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읍참마속(泣斬馬謖) -
공명(孔明)은 마속(馬謖)과 왕평(王平)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자 자리에 앉으며 명한다.
"왕평(王平)을 들라해라."
"예!"
마속(馬謖)과 왕평(王平) 두 사람은 공명(孔明)의 군막(軍幕) 밖에서 죄(罪)를 청(請)하며 꿇어앉아 있었다.
"왕평(王平)을 들라 하신다!" 명(命)이 떨어지자 왕평(王平)이 자리에서 일어나 군막(軍幕)으로 향하였다.
왕평(王平)이 승상(丞相)의 호출(呼出)에 군막 안으로 들어가자 마속(馬謖)이 근처(近處)의 병사(兵士)에게 말한다.
"밧줄을 가져와 나를 묶어라." 마속(馬謖)은 승상(丞相) 공명(孔明)에게 스스로 죄(罪)를 청(請)하는 모습을 보이려한 것이었다.
초췌(憔悴)한 몰골의 왕평(王平)이 공명(孔明)의 앞에 부복(俯伏)한다.
"승상(丞相)을 뵈옵니다!"
침울(沈鬱)한 표정(表情)의 공명(孔明)이 왕평(王平)을 길게 부르며 입을 열었다.
"왕...평... 늘 신중(愼重)했기에 전장(戰場)에서 마속(馬謖)을 도우라고 명했거늘... 너는 왜 마속에게 간언(諫言)하지 않았나!" 공명(孔明)의 목소리가 커졌다.
왕평(王平)이 두 손을 맞잡이 올리며 대답한다.
"아뢰옵니다. 소장(小將)도 수차례(數次例) 간언(諫言)을 하여 오로(五路) 관문(關門)에 진(陳)을 치자 하였으나, 참군(參軍)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장(主將)이요, 소장은 부장(副將)이 온지라 명령(命令)으로 굴복(屈服)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후 위군(魏軍)의 포위(包圍)로 소장(小將)이 수십 차례(數十次例)나 뚫고 나가 도우려 했으나, 수적(數的) 열세(劣勢)에 밀려 소장도 역부족(力不足)이었습니다. 소장(小將), 죄(罪)를 청(請)하오니 벌(罰)하십시오." 왕평(王平)은 그동안의 일을 숨김없이 말하였다.
공명(孔明)은 그러한 왕평(王平)의 대답(對答)을 듣고 더 이상 죄(罪)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물러가게."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노여움에 찬 어조로 명한다.
"마속(馬謖)을 대령(待令)하라!"
곧이어 온 몸이 밧줄로 묶인 마속(馬謖)이 들어왔다.
"승상(丞相)!"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을 한번 부른 뒤에 그대로 꿇어 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침통(沈痛)한 표정(表情)의 공명(孔明)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속(馬謖)을 향(向)해 입을 열었다.
"유상(幼常 : 마속의 字), 자네는 일찍이 병서(兵書)를 숙독(熟讀)해 병법(兵法)을 잘 알기에 가정(街亭) 방어(防禦)를 위해 자원(自願)했을 때 누차 경고(警告)를 하였네. 가정(街亭)은 아군의 근거지(根據地)라고 말이야. 한데, 현장(現場)에서는 왕평(王平)의 간언(諫言)도 무시(無視)하고 전공(戰功)만을 위해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행동(行動)하여 가정(街亭)을 잃었단 말인가? 하마트면 아군(我軍)이 회생(回生) 불능(不能)의 위기(危機)에 빠질 뻔 했네! 가정(街亭)을 잃는 바람에 결국(結局) 우리 군(軍)은 모두 한중(漢中)으로 철수(撤收)하게 되었으니, 그 죄(罪)를 어찌 감당(堪當)하겠나!"
"가정(街亭)을 잃은 건 모두 제 잘못 입니다. 군령장(軍令狀)을 써 놨으니 법에 의해 처단(處斷)하십시오."
마속(馬謖)도 결(決)코 죄(罪)를 용서(容恕)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속(馬謖)에게 과실(過失)은 있으나, 이십여 년간 선제(先帝)와 승상(丞相)을 보필(輔弼)해온 것과 과거(過去)의 공훈(功勳)을 감안(勘案)하시어 목숨만은 살려 주시고 속죄의 기회를 주도록 하십시오." 조운(趙雲)이 공명(孔明)에게 건의(建議)한다.
그러자 함께 가정(街亭) 전투(戰鬪)에 참여(參與)했던 왕평(王平)이 나선다.
"승상(丞相)! 용서(容恕)해서는 안 됩니다. 수십만(數十萬) 대군(大軍)의 군심(軍心)은 어찌하실 겁니까? 상벌(賞罰)은 분명(分明)해야 합니다. 말의 믿음, 행동(行動)의 결과(結果) 등, 군령장(軍令狀)을 썼음에도 집행(執行)을 아니 한다면 이제 누가 군령(軍令)을 지키겠습니까? 승상(丞相)! 마속(馬謖)을 용서(容恕)하신다면 군위(軍威)가 추락(墜落)하고 말 것입니다."
장군(將軍) 위연(魏延)은,
"승상(丞相)! 난세(亂世)인 이때, 우리 촉국(蜀國)의 인재(人材)를 버리는 것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마속(馬謖)은 평소(平素)에 근면(勤勉)한 데다가 병법(兵法)에도 능(能)하니 가정(街亭) 전투(戰鬪)의 패배(敗北)는 경험(經驗)의 부족(不足)에서 온 것일 뿐, 개인(個人)의 과실(過失)이 아니오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공명에게 마속(馬謖)의 용서(容恕)를 청(請)하였다.
자리에 함께 있던 장수(將帥)들 모두가 공명(孔明)을 향하여 무릎을 꿇어 보이며 위연(魏延)의 청(請)에 힘을 실었다.
공명(孔明)이 난감(難堪)한 상황(狀況)에 맞닥뜨렸다.
스스로 죄(罪)를 청(請)하는 마속(馬謖)과, 죄를 묻지 아니하면 장차(將次) 군기(軍紀)를 어떻게 다잡겠느냐는 왕평(王平)의 주청(奏請)과, 용서(容恕)하고 기회(機會)를 주자는 조운(趙雲)과 위연(魏延) 사이에서...
마속(馬謖)이 다시 한번 자신(自身)의 죄(罪)를 뉘우치며 인정(認定)한다.
"제가 승상(丞相)의 명(命)을 그대로 거행(擧行)하지 아니하고 임의(任意)로 군여(軍營)을 설치(設置)하여 많은 군사(軍士)를 잃었습니다. 이 죄(罪)는 만 번 죽어도 씻을 수 없는 죄이옵니다. 앞으로의 군(軍)의 위엄(威嚴)과 지엄(至嚴)한 명령 체계(命令體系)를 유지(維持)하기 위해서라도 저의 죄(罪)를 반드시 물어주소서. 공개 처형(公開處刑)을 통해 군심(軍心)을 잡으시길 바라옵니다. 다만 제가 죽은 뒤에 어린것들이나 돌봐 주소서. 이것이 승상(丞相)께 드리는 마지막 부탁(付託)이옵니다..."
마속(馬謖)이 거기까지 말하고 목을 놓아 통곡(痛哭)하니, 공명(孔明)도 눈물을 뿌리며,
"내, 너와 형제(兄弟)처럼 살아 왔거늘, 어찌 네 자식(子息)들을 모른다 하겠느냐..."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그러면서 마속(馬謖)이 쓴 군령장(軍令狀)을 집행관(執行官)에게 건네주며 말한다.
"군법(軍法)대로 처리(處理)하라."
"예!"
공명(孔明)은 마속(馬謖)을 내보내 놓고 선채로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군막(軍幕)밖에 형장(刑場)에는 마속(馬謖)의 참형(斬刑)을 집행할 집행관(執行官)과 도부수(刀符手) 옆에 장군(將軍) 위연(魏延)이 마속(馬謖)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상(幼常 : 마속의 字) 잠깐 서시오."
위연(魏延)은 마속(馬謖)을 멈춰 세워놓고, 큰 대접에 술을 따르게 하여 마속에게 건네준다
"유상(幼常), 한 잔 드시오." 위연(魏延)은 마속(馬謖)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술잔을 권(勸)하였다.
"유상(幼常), 한 잔 드시오." 위연(魏延)은 마속(馬謖)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술잔을 권(勸)하였다.
마속(馬謖)은 위연(魏延)에게 술 대접을 건네 받아 그대로 들이켰다.
그리고 빈 잔을 돌려주며 말한다.
"고맙소. 문장(文長 : 위연의 字), 이 마속(馬謖)이 살아서 장군(將軍)을 따라 전투(戰鬪)에 나서진 못 하겠으나, 죽어서 적군(敵軍) 장수(將帥)들에게 고난(苦難)을 주어 승리(勝利)하게 만들겠소. 여러 장군(將軍)들의 노력(努力)으로 북벌(北伐)이 이루어져 대업(大業)이 이루어지는 그날, 마속(馬謖)은 구천(九泉)에서 춤을 추며 기뻐할 것이오!"
이렇게 말한 마속(馬謖)은 뒤로 돌아서서 공명(孔明)의 군막(軍幕)을 향(向)하여 크게 소리친다.
"승상(丞相)! 마속(馬謖)은 갑니다! 마속은(馬謖) 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 도부수(刀斧手)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위연(魏延)은 차마 볼 수가 없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도부수는 집행검을 치켜 들었다.
때는 건흥(建興) 육년 오월이었다.
그때 마속(馬謖) 나이는 서른아홉 살. 공명(孔明)은 마속을 참형(斬刑)에 처(處)하자, 곧 그의 자녀(子女)들을 거두어 그들을 친자식(親子息)처럼 사랑으로 보살폈다.
*인물평
마속(馬謖) 190 ~ 228년.
유비(劉備)의 장수(將帥)로 자(字)는 유상(幼常), 의성(宜城) 출신으로 마량(馬良)의 동생이다.
유비의 휘하(麾下)에서 여러 요직(要職)을 거쳤다. 228년 봄, 가정(街亭)에서 위군(魏軍)과 대적(對敵)할 때 제갈량(諸葛亮)의 지시(指示)에 반대(反對), 남쪽의 험준(險峻)한 산중(山中)에 진(陳)을 쳤고, 위군이 물길을 끊는 바람에 패전(敗戰)하여 제갈량이 전군(全軍)을 돌려 한중(漢中)으로 전격 후퇴(後退)할 수밖에 없는 단초(端初)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귀환(歸還)한 뒤에 공명(孔明)은 군율(軍律)을 지키려는 의지(意志)로 아끼던 그를 처형(處刑)하였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곧 “울면서 마속의 목을 잘랐다”는 뜻으로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성어(成語)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삼국지 - 367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