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에 풍산역 가기 위해선 압구정역에서 한 시간 전에 전철에 올라야 한다. 다른 산행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각이다. 경로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막 시를 하나 써서 카톡에 띄운다. 비가 오락가락하니 두목(803~853)의 청명이란 시를 검색해 읽어 보고 막 시와 연관을 지어본다. 오늘 산행 후 찾아간 주막과 거기서 마시는 술의 정취가 1200년 전 당나라 시절 두목이 찾았던 酒家의 낭만과 필적하길 바래본다.{막 시에 나온 심학산(194m)은 파주시에 있음을 여행 후에 알았는데 우리가 올랐던 고봉산(206m) 보다 낮음도 알았다.}
9시 조금 지나 풍산역 대합실로 가니 친구들이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다. 모두 10인인데 부인이 3인이다. 특히 일산에 사는 남XX군이 참석하여 더욱 반가웠다. 오늘 가는 길은 고양누리길 9코스(고봉누리길)인데 고양누리길 전체를 부인과 함께 한 구간씩 착실하게 밟아오고 있는 장XX군이 안내자이다.
역을 나와 마을버스에 탑승하여 안곡초교 앞까지 갔다.(09:15) 여기서 코스가 시작되는 것 같다. 큰길을 따라 조금 가니 안곡습지공원이 나오는데 화장실과 여러 안내판이 있고 스탬프를 찍는 스탠드가 있어 이곳이 9코스 중에서 중요지점임을 알 수 있었다. 다들 스탬프북에 도장을 찍었다. 길은 공원 속으로 평평하게 가다가 언덕으로 올라가는 지점에 속이 하트모양인 촬영액자가 있어 세 쌍의 부부와 두 명의 남성 친구를 두 명씩 긴 의자에 앉히고 네 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09:33)
여기부터 길이 급해지며 밧줄 난간이 설치된 목제 계단이 나온다. 해발 206.3m인 고봉산까지 올라가려면 조금 힘을 써야 할 것 같다. 높은 봉우리의 뜻을 가진 고봉산은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상은 군부대로 접근이 불가능하다. 한참을 힘들게 올라가니 쉼터가 있고 이 지역에 얽힌 이야기를 써놓은 입간판이 나온다.(09:52) 한구슬과 안장왕 이야기이다. 백제 땅이던 이곳에 잠입한 고구려의 흥안태자(후의 양원왕)가 아릿다운 이곳 처녀 한구슬과 연인이 되는 인연을 맺고 나중에 태수에게 고초를 겪는 한구슬을 구출하였다는 이야기인데 춘향전의 모태로도 추정된다고 한다.(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이야기이다.)
조금 더 가니 이 지역의 주요전투로 봉일천 전투, 구파발 전투, 고양동 전투를 소개하는 입간판이 나오고 6.25전쟁의 교훈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09:56) 서울의 북쪽지역이니 만치 전쟁의 상처가 더 컸으리라고 짐작되며 걷는 동안 자주 보이는 참호가 낯설지 않다.
차가 다닐 수 있는 콘크리트길을 만났는데 여기가 영천사와 만경사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고양둘레길9코스의 설계는 특이하여 단순하게 설계된 다른 길과는 다르다. 대개의 둘레길은 제주 올레길이나 성남누비길처럼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코스를 모두 밟게 되어 있어 소위 리니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 9코스는 다르게 되어 있다. 고봉산과 황룡산을 한 바퀴 도는 원형 루프 두 개를 단선으로 연결시켜 큰 그림을 만들었다. 두 개의 루프에 접근하는 단선이 3개나 있는데, 우선 안곡초교에서 시작된 단선이 고봉산루프에 연결되고, 일산동고와 상감천마을에서 황룡산 루프로 각각의 단선이 연결된다. 따라서 9코스는 별을 그리듯이 시작점에서 종점까지 선을 따라가면 깔끔하게 전 코스를 섭렵할 수 있는 그런 길과는 다르다. 최선으로 계획해서 걸어도 경로를 부분적으로 남겨두게 될 것 같다.(중요 지점들을 연결하여 걷는 방법이 좋을 것 같다.) 지도를 보지 않고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그림이다.(아래 지도 참조)
영천사와 만경사가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우선 만경사를 보기로 하여 큰길을 따라 내려갔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반겨준다. 곧 만경사가 나왔다.(10:07) 만경사는 크지 않은 절로 위쪽에 작게 지어진 대웅전 옆에 큰 나무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무 아랫부분이 혹이 났는지 굵어지고 구멍도 나있었다. 만경사를 나와서 아까의 삼거리로 복귀하여 영천사로 가려 하는데 고봉산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전망을 할 수 있다는 유혹에 주저하지 않고 발길을 그리로 돌렸다.(여기까지 오는 동안 숲속길을 걸었기에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전망은 하나도 없었다.)
숲길을 따라 경사길을 올라가니 쇠기둥들 위에 목제 덱크가 2층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이 고봉산 전망대였다.(10:18) 남동쪽으로 멋진 경치가 펼쳐졌다. 특히 백운대가 있는 북한산이 약한 운무에 싸여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위층 덱크에서 간단히 휴식하며 간식을 즐길 수 있었다. 전망대를 떠나 계단을 올라가니 또 하나의 덱크가 나타나 전망대를 하나 더 만들어 놓고 있었다. 고봉산 정상은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 이곳이 사실상의 정상으로 보아야 하는데 오늘의 가장 높은 지점이고 가장 경치가 우수한 곳일 듯 하였다. 여기선 남서쪽으로 탄현역의 고층건물군, 심학산, 문수산, 황룡산, 월롱산, 북한 개풍군 등 여러 경치가 보였다.
고봉산은 아까 말한 고봉산 루프에서는 벗어나 있어 9코스에 포함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지나칠 수 있는 지점인데 보게 되어 다행이었다. 고봉산을 내려와 황룡산으로 가는 길에 두어번 헛손질을 하였으나 지도가 있어 좁은 길이 있는 숲속을 통과하여 큰길이 지나가는 고봉로삼거리까지 잘 찾아 갈 수 있었다.(11:15) 신호등을 기다려 큰 길을 건너자 길은 산길로 변해 경사길을 올라가는데 얼마 전부터 내리던 비가 조금 세게 내리고 있어 우산을 쓰고 배낭커버를 씌워야 했다.
마사토길은 비가 내려도 질지 않아서 좋다. 옆으로는 군부대이다. 길은 가파르지 않아서 좋았다.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쓴 친구들이 두 세 무리로 흩어져서 황룡산 쪽으로 걷는다. 일제 때 금을 생산하다가 육이오 때 양민학살이 일어났다는 금정굴을 지나 황룡산 쉼터까지 마사토길이 이어지고 친구들이 느릿느릿 비를 맞으며 걷는다. 사실은 비를 맞는 것은 내가 아니고 우산이다. 우산을 펴서 우산 밖으로 비를 배제하면 우산 아래에는 나만의 아늑한 공간이 생성되고 그 공간에서 나만의 생각 속에 깊이 빠질 수 있었다. 황룡산은 고봉산보다 낮기에 길의 경사는 고봉산보다 훨씬 완만하다.
오늘 걷기의 최종목적지인 황룡산 쉼터에 도착하였다.(12:00) 9코스의 스탬프를 찍는 두 번째 장소여서 여기서 모두들 도장을 찍었다. 이제부터 내려가는 길이다. 오던 길로 백(back)해서 가다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꺾어 일산동고로 내려가야 한다. 계속해서 내리는 빗속에 질척한 길을 천천히 내려가서 일산동고에 도착했다. 코스는 여기서 끝이다.(12:35)
점심 겸 뒤풀이는 가나안덕이란 이름이 난 오리집으로 결정하여 그곳까지 가야 한다. 우선 탄현역까지 걸었다. 탄현역사에 들어가니 인근에 아파트인지 주상복합인지 초고층 주거(60층으로 추정)가 보이는데 단지 이름이 “제니스”이다. 탄현역에서 경의중앙선 하행을 타고 두 정거장을 내려와서 아침에 왔던 풍산역에 내리니 원점회귀이다. 역을 나와 약 10분을 걸어가서 애니골의 “가나안덕”에 도착했다. 성경의 지명인 가나안과 영어단어 dug(오리)이 합친 기묘한 이름이다.
유명한 집이라서 사람이 많다. 14-5개 팀이 대기 중이다. 대기번호로 107번을 받고 한참을 기다리니 우리 차례가 와서 3층으로 올라갔다. 5인씩 양쪽으로 두 테이블에 주당과 비주당(여성3인 포함)으로 구분해서 앉았다. 우선 소맥으로 목을 축이고 오리고기를 안주로 소주와 맥주를 계속 마셨다. 적당한 운동 후에 정다운 친구들과 모이니 술이 술술 넘어가는 듯하다. 자리를 파하고 남XX군의 배려로 인근의 찻집으로 가서 차를 마시거나 빙수를 먹었다.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풍산역까지 같이 걸어서 돌아와 전철을 타고 귀가하였다.
- 후기 -
"고양누리길 9코스에서
친구와 같이 걸을 터이다"
입추가 지난
여름의 끝자락이다
비가 오락가락
나그네 맘을 무겁게 해도
친구가 온다니 안 갈 수 없지
배낭속의 술 한 병은
술이 아닌 우정이다
고양누리길 9코스에서
고양 일산을 누려보리라
친구들 사는
경치 으뜸 동네
벌판도 넓고 맘도 너르다
산 내음 풍부한 풍산역 떠나
고봉산, 황룡산 이름도 좋다
심학산 올라가면
배울 수 있지
마음을 다잡고 곧추 서는 법
(오늘은 멀어서 못 감)
더좋은 코스는 미루어두지
그리고 님 얼굴 한번 더 보세
길의 끝자락 쯤에서
멀리 살구꽃핀 마을의
주막을 가리켜주는
목동을 만날 수 있을까?
고양시는 도시계획의 지표중 일인당 공원면적이 전국에서 가장 넓다고 한다.(남XX군 제보) 그만큼 녹지와 공원이 풍부하여 살기에 좋은 고장이라고 하겠다. 이 고양시의 녹지를 따라 고양누리길이 14코스나 개설되어 녹지와 숲속을 누비고 있다. 가히 금수강산을 꿰는 부러운 길이자 이 도시가 가진 자산이다. 숲길을 걸을 때 나무만 보며 나무에 갇혀 걸으면 답답할 수도 있는데 이 길에는 여기저기 지형이 솟아올라 높은 곳에는 전망대가 있어 그곳에 서면 멀리까지 탁 트여 금수강산을 이루는 경치를 원 없이 감상할 수도 있다.(고봉산 전망대가 그 한 예이다.)
고교 동기 남XX군과 신XX군이 살고 있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는 경치 좋은 고장, 10인의 나그네가 하루를 빌어 그곳의 경치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