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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캅카스 지역의 지도. 캅카스 산맥 북쪽은 러시아연방, 남쪽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 위치해있다. <출처: wikipedia.org> 2 인구자료 출처 |
광고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캅카스(Кавказ) 또는 코카서스(Caucasus)하면 요구르트와 같은 유제품이나 장수 마을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은 곳으로 기억할 수도 있다.
러시아와 중동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는 캅카스는 동명의 산맥을 두고 남과 북으로 나뉜다. 북쪽에는 러시아연방 국민인 체첸인, 인구시인, 발카르인 등이 살고 있고, 남쪽에는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이 독립 국가를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은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 바다로의 출구가 없는 작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그저 작은 나라의 국민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아르메니아인은 고대 문명을 영유했던 민족이며,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9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중에는 현지에서 이름을 날린 기업가와 정치가,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 재능 있는 운동선수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고 올림픽에서도 승리해 커리어 골든 슬램을 달성한 테니스 선수 안드레 아가시(본래 성은 아가샨), 떠들썩한 사생활과 파파라치 컷으로 유명한 킴 카다시안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1 테니스선수 안드레 아가시도 아르메니아인이다. <출처: wikipedia.org> 2 아르메니아인 학살 100년을 추모하는 킴 카다시안 <출처: http://barev.today/news/kiminarmenia> |
고대 민족, 아르메니아인
1 아라라트 산은 비록 현재는 터키 영토에 속해 있지만, 여전히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靈山)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출처: wikipedia.org> 2 노아가 대홍수를 피한 곳이 바로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 산이다. <출처: Phillip Medhurst at wikipedia.org> |
아르메니아는 성경에도 언급됐을 만큼 역사가 오래된 국가 중 하나이다. 이는 ‘노아의 방주’와 관련이 있는데, 노아가 대홍수를 피한 곳이 바로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 산이다. 백두산이 한민족을 상징하듯이, 아라라트 산은 비록 현재는 터키 영토에 속해 있지만, 여전히 아르메니아 민족의 영산(靈山)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기원전 8-9세기 오늘날 터키 북동부와 아르메니아, 이라크 북부를 아우르는 곳(오늘날 아르메니아 고원)에 ‘우라르투’라는 고대 왕국이 존재했다. 기원전 6세기 이곳에 살던 사람 중 고대 아르메니아어를 구사하던 무시키(Mushki)라는 종족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 민족이 형성됐다.
학자들은 ‘아르메니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 여러 고대 사료를 바탕으로 몇 가지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시리아 서북부에 있었던 고대 도시인 에블라의 고대 사료에서 아르메니아인을 ‘아르만’, 이들의 땅을 ‘아르만눔’이라 불렀던 것을 근거로 든다. 다른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했던 페르시아 왕 다리오의 비문에서 티그라 강(티그리스) 상류 지역의 멜리테네(Melitene)와 면하고 있는 지역을 ‘아르민’들이 사는 ‘아르미니야’라고 기록했던 것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고대 히타이트 설형문자 사료에서 ‘아르마타나’라는 기록에 바탕을 둔 주장도 있다.
기원전 고대 시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아르메니아 왕국은 기원전 80년에서 70년 티그란 2세 시기 캅카스에서 팔레스타인까지, 그리고 카파도키아(터키 중부)에서 파르티아(고대 이란 왕국)까지 영토가 확장되며 중동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국가가 됐다. 고대 아르메니아인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월등한 면모를 보였다. 아르메니아인은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으며, 405년에는 문자를 창조했을 만큼 일찍이 고대 문명을 꽃피웠다.
이처럼 일찍부터 뛰어난 문화를 향유했던 아르메니아인이었지만, 4세기 후반부터 외세의 침입에 시달려왔다. 4세기 후반 사산조 페르시아와 로마 간의 강화조약으로 아르메니아는 분열됐으며, 7세기 중엽 아랍이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됐다. 아랍의 지배로 인해 아르메니아인이 대거 비잔틴 제국으로 이주했으며, 이중 많은 사람이 높은 관직과 성직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바실리 1세, 이라클리 1세, 레프 5세 등 비잔틴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아르메니아인도 있었다.
9세기 중엽 잠시 독립하여 아르메니아 왕가가 부활한 적도 있었으나, 주변국들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다. 11세기 초중반에는 비잔틴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지배했으며, 11세기 말에는 그전부터 침입해왔던 셀주크 튀르크가 지배하게 됐다. 이로 인해 아르메니아인의 이주가 다시 증가했고, 이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독립적인 공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조지아인(그루지야인)과 연합하여 셀주크 튀르크로부터 동아르메니아 영토를 회복했다.
그렇지만 이것도 잠시, 13세기에는 몽골의 지배를, 15세기에는 오스만 튀르크와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3세기 동안 아르메니아 영토를 사이에 둔 튀르크와 페르시아의 싸움이 계속되면서 이들의 아르메니아인 지배도 지속됐다.
19세기 초에는 아르메니아 동부가 러시아에 편입됐다. 1801년 로리 지역을 시작으로, 1805년에는 카라바흐, 잔게주르, 시라크가, 1828년에는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조약으로 나히체반과 에리반 지역까지 아르메니아 동부는 러시아 땅이 됐다. 러시아는 튀르크가 지배했던 아르메니아 서부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1829년 러시아-터키 전쟁 후 맺은 평화조약에 따라 서아르메니아는 다시 오스만 튀르크의 소유가 됐다.
긴 세월 지속된 식민지 지배에도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운동은 계속됐으며, 급진적인 성향의 젊은 혁명가들이 아르메나칸, 근차캰, 다시나크추튠 등 단체를 조직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노력은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했고,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식민지 지배 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더욱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 러시아에는 반(反)아르메니아인 정책으로 고위관직에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해고됐으며, 아르메니아 학교가 폐쇄됐을 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역사와 지리 과목은 정식 교과목에서 제외됐다. 아르메니아 교회의 재산 역시 몰수됐다. 서아르메니아에서는 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20세기 초 젊은 튀르크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국수주의가 강화됐고 아르메니아 학살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무너지면서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동부 아르메니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920년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소연방의 일원이 됐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에서야 아르메니아는 독립국가를 이루게 됐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 서부는 터키 영토로 남아 있게 됐다.
계속된 외세의 침입은 많은 아르메니아인의 죽음과 이주를 낳았지만,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1915년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제노사이드, Genocide)이다.
페르시아가 통치하던 동부 아르메니아는 1828년 제정러시아가 지배하게 됐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내세워 발칸 반도와 흑해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튀르크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한편 오스만 튀르크 통치 하에 있던 서부 아르메니아에서는 튀르크 정부의 튀르크화 정책과 이슬람 개종 강요에 맞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분열을 유도하고자 이를 지원하게 된다. 이에 대해 튀르크 정부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억압정책으로 맞대응했으며 1895년 이곳의 주민과 아르메니아인 간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난다.
1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열린 아르메니아인 학살 100주기 추모행사 <출처: http://www.northcountrypublicradio.org> 2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100년 상징 <출처: http://armeniangenocide100.org/en> |
그 후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했고 독일 측에 가담했던 튀르크는 러시아의 침입에 대응한다. 튀르크 정부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연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튀르크 정부는 이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쟁 중 젊은 튀르크인들은 외국인의 치외법권을 폐지하고 반오스만 봉기를 주도하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처형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을 억압했다. 1915년 4월 튀르크 군은 튀르크 내 아르메니아인 지도자와 지식인 총 325명을 연행, 처형했으며, 나머지 성인 남자들을 군대로 소집하거나 건설현장에 투입했다. 그곳에서 이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졌으며, 부녀자, 노인, 어린이 60여만 명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사막으로 추방되었다. 대학살과 추방 등으로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세계 각지로 피신했다.
아르메니아 측은 당시 쫓겨난 사람 대부분이 사막에서 굶어 죽어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생존자는 35명뿐이었으며, 이로써 당시 터키 영토에 살던 약 3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중 150만 명에서 200만 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것이 ‘인종대청소’였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터키 정부가 학살된 아르메니아인의 수를 30만 명으로 축소하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훗날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오늘날 누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기억하는가?”라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계획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예로부터 이웃 민족들에게 상인으로서 뛰어난 기질을 인정받았다. 이들은 일찍부터 교역을 목적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경제적인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외세의 침입과 대학살로 더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모국을 떠나 세계 곳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오늘날 모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 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모국의 인구수보다 더 많은 인구가 해외에 거주하는 것은 흔치 않다. 아르메니아 본토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은 약 3백만 명인데 반해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수는 8백만 명에서 9백만 명에 이른다. 아르메니아 인구보다 세 배 정도 많은 수가 모국 밖에서 사는 셈이다.
모국을 떠난 아르메니아인들은 새로운 곳에 빠르게 적응하여 안정적으로 정착하며, 일부는 큰 성공을 누리기도 한다. 상술에 능하고 현지 적응력이 뛰어나며 교육 수준이 높고 거주국에서 이른 시기에 성공하는 모습,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현지 사회에서 호감을 얻지 못하거나 좋지 않은 평판을 받기도 한다는 점, 오랜 유랑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화와 전통을 보존하고 여기에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아르메니아인은 유대인과 비슷하다.
거주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고 거주국 문화와의 동화 수준도 높은 편이지만, 이들은 모국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고 동포 간의 결속력도 강하다. 이는 모국에 대한 원조로 이어진다. 미국 의회에 친아르메니아파가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미국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적극적인 로비 활동을 펼쳐 왔다. 이들은 미국 정부가 아르메니아에 관심을 기울이고 경제적 원조도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는 LA에는 작은 아르메니아 (Little Armenia) 라는 도로명이 있다. <출처: http://mapofsmog.blogspot.kr>
개인이 모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에게 보내는 해외송금, 아르메니아 출신 백만장자들이 아낌없이 모국으로 보내는 기부와 대규모 투자, ‘아르메니아 펀드’와 같은 거대한 단체의 경제 지원은 1988년 대지진과 같은 국가적인 위기 극복만 아니라 모국의 경제 발전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종교는 아르메니아 정교이다. 301년 대(大)아르메니아 왕국의 트르다트 3세는 기독교를 공식적인 국가종교로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국가였던 만큼 아르메니아 곳곳에서는 고대 교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405년 아르메니아 문자가 만들어진 배경에도 아르메니아 교회가 있었다. 그리스어와 시리아어로 된 성경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기 위해 문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정교는 같은 동방정교인 러시아 정교나 그리스 정교와 조금 다르다. 506년 아르메니아 정교는 비잔틴 정교의 교리에서 완전히 분리됐다. 아르메니아 정교는 그리스도의 육화(肉化) 이전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하나로 존재하며 육화 후에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된다고 보는 그리스도 단성론을 인정한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Armenian Apostolic Church)라고 한다. 사도교회라는 이름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열 두 명의 사도가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아르메니아 정교는 오랜 세월 모국 밖에 있는 9백만 아르메니아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민족문화를 전수하고 민족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전 세계에 사는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이 아르메니아 정교를 믿고 있다. 하지만 터키에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된 아르메니아인들도 있다. 이들을 헴실(Hemshils)이라고 하며 아르메니아인과는 별개의 민족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아르메니아는 아라라트 산에서 나오는 광천수, 뜨거운 햇볕을 받고 자란 맛있는 포도와 살구로 유명하다. 이러한 환경은 아르메니아 음식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인은 포도로 술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화덕에 불을 때울 때도 잘 마른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를 이용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도와 함께 오래전부터 살구를 재배했으며 생산량도 많다. 소련 붕괴 이후 구소련 국가들에서 장미혁명(조지아), 오렌지혁명(우크라이나), 레몬혁명(키르기스스탄) 등 정권교체를 향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2007년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혁명은 살구혁명이라고 불렸다. 아르메니아에서 개최하는 영화제에도 “황금살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실제로 아르메니아 음식에는 살구를 활용한 수프와 요리가 적지 않다.
아르메니아의 대표적인 수프 ‘하시’ <출처: http://group.galatravel.org/ru/node/61>
아르메니아 음식문화는 캅카스 지역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르메니아 음식은 아르메니아 민족이 형성되던 시기와 역사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오래된 음식 중 하나이면서 캅카스 전역에 확산된 음식으로는 고기 수프 하시(խաշ)를 들 수 있다. 하시라는 이름은 아르메니아어로 ‘끓이다’는 뜻의 하셀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 옛날에는 하쇼우, 하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가 17세기 이후부터 하시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 이 음식은 점차 조지아(그루지야)와 터키로 퍼져 나갔다. 하시는 소의 다리 부분과 위(특히 위의 첫 부분), 마늘을 넣고 끓인 수프이다. 위 대신 머리 고기를 넣고 끓이기도 한다.
양고기 가슴살과 콩 등을 작은 항아리에 넣어 끓인 수프 푸투크 <출처: http://mobilizacia.kiev.ua/cooking/armenian-recipes/rss.xml>
흙으로 만든 각종 식기는 아르메니아인의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음식 이름이 그 음식의 주재료에서가 아니라 음식을 담는 식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푸투크, 크추츠, 타파크는 점토로 만든 식기 이름이면서 동시에 음식 이름이기도 하다. 푸투크는 작은 항아리 모양의 그릇으로, 거기에 양고기 가슴살과 콩 등을 넣어 끓인 수프도 푸투크라고 한다. 크추츠 역시 단지와 비슷한 그릇이면서 동시에 양고기의 기름이 많은 부위와 크게 썬 양파, 토마토, 감자, 콩, 고추 등을 놓고 끓인 수프를 말한다. 생선으로 만든 크추츠도 있다.
아르메니아식 화덕과 라바시 <출처: http://easycooks.livejournal.com/448919.html>
흙으로 구워낸 식기와 함께 아르메니아 음식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화덕이다. 흙으로 만든 아르메니아 화덕은 ‘토니르’라고 한다. 화덕에서는 아르메니아 식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라바시를 굽는다. 라바시는 기름 없이 간을 하지 않은 밀가루에 물을 넣고 반죽을 만들어 뜨거운 화덕 벽에 붙여 굽는 얇고 넓적한 빵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토니르에서 라바시 외에도 죽과 수프를 끓이고 생선이나 닭과 같은 가금류를 훈제하고, 각종 채소를 구웠다. 한편, 토니르는 캅카스 전역으로 퍼져 이곳에 사는 민족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육류가 아르메니아 식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오래전부터 아르메니아 고원에서 가축을 목축해 왔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주로 양고기와 쇠고기를 사용하여 갖가지 수프를 비롯하여 호로바츠, 이키-비르와 같은 꼬치구이, 완자와 비슷한 큐프타, 쇠고기를 볕에 말린 바스투르마 등을 만들어 먹었다. 이들은 가축에서 얻은 우유를 흙으로 만든 긴 항아리나 가죽 주머니에 담아 발효하여 여러 가지 유제품을 만들어 즐겼다. 가장 인기가 많은 유제품으로는 마춘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발효하여 걸쭉하게 된 우유로 아르메니아인이 아주 오래전부터 마셔 왔던 음료이다. 마춘과 곡물을 넣어 수프를 만들기도 하고, 여름에는 마춘에 차가운 물을 넣어 ‘탄’이라는 음료를 만들어 마신다.
아르메니아 전통음식의 특징 중 하나는 고추, 박하, 바질, 마늘, 샤프란, 계피, 후추, 생강, 정향풀, 오레가노 등 다양한 향신료와 허브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요리에 고기 기름 대신 오래 끓인 버터를 요리하는 데 있다. 이 버터는 주로 마춘으로 만들기 때문에 시큼한 맛이 난다. 식물성 기름은 생선 요리나 일부 채소 요리에만 사용된다. 대표적인 식물성 기름으로는 참기름을 들 수 있다.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아르메니아 음식문화는 오히려 지배민족에게 영향을 미쳤다. 아르메니아 전통음식은 페르시아나 튀르크에 의해 뒤늦게 유럽에 전파됐다. 튀르크 음식으로 알려진 톨마(또는 돌마) 같은 경우 아르메니아의 오래된 전통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톨’은 아르메니아어로 포도나무 잎이나 가지를 의미한다. 톨마는 잘게 썬 양고기 또는 쇠고기에 쌀, 후추, 소금, 허브를 넣어 포도나무 잎으로 감싼 후 쪄낸 음식이다.
코냑 아라라트 <출처: http://www.araratbrandy.com/en/news/ararat>
아르메니아인들이 마시는 술로는 포도주와 더불어 아라라트 분지에서 나는 양질의 포도로 만든 코냑을 들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연합국 정상들이 모였을 때 영국의 처칠 총리가 아르메니아 코냑을 맛보고 감탄하자, 스탈린이 1년 내내 마시라며 아르메니아 코냑 365병을 선물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아르메니아 코냑으로는 ‘아라라트’, ‘그레이트 벨리’, ‘마네’, ‘아르메니카’가 있다. 아르메니아인이 즐기는 술로는 코냑과 포도주 외에도 뽕잎으로 만든 보드카인 ‘아르차흐’가 있다.
아르메니아 전통가옥 내부를 재구성한 모습 <출처: http://art16.ru/gallery2/main.php>
아르메니아 전통가옥은 돌과 흙, 나무를 다양하게 사용해 만들어졌다. 벽 부분은 돌로 되어 있고, 지붕은 나무 기둥 위에 흙으로 덮은 형태이다. 집 내부에는 점토와 돌을 이용해 만든 화덕이나 벽난로가 있다. 아르메니아 전통가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여러 개의 궤짝과 점토나 동으로 만든 식기를 두는 선반이다. 또 하나 독특한 것은 각종 곡물과 가루 등을 보관하는 이동형 창고이다. 나무상자와 유사한 형태지만, 아래에 다리가 달려 있어 이동이 용이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집 내벽에 우묵 들어간 곳을 만들어 작은 문을 달아 벽장처럼 사용했으며, 큰 나무로 등받이 없는 소파를 만들어 벽을 따라 배치해 침상으로 사용했다. 아르메니아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양탄자이다. 양탄자를 벽에 걸거나 바닥에 넓게 깔아 집안을 장식한다. 양탄자는 가옥을 꾸미는 인테리어 소품이자, 아르메니아인들의 생활동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양탄자 위에서, 또는 그 위에 우리나라 밥상과 같이 낮은 테이블을 놓아 식사를 한다.
아르메니아 남성의 전통의상은 실크나 면으로 만든 셔츠와 폭이 넓은 바지로 구성된다. 러시아인과 같은 동슬라브인이 흰색 셔츠를 입는 반면, 아르메니아 전통 상의는 여러 가지 색상의 직물로 만들며 낮은 깃이 달려 있고 옆구리 쪽으로 끈을 묶어 여미게 되어 있다. 바지는 어두운색의 양모나 면으로 만들며, 발목 부분은 넓은 천으로 감싼다.
아르메니아의 다양한 전통의상 <출처: http://rus-img.com/armyanskiy-nacionalnyy-kostyum-taraz>
셔츠 위에 입는 옷은 동부와 서부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동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셔츠 위에 아르할루흐를 입는다. 아르할루흐는 폭이 넓으면서 길이가 짧은 외투로 이 위에 넓은 허리띠를 맨다. 부유한 사람들은 은장식이 많이 달린 허리띠를 착용하기도 한다. 반면 서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할루흐보다 더 짧고 단추가 따로 없는 조끼나 재킷을 입는다.
겉옷으로는 아르할루흐 외에도 옷자락이 긴 외투가 있다. 외투의 모양은 꽤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허리 모양이 잡혀 있고 허리 아래로는 플레어스커트처럼 넓게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소매 부분은 좁은 편이며, 옷깃은 세워져 있거나 아예 없다. 겉옷은 대부분 어두운 색상이지만, 귀족층은 흰색이나 밝은 회색 옷을 입기도 했다.
아르메니아 여성 의상은 남성 의상과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 조금 차이를 보인다. 셔츠는 목 부분이 조금 더 깊게 파여 있으며, 바지는 주름이 더 잡혀 있고 발목 부분에 달라붙는 형태이다. 바지 대신 긴 치마를 입기도 하며, 여기에 수놓은 앞치마를 착용한다.
여성의 겉옷도 남성의 겉옷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여성 의상은 소매 부분이 매우 길며 허리 부분은 남성처럼 허리띠를 사용하지 않고 긴 숄이나 스카프로 묶는다. 그리고 여성 외투의 가장자리에는 자수로 장식되어 있다.
남성모자도 동부와 서부에 따라 조금 다르다. 동부에서는 모피로 만든 모자를 자주 쓰며, 서부에서는 펠트나 천으로 만든 모자를 쓴다. 아르메니아 여성은 머리를 길게 땋는데, 풍성하게 땋은 머리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다. 땋은 머리에 금실과 투명한 면사포로 장식된 모자를 쓰거나 화려하게 테두리가 장식된 긴 머릿수건을 쓴다.
전통춤을 추고 있는 아르메니아인 <출처: http://javakhkmedia.com/armenian-folk-dance-in-javakhk/>
전통혼례: 신랑 신부 다음으로 중요한 대부와 대모
전통혼례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일곱 번의 낮과 일곱 번의 밤을 즐긴다”라고 말할 만큼 가정의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이다.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주인공인 신랑 신부이지만, 아르메니아 전통혼례에서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대부와 대모이다. 결혼식의 ‘증인’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하는 이들은 신랑 신부 주변 인물 중 가장 가까우면서 이들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존경받는 부부여야 한다.
대부와 대모로 선정된 부부는 결혼의 처음과 끝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 외에도 할 일이 많다. 아르메니아 전통혼례에는 새신랑과 신부에게 선물을 주는 시간이 별도로 있는데, 친인척들과 손님들은 일반적으로 보석, 직물, 세간, 돈 등을 선물한다. 이때 대부와 대모는 가장 비싼 선물을 해야 한다.
19세기 아르메니아 여성의 결혼의복 <출처: https://www.pinterest.com>
아르메니아 전통혼례에는 소위 신부의 ‘몸값’을 지불하는 의식이 있다. 이러한 의식은 다른 많은 민족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의식이지만, 아르메니아인의 몸값 지불 의식에는 대부와 대모가 참여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부부도 신부 가족에게 주는 몸값 일부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그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
아르메니아 전통혼례가 진행되는 동안 가족은 신부에게 아기를 안아 보라고 시킨다. 이때 아이는 남자아이여야 하는데, 여기에는 신혼부부의 첫 아이가 아들이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과거 아르메니아인의 남아선호사상을 엿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전통적으로 많은 자녀를 두었다. 아이의 출산은 큰 행복이므로 모두가 모여 출산을 축하하는데, 아들을 보면 더욱 기뻐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교회 축일이 되면, 아이가 태어난 집에서는 더 많은 아이가 태어나라는 의미에서 초록색 잎이 달려 있는 가지를 달아 장식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 40일 동안은 아주 가까운 사람 외에는 아이를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질병이나 부정한 기운이 아이에게 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기독교를 정식 국교로 채택하기 전, 아르메니아인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다양한 신의 존재를 믿었다. 아르메니아인은 신을 모시는 신전을 만들어 숭배했다. 최고신이자 신들의 아버지는 아라마즈드이며, 그 뒤를 따라 전쟁의 신 바근, 나라를 수호하는 여신 아나이트가 있다. 태양신 미흐르(또는 미르타), 지혜와 문자의 신 티르도 있는데, 시대에 따라 이 둘의 역할이 바뀌어 알려지기도 했다. 사랑의 여신 나네와 아스트히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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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트른데즈 <출처: http://armenia-g.blogspot.ru/p/blog-page_6317.html> 2 젊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바르다바르를 즐기는 모습 <출처: wikipedia.org> |
고대 아르메니아인들은 여러 신뿐만 아니라 자연도 숭배했다. 자연숭배 사상은 전통축제에 반영됐으며, 기독교 수용 후 기독교 축일과 통합됐다. 겨울의 막바지에 즐기는 축제는 ‘트른데즈’로 불을 숭상했던 고대 신앙에서 유래했다. 기독교가 들어온 후에는 교회 문 앞에 큰 모닥불을 피워 젊은이들이 그 위를 뛰어넘는 의식을 치렀다. 불 위를 뛰어넘는 의식은 모든 나쁜 기운을 정화하는 의미가 있다. 트른데즈가 끝나면 서서히 봄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봄이 왔음을 기뻐하는 축제는 ‘차흐카자르드’ 또는 ‘차르자르다르’로, 아르메니아인들은 부드러운 잎이 돋아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교회로 가져온다. 교회에서 정화의식을 끝내고 젊은이와 어린이는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화환을 쓴다.
8월 초에는 무더운 날씨로 가뭄에 시달리는 땅을 위로하는 물의 축제이자 기우제인 ‘바르다바르’를 즐긴다. 이날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서로 물을 뿌린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즐거운 일, 좋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좋은 일이 생긴 주인공은 자신의 손을 가까운 사람들과 친구들의 머리에 갖다 대고 “타로세 케스”(Tarose Kes, հանձնում եմ քեզ)라고 말한다. 이 말은 “너에게 전한다”라는 뜻으로 자기가 누리고 있는 좋은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질 것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좋은 기운도 나눠 갖는 아르메니아인들은 과거부터 손님 접대를 중요시 여겼다. 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지인들을 불러 모아 대접한다. 만약 지인들이 직장동료라면 직장에서도 이렇게 대접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좋은 일로 지인들을 대접하면 그 복이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모든 참석자가 마시고 먹어야 하는데, 만약 음식을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역사와 뛰어난 문화를 영유해온 아르메니아인은 오늘날 정치·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웃 국가 아제르바이잔과의 영토 분쟁, 대학살 사건으로 폐쇄된 터키와의 국경은 이들의 경제 상황을 오랫동안 악화시키고 있다. 국내 상황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소련 붕괴 이후 각종 시위가 이어졌으며, 2015년 6월부터는 전기료 인상을 반대하는 시위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 이 시위는 관료 부패,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 관계 등 복합적인 정치, 사회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어, 일부에서는 2007년 살구혁명이 재개될 가능성도 내다보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고 과거 고대 문명국으로서 누렸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정리
·김혜진.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의 형성과 모국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슬라브학보』, 제24권, 제4호. 서울: 한국슬라브학회, 2009.
·Лэнг Д. Армяне. Народ-созидатель. М., 2009.
·Толстов С. П. Очерки общей этнографии. том 2, выпуск 2. М., 1968.
·http://www.gov.am
·http://www.armenia.am
·http://group.galatravel.org/ru/node/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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