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와 마천의 교회 현황
오동춘:마천출신 서울 화성교회 장로
가.한국 기독교
1: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전도활동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복음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은 미국 북장로교 파송 언더우드<1859-1916> 북감리교 파송 아펜젤라<1858-1902> 두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인천>항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언더우드는 한국 개신교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1890년경의 기도문에 의하면 당시 무지한 조선 사람들이 서양 귀신 왔다고 전도를 배척하는 고난 속에서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학교도 없고,의원도 없고,의심과 멸시 천대만 있는 이 땅이 이제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오직 제 믿음을 지켜 주소서 아멘!”이렇게 기도하며 성경을 쉬운 한글로 번역해 가며 오로지 전도에 온 땀과 피를 쏟았다 이미 1886년 5월에 언더우드학당<뒤에 밀러학당 경신학교 전신> 교육기관을 세워 “우리 학당은 밥도 잠도 공부도 공짜요 아무나 오시오!”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학당을 경영하여 많은 학생을 전도하고 그 가운데 60 한평생 우리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애국가도 지은 도산 안창호<1878-1938>선생도
제자로 배출했다 그 뿐인가 장로교 일번지가 되는 광화문에 새문안교회를 1887년에
창립했으며 한영사전을 편찬하고 1890년 성서공회를 설립하고 1916년 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으로 조선에 입국하며
1885년 부활절 아침 기도 일부를 보면“주여! 메마르고 가난한 땅,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오르지 못하게 하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있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이런 기도 속에 우리나라 기독교 문화 발전에 평생을 바쳤다 우리 이름으로 원두우인 언더우드 선교사는 자신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을 아들 원한경
박사가 이었고 손자 원일환 박사는 연세대 총장 서리를 지냈다 언더우드 일가족묘지가 마포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마련되어 있다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부활절 기도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남긴 아펜젤러도 배재학당<1886>을 세우고 첫감리교 교회인 정동감리교회를 세워 우리 나라 근대교육의 개척자로 기독교교육과 복음전도에 일생을 바쳤다 한글 성경번역에도 헌신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 참석차 가다가 선박사고로 순교했다 그 아들 내외와 딸이 양화진선교사묘원에 안장 되어 있다 아핀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이승만<1865-1965> 우리 나라 초대 대통령,주시경<1876-1914>국어학 선구자 등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었다
이수정<1842-1886>선교사는 일본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건너가 1883년 일본 야스카와<安川亨>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한글성경번역선구자로 활동하며 일본을 들린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에게 한글성경을 전해주면서 조선어교육을 했다 이수정 선교사도 우리 나라 선교사로 복음전도에 공로가 큰 기독교 신앙인이다 귀국 후 선교활동을 했다
기독교 최초 의료선교사로 우리 나라에 온 알렌<1858-1932> 의사는 갑신정변 때 상처 입은 민영익 대감을 최초로 치료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어서 의료기관인 광혜원 병원을 하사 받았다 자유로운 진료행위로 선교의 새장을 열었다 그 뒤 언더우드,혜른,스크랜튼 등의 의료 선교사를 통하여 선교의 도약을 이루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6월에 한국에 온 헤른<1856-1890>은 의료 선교사로서 제중원<광혜원 후신>에서 알렌,언더우드와 함께 열심히 선교활동을 벌였으나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 지 5년만에 별세했다 서울 마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최초로 안장된 선교사가 되었다
캐나다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에비슨<1860-1956>선교사는 우리 나라 근대의학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893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제중원 제4대 원장을 지내면서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했다 43년간 의료 선교활동을 하고 1935년에 은퇴했다 양화진선교사묘원에는 에비슨 선교사 아들 내외가 묻혀 있다
1886년 7월 4일 미국 북감리교 파송 선교사로 육영공원 교사가 된 헐버트<1863-19439>박사는 선교사로 한국독립에 크게 기여했고 우리 나라 최초 한글교과서 <사면필지>책을 1889년에 펴냈다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 받으며 그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1949년
8월 5일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에 왔으나 여독으로 곧 별세하여 8월 11일 외국인으로서 처음 사회장으로 양화진선교사묘원에 모셨다 그는 외국인으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1950.3.1.>이 추서 되고 한글공로로 2014년 10월 9일 한글날 금관문화 훈장도 추서되었다 이밖에도 우리나라 선교활동으로 교육 및 한국문화,기독교 발전에
이바지한 선교사가 많이 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튼<1832-1908>,배화학당 설립자 캠벨<1853-1920>,연동교회 초대목사 게일<1863-1937>선교사 등이 있다
이 서양 선교사보다 먼저 한국을 방문한 선교사로 독일의 귀출라프 선교사가 있고 최초 한국에서 순교한 선교사로 영국인 토마스<1840-1866>선교사가 있다 성경책을 전하며 전도하다가 대동강변에서 조선군에 의해 27세로 순교를 했다 토마스의 순교는
헛되지 않아 평양을 제2예루살렘으로 만들었다 평양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1월 6일부터 2주간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1500명 성도가 통성기도로 은혜가 넘쳤다
1907년 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가 창설되어 평양신학교 7명의 졸업생이 안수를
받았다 그 명단은 서경조<황해도 소래교회 개척자 서상륜 집사 동생>,이기풍<신사참배 반대 순교자>,길선주<민족대표 33인 중 하나>,한석진<일본 선교사로 파송> 방기창<장대현교회 초대 장로>,송인서<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부서기> 양전백<민족대표 33인 중 하나>
위에서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기독교가 초기 교육 의료 성경번역,한글보급 등의
활동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사실을 살펴 보았다
2.일제시대의 한국 기독교 탄압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나라 잃은 당시 조선의 기독교는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기독교 민족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제는 1911년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암살 사건을 조작하여 초기 600여명을 검거하여 취조하고 날조된 사건으로 증거가 불충분하여 일제는 105인만 입건하여 105인 사건을 만들어 2심에서 이승훈 안태국 윤치호 등 6인에게 6년 실형을 내리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했다 105인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을사늑약,정미7조약 등으로 나라의 위기를 느끼고 미국 망명 중에 기획한
지하 비밀 애국단체인 신민회 조직차 1907년 2월 20일 인천항으로 귀국한 안창호 선생은 민족정기가 투철한 전덕기<1875-1914>목사가 시무하는 상동교회 교인들 중심의
전덕기,이승훈,신채호,이동녕,이동휘,박은식,등의 애국지사들로 신민회를 조직했다
안창호가 세운 평양대성학교 남강 이승훈이 세운 정주 오산하교 중심의 민족주의교육,근대적 자아의식 고취,민족산업 육성,민족문화계발,등의 활발한 애국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량 검거하여 신민회는
해체되고 대표격으로 활동한 안창호는 거국가를 남기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대라우치 총독의 무단정치로 억압받던 우리 한국 국민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민족대표 33인 중에 길선주 이승훈 양전백 등
기독교 교인 16명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 교인 16명,한용운 백용성 불교계가 2명
민족대표 중에 기독교 대표가 16명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기독교의 애국운동이 돋보이는 일로 느껴진다 이화여고생 기독교인 유관순의 병천 아오내 장터 3.1독립운동 주도
활동으로 민족정기를 살리고 끝내 옥사한 순국정신은 우리 만고의 거울이다
일제시대 기독교가 남긴 치욕사건은 일제의 강요에 굴복하여 우상숭배인 신사참배 행위를 가결한 것이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일제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신사참배 하기로 가결한 것이다 193명의 총대 중에 일제 감시 경찰이 100명이었다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니고 국가의식이라는 일제
억지 논리에 목사 장로들이 굴복하는 치욕을 보인 것이다 일제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고 황국신민으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결의한 장로교 총회는 천추의 한을 남기고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 1조를 어긴 것이다 안건이 가결될 때
홍택기 총회장은 가부를 무를 때 “아니오”는 묻지도 않았다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는
그날로 평양신사에 23명을 인솔하여 신사에 참배했다 우상숭배 죄를 지은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일본 기독교 산하로 편성되어 일제의 신사참배 우상숭배 소굴로 빠져
든 것이다
1897년 경남 창원 출신의 주기철 목사는 평양장로교신학교 졸업 후에 부산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시무를 거쳐 조만식 장로 권유로 1936년 평양산정현교회로 자리를 옮겨 시무했다 주기철<1897-1944>는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일제의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강력히 반대했다 계속 옥중 투쟁하다가 1944년 4월 21일밤 9시 만신창의가 된 몸으로 평양감옥에서 순교했다 일사각오 믿음으로 우상숭배인 신사참배 거부하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기독교계 훌륭한 거울 목사요 오늘의 목사들이 본받아야 할 귀감이다 이기선 채정민 목사가 서북지방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폈고 마산문창교회 중심으로 한상동,주남선,황철도 이인재 목사등이 신사참배 반대 활동에 열열히 투쟁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교회와 가정을 탄압하여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의
위패가 든 신사도형의 가미다나<神棚>을 안치하게 하거나 혹은 종이로 만든 위패를 벽에 걸게 했다 예배 전에 천황이 있는 곳으로 동방요배,황국신민선서를 해야 했다
1940년 7월 일제경찰은 신사참배 거부 기독교 군인들을 2천명 검거하여 70명은 장기 복무하다 50명이 옥사하고 나머지는 광복후 출옥했다
일제 신사참배를 강력히 반대한 이기풍<1865-1942>목사는 평양 출생 평양신학교 출신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7인 목사안수 중에 하나로 탐라<현제주도>에 우리 나라 첫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제주도에 도착 했으나 굶주림과 고난 속에 제주의 우상인 산신령 큰뱀을 때려 죽이고 어린 여아를 구해낸 일에 감동 받은 제주도민의 도움으로 제주도에 서부교회를 설립했다 한때는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마포삼열 선교사 목사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자가 되고 거듭 나서 목사가 되어 제주도 선교사가 된 것이다 제주에서 나와 호남 일대에 전도하며 신사참배를 줄기차게 반대하다가 일제 경찰에 잡혀가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 1942년에 순교했다 북제주군 포천읍 화흘리 산 14-3번지에 이기풍 선교관이 서 있다 제주도에 처음 복음 씨앗을 뿌린 전도자는 이기풍 목사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박관중 장로와 안이숙<1908-1997>성도는 일본 동경에서 열린 일본 74회 제국의회에 참여하여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지 말라 소리 지르고 가져간 유인물도 뿌렸다 신사참배 반대자로 박관준 장로,안이숙 성도는 6년간 옥살이 하고 광복과 함께 출옥했다 안이숙 성도는 늦게 결혼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등의 많은 간증저서를 내서 은혜롭게 전도했다
이밖에도 많은 목사,장로,성도들이 일제의 우상인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하여 성도의 신앙을 잘 지켰다
3.광복후 한국교회
원자탄 두알의 하나님 심판으로 일본이 패망하여 광복을 맞은 한국교회는 일제 신사참배 친일 목사들과 신앙을 바로 지킨 목사들 사이에 다툼과 교계 쇄신운동이 일어 났다 친일 목사들리 일제 강요로 신사참배 했다는 변명으로 회개가 없으므로 교계 쇄신운동은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의 하지중장이 다스리는 미군정은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었다
1945년 11월 23일 북한에서 사회민주당을 한경직<1902-2000> 목사 이우필 성도 등이 주도 했으나 공산세력 때문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했다 1945년 12월 대한민국 최초 반공투쟁인 신의주학생사건에 참여한 한경직 목사가 반공투쟁 학생들과 함께 월남했다 1945년 12월 2일에 함께 월남한 교인 27명이 모여 개척한 영락교회가 하나님 은혜로 5만이 넘는 성도로 부흥되었다 전도사업,교육사업,봉사사업을 교회 목표로 삼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이바지한 한경직 목사의 헌신적인 공로는 크다 한국 정부에서 국민훈장,무궁화장<1970>을 받고 1992년도 독일 베르린에서 세계의 종교계 노벨상으로 알려진 템풀린상을 받았다 그 수상 소감 몇 말씀이 은혜롭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템풀린상 수상 소감에서 한경직 목사는 신앙양심으로 신사참배를 했다고 고백했다
깊이 회개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국교계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였다 한경직 목사 소원은 백두산 소나무로 고향 땅에 예배당 짓고 예배 드리는 것이었다
한경직 목사 뒤를 이어 담임목사직을 맡았던 박조준 목사는 북한에 소련이 북한에
오지 않았다면 한경직 조만식 지도자 중심으로 북한사회를 자유민주주의로 이끌어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건전한 기독교계 지도자가 북한사회를 잘 다스려 나갔을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북한은 종교의 자유가 없다 허수아비교회 봉수교회 칠곡교회 두 개가 형식적으로 있을 뿐이다 북한은 국민의 의, 식, 주 배급권한을 쥐고 오직 김일성
김정일의 주체사상을 신봉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불행한 동토가 되었다 대한민국 성도의 합심 기도로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살아나고 자유의 깃발이 휘날리게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98세로 장수하신 한경직 목사의 유품은 20평짜리 남한산성 집에 타고 다닌 휠체어 하나,성경책,안경뿐이었다 청빈한 목회자의 삶을 모범적으로 잘 보여 주었다
미국 하지 중장의 3년 군정이 끝나고 남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설립된 제헌국회는
이승만 의장이 이윤영 목사의원으로 하여금 기도로 국회를 열어 기독교입국론의 나라가 되었다 장로다운 이승만 대통령의 신앙심이 높게 돋보인다
백범 김구<1876-1949>는 1896년 21세때 민황후 국모가 살해 당한 원한으로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 육군 중위 스찌다<土田壤亮>을 죽인 살인죄로 수감된 인천 감옥에서 탈옥했다 1902년경 남대문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설교에 감화 받으며
기독교 신앙인으로 애국활동을 했다 3.1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기독교인
내무총장 안창호를 만나 독립운동을 함께 했다 안창호는 윤봉길 의사의 배후인물로
체포되어 4년언도를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중 2년 6개월만에 가석방 되었다 그러나
평양 송태산장에서 수양중인데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 재수감 되어 건강악화로 경성제대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에 병보석 중 결국 일제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8년 3월 10일 별세했다 백범과 막역한 독립운동가였던 안창호의 별세후 상해임시정부는 주석이된 백범이 광복 전까지 이끌었다 광복 후 귀국했으나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의 권총에 1949년 6월 26일에 서대문 경조장<현고려병원>에서
암살되었다 백범도 도산도 예수 잘 믿는 성도였다
1950년 6.25 사변으로 남침한 공산당 만행은 극심했다 여수에 애향원을 세우고
나병 환자를 보살피는 손양원<1902-1950>목사는 1940년 일제때는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가고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안제신 공산당 청년에게 동인 동신 두 아들을 잃고 두 아들 죽인 살인범 안재신을 양아들 삼아 하나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한 그야말로 사랑의 원자탄 목사님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경남 함안 출신으로 평양신학교 졸업<1938>후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 감옥에 투옥 되었다가 광복 후 풀려 났다 그리고 애향원과 나환자를 돌보며 지키다가 6.25 나던 해 1950년
여름 여수로 쳐들어 온 공산당 총에 순교했다 보기 드문 정말 예수 닮은 사랑의 원자탄 목사 손양원 목사님은 온 국민이 존경하고 있다 특히 목사들이 그 신앙을 꼭 배워야 할 것이다 기독교 성도들의 스승같은 목사님이다
한국에 존경 받는 대표장로님으로 장기려<1911-1995> 장로님 가나안농군학교 교장
김용기<1909-1988> 장로님을 생각하게 한다 북한에서 김일성 수상 맹장 수술를 해 주고 자유 찾아 아들 하나 데리고 월남한 장기려 박사는 꼭 예수 닮은 사랑이 많은 의사 장로이다 부산에 복음병원을 차리고 무료치료도 많이 해 주고 가난한 이웃을
열심히 도우며 전도한 장기려 박사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존경 받고 있다 결코 재혼하지 않고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아내사랑으로 한평생 사시다 하늘나라 가신 의사 장로님이다 필립핀 막사사이상을 받은 예수 삶을 그대로 닮은 기독교 신앙인이다 목사 장로가 본 받고 온 성도 온 국민이 그 고귀한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의료보험 창시자도 장기려 박사임을 우리는 고마워 해야겠다
일제시대부터 농촌운동으로 나라를 사랑해 온가나안농군학교 교장 김용기 장로님은 스스로 생활헌장을 만들어 국민을 바로 가르쳐 주고 있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현 하남시>에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워 두고 군인 공무원 회사원 여러 단체 입교를 원하는 사람 누구나 가나안 복민의 생활헌장을 교육하여 반듯한 새 사람되어 나가게 만든다
생활헌장 7대강령을 보면 1.우리는 역사의 동상 2.시대의 등불 3.판단의 거울 4.문화의 발판 5.선악의 거울이 되자 하였고 6.우리는 지식의 채찍을 가하자 7.우리는 신앙의 불길을 일으키자 이와같이 제시한 일곱가지 실천의 사람이 되길 가르치고 있다
원주에도 가나안농군학교가 있고 외국에도 가나안 농군학교를 차려 세계시민을 다
가나안 복지로 이끄는 귀한 하나님의 참일꾼 김용기 장로님은 온 국민이 존경하는
모범 신앙인이다 남북 복음통일도 간절히 기도하는 장로였다 장기려 장로님과 함께 필립핀 막사사이상도 받았다 김용기 장로님의 바른 신앙적 가르침 잘 지켜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북한 조선민주당을 만들어 자유민주의를 수호하려다 실패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조만식<1882-?>장로는 일제시대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예수님을 가슴에 영접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 와 오산중학 꾜장 수인중학 교장 등 교육에 몸을 담았다가 잠시 조선일보 사장으로 언론활동도 했다 물산장려운동으로 애국운동 독립운동도 했다 그리고 대전감옥에 출옥된 도산 안창호가 평양으로 돌아오자 동지이며 선배인 안창호와 농촌진흥운동을 하려 했으나
안창호가 흥사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고 곧 병보석 되어
경성제대 부속병원<현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시자 자신의 농촌진흥운동의 계획은 접었다 산정현교회 장로로 시무하며 일사각오로 신사참배 거부하며 평양감옥 옥살이 하는 주기철 목사를 대신하여 교회를 지키며 설교도 했다 주기철 목사가 옥사하시자
교회도 폐쇠되고 믿음으로 고통의 현실을 타개해야만 했다 광복이 되어 공산사회가 아닌 자유민주사회로 이끌려고 소련군과 대치하다가 조만식 장로님은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다 공산 지배자들에게 무저항의 저항을 보이던 조만식은 애국자요 따뜻한 인간성과 신랄한 풍자와 비판과 교훈으로써 동포를 대하던 우리 조만식 장로님인데 안타깝게 돌아가신 곳을 모른다 그래서 박남수 시인은 조만식에 대한 시 첫머리에 /오늘 누구도/그이의 생사를 아는 이없다/로 읊고 있다 신사참배 거부의 일사각오 주기철 목사님을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신 조만식 장로님 지금 하늘나라에서 한국교회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조만식 장로님 국민의 존경 받는 훌륭한 장로님이다
천주교 신부로 아프리카 남수단에 가서 헌신적으로 톤즈마을 사람을 사랑하다 젊은 나이에 삶을 마친 이태석<1962-2010>신부도 예수님 닮은 희생과 봉사와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한 의사 출신 성직자였다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신앙 독실한 모범 신부였다
흉악한 살인범 사람을 17명이나 살해한 김대두 사형수가 감옥 안에서 예수 믿는 전도를 받고 거듭난 회개하는 인생이 되어 1976년 12월 28일 사형집행 당하기 전에 마지막 진술은“하나님 사랑 받고 갑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에 올라 갑니다 낙원에 갑니다” 주님 안에 기쁜 마음으로 사형 직전에 김대식 사형수가 말학 것이다 우라 가슴이 찡하지 않는가 김대두는 감옥 안에서 많은 죄수들에게 전도하여 하나님 믿게 했다고 한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믿는 마음은 항상 기쁜 것이다
광복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한 목사들과 신앙지조 지켜 신사참배 안한 목사들과
한동안 마찰을 빚어 왔다 신사참배로 우상을 섬긴 친일 목사들은 깊이 회개해야 할 것이다 6.25 사변 이후 장로교 감리교 등 한 때 부흥도 있었으나 둘 셋 등으로 교파가 갈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하나님 뜻이 아닐 것이다 현재는 사화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수원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자인 박윤선<1905-1988>목사님 신학교 3대교육 이념이 바른신학,바른교회,바른생활이다 이제 두 세개 교단 빼고 여자도 목사 장로가 된다 목회자 장로들이 바로 서야 교단과 교회가 바로 설 것이다 마천면 5개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교회가 하나로 뭉쳐 한 목소리 한 기도로 교단의 갈등을 없애고 하나님 축복 받는 교단 이루며 속히 남북이 복음통일부터 이룩되게 온 기독교 성도들이 불 같이 기도해애 하겠다 세계에 선교사 많이 보내는 세게 으뜸 한국교회가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