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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11:1-9(p.981)
평화의 왕, 평화의 나라(King of Peace, Kingdom of Peace)
한 가정의 가장이 인자하고 덕스러우면, 그 가정의 분위기는 화기애애 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은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이웃들에게도 들릴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가장이 항상 술에 취하여 집에 들어왔어는 폭력을 행사하거나 부부 싸움을 일삼는다면 그 가정에서는 웃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아이들은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한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왕정시대에는 왕이 평화로운 분이면 나라도 평화로운 나라가 됩니다. 왕이 폭력적이라면 나라도 결코 평화롭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장차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시면 평화가 함께 임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장차 오실 메시야, 그 분은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기 때문에 평화의 나라가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적부터 말씀 드리면,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말씀을 듣는 가운데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도 평화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의 나라에서 평화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먼저 1절 말씀을 봅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아하스 왕은 적들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못했고, 떨고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그의 시대를 넘어 그의 후손인 이새의 줄기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일을 만날 때, 눈앞에 일어난 그 일만 해결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다가 해결될 가망이 보이지 않게되면 실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하여 아주 비관적인 일을 택하는 사람들도 불행하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 넘어 넘어, 그리고 강을 건너고 또 건너..., 영원까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불신앙의 시대, 하나님을 외면하던 시대에도 하나님은 먼 미래를 보시면서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끝까지 이루어가시고 완성하여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의 장중(莊重)하신 계획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새’라는 사람의 혈통에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새’라는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게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하나님의 이 계획은 취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분명히 ‘이새’라는 사람의 혈통에서 메시야는 오셨습니다.
‘이새’란 이름은 다윗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왕조를 일으켜 세운 위대한 인물이었지만, ‘이새’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양을 치던 이름 없는 목자에 불과하였습니다.
메시야라는 싹이 그런 이름 없는 목동의 줄기에서 나온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도 메시야로서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요1:11).
그러므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는 것은 사람의 상식과 이해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때에 성령님께서 감동해 주시어 믿어지게되고 알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 『줄기』란 나무의 줄기(branch)가 아닌 베어 넘어뜨린 나무의 밑둥, 즉 그루터기(stump)를 의미합니다.
나무 가지는 보통은 나무에서 가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나무는 쓰러지고 그 쓰러진 곳에서..., 즉 그루터기에서 한 가지가 올라온 것이라는 말씀은 이미 생명이 거의 죽어버린 상태, 생명의 온기가 사그라진 상태..., 비참한 형편, 완전한 파멸과 멸망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절망적인 상황은 메시야가 오실 당시 유다의 형편과 상황을 상기시켜 주기도 합니다.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여 70년 간 바벨론으로 전부 끌려갔어 노예로 살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미 나무가 찍혀 불에 던져진 상태였습니다. 종으로 살아간 70년의 고초와 수치는 눈물과 탄식과 설음의 세월이었습니다.
종살이 70년 만에 그들은 바벨론에서 해방되었고 이후 새로운 부흥과 회복을 기대하며 고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다윗 시대의 영화를 꿈꾸며, 다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가나안 땅으로 귀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을 이루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헬라 제국, 로마 제국 등 여러 나라들의 침공으로 극한 고통을 당하였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인 압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무가 찍히고 잘려 말라 비틀어진 나무 밑둥에 비할 만큼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한 싹』이라 말씀하였는데, 여기서 말씀하는『한 싹』은 새롭게 돋아나는 어린 싹을 의미합니다.
그 싹은 마른 땅에서 돋아나는 연한 순 같아서 고운 모양이나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외관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할 것임을 이사야의 입을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사53:2)
이사야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당시 유대인들은 그의 출신과 외모를 문제 삼으며 비아냥거렸고 그분을 메시야로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요7: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이해하려했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얼마든지 메시야로 받아들었을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버려지고 척박한 땅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죄로 인하여 비참한 인생들을 구원 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그토록 홀대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린 싹이 돋아나서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크게 성장하여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크게 성장하여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그 분을 사9:6에서는 ‘한 아기’, ‘한 아들’로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한 아기’ ‘한 아들’은 아기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으로 오셨습니다. 참으로 연약한 모습으로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할 수 없는...,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그 열매는 풍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13:31-32)
예수님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만, 작은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쉴 수 있게 되듯이 예수님의 겉모습은 겨자씨 같이 작게 보이지만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2절에서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할 것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장차 오실 메시야에게 모두 주실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는 굉장한 소망이 됩니다. 산 위에 내린 빗물은 아래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산위이나 들판 위에 내린 빗물은 강으로 들어갑니다. 강물은 바다를 찾아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메시야에게.., 그리고 메시야에게 강림한 영은 메시야를 믿는 저들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는 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는 여호와께서 불어넣으신 호흡을 의미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창2:7)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메시야로 하여금 구원 사역을 감당하도록 그에게 주시는 ‘여호와의 영’을 지칭합니다.(사61:1).
사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 『강림하시리니』에 해당하는 ‘웨나하’는 여호와의 신이 메시야에게 강림하여 그의 일생 동안 그 위에 머무실 것을 나타냅니다.
√.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으신 관계이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신 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으로 충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눅1: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으신 관계이신 것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심으로 공생의 시작을 성부 하나님께서 공적으로 승인하여 주셨던 사실에서 우리는 보게됩니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으신 관계이신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으며 그리고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던 것을 볼때도 알 수가 있습니다.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 예수님과 성령님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으신 관계이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使役)에도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셨음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눅4: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행하시는 모든 사역들이 성령이 임하시어 하실 것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 동네를 찾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늘 하시던 대로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자 책을 펴서 이사야가 전했던 메시야 예언에 관한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심을 통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에 기초하여 사역하시고 있으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눅4:18)
⇢ ⇢ 다시 2절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2절에서는 《메시야》에게 주어지는 ‘여호와의 영’의 성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2절에서는 6가지의 성령의 속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각각 두 개씩 세 쌍으로 구분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3가지의 성령의 속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하였습니다.
∇. 먼저 『지혜』에 해당하는 ‘호크마’는 구약 성경 내에서 인간 삶의 제반에 관련하여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描寫)됩니다.
지혜는 전쟁에서도(사10:13), 제사장의 옷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마음에 지혜 있는 자, 하나님이 지혜로운 영(靈)으로 채운 자들에게 만들도록 하였습니다.(출28:3)
그리고, 금은(金銀)과 놋으로 만드는 작업과 보석을 깍아 만들며, 목공 작업에도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어 일하게 하였습니다.(출31:3-6)
나라를 통치할 사람도 지혜의 신이 충만한 자를 세우게 하였습니다.(신34:9)
지도자들과 국가 관리들의 통치 행위에서도(신34:9 삼하14:20), 바른 상황 판단과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는 것에도(삼하 20:22), 신중하고 사려 깊은 언어생활,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는 측면(시 90:12) 등에도 지혜는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지혜의 영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합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죄를 피하는 방면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지혜의 영입니다.
∇.다음은 총명의 영입니다.
『총명』에 해당하는 ‘삐나며꾀’는 사전적으로 ‘이해’, ‘이해력’,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바르게 이해하는 행위, 바르게 이해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의 대상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릇되고 악한 것을 이해하고 그것으로 인해 악에 빠지는 것이 아닌 거룩하신 분, 곧 하나님을 바르게 보고 이해하며 그분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그분의 뜻하신 바대로 행하는 것을 함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와 총명은 사실상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었지만 특별히 백성들을 통치하는 왕에게 요구되었던 자질(資質)입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왕으로서 가져야 할 통찰력 그리고 이해력을 구했던 것입니다.
왕상3: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듣는 마음이 바로 통찰력 이해력을 말합니다. 솔로몬은 왕이 가져할 총명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에게 주어지는 지혜와 총명은 솔로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메시야는 사탄의 궤계와 사악한 힘과 권세로부터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탄보다 더 큰 지혜와 총명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총명의 영이신 여호와의 영을 그에게 부여하셨고 이를 가지고 메시야는 구속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으며 그 같은 지혜와 명철을 또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으로 부여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 다음으로 메시야에게 모략(謀略)과 재능(才能)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모략』에 해당하는 ‘에차’는 주로 정책올 결정할 때 필요한 지혜를 말합니다.
옛날에는 왕 곁에는 책사(策士)라 하여 왕이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 어떤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지혜를 내어 왕을 곁에서 돕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통령 곁에는 많은 책사들이 있습니다.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여러 수석들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대통령 곁에서 대통령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나라에서는 뛰어난 실력자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라가 파탄에 빠지게도 합니다. 사람들의 모략은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메시야에게는 모략의 영이 강림하여 메시야가 행하는 모든 일에는 실패가 없으십니다.
∇.재능(才能)으로 번역된 ‘께부라’는 메시야가 권능 있는 자란 사실을 말합니다.
이는 메시야의 사역이 지적인 측면에서만 탁월한 것으로 드러날 뿐 아니라 실제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측면에서 강하고 능하신 분으로 드러날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모략과 재능의 영으로 무장한 메시야를 당할 세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메시야는 그 권능으로서..., 인류를 범죄로 이끌며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가두어 놓고 있던 사탄의 권세를 파하시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자들을 참 생명과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 메시야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을 받으셨습니다.
∇. 메시야에게 임한 ‘지식’은 관념적 지식이 아닌 실제적이며 체험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과거 우리나라 교육 중에 잘못된 것 하나가 영어교육이라 말합니다. 최소 6년 동안 영어를 배웁니다. 그리고 [국영수]라 하여 국어, 영어, 수학..., 이 3개의 과목을 다른 모든 과목보다 앞세우면서도 미국 사람을 만나면 말한마디 못하는 영어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영어 교육이 실제적인 교육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갖이신 지식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지식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며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십니다.
시139: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이런 지식을 갖이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지식의 영을 부음 받은 메시야 밖에는 없으십니다.
잠3:1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20.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21.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이 네 눈 앞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한 지혜입니다. 이 지혜로 주신 말씀을 우리는 지혜로 삼아 근신하며 우리 앞에서 말씀이 떠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만이 지혜로운 삶일 것입니다.
과거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 이스라엘은 그 주인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사1:3),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였지만(호4:6),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그의 뜻을 준행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식의 영이 충만하신 메시야께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에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그 메시야를 믿고 따라감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삶을 살게될 것을 믿습니다.
∇.『경외하는』라는 말씀은 자기를 세운 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의 자세, 태도 또는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 외의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그의 모든 행위의 동기가 여호와의 뜻을 쫓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데 두고 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그 영광과 위엄이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하심에도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 메시야직을 위임받고 이 세상에 보냄 받은 분이었기에 그를 보낸 자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고 그 뜻을 받드는 가운데 당신의 메시야직을 완수하셨습니다.
⇢. 3절 말씀을 봅니다.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과,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을 부여받으신 메시야는 그 부여받으신 것으로 성부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였는가를 3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시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되 죽기까지 순종할 정도도 경외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5-8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또한 예수님은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하고, 궤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억울하고 불공평한 심판이 많으며, 불합리하게 판단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이 있을 경우 무죄로 풀려나지만 돈이 없을 경우 유죄로 처벌받는다는 말입니다.
법률소비자연대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0%가량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동의한다고 하였습니다.
솜방망이 라는 말이 회자(膾炙)될 때가 있습니다. 재벌들이 죄를 범했을 때, 누가봐도 서민들보다 죄가 큼에도 불구하고 처벌이 가벼울 때 사람들은 솜방망이 처벌이라 합니다.
일반인들은 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어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지만 돈이 있는 사람들은 이름있는 유명한 변호사를 한명도 아니고 여러명을 선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역시 돈이 있으면 죄의 무게보다도 헐씬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보게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1988년에 탈주범 지강헌의 절규로 유명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조적(自嘲的)인 말로 ‘죄가 있다면 돈 없는 죄 밖에 없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불공평과 불합리로 뭉쳐져 있지만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야는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모든 것의 원인을 아십니다. 그 연약함도 아십니다. 그래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덮어쓰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심판하시고 판단하십니다. 십자가의 피로 덮어져 있으면 그것을 심판으로 삼으십니다. 죄를 주님의 피로 씻음받았으면 그것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 더 이상의 심판도 더 이상의 판단도 하지 않으십니다.
⇢. 4절 말씀을 봅니다.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시며』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불의한 재판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모두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身元)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訟事)를 수리(受理)하지 않았습니다.(사1:23)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판단은 “설명을 듣기 위해 소환하다” 또는 “판결하다.”는 뜻입니다. 겸손한 자의 말을 들어보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겸손(謙遜)한 자의 호소를 들으십니다.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입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시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8.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그 입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그 능력의 말씀으로 악한 모든 것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계1:16절에는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라고 하였습니다. 살후 2:8절에서 는 “그 입의 기운으로”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킬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의 유혹과 궤계를 능력의 말씀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게되면 계2:27절 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철장으로..., 즉 쇠몽둥이로 질그릇 깨드리는 것처럼 하리라” 하였습니다.
⇢. 5절 말씀을 봅니다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통치자가 가져야 할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公義)입니다.
공의(公義)라는 말은 정의(正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쉬파트’(mishpat), ‘체다카’(tsedaqah), 헬라어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등입니다.
‘미쉬파트’는 재판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옳음. 공평한 것을 말합니다.(레19:15 신 16:19-20) ‘체다카’는 의로움, 경건, 덕을 뜻합니다.(창15:6 사5:7) ‘디카이오쉬네’는 넓은 의미의 올바름, 생각이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하는 사람을 뜻합니다.(히5:13)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사30:18) 중의 하나로, 각 사람을 공평하게 취급하시는 데에서 잘 드러납니다.(신32:4 단 9:14 습 3:5).
하나님은 공의를 굽게 하시지 않으시며(욥8:3; 34:12), 공의로 판단하시며 세계를 심판하십니다.(렘11:20 시146:7 창 18:25 시9:8). 그리스도 역시 공의로우십니다.
망령된 자들은 정의를 업신여깁니다.(잠19:28) 또한 악인은 정의를 행하기 싫어 합니다.(잠21:7)
인류 역사에서 독재자들은 모두 공의(公義)를 싫어했습니다. 정의(正義)를 업신여겼습니다. 자신의 말과 생각만이 정의라고 믿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공의를 구하고 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습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공의로 살려면...,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시25:9) 그리고 또한 성령을 받아야 정의를 베푸는 자가 됩니다.(사42:1)
공의를 행한 결과, 하나님의 나라는 굳건해집니다.(잠29:4)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자도 정직하며 공의를 실천하는 자입니다.(시15:1-2)
그뿐 아닙니다. 공의를 행한 자는 큰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솔로몬은 왕상3:6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왕상3: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악인이 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악인이라 하여 금방 심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로 의인이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 앞에서 ‘왜’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아삽은 이에 대해 답을 얻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본 뒤에야 궁극적으로 악인은 결국 멸망하며 의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시 73:17-20, 24).
하나님의 공의는 현재 세상에서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온전하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의의 하나님의 관심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데 있으시기 때문이다(시 103:6 사 45:22).
⇢.마지막으로 6절부터 9절까지 말씀을 봅니다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6절 말씀에서 9절 말씀까지는....,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된 피조물의 세계인 짐승과 사람사이, 짐승과 짐승사이에 일어나는 파괴된 세계가 예수님이 성령으로 다스릴때 평화가 임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은 그곳이 지옥입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이 등식(等式)은 동물들의 셰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세상에도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인평등(兩性平等) 이라 말은 하지만 그 말도, 힘있는 강자(强者)자들에게는 그들만의 품위 유지를 위하여, 혹은 인격적인 사람임을 치장(治粧)하는 하나의 구호(口號)일뿐입니다.
만인평등을 부르짖는 또한 무리가 있습니다. 바로 약자(弱者)들입니다. 이는 약자들의 탄식이며 애원일뿐 진정한 만인평등은 없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왕이 오실 때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진정한 평등은 지금도 이루어집니다.
그 때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입니다.
그 날은 이미 세상에 임하였습니다. 이제 장차는 주님이 온전히 통치하는 평화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며 지금 우리가 사는 그곳이 어디가 되었건간에 예수님이 다스리는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사랑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아프리카의 사바나(savanna)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초식동물들을 잡아 먹으려는 포식자들이 사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덩치가 아주 큰 들소도 사자들 앞에서는 한끼의 식사꺼리입니다. 달리는 것에는 남부럽지 않는 얼룩말들도 사자나 치이타나 하이에나에게는 먹이감에 불과합니다.
잡아 먹고 잡아 먹히는 피비린내 나는 죽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나라를 복음으로 세워주심으로 사람사는 세상은 사바나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복음을 전하며 기도하며 전도자의 열심을 품고 살아가십시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나라를 새워주심으로 평화로운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나라를 새워주심으로 평화로운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우리 모두 사모하면서 간절한 도고의 기도자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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