술의 핵심이었던 크루이프가 뭉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는 유럽을 넘어 세계 최정상을 넘보았다.
빛나는 오렌지 군단
1974 서독 월드컵의 방식은 특이했다. 16개의 본선 진출국이 4개의 조를 이루어 조별리그를 치르는 것은 이전과 같았다. 다만, 2라운드 방식이 달랐다. 이전에는 8강부터 토너먼트를 진행했지만, 이번에는 8개의 팀을 2개의 조로 나누어 다시 한번 리그를 치렀다. 두 조 1위 팀이 결승전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1라운드에서 네덜란드는 스웨덴, 불가리아, 우루과이와 함께 3조에 속했다. 여기서 네덜란드는 크루이프 지휘 아래 2승 1무라는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토털 풋볼’의 등장을 전 세계인에게 알렸다. 크루이프는 조별리그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지만, 천재적인 기회 창조 능력과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며 자신이 세계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다.
'크루이프 턴'을 시전하는 요한 크루이프, 뛰어난 개인 기량으로 전 세계 축구 팬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출처: FIFA 유튜브)
다음 라운드에 진출한 네덜란드의 상대는 아르헨티나, 동독, 브라질이었다. 토털 풋볼이 아무리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할지라도 남미의 전통 강호 아르헨티나와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이 속했기에 결승행을 함부로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크루이프의 멀티골에 힘입어 4대 0으로 아르헨티나를 대파했고 동독을 상대로도 2대 0 승리를 거두며 결승전 티켓을 향해 나아갔다. 오렌지 군단의 마지막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펠레가 빠졌음에도 브라질은 브라질이었다. 브라질 역시 아르헨티나와 동독을 차례로 격파하며 2승을 기록했다. 사실상 두 팀의 마지막 경기는 준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크루이프는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2대 0 완승을 거두며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악수를 나누는 요한 크루이프와 베켄바워. 두 선수는 유럽 최고의 선수라고 불리는 '세기의 라이벌'이었다. (출처: interleaning.tumblr)
세기의 라이벌, 월드컵 결승에서 맞붙다
대망의 결승전, 상대는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의 서독이었다. 유로 1972를 제패한 개최국 서독은 강력한 우승후보였고 대회 내내 좋은 모습을 보이며 결승에 안착했다. 그리고 세기의 라이벌이었던 베켄바워와 크루이프의 맞대결이 펼쳐진다는 소식에 전 세계 축구팬들이 큰 기대를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월드컵 결승전에서 메시와 호날두가 맞붙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대망의 결승전은 뮌헨의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펼쳐졌다. 대부분의 전문가와 사람들은 과거에는 본 적도 없는 전술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준 네덜란드의 우승을 점쳤다. 전반 1분, 네덜란드가 대중들의 기대에 보답하는 듯했다. 네덜란드는 킥오프 이후 한 번도 공을 빼앗기지 않는 패스웍을 보여주었다. 이어 나온 크루이프의 환상적인 드리블 돌파가 상대방의 태클을 이끌어내었고, 주심은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네덜란드는 키커로 나선 네스켄스가 이를 성공시키며 1대 0 리드를 가져갔다.
리드를 빼앗긴 서독은 리베로이자 주장인 베켄바워의 지휘 아래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결국 서독은 페널티킥으로 동점 그리고 폭격기 게르트 뮐러의 역전 골로 2대 1로 전반을 마무리했다. 후반전 네덜란드는 크루이프를 중심으로 여러 찬스를 만들었으나 슛이 빗나가거나 전설적인 골키퍼 제프 마이어 선수의 선방으로 막혔다. 크루이프 역시 베르디 포크츠의 끈질긴 맨 마킹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네덜란드와 서독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했으나 득점 없이 끝났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베켄바워의 서독이었다.
그러나 서독의 우승에도 불구하고 1974년 발롱도르의 주인공은 요한 크루이프였다. 월드컵에서 보여주었던 네덜란드와 크루이프의 '토털 풋볼'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토털 풋볼 전술을 활용해 유러피언 컵을 정복한 미헬스(좌) 감독과 크루이프(우) (출처: (iamsiddharthdas.medium.com)
토털 풋볼이 대체 뭐여?
본격적인 설명에 앞서 하나 알아야 할 것은 토털 풋볼이 미헬스와 크루이프가 창조한 전술이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 1970년 이전에도 존재한 전술이었다. 다만, 크루이프와 미헬스가 이 전술을 완성 단계까지 끌어올렸다고 보면 된다. 크루이프와 미헬스의 토털 풋볼이 유럽 무대와 월드컵에서 보여준 모습은 마치 혁명과 같았기에 이 전술이 그들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토털 풋볼(Total Football)’, 이름만 들으면 동네 축구처럼 모든 선수가 공만 보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전술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질서를 갖춘 상태에서 모든 선수가 공격과 수비에 가담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당시 축구로서는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이 전술의 핵심은 공간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축구는 고정된 '포지션'을 기준으로 선수들이 움직임을 가져갔다. ‘공격은 공격! 수비는 수비!’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토털 풋볼은 공간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움직였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빈 공간이 났을 때는 수비수 A가 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A가 점유하던 원래 위치를 다른 선수가 메워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전술의 핵심이다.
또한, 압박 역시 이 전술의 키포인트였다. 상대의 공격이 시작하는 지점부터 강한 압박을 가해 상대가 공을 자유롭게 잡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압박을 하면 많이 뛰어야 하고 당연히 그에 따라 체력 소모가 크다.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그들은 공을 빼앗은 뒤 짧은 패스를 이용해 공을 점유하면서 체력 소모를 최대한 줄였던 것이다.
이 전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능력이 필요했다. 기본적인 공격, 수비, 패스를 포함한 탁월한 경기력, 누군가 공격에 참여하면 빈 공간을 메울 수 있는 지적인 움직임, 하나의 위치가 아닌 여러 공간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일 수 있는 축구에 대한 높은 이해력, 공간을 지배하기 위한 압박이 전술의 핵심이었기에 압도적인 체력 역시 필요했다. 그리고 이 핵심 요소를 모두 완벽하게 갖춘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요한 크루이프였다.
크루이프의 포지션 상 위치는 센터 포워드였지만, 미헬스 감독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경기장 곳곳을 누비며 찬스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그런 크루이프는 때로는 좌우 측면에서 나타나 기회를 만들었고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수비 가담을 한 뒤, 팀의 빌드 업을 돕기도 했다. 개인 기량 역시 뛰어났고 본연의 임무인 득점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축구라는 종목에 대한 이해도가 탁월한 선수였다. 그는 매일 같이 축구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천재적인 플레이를 보이며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항상 증명했다.
크루이프는 담배를 무지 막하게 피워댔던 골초로 유명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선천적 피지컬로 필드를 누비며 담배가 자신의 체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덕분에 '게으른 천재'라는 별명도 있다. (출처: Cypers Mail)
근데 이게 왜 혁명이야?
앞서 말했듯 토털 풋볼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완성 단계를 보여준 것은 70년대 초반 아약스와 네덜란드뿐이었다. 특히 월드컵 무대에서 전 세계인에게 보여준 토털 풋볼의 임팩트는 매우 강했다.
크루이프의 등장 직전까지 월드컵을 지배했던 나라가 어디인가? 바로 1958년부터 1970년까지 월드컵을 세 번이나 제패한 펠레의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기적인 팀플레이보다는 화려한 개인 기량이 아닌가? 그들의 상징은 ‘징가’라고 불리는 화려한 개인기 플레이였다. 브라질은 펠레뿐만 아니라 가린샤, 디디, 자이르지뉴 등 월등한 개인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집합한 팀이었다. 그들은 전술적 움직임보다는 화려한 플레이로 상대팀을 깨부수며 월드컵을 세 번이나 우승할 수 있었다. 물론 1970 브라질은 지역 방어란 전술을 사용하는 등 전술적으로도 위대했다. 하지만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더욱 돋보인 팀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팀적인 전술보다는 스타 선수의 기량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서 네덜란드가 보여준 전술 축구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선수 개인 기량에 의존하지 않고 질서가 잡힌 팀플레이 위주의 축구였다. 이런 조직력을 과시하는 축구는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화려함을 상징하는 남미 축구 트리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차례로 격파해낸다. 이는 축구가 팀스포츠라는 것을 축구 팬들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상징과도 같았다. 세 국가는 오렌지 군단에게 단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처참하게 무너졌다. 화려한 개인기로 세상을 지배하던 남미 축구가 토털 풋볼 전술에 속절없이 무릎 꿇는 모습에 모든 축구팬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래서 많은 축구 전문가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현대 축구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공격은 공격, 수비는 수비만 하던 정적인 모습은 이 월드컵을 끝으로 사라졌으며 모든 감독이 토털 풋볼의 철학을 바탕으로 전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현대 축구의 틀을 닦은 토털 풋볼의 지휘자는 누가 뭐라 해도 크루이프였다. 득점, 드리블, 패스, 수비 가담, 선수들은 통제하는 리더십 무엇 하나 빠짐없이 S+급이었다. 특히 한 번에 연결되는 킬패스 능력은 체력 부담이 높은 토털 풋볼이 효율적인 축구로 변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월드컵과 트레블을 이룩한 베켄바워를 꺾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했으며 현재까지도 축구 역사를 뒤바꾼 혁명가이자 전설적인 선수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1974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인정받아 '월드컵 위너' 베켄바워를 꺾고 발롱도르를 차지한 크루이프의 모습이다. 1974 월드컵 당시 크루이프의 기회 창출 기록은 무려 36회이며, 이는 지금까지 단일대회 최다 기회 창출 기록으로 남아있다. (출처: AS)
현대 축구의 아버지
크루이프가 선수로만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는 천부적인 축구 천재였고 그 천재성은 감독 생활을 하면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자신이 현역 때 사용했던 토털 풋볼을 한 단계 더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는 아약스를 거쳐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드림팀’이라 불릴 정도로 위대한 팀을 만들었다. 라리가를 네 번 연속으로 제패했으며 구단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의 전술의 핵심은 짧은 패스와 압박이었다. 그리고 크루이프의 수제자는 다름 아닌 펩 과르디올라였다. 필자의 학창 시절을 지배했던 ‘티키타카’의 시작은 요한 크루이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게다가 세계 최고의 선수 리오넬 메시를 배출한 ‘라 마시아’라는 유스 시스템도 크루이프가 완성한 정책이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크루이프가 눈을 감은 2010년대 중반까지 크루이프의 철학 아래 바르셀로나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듯 축구 역사에 위대한 유산을 여럿 남긴 크루이프는 지난 2016년 폐암 말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현대 축구인들 가슴속에서 크루이프는 영원한 혁명가이자 현대 축구의 아버지로 기억될 것이다. 나아가 필자는 위와 같은 근거로 요한 크루이프가 축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펠레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고 축구의 위상을 제일 드높인 인물일지는 몰라도 축구 자체에 끼친 영향력은 크루이프가 더 위지 않을까 싶다.
FC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활약했던 시절의 요한 크루이프,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출처: ESP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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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초대 월드컵,'메이저 3연패'를 이룩한 우루과이
Ep.8) 골 라인 넘은 거 맞아? '축구종가' 논란의 우승
Ep.11) 축구 전쟁,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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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樂soccer 원문보기 글쓴이: 존예보스최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