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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야릇한 일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 무궁한 음모론이 생산되는 한국에서 미술계도 예외가 없다. 그 중 가장 압권은 1991년 벌어졌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위작 논란이다.
사건의 발단과 전개는 이러하다.
김재규 중정부장의 재산을 국가과 환수되면서 김부장이 가지고 있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도 같이 딸려왔고, 최종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까지 왔단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이 1991년 유명 화가의 그림을 복제해서 몇 만원에 팔았다. 시중에 나도는 복제품을 본 천경자 화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화를 해서 자기 그림이 아닌 위작이라고 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천화백은 머리를 검게 개칠(改漆)하지 않으며, 머리에 흰꽃을 그린 적이 없으며, 어깨위의 나비도 그린 적이 없고, 작품년도 숫자도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한자로 표기하고, 결정적으로 자기그림에 느껴지는 혼이 담겨있지 않다는 사유로 위작이라고 주장하였다. 천화백이 그린 "장미와 여인"(1981년)이라는 그림(둘째 딸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이 분도 미술가이고 사위도 미술가라네)과 비교해 보면 천화백의 주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사자가 자기 그림이 아니라고 하면 위작인 것으로 하면 그냥 에피소드 정도로 끝날 문제였는데, 국립현대미술관측이 이를 부인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다. 국립현대미술관측은 구입할 때에도 진품여부를 감정했고, 과학적 분석결과 천화백이 사용한 일본산 안료와 동일한 안료가 사용되었고, 화랑협회의 감정위원들이 감정한 결과도 진품이 맞다고 결론이 났기 때문에 진품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60이 넘은 천화백의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왔다. 실상, 몽환적인 그림(머리에 꽃을 꽂은?)을 그리고, 동네비디오방에서 SF영화를 빌려서 즐겨보는 천작가가 나이들더니만 드뎌 돌아버렸다는 정도의 모욕적인 언사였다. 작가가 자기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데, 미술계 권위자들 여럿이서 너 작품이 맞다고 일종의 다구리를 하는 상황에 충격을 받은 천화백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몰라보는 엄마도 있냐며 다시는 한국에서 작품활동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딸이 사는 미국으로 가서 지금도 여전히 미국에서 살고 있다. 반전은 1999년에 일어난다. 고문서 위조가였던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인터뷰를 한 것이다. 자신의 친구요청에 따라 달력그림 몇 개를 그려주면서 천화백의 미인도도 위조해서 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검찰은 공소시효 지났기 때문에 수사할 수 없다고 했고, 국립현대미술관측은 권춘식은 동양화 위조전문가이 깨문에 미인도 위조를 할 수가 없고, 1984년 위조했다고 했지만 이 그림은 그 전에 압수된 작품이기 때문에 권춘식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진품이 맞다고 했다. 권춘식씨에게 미인도 다시 한 번 그려보라고 해서 확인하면 될 것을 논란을 키우는 게 요즘 누군가를 보는 것 같다. 어쨌든 요지는 아직도 미인도 위작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 그런데 대체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면 작가의 의견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게 정석아닌가? 화랑협회 규정도 그런 것이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일이 흘러가는지 모를 일이다. 전문가라는 권위로 진실을 압박하는 모양새이다. 요즘도 지긋하게 보이는... 천경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16살 일본 유학을 했고,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가 입선하면서 화가로 데뷔했다. 1944년 귀국해서 광주공립여고보의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해방직후 일본에서 만난 유학생과 결혼했다. 그러나 1남1녀를 떠 안은 채 이혼해야 했고, 사업실패로 실의에 젖은 아버지의 죽음. 폐결핵을 앓던 여동생의 죽음. 초혼 실패 이후 빠져든 한 유부남과의 사람도 김씨 성을 가진 남매만 낳고 결혼까지는 못하는 등 가정적으로는 매우 불행했다.(천화백의 첫째와 둘째 남매는 이씨이고, 그 아래 남매는 김씨 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정신적으로 피폐해 있던 상태에서 남들이 징그럽다고 피하던 뱀들이 눈에 들어왔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광주역 앞의 뱀집을 열심히 드나들면서 뱀들을 스케치해서, 청동색 뱀 35마리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똬리를 틀고 있는 '생태'를 완성했다. 이 그림으로 천경자는 화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천경자의 그림에 1970년대부터 꽃과 여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천경자의 작품에 대해서 환상, 몽환, 꿈과 정한의 세계 등으로 평가받았았는데, 요즘은 흔들리지 않은 여성성의 확보, 구태의연해 보이는 여성의 삶에 대한 환멸의 치유책, 여성애 표현 등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뉴욕의 큰 딸과 같이 살고 있는데, 말년에 또 구설수에 휘말려 있다. 사실 천화백은 이미 별세했는데, 큰 딸이 이것을 숨기고 예술원 회원수당을 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예술원에서 천화백의 최근 근황과 의료기록 등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냈는데, 큰 딸이 이에 대한 답이 없다는 것. 그래서 예술원은 수당지급을 중지했고, 큰 딸은 예술원 탈퇴신청을 했지만 예술원 측은 당사자 의견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탈퇴처리는 하지 않고 있다네 <4월> 정이 많은 남도 여자. 남자에게 약했고, 욕을 감칠맛나게 잘하던 사람. 사투리를 구성지게 들려주던 화가, 천경자.... 1991년에 있었던 ‘미인도’ 위작 시비는 천경자 개인뿐 아니라 한국 미술계에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천경자의 <미인도> 위작 시비는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10·26의 주역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소유였던 '미인도'를 5호 크기의 유화로 대량 복제해 1점당 5만원에 판매하면서 일어났다. 10·26 사태 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씨 집에서는 유명 작가의 그림과 고서화, 골동품 수백점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을 동원해 감정한 결과 진품은 몇 점에 불과했다. 이 몇 점의 진짜(?) 가운데 '미인도'가 들어있었다.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천화백은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과 복제품을 검토해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는 주장을 했고 이 이야기가 한 두사람을 거쳐 언론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위작을 소장한 꼴이 된 국립현대미술관은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하기위해 그림의 제작연도부터 소장되기까지의 정황을 엄밀하게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인도> 국립현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이 그림은 ‘경자 1977’이라고 사인이 된 채색화 (26cm X 26cm, 4호 크기) 정작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는 진품이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천경자 화백은 91년 4월에 “내 작품이 아닌 가짜”라고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고, 박물관 측에서 이에 대해 ‘진짜’라고 맞받아치면서 논쟁이 확대되었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 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 머리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표시 연도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난작품연도를 한자로 적는데, 이그림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있어요.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없습니다.' 피를 토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졸지에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미’가 되어 버렸다. 세상은 그녀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1차 감정을 실시한 후 “적어도 가짜는 아니다”라는 감정 결과를 발표했고, 며칠 후 진행된 2차 감정에서도 역시 ‘진품’ 판정을 내렸다. 게다가 감정위원회는 당시 판정의 말미에 “만약 위작 경위가 밝혀질 경우 그 결과를 전면 수용하겠다”라고 덧붙여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증폭시켰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초지일관 ‘진품’임을 주장했다. 미술관 측에서는 두 가지 근거를 내세웠다. 첫째는 소장 경위가 확실하다는 점이었다. 문제가 된 미인도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돼, 재무부 문공부를 거쳐 80년 5월 3일 국립미술관으로 넘어온 작품이라는 것. 두 번째는 전문가가 이미 진품으로 판정했다는 점이었다. 전문위원이었던 미술평론가 오광수씨(당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이미 진품으로 감정을 끝낸 상태라는 것. 그러나 당사자인 천화백의 항의와 언론의 의구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며칠 후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자체적으로 실시한 정밀 검사 결과를 다시 발표했다. “현미경 분석과 적외선, X선 촬영 등을 통해 종이와 안료에 대한 정밀 감식을 실시한 결과 역시 진품인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나이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 해서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까지 들어야 했고, 이 일로 인해 평생 그림의 외길을 걸어왔던 천경자 화백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천경자 화백은 사건 직후인 91년 4월 7일, 결국 절필을 선언했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대한민국예술원에 회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리기 위해 요양차 떠난 미국행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 미국에서 그녀의 나이 80세이던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 이후 뉴욕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남은 삶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 . .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동양화 위조범 권춘식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미인도'는 내가 그린 것' 이라고 진술해 엄청난 파문이 일었다. '91년 위작 시비를 낳았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내 작품 이다.' 검찰 수사에서 권씨는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길례언니>
그녀에게 창작 영감을 불어넣었던, 늘 그리워하던 고향 전남 고흥에 그녀의 공간이 생겨난다는 소식에 모두들 잘 된 일이라고 기뻐했었다. 미술관이 아닌 45평 규모의 아담한 전시관으로 꾸며진다고 했다. 전시관은 고흥군이 개관해 운영했고 50∼60여 년 전 종이에 그린 드로잉 작품부터 천 화백만의 화법으로 그린 여인들까지 작품 66점이 전시돼 있었다. 그런데 이 전시관이 폐관 위기에 처했다. 천 화백 가족들이 모두 돌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 돌려달라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천경자 화백의 큰 딸 이혜선 씨에 의하면, '그림에는 절대 써서는 안되는, 쓸 수도 없는 할로겐을 써서 그림이 다 상했다. 그림들을 보관할 때 신문지들에 싸서 청소기구 넣는 창고에다가 그냥 보관하는 등 관리부실이 너무 심했다. 도저히 그림들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고흥군 측은 작품 관리에 일부 소홀한 면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는 입장이다. 천 화백 측이 터무니없는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등 마찰이 빚어지면서 기싸움으로 비화했다는 것이 바로 다른 이유, 요구조건을 명시한 협약서를 제시해 또다시 천 화백 측의 반발을 사고 있다. 화백의 작품은 한 점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자화상> 일제강점기인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60, 70년대 한국 화단을 이끈 대표적인 화가 천경자. 지난주에 서울시립미술관에 다녀왔다. 2층에서는 언제나 천경자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입장료도 없다. 1998년, 미인도의 진위 논란에 고통을 받은 천 화백은 그때 그의 분신과도 같은 귀중한 작품 93점을 서울 시립 미술관에 기증하고 딸이 있는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꽃무리> 고흥읍은 팔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동.남.서로는 바다로 뻗은 신작로가 나 있고, 산의 계곡에서 내린 물줄기는 또랑을 이뤄 서문리 동촌 마을에 흐르고 있고, 그 또랑은 또 작은 강이 되어 읍내 복판을 흐르고 있었다. 봉황교 부근은 상점과 요릿집이 즐비한 유흥가였고 그 다리는 타관 문둥이들이 울면서 소록도로 가는 슬픈 다리였다. 개천을 건너면 수려한 봉황산이 있다. 소나무가 우거져 겨울 설경이 한결 아름답지만 봄이 오면 취나물 잎사귀 그늘 아래 하얀 오랑캐 꽃이 피어 그것이 참꽃보다 애처롭게 보였다. <단장> 봄이 오면 곡마단 '협률사' 신파가 들어와서 봉황산 기슭 나락 벤 터에 덕석을 깔고 차일 막을 쳐 무대를 만들어 놓았다. 그곳에서 흥행흥행 피리 소리에 맞춰 징 치는 소리, 슬픈 나팔 소리, 북소리 곡조가 울려오면 오만 간장 흔들렸다. 빤득빤득 금종이 붙인 옷 걸친 곡마단 아가씨들 줄 타고 재주넘으면 어린 가슴 설레고 그것이 부럽기 그지없었으나, 어른들은 곡마단에 잡혀간다고 밖에 못 나가게 애들 단속에 신경 쓰던 시대였다. 그러나 떠날 때 동네의 반들한 처녀, 총각 몇이 미쳐서 부모 몰래 봇짐 싸고 자진 따라나서니 동네 멋쟁이 하나 둘 사라져 버렸다. 남도의 묘한 기후 탓인지 꽃도 많이 피고 미친놈, 미친년들이 많아 날 궂은 날이면 시부렁 거리는 그들 소리가 동네 길을 누벼 메아리쳐 귀에 아프게 들려왔다.
그렇게 의심되면 미국으로 가서 보던지....아니면 미국에 있는 사람에게 확인을 의뢰해 보던지....자존심 강한 예술가를 욕보이는 것 아닌가 싶다. 이탈리아 기행 (1973) 사월 (1974) 뉴욕 센트럴 파크 (1981)
그로부터 8년 후인 1999년,
2007년,
작품 관리 부실 등을 이유로 기증했던 작품을
전시실 외에 천경자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결국 고흥군은 천 화백의 작품을 모두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고흥군이 작품 훼손 여부에 대해 문제 삼지 않기로 하는 등
결국 국내 최고의 현존 여류 화백의 고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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