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v a r d M u n c h
에 드바르트 뭉 크
Norwegian expressionist painter
Born December 12, 1863 , Ådalsbruk, Løten, Sweden–Norway - Died January 23, 1944 , (aged 80) Oslo, Norway
P eriods - E xpressionism, S ymbolism, M odern art, P ost-I mpressionism
Notable work - Th e Scream , Madonna , The Sick Child
The Scream (절규)
1893 , Oil painting
National Gallery, Oslo
'절규'는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자 모든 예술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중 하나이다. 그것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불안을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해석되어 왔다. 현란한 색채의 넓은 띠와 고도로 단순화된 형태,
높은 시점을 구사하여 고뇌에 찬 모습을 감정의 위기에 처한 갑옷을 입은 해골로 환원시킨다.
The Scream은 두 개의 파스텔(1893 및 1895)과 두 개의 그림(1893 및 1910)의 네 가지 버전 으로 존재한다.
T he Scream (1895 이후)의 여러 석판화도 있다
'나는 친구들과 산책을 나갔다. 해가 지기 시작했고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피로를 느끼며 멈춰서서 난간에 기대었다. 핓빛과 불의 혓바닥이 검푸른 협만과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친구들은 게속 걸어 갔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을 관통하는 끝없는 절규를 들었다.' 뭉크의 절규에 대한 설명
The Scream, 1895
The scream
1895, Lithographie
고통의 대장간에서 언 가슴 불에 달구어
쇳물로 녹아 흐르는 핏 조각들이
하늘로 솟구쳐 비상하던 날개
자유를 선포하고 금기된 공포를 노래하는
살아 있는 처절한 몸짓이었다
극에 달한 무형의 눈물이었다
빛의 반대편에서 최고의 빛을 향한
깊은 내면의 소리
그것은 위대한 창조였다
가장 진실한 본질의 욕구였다
은밀한 영혼의 아픔과
삶의 샘에 흐르는 침묵의 절규였다
가난한 어둠에서 광기로 뽑아 낸
혼이 휘는 등불이었다
뭉크의 절규 . . . . . . . . . . 고은영 ( 宵火, 1956- , 대한민국 시인, 화가)
The Dance of Life
1899-1900 | Oil painting
National Museum of Art, Norway
Red and White, 1899–1900
Munch Museum, Oslo
Anxiety (불안)
1894, Oil on canvas
Munch Museum, Oslo, Norway
많은 미술 평론가들은 불안이 뭉크의 더 유명한 작품인 절규(1893)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절망을 나타내고 어두운 색은 우울한 상태를 나타낸다.
또한 비탄과 슬픔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The Sun, 1911
Oil oncanvas
The Sun은 많은 사람들에게 현대 벽화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 거대한 그림은 현재 오슬로 대학교 강당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힘을 부정할 수 없이 보여주는 중앙 위치에 우뚝 서 있다
뭉크가 극심한 불안과 과도한 음주와 싸우며 병원에서 돌아온 후에 그려졌다.
Girls on the Bridge
The Sick Child
Original version , 1885-1886, Oil painting
The National Gallery, Oslo
누나 요하네스 소피(Johanne Sophie, 1862–1877)는 15세 때 결핵에 걸렸다.
뭉크는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6점 이상의 완성된 유화와 다양한 매체에 대한 많은 연구를 통해
이 깊은 충격적인 사건을 그의 예술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했다. 작품에서 Sophie는
그녀의 이모 Karen으로 추정되는 검은 머리의 슬픔에 잠긴 여성과 함께 그녀의 임종에 등장한다.
모든 그림에서 소피는 분명히 고통에 시달리는 의자에 앉아 커다란 흰색 베개를 받치고
죽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불길한 커튼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를 위로하고 싶은 것 같지만
어린 소녀의 눈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는 슬픔에 잠긴 할머니와 손을 움켜 쥐고
유령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1885-1886년 원본 버전이 1886년 처음 전시되었을 때, 관중들의 야유를 받았고
그의 인상주의적 기법의 사용, 겉보기에 선의 포기, 그리고 그림이 미완성인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과
많은 사람들은 그림의 핵심 구절인 여성의 맞잡은 손이 상세하지 않고 손가락을 묘사하는 선이 없으며
중앙 장식이 기본적으로 페인트 얼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만족하지 못했다.
방어에서 Munch는 '나는 내가 보는 것을 그리지 않고, 내가 기억하는 것을 그린다' 라고 말했다.
The Sick Child
The 6th in the series , 1927, Oil painting
Munch Museum, Oslo
Cupid and Psyche
Eyes in the Eyes
Vampire (흡혈귀)
1895 | Oil on canvas
스무 살의 뭉크는 연상의 여인 밀리 톨로에게 걷잡을 수 없이 푹 빠져들었다. 하지만 당시 소문난 팜므파탈(femme fatale)이었던
그녀에게는 뭉크 외에도 수많은 남자가 있었다. 터질 듯한 분노와 질투심으로 혼자만의 전쟁 같은 사랑은 6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긴 뭉크는 여성에 대한 피해망상을 갖게 되었다.
뭉크는 밀리를 사랑하며 중독과도 같은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되지만 여기저기서 인기가 많았던
밀리는 뭉크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다. 뭉크는 크게 상처를 입고 여자에 대한 혐오와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된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Vampire(흡혈귀) 이다.
Vampire II
Ashes
1894-1895, Oil on canvas
National Gallery of Norway, Oslo, Norway
이 작품은 수치심과 낙담으로 등을 구부린 남자와 좌절과 절망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움직이지 않는 여자를 떠나보내는
숲속의 커플 사이의 사랑의 시도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그림의 제목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열정의 열기가 그 순간 타 버렸음을 암시한다.
Madonna
1894 | Oil painting
1893년 서른 살의 뭉크는 베를린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했고, 우연히 베를린으로 유학 온 어릴 적 친구
다그니 유엘과 재회하면서 마음속에 다시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를 동료 작가에게 뺏기고 만다.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Stanisław Przybyszewski, 1866-1927, Poet, writer, novelist, playwright)
등의 예술가와 교류하였는데, 이 프시비셰프스키에게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다그니 유엘(Dagny Juel) 빼앗긴다 .
뭉크는 'Jealousy(질투)' 나 'The Separation (이별)' 등의 그림을 통해 다그니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결국 다그니는 1893년 프시비셰프스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이에 분노한 뭉크는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Madonna ( 마돈나)' 를 그리게 된다.
훗날 다그니는 34살 젊은 나이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데, 바로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남편 프시비셰프스키가
다그니와 다른 남자가 불륜을 하게 조장한 후에 그 불륜남에게 살인을 사주했다고 한다.
Madonna (마돈나)
1895, lithograph on grey-green paper
The Separation (이별)
Jealousy(질투) , 1895
Oil painting
Kiss by the window
1892 | Oil on canvas
Self-Portrait with a Bottle of Wine
The Fairytale Forest
Girls on the Pier, 1901
Morning
Youth seaside
1904 | Oil on canvas
The day after
1894 | Oil on canvas
Puberty (사춘기)
1894-1895, National Gallery, Oslo
Oil on canvas
모티프는 종종 불안과 공포, 어린 소녀의 성욕의 각성, 청년이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신체적, 심리적으로 경험하는 변화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사춘기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 모두와 관련이 있으며 전자는 뭉크가 등장한 운동이고 후자는 뭉크가 중심이 된 운동이다.
'Puberty(사춘기)'는 우리의 학창시절 사춘기에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친근한 작품이다.
On the Veranda, 1902
Winter Night
Pine Forest, 1891-1892
Summer night, Inger on the beach
1889 | Oil on canvas
Summer Night by the Beach
Woman in three stages (Sphinx) 1893-1895
Golgotha
Oil on canvas
Self Portrait with Cigarette
The Starry Night
Woman with a dog
The Living-Room of the Misses Munch in Pilestredet 61, 1881
Self Portrait or Man Walking Night
Star Night Landscape in Northern Europe
Despair (Sick Mood at Sunset)
The Smell of Death
Girls on the bridge, 1902
Melancholy
너를 잃은 것도
나를 얻은 것도 아니다
네 눈물로 나를 씻겨주지 않았고
네 웃음이 내 품에서 장미처럼 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눈물은 쉽게 마르고
장미는 지는 날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다
너를 잃은 것을
너는 모른다
그것은 나와 내 안의 잃음이다
그것은 다만 . . . .
고독 . . . . . . . . . . 김현승 (金顯承, 1913-1975, 대한민국 시인)
Melancholy
1892 | Oil on canvas
Melancholy
1893 | Oil on canvas
Melancholy III. 1902
color woodcut
Spring in an elm forest, 1923
The Yellow Log
Evening on Karl Johan
1892 | oil painting
The Death of Marat (마라의 죽음)
1907, Munch Museum, Oslo
한동안 좌절에 빠졌던 뭉크는 그 후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이란 여자와 교제하게 된다.
그동안 뭉크를 떠나 상처를 주었던 여자들과 달리 툴라의 경우 그보다 4살 더 연상인 연상녀로서 예술 방면에 해박하고
성격도 적극적이어서 뭉크와 깊은 관계를 지녔지만 그 사랑이 너무 지나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뭉크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혼을 요구했다. 점점 툴라를 멀리하는 뭉크에게 툴라는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뭉크는 결국 툴라에게로 돌아와 툴라를 말렸는데, 하필이면 이 때 총이 발사되면서 뭉크의 왼쪽 3번째 손가락(중지)이
관통당하는 사태가 생기고, 뭉크는 결국 영영 왼손의 중지를 잃고 만다.
툴라는 이 일이 있은 지 3주 후 새 연인을 만나 파리로 떠나버렸다. 이 사고로 뭉크는 평생 왼손에 장갑을 끼고 다녔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그 손을 숨기며 살았다. 이 이 일을 겪은 후 뭉크가 그린 그림이 'The death of Marat (마라의 죽음)' 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French Neoclassical style painter) 의 1793년 작,
'마라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툴라와의 일에서 자신을 애도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이다.
뭉크는 점차 유명세를 탔고 그림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그의 정신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알코올 중독에 더해 누군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피해망상에까지 시달리게 된다.
The Death of Marat, 1793
Jacques-Louis David (1748-1825, French Neoclassical style painter)
Oil on canvas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Weeping Nude
Reclining Female Nude
Bathing Men, 1907
Oil on canvas
Ateneum, Helsinki, Finland
1907년에 만든 이 작품은 높이와 너비가 2m가 넘는 비교적 큰 작품으로 핀란드 헬싱키 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장면에는 전경과 배경 모두에 많은 인물이 있지만 특히 우리의 관심을 가장 먼저 집중시키는 것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서너 명의 남자이다. 색 사용은 따뜻한 노란색과 주황색 톤에 대해 파란색과 녹색 영역 사이에서 대조를 이룬다.
Bathing Men의 분위기는 마음의 제약이나 걱정없이 좋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복하고 재미있는 분위기다.
19세기 이전에는 실생활에서 이미 이와 같이 행동했더라도 예술 내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인물을 등장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수 있다.
다른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린 목욕하는 사람들의 작품은 대부분은 19세기 중후반에 나타난다.
The Brooch, Eva Mudocci
1903 | Lithography
Lovers in the Waves
Lithograph
Young woman on the Seashore
1896 | O il painting
Starry Night
The Dead Mother and Child
1897 | O il painting
Death in the Chamber of the Sick
Dancing on a Shore, 1900
The murderer, 1910
The Wedding of the Bohemian, 1925-1926
New Snow in the Avenue
Spring Day on Karl Johan Street
Woman in red dress
1904 | Oil on canvas
Forest in Thuringia, 1904
The Storm
1893 | Oil on canvas
Meeting in outer space, 1899
The Voice
1893 | O il painting
The Kiss
The Kiss. 1895
Self portrait
1904 | Oil on canvas
The Scream (절규)
1910 , National Gallery, Oslo
Chopin, Cello Sonata Op.65-3. Largo 쇼팽, 첼로 소나타 Op.65 3악장 라르고
Munch in 1912
Edvard Munch(에드바르 뭉크,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는 노르웨이의 화가이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The Scream (절규, 1893)은 서양 예술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질병, 사별, 가족의 정신 질환 유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어둡게 가려졌다.
Kristiania(오늘날의 오슬로)에 있는 Royal School of Art and Design에서 공부하면서 Munch는 자신의 정서적,
심리적 상태('소울 페인팅')를 그리도록 촉구한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인
한스 예거 (Hans Jæger , 1854-1910, Norwegian writer, philosopher) 의 영향으로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것에서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 나타났다.
Writer Hans Jaeger
1889, Oil on canvas
그는 오슬로에서 자랐다. 오슬로에서 공부하고 유럽에서의 추가 교육을 위해 여러 장학금을 받았다.
1879년 뭉크는 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기술 대학에 등록했으며 그곳에서 물리학, 화학 및 수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는 축척과 원근법을 배웠지만, 잦은 질병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
이듬해 아버지의 실망에 뭉크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대학을 떠났다.
에드바르트 뭉크는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미술 양식인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인상주의의 다소 피상적인 표현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면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본 사상이었다.
공포, 기쁨, 슬픔, 분노, 실망과 같은 깊고 열정적인 경험을 그림에 표현하여 감상자를 감동시키는 것은
표현주의 화가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표현주의가 시작되기 수년 전에 뭉크는 이미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를 그렸다.
'절규'는 미술사에 기록된 최초의 표현주의 그림이다.
뭉크는 1863년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빈민가에 사는 의사였다.
그 빈민가의 절실한 생활은 그의 마음에 새겨졌으며, 어릴 때에 어머니는 결핵으로 사별하고,
이어 누나까지 사망하였다. 죽음과 병에 대한 환각(망상)은 그에게 마음의 벽을 쌓게 했다.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색채를 강하게 바꾸어
그리는 화법을 구사하였다. 또 1892년에는 베를린 미술협회에 초청되어 대량의 작품을 출품했으나
그 이질적인 표현으로 공격을 받고 (Fall Munch, 뭉크 사건 또는 뭉크 스캔들)을 일으키며 독일 회화사에
충격과 변화의 계기를 준다. 그는 다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나치스는 퇴폐예술이라는 이유로 그의 그림을 몰수하기도 했다.
Self-Portrait with Skeleton Arm
1895, Lithographie
뭉크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아버지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
Munch가 가장 좋아하는 누나 Sophie도 1877년에 사망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뭉크 형제는 아버지와 이모 Karen에 의해 양육되었다.
Munch의 여동생 중 한 명인 Laura는 어린 나이에 정신 질환 진단을 받았다.
다섯 남매 중 Andreas만이 결혼했지만 그는 결혼식 몇 달 후 사망했다.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으로 그는 긴장에 시달린다.
나중에 아버지처럼 그는 우울증에 걸리며 성인이 된 그는 걱정거리를 술에 의존하게된다.
그는 스스로 박해를 받고 불안한 상태에 있으며 자신을 학대한다. 1880년, 그는 의식적으로 예술가로서의 진로를 결정하게된다.
공학 공부를 중단하고 보헤미안 그룹에 합류한다. 화가, 작가 및 기타 지식인으로 구성된 그룹은 함께 보수적 부르주아와 사회 도덕에 반대했다.
Munch는 훗날 '나는 인류의 가장 무서운 두 적을 물려받았다. 바로 소비와 광기의 유산이다' 라는 표현을했다.
대부분의 겨울 동안 종종 병에 걸리고 학교에 가지 않는 Edvard는 바쁘게 생활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곤했다.
그는 학교 친구들과 이모에게 과외를 받았다. 아버지(Christian Munch)는 아들에게 역사와 문학을 가르쳤고
생생한 유령 이야기와 미국 작가 포우(Edgar Allan Poe)의 이야기로 아이들을 즐겁게 했다.
인상주의는 어릴 때부터 뭉크에게 영감을 주었다.
초기에 그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포함한 많은 스타일을 실험했다. 일부 초기 작품은 Manet를 연상시킨다 .
그의 화풍은 즉흥적인 붓놀림과 거친 형태가 특징이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매우 독특하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의 그림에서 그는 강하고 대담한 색상에 초점을 맞추며 결코 자연에 충실한 현실을 재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는 자신의 전시회를 조직한다.
Verein Berliner Künstler( 독일 시각 예술가 협회) 에서 55점의 그림을 선보인
베를린에서의 첫 전시회에서 그는 가장 큰 예술 사건 중 하나를 불러일으켰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Fall Munch ( 뭉크 사건 또는 뭉크 스캔들 , 독일 미술사에서
1892년의 '뭉크 스캔들은 독일 현대미술 탄생의 시간으로 간주된다. 뭉크전은 그때까지 독일 미술계가 겪었던
최대의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대중과 나이든 화가들은 뭉크의 그림을 무정부주의적 도발로 받아들였고,
전시회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원장인 안톤 폰 베르너의 선동으로 1892년 11월 12일에 항의하여 폐쇄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대중의 뭉크 전시회에 대한 공격으로 베를린 사람들은 드디어 최근의 국제 예술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게 예술 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독일 미술사에서 '모더니티의 탄생'으로 평가되는 1892년의 '뭉크 스캔들' )로 알려져 있다.
뭉크의 도발이 독일에서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에 이 사건들은 독일 예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에서 그의 회화적 돌파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그의 삶의 우울한 단계에 의해 반복적으로 가려졌고 그 동안 그는 한때 손가락에 총을 맞았다.
그림 ' Death of Marat, 1907 (마라의죽음)'에서 그는 당시의 감정을 처리하며 신경 쇠약으로 시달린다.
뭉크의 연애사는 그의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큼 우중충했으며,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여자와의 관계가 아예 전무했던 건 아니었으며
밀리 탈로, 다그니 유엘, 툴라 라르센이라는 세 여자와 나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다만 셋 중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헤어짐 후에 이별의 아픔과 분노를 표현한 걸작들을 남겼다.
그는 거주지를 몇 번이고 바꾼다. 유럽의 주요 도시인 파리, 런던, 베를린과 노르웨이 고향을 왕래한다.
지금도 무척 유명한 화가지만 생전에도 돈을 잘 번 화가이기도 했다.
뭉크의 이미지는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그림과 함께, 7 노르웨이 1,000크로네 지폐에 나타난다.
뭉크는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두 지역의 넓은 땅을 사서 그곳에서 풍경화나 자화상 등을 주로 그리며
20년을 살았다고 한다. 또 대량의 판화 작품도 제작했으며, 한 작품을 팔고 나면 같은 소재로 작품을 또 그리는 일을 반복해서
작품의 숫자가 많아졌고, 현재의 뭉크 미술관이 그의 전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1월 23일에 80세의 나이로 노르웨이에서 사망했는데 뭉크는 죽은 후 다시 한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여러 해 동안 아무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그의 집 2층이 개방되자 그곳에는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페인팅, 드로잉, 석판화, 에칭화, 목판화 외에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사진과 일기 등의 자료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 모든 작품을 아무런 조건 없이 오슬로시에 기증했증고, 1963년에 뭉크미술관이 개관되었다.
'나의 모든 작품은 질병에 대한 사색에서 비롯되다
두려움과 고통이 없었다면 나의 삶에는 방향키가 없었을 것이다'
Edvard Munch (1863-1944, Norwegian expressionist painter)
* 저작권 관계로 스크랲 막았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
20 23 . 2. 13. Cream rose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뭉크를 아침에 만납니다.
아침 감상엔 부담이 되는군요.
이따 저녁에 다시 봐야지.....
늘 감사합니다.
절규하는 뭉크
잘 알게되었네요
종교에 의존하지 않으면
절망 불안 허무 쾌락이 전부인 것
다시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풍성한 선물 늘 감사드립니다!!!^^
놀랍군요.
뭉크는 절규의 작가 정도로만 알았는데...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설명이 좀 더 길기를 바라는 마음도 가져 봅니다.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크림로즈님.
잘 감상합니다.
즐감합니다.
뭉크의 `절규` 아마도 고등학교 미술책에 있지 않았나요
처음 봤을 때 그 느낌이 큰 충격이었어요
뭉크의 그림들을 이렇게 많이 보게 될 줄 몰랐네요
거의 모든 그림들이 강렬하게 슬프고 비장합니다
그림이 보여주는 고통에 같이 있고 싶습니다
이럴 때는 연민의 마음도 너무 가벼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뭉크의 감정이 고수란히 전달되는 기분으로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뭉크미술관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뭉크의 많은 그림들을 잘 감상 했습니다.
어떤 많은 색을 가지고 썼는지도 자세히 봤고요 ^^
감사 드립니다.
오늘 아침부터 뭉크의 그림으로 긴 여운 입니다.
산뜻하고 행복한 하루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