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존했던 여객선
1.1 스펙
선적: 영국
모항: 리버풀(Liverpool)
모항: 리버풀(Liverpool)
선박 특성[2]
- 총 톤수: 46,328 GRT[3]
- 배수량: 52,310t
- 전체 길이: 269.1m
- 전체 폭: 28m
- 최대 속도: 23노트 (43km/h)[4]
- 굴뚝 수: 4 (단, 끝의 하나는 장식 및 환기용)
- 마스트 수: 2
- 통신 시스템: 밤에는 3200km까지 연락 범위 확대.
- 재질: 강철
- 기관: 스카치식 보일러 24기, 보조 5기, 레시프로 4기, 통 엔진 2기, 증기터빈 1기, 혼성 3축, 프로펠러 3기[5]
- 출력:46,000HP (설계) – 59,000HP (최대출력)
- 최대 탑승가능 인원: 3547명 (승선객, 승무원 모두 포함)
- 선실수
- 1st-class(1등실) 416
- 2nd-class(2등실) 162
- 3rd-class(3등실) 262
- cabin area(전용실, 갑판실 등) 40
- 1st-class(1등실) 416
1.2 건조
20세기 초에 조선업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하란드 월프 사의 회장인 피리 경이, 런던메이 페어의 저녁식사 모임에서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이즈메이 사장에게 3척의 대형 여객선의 건조 계획을 말한 것이 타이타닉 호 건조의 발단이었다. 설계는 토머스 앤드류스가 맡았다.
화이트 스타 라인 사는 "블루 리본"으로 불렸던 북대서양 여객선들의 속도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쾌적한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고 있었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 설계에 방수구획을 도입하였다. 선체는 방수 격벽에 의해 16개의 구획으로 구분되었고, 그 중의 2구획(뱃머리의 경우 4구획)이 침수해도 침몰에 이르지 않는 구조였다. 게다가 격벽은 제어실의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수대책의 도입으로 타이타닉호는 "불침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실제로 설계상의 구조는 지금 기준으로도 안전한 편. 그러나 갑판 아래 선체가 전부 방수구획으로 설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 갑판을 통해 구획 모두가 연결되어 있어서 선체에 큰 손실이 발생하여 다량의 해수가 유입될 경우 도미노처럼 다른 구획까지 차례차례로 침수될 수도 있는 구조였으며 실제로 첫 항해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
타이타닉 호는 올림픽 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가 개시되어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 등 외관에서나 내장 면에서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 호가 전무후무한 초대형 선박인 냥 연출했지만 실제로는 올림픽 호가 클래스의 대표 선박으로, 타이타닉 호와 브리타닉 호라고 하는 2척의 자매선과 함께 올림픽 클래스라고 불리고 있었다. 타이타닉 호의 사진으로도 종종 올림픽 호 사진이 사용된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타이타닉호와 자매선들은 최초로 배 안에 수영장을 설치해 놓은 여객선들이었다고 한다.
1.2.1 설계의 변경
오른쪽이 타이타닉 호, 왼쪽은 자매함이자 1번함 올림픽 호.
그러나 앞서 항로에 투입된 올림픽 호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타이타닉 호의 설계에 반영한 결과, 몇 군데 달라진 부분은 있었다. 예를 들면 A 갑판의 1등실 전용 산책용 갑판(Promenade) 앞부분에 유리창이 설치되는데, 이는 북대서양의 추운 바람으로부터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은 외관상으로 두 개의 자매선을 구분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위 사진은 전술한 유리창이 설치되기 전의 모습. 그 밖에도 올림픽호는 B 갑판의 창가 전체에도 산책용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타이타닉호의 설계도에서는 산책용 갑판 대신에 창가 전체에 1등 선실을 새롭게 마련하도록 변경되었다. 그 결과, 1등실의 수가 올림픽호보다 더 많아졌고 전용 산책용 갑판에 면한 스위트룸이 도입되었다.
자매선이니만큼 애초의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설계되었지만 이상의 이유로 타이타닉의 객실 수가 증가,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의 총톤수는 올림픽 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커진 46,328톤으로 늘어났다. 타이타닉호가 올림픽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 그러나 타이타닉 호가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수에즈 운하에 이 배가 너무 커서 안들어가 수에즈 운하가 확장 공사를 해야 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말은 확실한 과장. 수에즈 운하의 확장은 당시 선박의 대형화 추세 때문이지 타이타닉호 한 척의 통행 때문은 아니었다.
1.3 시설
1.3.1 층별 구조
총 11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보트 갑판 - 최상층으로, 구명보트들은 모두 여기에 나열되어 있었다. 맨 앞쪽에는 선교와 조타실이 있었으며 선장 & 간부(항해사) 숙소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중앙계단의 최상층과 체육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넓은 산책로를 가지고 있었으며, 1등실, 2등실, 항해사, 기관사 저마다 산책로의 영역이 정해져 있었다. 1등실 산책로의 경우 외관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구명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때문에 참사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A 갑판 - 산책 갑판이라고도 불렸다. 거의 모든 영역이 1등실 전용이었고, 1등실 객실들과 라운지, 흡연실, 독서실, 그리고 야자수 코트가 놓여져 있었다. 산책 갑판이라는 이름답게 승객들은 기나긴 산책로가 놓여져 있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앞쪽의 산책로에는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 B 갑판 - 선교루 갑판이라고도 불렸다. 객실은 1등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어떤 객실들은 개인 산책로를 보유하고 있었다. 레스토랑과 카페도 있었다. 이 갑판에는 선두와 선미 윗쪽도 포함하고 있는데, 선미는 3등실 산책로로 쓰였지만 선두는 당연히 안전문제상 선원 외 출입금지였다. 그러니까 97년판 영화에서 "나는 세상의 왕이다!" 하는 장면과 "날고 있어!" 장면은 페이크(...) 다만 생존자가 실제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초에 출입금지라고 해봤자 들어갈 사람은 다 들어가기 마련 - C 갑판 - 배에서 선두,선미와 분리되는 지점이자 하얗게 칠한 곳이 시작하는 지점으로, 3등실의 산책로로 쓰이고 선두와 선미로 각각 이어지는 요갑판과 이어져 있었다. 선두는 주로 선원들의 숙소로 쓰였고, 선미는 3등실 전용 휴게실과 흡연실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1등실 객실들과 2등실 도서관이 있었다.
- D 갑판 - 3개의 넓은 공공시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1등실 대합실, 1등실 식당과 2등실 식당이 있었다. 3등실을 위한 오픈 스페이스도 있어 밤만 되면 신나는 연회가 열렸다. 1등실, 2등실, 3등실 객실들과 화부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방수격벽이 위치해있던 가장 높은 갑판이기도 했다.
- E 갑판 - 주로 1등실, 2등실, 3등실 모두의 객실들과 선원들의 숙소로 차지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 로드"라고 불리던 아주 긴 복도가 있어 선원들과 승객들이 오고갈수 있었다.
- F 갑판 - 객실은 3등실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2등실 객실과 선원들의 숙소도 있었다. 3등실 식당은 여기에 위치했다. 또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수영장과 터키탕도 있었다.
- G 갑판 - 수면 위에서 가장 낮은 층으로, 선원들과 승객들의 객실이 있는 가장 낮은 갑판이었다. 스쿼시 코트도 있엇으며 우편 저장소도 여기에 있었다. 대다수의 영역이 보일러실이 있는 최하 갑판과 겹쳐 있어 선미와 후미가 각각 따로 떨어져 막혀있었다.
- 최하 갑판: 주로 창고가 대부분이였다.
- 탱크 톱: 보일러실과 기관실이 위치해 있었다.
1.4 승객과 선원들
- 1등실에는 총 329명의 부유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급한 사정보다는 즐기려고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 객실은 최상층인 보트 갑판부터 갑판 E(상갑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호화 호텔 수준이었고 개인 목욕탕이 있었다.
- 2등실에는 총 285명의 중산층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등실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배들의 1등실에 견줄 만한 많은 편리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객실은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갑판 B), 레스토랑(갑판 B), 도서관(갑판 C), 상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 3등실에는 총 710명의 가난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주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승선한 승객들이었다. 객실은 2등실과 마찬가지로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시설은 1등실과 2등실만 못하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배에 탑승하기 전에는 검역을 걸쳐서 전염병이나 이/벼룩을 확인했고 여자와 남자는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따로 떨어져 승선했으나 가족 단위일 경우 같이 승선할 수 있었다.
1.5 항해와 침몰까지
1.5.1 출항과 항해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Southampton)으로부터 타이타닉호는 첫 항해를 시작했다.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이 승선하였다. 배가 항구를 떠날때, 실수로 정박되있던 뉴욕 호의 정박용 밧줄을 끊어버려 둘이 충돌할 뻔했던 사건(!)이 발생했다.프랑스의 셸부르(Cherbourg)과 아일랜드의 퀸즈타운에 기항한 후, 미국의 뉴욕 항구로 향했다.
출항 당시 쌍안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 없었다.(...) 때문에 감시원들은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고 육안으로 위험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사고 초기에는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었으나 나중에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실제로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시 쌍안경을 사용하여 실험한 결과 이것조차도 무용지물이 되었다.(실험 결과 그냥 검은 원만 보였다고(...)) 애당초 당시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칠흑같은 밤에 파도도 없어서 빙산을 발견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우린 안될꺼야 아마 그러니까 여러 악조건이 겹쳤다고 볼수 있다.
출항 오전부터 빙하가 돌아다닌다는 위험한 소식이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경고되고 있었으며, 적어도 타이타닉 호는 4월 14일 6통의 경고를 통신으로 받았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들은 승객들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이 계절의 북대서양의 항해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여겨서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무선을 보낼 때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한 통신사 필립스가 "닥쳐요! 지금 그쪽이 통신을 방해하고 있다고요!"...라고 일침을 놓았고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는 빡쳐서 무전 스위치를 끄고 잠이 들었다(...). 문제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배가 캘리포니안 호였는데, 하나뿐인 통신사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구하러 오지 못했다. 이 설에 따르자면 겨우 통신사의 불친절함 때문에 1500여명이 죽어간 참사가 일어난 것이 되는데, 사실 이 주장에 대해서 사건 직후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간 통신사 에반스는 '그런 정도 문제 가지고 화를 낸 건 아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애초에 통신장비를 갖춘 선박의 통신사는 24시간 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고, 당연히 혼자서 24시간 근무가 가능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통신사를 1인만 탑승시킨 캘리포니안 호가 규정을 위반하고 있었던 것. 다만 당시의 해운 관행상 이런 경우는 흔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안 호만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이때 억울하게 캘리포니안 호의 선장만 비난받기도 한 적이 있다. 당시 에반스는 빡쳐서 무전을 끄고 잔 게 아니라 그냥 고된 근무로 피곤해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무선을 보낼 때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한 통신사 필립스가 "닥쳐요! 지금 그쪽이 통신을 방해하고 있다고요!"...라고 일침을 놓았고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반스는 빡쳐서 무전 스위치를 끄고 잠이 들었다(...). 문제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배가 캘리포니안 호였는데, 하나뿐인 통신사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구하러 오지 못했다. 이 설에 따르자면 겨우 통신사의 불친절함 때문에 1500여명이 죽어간 참사가 일어난 것이 되는데, 사실 이 주장에 대해서 사건 직후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간 통신사 에반스는 '그런 정도 문제 가지고 화를 낸 건 아니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애초에 통신장비를 갖춘 선박의 통신사는 24시간 근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고, 당연히 혼자서 24시간 근무가 가능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통신사를 1인만 탑승시킨 캘리포니안 호가 규정을 위반하고 있었던 것. 다만 당시의 해운 관행상 이런 경우는 흔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안 호만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이때 억울하게 캘리포니안 호의 선장만 비난받기도 한 적이 있다. 당시 에반스는 빡쳐서 무전을 끄고 잔 게 아니라 그냥 고된 근무로 피곤해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1.5.2 충돌
그리고 운명의 밤 11시 40분, 레지날드 리와 함께 망을 보던 보초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미터에 높이 20미터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7] 출항할 때 쌍안경을 사용할 수 없었고 빙산의 10분의 1은 숨어 있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급히 무전을 쳤고,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그것을 받고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 1등 항해사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그는 바로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에게 우현 전타를 명령하고(그런데 2010년쯤에 2등 항해서 찰스 라이톨러의 손녀(소설가)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조타수가 하필이면 실수로 키를 그대로 오른쪽으로 돌리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오른쪽으로 돌려면 왼쪽으로 돌려야 했으므로 명백한 삽질. 물론 잠깐 후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제대로 왼쪽으로 돌렸지만 결국에는 배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고...)[8] 텔레모터(원격 조정 장치)를 "전속 후진"로 돌려놓아 엔진 역추진을 시도했다. 그러고 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에 방수 격벽이 닫힐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속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으면 빙산과의 충돌은 회피할 수 있었다."라는 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었다.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급히 무전을 쳤고,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그것을 받고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 1등 항해사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그는 바로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에게 우현 전타를 명령하고(그런데 2010년쯤에 2등 항해서 찰스 라이톨러의 손녀(소설가)의 말에 따르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조타수가 하필이면 실수로 키를 그대로 오른쪽으로 돌리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오른쪽으로 돌려면 왼쪽으로 돌려야 했으므로 명백한 삽질. 물론 잠깐 후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제대로 왼쪽으로 돌렸지만 결국에는 배가 빙산에 부딪혀 침몰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고...)[8] 텔레모터(원격 조정 장치)를 "전속 후진"로 돌려놓아 엔진 역추진을 시도했다. 그러고 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에 방수 격벽이 닫힐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속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으면 빙산과의 충돌은 회피할 수 있었다."라는 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었다.
실제로 충돌시에 상당한 속력이라 키와의 상관은 없었던 것 같다. 뱃머리 부분은 회피했지만 배 우현은 빙산 쪽으로 서서히 접근해 결국에는 충돌하게 된다. 아랫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윗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으나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은 흔들림을 느끼고 깨어났다.
하지만 6번과 5번 보일러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부들은 물을 피해 도망갔다.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방수 격벽의 스위치를 내렸다.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충격을 느끼고 올라온 사람들이나 갑판 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오히려 즐거운 분위기였다. 3등실 승객들은 올라나와 얼음조각으로 축구(...)를 했으며, 1등실도 다른건 아닌건지 어떤 사람들은 기념으로 위스키에 쓸 얼음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우현에는 수면 아래로 약 90미터에 걸쳐서 손상이 생겼다.(배와 빙산은 최대한 10초간 정도 밖에 접촉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선체의 흠집은 겨우 수 인치 정도로, 손상폭을 합계해도 1m란 것이 후에 해저 탐사에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5구획에 걸쳐서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왔다. 4번째 방수구역까지 물이 들어오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지만 5번째 방수 구역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애초에 격벽이 위 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해수는 격벽을 넘어서 차례차례로 다른 구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뱃머리에 실린 물로 배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고 뱃머리가 해수면 아래로 점점 들어갔다.
게다가 횡단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화이트 스타 라인 사의 회장이자 배의 이사 브루스 이스메이가 그대로 전진할 것을 지시하고 선원들은 이를 그대로 따르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에 침몰이 가중되었다.[9] 바로 멈췄다면 침몰 시간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횡단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화이트 스타 라인 사의 회장이자 배의 이사 브루스 이스메이가 그대로 전진할 것을 지시하고 선원들은 이를 그대로 따르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에 침몰이 가중되었다.[9] 바로 멈췄다면 침몰 시간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침몰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 "정면이 아닌 측면에 빙산이 충돌해 피해가 가중되었다."라고 하는 설도 있다. 만약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정면에서 충돌했으면 침수한 방수 구획은 일부의 좁은 범위(타이타닉 호의 방수 구역 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끝나고, 침몰을 면할 가능성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충돌을 회피하려고, 키를 돌려 어중간하게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 피해를 가중했다. 당시의 낮은 제강 기술로 인해 당시 최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던 선체의 강철에 불순물인 황과 인이 많이 섞여 있었는데, 많은 인 성분은 균열을 만들고, 황은 이러한 균열을 더 확산시키고, 낮은 망간 비율은 강철의 탄력성을 낮추어 메진 성질을 더 크게 한다. 참고로 현대의 질 좋은 강철은 망간과 황의 비율이 200:1이지만, 타이타닉 호의 선체에 사용된 고급 강철은 겨우 6.8:1 수준이었다. 황과 인은 각각 4배, 2배 더 많았다는 게 밝혀졌다.
게다가 선체를 접합하는 데 사용했던 이음못(리벳)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타이타닉 호의 잔해에서 채취한 이음못 48개를 분석한 결과, 이음못에 유리 성분의 슬러그가 높은 비율로 섞여 있었고 이로 인해 이음못이 메진 성질을 가져 쉽게 금이 간 것이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쪽을 밀고 있는데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의 내용에 따르면 선수 부분은 곡선이다 보니 리벳 머신으로 박을 수 없어서 강철 리벳 대신에 인력으로 때려박을 수 있는 연철 리벳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헌데 테스트용으로 만든 연철 리벳은 10,000psi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고(타이타닉이 충돌할 당시의 충격에 의한 압력은 14,000psi로 추정하였음) 실제 타이타닉의 선수 부분의 리벳은 테스트용보다 휠씬 약한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충격으로 리벳이 박살나면서 생겨난 틈으로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타이타닉 선장 스미스는 해수의 배수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삽질그저 몇 분의 시간을 버는 정도였다. 펌프를 사용한 배수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그로 그럴게 균열이 너무 컸으므로 배수속도보다 물 들어오는 속도가 빠르니 당연한 결과.
배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첫번째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화부 몇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것.(이건 밑에도 있는 항해중에 있었던 의문의 화재때문에 격벽이 약해져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화부 대장이었던 프레드릭 바렛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4월 15일 0시 15분 조난 신호 CQD를 발신,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다. 불과 20km 정도의 거리에 정박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있었지만 1명 밖에 없는 통신사가 취침중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다. 대략 90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응답해 전속으로 구조로 향했지만 배의 최대 속도가 17노트(약 34km)밖에 안 되는 카르파티아 호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5.3 탈출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렸다. 우선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으며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이 구명보트를 하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승객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구명보트에 탈 생각조차 안했는데 나무로 만든 조그만한 보트보다는 차라리 260미터의 강철로 만들어진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할 듯. 게다가 날씨 때문에 귀찮아했던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콥 아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한 보트보다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선장에게 여자와 어린이를 먼저 태울 것을 건의하고, 선장은 승인했다.1등 항해사 머독은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여자와 어린이 먼저"를 "여자와 어린이만"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다.
타이타닉호가 참사가 된 원인 중 하나는 구명보트의 부족 때문이었는데, 당시의 영국 상무성의 규정을 보면 여객선은 여객 정원만큼 구명보트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당시 규정에서는 978명, 그나마도 배의 배수톤수 기준이었다! 또한, 미관, 비용 등의 이유로 인해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에 1,178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보트만 준비하는 병크를 저질렀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맨 처음 구명보트를 하선할 때에는 많은 승객들이 탈 수 있어도 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언비어가 승무원 사이에 떠돌았다. 정원 65인승의 보트에 70명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배는 뜰 수 있었지만 추진과 균형 잡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배의 건축가를 포함해 관련자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또한 급작스런 사고에 당황한 승무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구명보트를 하선했다. 게다가 그 누구도 그런 배가 침몰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기에 선원들도 정원이 얼마인지 헛갈렸고 사전에 안전 교육도 계획이 있었긴 했지만 (아마도)예배 때문에 취소되어 전혀 하지 않았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를 판에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정원이 완전히 채워졌다면 반이라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를 판에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정원이 완전히 채워졌다면 반이라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1.5.4 대피와 혼란
12시 45분쯤 구명보트 7호가 28명을 태우고(정원은 65명인데...)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 이어 55분에 좌현에서 구명보트 6호가 7호와 마찬가지로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여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빙산에 부딪히고 있었을때 배를 맡았던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 빙산을 처음 목격했던 보초 프레드릭 플리트, 그리고 훗날 "Unsinkable"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가렛 몰리 브라운도 있었다.)
한편, 배 밑 보일러실에서는 화부들과 기관사들이 물이 보일러에 접촉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관실에는 기관사들이 계속해서 동력을 공급했다.
배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5번 보일러실에서 첫번째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기관사 몇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6번 보일러실의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것. 화부 대장이었던 프레드릭 바렛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또 한편 우편 직원들은 침수하는 우편물 저장고에서 우편물을 물에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갑판에 남아있던 몇몇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물이 복도 구석구석에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배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5번 보일러실에서 첫번째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기관사 몇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6번 보일러실의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것. 화부 대장이었던 프레드릭 바렛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또 한편 우편 직원들은 침수하는 우편물 저장고에서 우편물을 물에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갑판에 남아있던 몇몇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물이 복도 구석구석에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구명보트는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허나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정원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내려졌다.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이, 8호는 39명이 탔고,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혼란이 점점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은 구명보트 10호와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혼란이 점점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은 구명보트 10호와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어떤 승객들은 구명보트에 타기 위해 줄을 타거나 뛰어들기도 하였다. 물론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이제 승객들도 상황의 심각함을 어느정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한편 무전사 잭 필립스와 해롤드 브리드는 계속해서 모스 신호를 보내고, 하늘에는 계속해서 로켓이 발사되었다. 캘리포니안 호에서도 이것이 조그만하게 보였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선박이 목격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선박은 후에 포경선으로 밝혀졌으며, 해양경비대로 착각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상황이 지속되고 배가 서서히 기울어짐에 따라 혼란이 훨씬 더 가중되었다. 이제 대다수의 승객들이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공황에 빠졌다. 아직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약간씩 있었다.
한편, 3등실에서는 일부 승무원들이 승객들이 구역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고 많은 구역에 철창이 쳐져있었기 때문에 3등실 승객들이 탈출에 지장을 겪었다. 또한 3등실에는 영어를 잘 모르는 승객들도 꽤 많았다. 이렇게 배 안에 갇히게 된 승객들은 이리저리 헤매며 어떻게든 갑판으로 올라오거나, 모여서 지시를 기다리거나, 식당이나 숙소에 남아 기도하고 있었다.
물론 후에 지시가 내려지고 대부분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구명보트가 떠나간 상태였다. 3등실 승객들의 사망률이 높은 건 이때문.
물론 후에 지시가 내려지고 대부분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갔지만 이미 대부분의 구명보트가 떠나간 상태였다. 3등실 승객들의 사망률이 높은 건 이때문.
1시 30분쯤에는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하고, 혼란은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구명보트도 이제 정원에 어느정도 맞추기 시작했다. 구명보트 11호는 정원을 다섯명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제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리기 일보직전까지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구명보트에 타고있던 프레드릭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명보트 14호가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14호를 맡은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에 허공에 대고 총을 쐈다. 5분 후에는 구명보트 16호가 내려졌는데, 여기 타고 있었던 사람들 중 간호사였던 바이올렛 제솝은 후에 자매선 브리타닉이 침몰했을때도 살아남았다.
구명보트가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이제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접이식 보트 C가 1시 40분에 내려지기 직전 두 사람이 몰래 탔는데, 한명은 가족을 구명보트에 미리 태운 승객이었고, 나머지 한명은 화이트 라인 사의 회장이자 배의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였다. 그는 이때문에 돌아와서 욕을 꽤 먹었으며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도 사퇴했다.
1시 45분에는 구명보트 2호가 내려졌다. 이때 몇몇 외국인들이 타려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 존 제이콥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40명 중에 25명이 타고있었음)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마지막 구명보트(선교 위에 비상용으로 있었던 접이식 보트 2개는 제외)는 접이식 보트 D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1시 45분에는 구명보트 2호가 내려졌다. 이때 몇몇 외국인들이 타려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 존 제이콥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40명 중에 25명이 타고있었음)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마지막 구명보트(선교 위에 비상용으로 있었던 접이식 보트 2개는 제외)는 접이식 보트 D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스트라우스 내외는 금슬좋은 노부부였는데, 남편인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배에 남아 남편과 함께 죽었다.[10]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11]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11]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1.5.5 최후의 순간
2시 5분, 접이식 구명보트 2개를 제외한 마지막 구명 보트인 접이식 보트 D가 떠났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하겠다고 선포했다. 남은 사람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살기위해 발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접이식 보트 2개를 기다리거나 바다로 뛰어들거나 선미로 달려나갔다. 배가 기울며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2시 10분에는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악단이 구슬픈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와 Autoume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고 하며 배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고 하며 배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2시 15분에서 17분사이에는 배가 보트 갑판을 삼키기 시작했다. 배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는 30여명의 사람들이 선 상태로 뒤집혔고, 접이식 보트 A는 제대로 뜨긴 했으나 물이 반쯤 찼다. 이때 몇몇 사람들(아치발드 그레이시, 2등 항해사 라이톨러, 잭 테일러 등)이 환기구 때문에 빨려들어갔지만 다시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면서 물속으로 빠져나와 뒤집어진 구명보트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는 30여명의 사람들이 선 상태로 뒤집혔고, 접이식 보트 A는 제대로 뜨긴 했으나 물이 반쯤 찼다. 이때 몇몇 사람들(아치발드 그레이시, 2등 항해사 라이톨러, 잭 테일러 등)이 환기구 때문에 빨려들어갔지만 다시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면서 물속으로 빠져나와 뒤집어진 구명보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던중 굴뚝 1이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존 제이콥 애스터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덮쳐버렸고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내렸다. 조금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배가 급속도로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하자 온갖 종류의 배 내부 물체들(가구, 그릇, 보일러 엔진 등)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발생했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시켰다.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들 또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이후 침수되면서 굴뚝 2도 차례로 쓰러졌다.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더 커졌다. 그러던 중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잠깐 깜박거리다가 완전히 정전되었다. 잠시 후,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3번째와 4번째 굴뚝(환기구)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굉음과 함께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인 4가 부러졌다.
영화에서는 엄청 스펙타클하게 묘사됐지만 사실 이걸 본 사람은 소수인데다가(폭발은 약간 보였다고 한다.) 그나마 생존자 중 가장 등급이 높은 항해사인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회사가 망해 동료들과 부하들이 일자리를 잃고 흩어지는 것을 염려해 절대 동강나지 않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영국 상무성은 "동강나지 않고 침몰"이라고 결정내렸다. 1985년 로버트 발라드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지지만. 그리고 바다 속에서는 3개로 갈라져 있었다. 이윽고 뱃머리 부분은 잠기고 배 뒤쪽은 바다로 다시 일직선이 되었으나 곧바로 다시 기울어 점차 수직에 가까워졌다.
마침내 운명의 시각 2시 20분, 배와 해수면 사이의 내부 압력이 같아지자 타이타닉호는 물을 뿜어내며 수직으로 서서 서서히 물속으로 들어가다가 완전히 침몰했다.
1.5.6 구조
배에 남아 있던 1500여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구명보트에 탔던 사람들은 배가 침몰한 곳에서 울려퍼지는 온갖 비명과 아우성을 들었다.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번 보트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슨은 현장에 돌아가자고 요구했으나 더프-고든 부부와 배를 맡은 시몬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으며 결국 무산되었다. 5번 보트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또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여자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번 보트에서는 마가렛 몰리 브라운 또한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한편,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점점 줄어들면서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4번 보트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 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보트로 옮겨 구조에 나섰으나 이미 늦었다.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죽었다. 저체온증 이전에 심장마비로 몇 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별세자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모친도 있었다고 한다. 4명만이 그 곳에서 살아남았다.
이후에는 물이 차거나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A와 B의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이후에는 물이 차거나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A와 B의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이때 바닷물에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주방장인 찰스 조그힌이었는데,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B에 매달렸다가 자리가 차 거절당했지만 위에서 누군가가 먼저 죽자 자리가 남자 끌어올려져 살아남았다. 그렇게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이유는 침몰 중 술을 잔뜩 마셨기 때문(...) 무려 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선미 끝에 매달려 있다가 배가 완전히 침몰함과 동시에 그냥 물 속에 떠올랐는데 머리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근데 사실 조난 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위이다.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체온이 상승하지만 혈관이 확장되기 때문에 그만큼 체온 손실도 빨라진다. 술 마시고 길에서 자다가 동사하는 사람들이 왜 많은지 생각해보자(...).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3시간 동안 영하의 바닷물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살아 남은 것은 그냥 기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하나도 젖지 않은 것이 생존에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체온 손실의 40%는 두피의 노출로 이뤄지기 때문.
근데 사실 조난 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위이다.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체온이 상승하지만 혈관이 확장되기 때문에 그만큼 체온 손실도 빨라진다. 술 마시고 길에서 자다가 동사하는 사람들이 왜 많은지 생각해보자(...).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3시간 동안 영하의 바닷물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살아 남은 것은 그냥 기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하나도 젖지 않은 것이 생존에 도움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체온 손실의 40%는 두피의 노출로 이뤄지기 때문.
침몰한 뒤 약 1시간 30분 후인 새벽 3시 55분에 신호를 받고 도착한 카르파시아 호(선장 아서 로스톤)는 약 4시간 30분 동안에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했다.(5명의 사람은 구명보트에서 죽었다.) 배는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다.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속도를 줄이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으나 시신들은 파도에 쓸려가서 거의 보이질 않았고 흩어진 잔해들과 시신 1구밖에 보이질 않았으며, 이때까지 물 속에 살아있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수색은 포기하고 뒤늦게 사고 해역에 도착한 캘리포니안 호에게 생존자를 더 찾아달라고 한 뒤에, 3일 후 뉴욕에 도착했다.
타이타닉 호의 생존자와 사망자 비율[12]
1등실, 어린이 | 6 | 83% | 17% | 5 | 1 |
2등실, 어린이 | 24 | 100% | 0% | 24 | 0 |
3등실, 어린이 | 79 | 34% | 66% | 27 | 52 |
1등실, 여성 | 144 | 97% | 3% | 140 | 4 |
2등실, 여성 | 93 | 86% | 14% | 80 | 13 |
3등실, 여성 | 165 | 46% | 54% | 76 | 89 |
1등실, 남성 | 175 | 33% | 67% | 57 | 118 |
2등실, 남성 | 168 | 8% | 92% | 14 | 154 |
3등실, 남성 | 462 | 16% | 84% | 75 | 387 |
승무원, 여성 | 23 | 87% | 13% | 20 | 3 |
승무원, 남성 | 885 | 22% | 78% | 192 | 693 |
어린이 총합 | 109 | 51% | 49% | 56 | 53 |
여성 총합 | 425 | 74% | 26% | 316 | 109 |
남성 총합 | 1690 | 20% | 80% | 338 | 1352 |
전체 총합 | 2224 | 32% | 68% | 710 | 1514 |
3등실의 사망률이 월등하게 높다. 이때문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예시가 되기도 하는데 물론 일부 승무원들이 3등실 승객들을 제한하기는 했었지만 일단 3등실 선실이 구명보트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구조기도 하고...어쨌든 승무원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러나 1등실이라고 마냥 다 살아난것은 아니다. 1등실에서는 헬렌 알리슨이라는 당시 2살짜리 여자아기가 구조되지 못했는데(구조되지 못한 이유가 엄마를 찾아서라고...) 이는 1등실과 2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유일한 어린이였다. 그녀의 오빠인 당시 11살의 허드슨 알리슨은 구조되었다. 2등실에서 어린이 구조율은 100%였다. 반면 3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어린이는 거의 절반에 가까웠다.
사망 원인의 대다수는 영하 2도의 수온으로 인한 저체온증이었다.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체온 저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며, 영상 20도의 해수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 사고가 발생한 북대서양 바다는 여객선이 통행하는 바다 가운데 가장 수온이 낮은 바다로, 영하의 바닷물에서는 10분 내외로 목숨을 잃는다. 남성과 2등급, 3등급 탑승자의 사망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2등급 탑승자 남성 중 92퍼센트가 사망했다.
타이타닉 사건의 생존자들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사람은 밀리비나 딘(Millivina Dean)으로 타이타닉의 최연소 승객이기도 했다. 침몰 당시 9주밖에 안 된 아기였다. 그녀는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으며, 사우햄프턴에 거주했다고 한다.[13]
여담으로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에는 자매함인 올림픽에 승무원으로 탑승했었고 이후에 브리타닉에도 탑승하게 되는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Violet Jessop)도 있었는데, 올림픽에서는 영국 군함 HMS 호크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었고, 브리타닉이 침몰할 때도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건강히 살다가 83세로 1971년에 사망.
타이타닉 탑승자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다. 중국인 8명(10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앞서 언급되었듯 타이타닉 탑승자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과, '호소노 마사부미'라는 이름의 일본인 공무원 1명이 있었는데[14] 중국인 6명과 일본인 1명이 구조되어 생존률은 꽤 높았던 편이었다. 여담으로 이 일본인은 '여자와 아이를 우선으로 구한다'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구차하게 보트에 탑승하려 했다고 해서 귀국하고도 갖은 욕을 먹었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불운하게 죽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탑승한 보트 근처에 더 이상 여자와 어린이가 없어서 탑승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한다. 사실 이 호소노라는 일본인 말고도 뇌물을 주고 살아난 영국 준남작도 있고(...) 죽을 마당에 살려고 발버둥치는걸 뭐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후 출간된 여러 관련 서적에서도 도시전설급으로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는 빠지고 비난을 받았는데...80년대 조선일보에서 기고를 자주하던 이규태 선생은 타이타닉 이야기를 하거나 타이타닉 영화[15]가 TV에서 방송될때마다 일본인의 민족성 운운하면서 호소노를 까곤 했다. 우리는 이러지 말자
참사의 원인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 빙산 경고 메세지가 선장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항로를 바꾸지 못했다. 게다가 배는 당시 전속력으로 가는 중이었다.
- 망원경 열쇠도 항구에 두고 왔고, 달빛도 없었는 데다가 파도까지 잔잔해서 보초들이 맨눈으로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다.
- 게다가 빙산의 대부분은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알아냈을 때는 늦었다.
- 조타수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동안 우현 전타와 좌현 전타를 헷갈려했다.
- 리벳 또한 불량이었다.
- 게다가 충돌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진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배인 캘리포니안 호의 유일한 전파사는 타이타닉호의 전파사에게 일침을 들은 후 침몰 당시 자고 있었다.
- 3등객 승객들이 탈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후에는 대부분 나오긴 했지만 이미 많은 구명보트가 떠난 상태였다.
- 구명보트의 정원이 탑승객들의 절반 밖에 안됐다.
-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를 판에 많은 수의 구명보트가 꽉 채우지 않은 상태로 보내졌다.
1.6 시신 인수
며칠 후, 시신 인수를 위해 맥케니 베넷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보내졌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인수되었는데, 그중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그리고 선원들의 시신(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에 묻힌다는 전통에 따라)은 영국에서 바다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시체를 넣을 공간이 모잘랐기 때문에, 선원들과 3등실 승객들까지 바다에 장사지내지기도 했다(...). 돈 없어서 죽었더니 죽어서까지 이 고생
건진 시신들은 핼리팩스에 묻었다.
1.7 사고의 영향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문명의 진보에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이 낙관은 2년 후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확실하게 확인사살된다.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16]이다. 생존자는 711명에 불과.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의 안전성 확보를 국제 조약의 형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3개 주요 해운국 회의에서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 통칭 SOLAS)"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17] 당시 선박에 적용되는 안전규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냐면 지금까지도 해상법에 있어 가장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국법에서도 구명보트의 설치 기준은 선박의 정원이 아닌 배수톤수에 맞춰져 있었을 정도. 화물선은 몰라도 여객선에서는 구명보트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미국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에 무선 통신 장비가 의무화, 무선 통신이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긴급 상황을 의미하는 통신용어 메이데이(mayday)가 이때 등장한 표현. "구해 달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venez m'aider'에서 뒷부분만을 몬데그린 현상이 일어나면서 생긴 단어이다.
또 하나의 같은 의미인 통신부호 SOS도 타이타닉에서 유래됐다 하는데 실은 떡밥이다. 하지만 타이타닉호가 최초로 SOS를 쓴 선박 중 하나인 건 맞다. 항목 참조.
참고로 타이타닉이 들었던보험은 영국의 로이드보험인데 140만 파운드를 지급해야했다 한다...
1.8 발견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Robert Balla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배의 앞쪽 부분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뒷쪽 부분은 선체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훼손이 심했으며, 잔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배의 모든 기둥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는 선교루를 향해 쓰러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한구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 조류로 인해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듯 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다 기뻐했지만 누군가 시계를 보고서 "그러고보니까 침몰한지 20분 전인데"라고 하자 분위기가 쏵 바뀌어 하나같이 침묵했다고 한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또 배에서 단 한개의 유물도 건지지 않았다.
사족. 사실 타이타닉을 찾기 위해서는 미군의 원조가 필요했었는데 당시 관련자들은 미군의 원조를 얻기 위해 미군이 조건으로 내건 1960년대 바다에서 감쪽같이 증발한 두 척의 핵잠수함을 찾아내야만 했다. 결국 찾아냈고 짧은 시일이나마 미군의 원조를 받아 타이타닉의 잔해를 찾아낸 것이다. NGC에서 관련 다큐를 방영해준 적도 있다.
1993년 9월에는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케(Wiliam Garzke)가 당시 기록을 근거로 타이타닉 호 침몰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배가 빙하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소리는 저급 강철판이 만들어낸 대재앙의 신호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건져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이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았거나 침몰시간이 지연되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사실 타이타닉은 당시 사용되던 최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시 제조기술이 너무 낮아 최고급 강철판 역시 황의 함유량이 너무 많았고 덕분에 낮은 온도에선 휘어지기보단 부셔저버리게 된 것이다.[18]
출처: 위키피디아 (참고로 위키피디아의 항목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 이는 몇몇 사용자들이 두개 다 편집했기 때문이다. 헐)
1.9 유명한 승객과 선원들
타이타닉(영화, 1997) 항목의 실존인물 항목을 약간 참고할것.
1.9.1 부록: 영웅들
승객들을 구하거나 품위있게 죽은 영웅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영화 타이타닉에도 등장한다.
-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구명보트에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승객들을 지도하다가 끝까지 배에 남아 죽었다. 참고로 스미스 선장은 낮은 계층 출신이었으나 그 기품과 카리스마 덕분에 화이트 스타 라인의 고객 중에도 오로지 스미스 선장의 배만을 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원래 1911년에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회사측의 설득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출항하기로 한 것이 바로 타이타닉호의 처녀항해였다. 항해사 절반 또한 죽었다.
- 배의 설계자인 토마스 앤드류스는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선과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흡연실에 고귀하게 남기로 한 사람은 앤드류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1등실) 승객들도 있었다. 어떤 승객들은 카드 게임을 계속했으며 당대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T. 스티드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들 또한 모두 배와 함께 죽었다.
- 기관장인 조셉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들과 화부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8명의 연주대는 배가 침몰하기 고작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졌으나 비극적이게도 모두 죽었다.
- 토마스 바일스 신부는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구명보트 승선을 돕고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달리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죽었다.
-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현지처와 하녀를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이 여기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콜렉션한 예술작품들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이 좋은 노부부였다. 이지도르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인 아이다 스트라우스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하고 하녀 엘렌 버드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죽었다.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 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참고로 이 때는 아직 배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구명보트에 타기보다 배에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였지만, 아이다 스트라우스는 엘렌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며 "나에게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했으므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 두명의 전파사들도 선장이 이만 물러나가도 좋다고 한 후에도 끝까지 남아 전파를 보냈다. 이 중 해롤드 브리드는 살아남았지만 잭 필립스는 죽었다.
- 남편이 금광을 발견해 하루아침에 떼부자가 된 1등실 승객 마가렛 몰리 브라운은 구명보트에서 가장 앞장서서 노를 저었으며 생존자를 구조하자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지만 보트를 맡고 있던 조타수 히친스의 기를 죽여놓았다.
- 젊은 로테스 백작부인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노를 앞장서 열심히 저었으며, 3등실 승객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 보트에 타고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1.10 부록: 타이타닉 자매선들의 운명
타이타닉의 자매함 올림픽호와 브리타닉호 역시 뒤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브리타닉호는 원래 타이타닉호보다도 화려하게 만들어질 예정이었지만 건조되자마자(...) 1차대전에서 병원선으로 징발되어 활동하던 중 1916년 독일해군이 설치한 기뢰(추측)를 건드려 침몰하였다. 구명보트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살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프로펠러가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명보트 두대가 빨려들어가 30명 가까이가 죽었다. 이때 바다에 뛰어들어 운좋게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하나는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인데, 이전에 타이타닉호에도 승무원으로 탑승해 살아남았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알수가 없다
올림픽호 역시 병력/물자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1차대전에 참전하는데, 독일의 유보트를 선체로 들이받는(!) 충각 전술로 격침(...)시키는 희한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전후 올림픽호는 다시 호화 여객선으로 돌아왔으나 항공기의 발달로 호화 여객선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특히 올림픽호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호화 여객선의 주요 기관이 터빈기관으로 바뀌고 있는 가운데 구식 왕복엔진을 주 동력원으로 한 탓에 속력이 느렸고, 배 또한 1912년 건조 당시부터 끊임없는 사고로 인한 선체 노후화가 있어 결국 1934년에 퇴역, 35년에 고철로 처리되었다.
원래 항목에는 귀부인의저택이 되었다가 2000년에 크루즈 선사로 유명한 로열 캐리비안 사가 구매하여 자사의 크루즈선인 밀레니엄호의 부속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배 자체로서의 올림픽이 아니라, 1934년에 배가 폐함처분될 때 철거된 올림픽 호의 인테리어 파트, 특히 부설 레스토랑의 목제 내벽을 가리키는 것[19]이 아니면, 1969년에 퇴역해서 장기간 수상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올림픽 호의 1, 2등실 승객용 셔틀 선박인 SS 노매딕의 이야기가 복합된 착오라고 보인다. 수정바람.
원래 항목에는 귀부인의저택이 되었다가 2000년에 크루즈 선사로 유명한 로열 캐리비안 사가 구매하여 자사의 크루즈선인 밀레니엄호의 부속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배 자체로서의 올림픽이 아니라, 1934년에 배가 폐함처분될 때 철거된 올림픽 호의 인테리어 파트, 특히 부설 레스토랑의 목제 내벽을 가리키는 것[19]이 아니면, 1969년에 퇴역해서 장기간 수상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올림픽 호의 1, 2등실 승객용 셔틀 선박인 SS 노매딕의 이야기가 복합된 착오라고 보인다. 수정바람.
1.11 불길한 징조?
우연인지 운명인지 많은 사람들이 출항하기 전 불길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선원은 자기 아내가 화이트라인사 로고가 새겨진 뜨개질을 하다가 엉켜버렸는데, 이에 아내가 불행한 징조라면서 말려 가지 않았다고 한다. 수석 항해사 헨리 와일드는 출항 전 가족에게 뭔가 불길하다는 편지를 남겼는데, 이후 배와 함께 죽었다.
그리고 침몰 전 배와 한참 떨어진 스코틀랜드에서 병어 걸려 죽어가던 제시라는 여자아이가 꿈에서 큰 배가 침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월리라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봤다고 한다. 소녀가 꿈에서 보았던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월리 하틀리가 이끄는 악단은 끝까지 연주를 계속하다 배와 함께 죽었다.
또 출항하던 날 갈매기가 단체로 배를 쫓아왔다고 하던데, 이는 뱃사람들에게 안좋은 징조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다른 배와 아슬아슬하게 충돌할 뻔한 일도 있었고 항해 와중에 석탄 저장고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나기도 했다.
또 특기할 만한 것은...타이타닉호 침몰 사고(1912년)가 일어나기 14년 전인 1898년 모건 로버트슨(Morgan Robertson)이란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무용지물(Futility)>이 이 배의 침몰을 예언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슨의 그 소설 내용이 '타이탄'이란 초호화 여객선이 대서양으로 처녀항해에 나섰다가 빙하와 충돌하여 대형 인명 사고를 낸다'는 것이었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탑승객 숫자와 구명 보트 수, 출발 항구, 사고 원인과 사고 지점, 배의 규모와 사고 시기가 14년 뒤에 실제로 일어난 타이타닉호 사건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그리고 로버트슨은 '타이탄 침몰'에 관한 소설 뿐 아니라 '비행기가 한 도시를 폭격한다'는 내용의 단편 소설도 썼는데, 그로부터 30년 후인 제 2차 세계 대전 때 진주만 습격 사건이 발생하여 그의 '소설 속 내용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흠좀무.
로버트슨의 그 소설 내용이 '타이탄'이란 초호화 여객선이 대서양으로 처녀항해에 나섰다가 빙하와 충돌하여 대형 인명 사고를 낸다'는 것이었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탑승객 숫자와 구명 보트 수, 출발 항구, 사고 원인과 사고 지점, 배의 규모와 사고 시기가 14년 뒤에 실제로 일어난 타이타닉호 사건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그리고 로버트슨은 '타이탄 침몰'에 관한 소설 뿐 아니라 '비행기가 한 도시를 폭격한다'는 내용의 단편 소설도 썼는데, 그로부터 30년 후인 제 2차 세계 대전 때 진주만 습격 사건이 발생하여 그의 '소설 속 내용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흠좀무.
1.12 타이타닉과 관한 도시전설
거의 모든 대형 사건들이 그렇듯, 타이타닉도 몇 가지 괴담과 음모론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가장 유명한 괴담은 불행하게 죽은 이집트 공주의 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소유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다가 어느 고고학자에 의해서 어느 여객선에 실려갔는데 그 여객선이 바로 타이타닉이라는 것.
그밖에 선박 번호 390904를 거울로 뒤집어 보면 "NOPOPE"가 되며 이는 아일랜드 선박 노동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한 반감으로 꾸민 짓이라는 음모론도 있고 애초부터 선박사가 보험사기로 꾸민 짓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물론 죄다 믿으면 골룸.
2 각종 매체에서
2.1 영상화
아무래도 이 사고가 너무나 유명해서 그런지 영상화도 많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1997년에 만든 타이타닉이다. 2012년 현재 역대 흥행 순위 2위에 올라가 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영화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 제작되기 전 가장 유명했던 영화는 타이타닉호의 비극(The Night to Remember(1958))이라는 영화로 타이타닉에 관심있다면 찾아볼것. 제목은 월터 로드가 타이타닉에 관해서 쓴 동명의 책(논픽션이다.)에서 따왔다.
케네스 모어가 2등 항해사 라이톨러(주인공) 역으로 등장한다.
오래된 영화지만 연출이 뛰어나며, 1997년판 타이타닉도 이 영화에서 오마쥬한 것이 많다. 예를 들자면 토마스 앤드류스가 흡연실에서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최후를 맞이한다던가, 악단이 월레스 하틀리를 중심으로 하나 둘씩 돌아와서 끝까지 연주한다던가.(사실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했지만 연출 부분에서 비슷하다.)
케네스 모어가 2등 항해사 라이톨러(주인공) 역으로 등장한다.
오래된 영화지만 연출이 뛰어나며, 1997년판 타이타닉도 이 영화에서 오마쥬한 것이 많다. 예를 들자면 토마스 앤드류스가 흡연실에서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최후를 맞이한다던가, 악단이 월레스 하틀리를 중심으로 하나 둘씩 돌아와서 끝까지 연주한다던가.(사실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했지만 연출 부분에서 비슷하다.)
가장 먼저 나온 영화는 1912년에 배가 침몰한 후 한달도 되지 않아 생존자이자 1등실 승객이었던 여배우 도로시 깁슨이 만든 "타이타닉에서 구해지다"(Saved from Titanic)이다. 이때 사건 당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출연했다고...안타깝게도 마지막 필름마져 화재로 유실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또 1953년에 나온 영화도 있는데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게다가 1943년에 나치 프로파간다(...)로 나온 영화도 있다! 주인공이 1등 항해사인 독일인(물론 영화상 설정)으로 나오며 연출은 좋지만 프로파간다 영화이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편파적으로 나오는 부분도 많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은 당대 독일에서 성공한 감독이었는데 이 영화를 찍은 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요제프 괴벨스에게는 이 영화와 감독이 탐탁치 않았고 이후 미운털이 찍힌 감독은 감옥에 갇힌 후 자살을 가장한 처형을 당하고 만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방영됐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서라고...또 한 가지 사실은 이 배의 배경이 아르코나 호(SS Cap Arcona)에서 찍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죄수선으로 쓰였다가 소련 잠수함에 격침당하여 무려 5000명이나 죽는 해양 참사로 기록된다. 타이타닉보다 무려 4배나 더 많이 죽었고 비율로 따지면 더하다. 흠좀무.
여담으로 이 영화에서도 다른 타이타닉 관련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카메론이 따온 연출이 많다. 1958년도판 영화도 이 영화에서 나온 장면을 일부 첨부하였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은 당대 독일에서 성공한 감독이었는데 이 영화를 찍은 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요제프 괴벨스에게는 이 영화와 감독이 탐탁치 않았고 이후 미운털이 찍힌 감독은 감옥에 갇힌 후 자살을 가장한 처형을 당하고 만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방영됐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서라고...또 한 가지 사실은 이 배의 배경이 아르코나 호(SS Cap Arcona)에서 찍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죄수선으로 쓰였다가 소련 잠수함에 격침당하여 무려 5000명이나 죽는 해양 참사로 기록된다. 타이타닉보다 무려 4배나 더 많이 죽었고 비율로 따지면 더하다. 흠좀무.
여담으로 이 영화에서도 다른 타이타닉 관련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카메론이 따온 연출이 많다. 1958년도판 영화도 이 영화에서 나온 장면을 일부 첨부하였다.
그밖에 1979년판 영화도 있고 기타등등...
TV드라마로도 나왔다. 1996년도 2부작 드라마에서는 뜨기 전의 캐서린 제타-존스가 나오기도 했고, 2012년에는 침몰 100주년으로 4부작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독일에서 나온 1984년도 TV영화도 있는 편.
타이타닉2라는 괴작도 나왔지만 이건 카메론 감독이 만든 영화의 정식 후속작이 아니고 어사일럼 영화사가 만든 것. 헐리웃에서 히트친 영화들을 속전 속결로 후다다닥 대충 베껴(?) 동인지 목버스터 영화로 만드는 곳이다. 예)트랜스포머→트랜스모퍼, 나는 전설이다→나는 오메가다, 드래곤볼 에볼루션→드래곤 퀘스트(게임 원작 절대 아님!!), 스피드 레이서→스트리트 레이서, 데스 레이스→데스 레이서, 파라노멀 액티비티→파라노멀 엔티티,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터미네이터스, 타이타닉→타이타닉2. 이름을 살짝 바꾸는 게 아니라 2편이라고 쓰는 건 처음인데, 아마 타이타닉은 영화 타이틀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배의 이름이니까 상관없다고 둘러대는데 성공한 것 같다. 참고로 이 타이타닉 2는 엄청난 저예산답게 CG나 연기들이 역시나 괴작이다.
2.2 기타 이것 저것
또한 애니메이션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1999년에 만든 <타이타닉의 전설>이라는 애니메이션인데 타이타닉이 사실은 침몰하지 않았으며(뭐?) 거대 문어가 타이타닉을 도와 사람들도 살고 배도 살고 선장도 살았다는 역사적 왜곡까지 집어넣고 있다. 거기에 난데없이 고래 보호 캠페인을 강조하자는 건지? Nostalgia Critic도 사정없이 깠다. 더불어!? 이 애니는 북한에서 하청했고 북한 쪽 사람이 공동감독까지 했다! 더 충격적인 건 북한 감독이 맡은 속편도 있다는 사실.NC가 절규한다. 안돼애애애애애애
그 외에도 2000년에 또 이탈리아에서 <타이타닉 : 전설은 계속된다>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NC는 2000년 <타이타닉 : 전설은 계속된다>를 먼저 리뷰했다. 영화를 먼저 리뷰했기 때문에 앞의 물건보다는 조금 나으나[20] 랩을 하는 개가 나오고 뱅크샷이 빈번하게 사용되는 등[21] 여기도 만만찮게 미쳐있다. 이 영화는 2012년 6월 기준으로 드디어 IMDB에서 평점 1.4로 최악의 영화 1위를 찍었다.
고스트 버스터즈 2에선 타이타닉이 무사히 미국으로 온다. 물론 유령선으로...밤중에 갑자기 나타나서 미국 항구에 도달하여 유령들이 가득 내려오자 사람들이 건물 안에서 어이없듯이 쳐다보는 것으로 잠깐 나온다.
TITENIC이라는 게임도 존재한다. 물론 공식 게임화라고 믿으면 골룸. 패미컴의 해적판 게임이다. 이 게임의 제작진중 몇몇은 마스터 파이터 2, 소마리를 제작한 해적판 게임 제작진으로 추정된다. 타이틀까지도 원작 포스터를 그대로 베껴 그렸는데...정작 잭과 로즈가 갑판에서 격투활극을 찍는 해괴한 내용의 액션 게임이 되어버렸다.[22] 또한 이 게임을 제작한 제작진들은 이 게임의 포맷을 복붙해서 해리포터 게임이랍시고 역시 패미컴 해적판 게임을 내놓았다.
3 닥터후의 함선
크리스마스 이브 스페셜로 방송된 '저주받은 자들의 항해'에서 등장. 크리스마스날 운치있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배 이름이 사망 플래그선주가 침몰시키고자 계획한 배였기 때문에 일부러 역장을 내려 운석에 직격당해버렸고, 거기에 천사 로봇의 영향으로 승객들 대부분이 몰살당한 상태로 결국 지구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만약 지구에 낙하하면 초대규모 핵융합 폭발로 인해 광대한 영역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 결국 닥터의 활약으로 버킹엄 궁전 상공을 크게 가로지르며 불시착. 지구에 대피령을 내리자 애완견을 데리고 도망치시는 엘리자베스 2세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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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oyal Mail Ship. 당시에는 여객선이 우편 배송도 하는 것이 상당히 흔했다.[2] http://www.atlanticliners.com/titanic_home.htm
[3] 선박의 등록톤수. 구글 검색에 GRT를 치면 1 register tonne = 2.83168466m³가 뜬다.
[4] 길이와 폭, 속도의 미터 단위 표기는 피트 단위 및 마일 단위의 환산이기 때문에 인용 매체에 따라 소수점 단위의 차이가 존재함.
[5] 현대의 비슷한 배수량의 선박들이 보통 메인엔진 1기, 보조엔진 1기로도 타이타닉과 비슷한 속도를 낸다는 점을 떠올려보며 20세기 내연기관의 발달에 감탄하도록 하자. 사실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를 떠난지 26년후(1936년)에 경쟁회사인 큐라드 라인에서 발주해서 처녀항해를 한 퀸메리(RMS Queen Mary)호 만해도 160,000shp 마력이다.
[6] 공교롭게도 이날,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모 반도 국가에서 주체사상을 이끄신 어버이 수령 혹부리우스가 탄생하였다.
[7] 타이타닉 호의 높이는 배 밑바닥으로부터 굴뚝 위까지 52.2미터이고, 빙산은 수면 위로 1/10만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수면 아래에 충돌할 위험이 높다.
[8] 이게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동료들과 부하들이 직장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9] 이 사실 또한 찰스 라이톨러의 손녀의 증언에서 나왔다.
[10]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 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11]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이 여기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콜렉션한 예술작품들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12] http://www.titanicinquiry.org/USInq/USReport/AmInqRep03.php#a8. 이는 승선객 명부에 따른 수치이며, 돌발상황 등으로 인한 변화내용은 반영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13] 경제적 어려움을 잠깐 겪으셨는데, 이에 97년판 영화의 제작진들과 타이타닉 탐사협회가 자금을 지원해줬다.
[14] 이 사람의 손자가 바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호소노 하루오미다.
[15] 물론 아래 나오는 영화는 아니다. A Nighy To Remember라고 이 주제를 다룬 고전 작품. 한국에서는 SOS 타이타닉이나 타이타닉호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번 방영되었다.
[16] 자연적 재해--아무래도 빙산을 사람이 만들거나 한 게 아니니까- 분야 최대 선박 사고 사망자이다. 다른 사고로는 1945년 한국인 5천명 이상이 죽은 우키시마 호 자침 사건 같은 일이라든지 4천명 이상이 죽은 1987년 12월 필리핀 도나 파즈 호 침몰 사건 같은 비극은 사망자 수를 타이타닉 4배 가까이 된다...사상최악의 단일함선 침몰 사망숫자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1945년에 발트해 연안에서 피난가던 독일피난민을 태우고 가다가 소련잠수함에 침몰)(최대 1만명이 넘게 타고 있었다고 하는데 2000명 정도가 구조), 고야호(같은 지역에서 침몰)(이쪽은 6000~8000명은 넘게 타고 있었는데 그 중 180명 정도만 생존)
[17] 이 조약은 수없는 개정과 보강을 거쳐 현재까지도 효력이 지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 중 하나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해상 규약 역사에는 정확이 들어맞는 것이, SOLAS와 함께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인 MARPOL(선박에 의해 발생하는 해양 오염을 규제하는 규약) 역시 사상 최악의 유조선 침몰 & 원유 유출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제정되었다. 이뭐병.
[18] 당시 한국어판 뉴턴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19] 현재 영문판 위키페디아에 해당 내용이 기재돼 있으나 선사가 다르며, 또한 귀부인의 저택 관련은 출처 필요라는 조건이 부기돼 있다.
[20] 여기선 최소한 침몰은 한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NC가 씹은 타이타닉의 전설에서도 잠깐 나오는데 이게 저 애니보단 조금은 낫다고 언급한다.
[21] 71분으로 재편집된 영미권 버전 한정. 84분 오리지널에서는 뱅크샷은 나오지는 않으나 그에 만만찮은 작붕과 광기가 들어가 있다.
[22] 또한 잭과 로즈의 동작중 몇몇은 KOF 시리즈의 쿠사나기 쿄와 아사미야 아테나의 모션을 몇몇 유용했다. 아마 패미컴으로 낸 KOF 해적판의 데이터를 손질한게 아닐까 싶다.
[23] 영화는 뮤지컬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