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
총 사십 권이나 되는 세계사 책을 훑어보아도 그런 현상이 있었다는 서술은 커녕, 단 한 건의 사례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로 낮과 밤, 아침과 저녁해서 넉넉하게 스물네 시간이나 되는 하루가 다가도록 아파 서 죽거나, 높은 데서 떨어져 죽거나, 자살에 성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명절이면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마음도 해이 해지고 술도 거나하게 취해 누가 먼저 죽음에 이르는지 내기라도 하듯이 도로에서 서로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일어나는 자동차 사고에서도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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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나는 전하에 게 어느 쪽이 더 좋으냐고 물어볼 생각이오, 모후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침상에 누워 영원히 죽어가는 모습, 세상에 속한 육신이 수치스럽게 영혼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는 게 좋으냐, 아니면 죽어서 하늘의 영원하고 찬란한 영광 속에서 죽음에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보는 게 좋으냐.
그 문제라면 누구도 대답을 망설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겠지, 하지만 총리, 총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그 답보다는 질문에 더 관심이 있다오. 우리의 질문에는 분명한 목적과 감추어진 의도가 있다는 점을 잘 알아두시오. 우리가 질문을 할 때는 상대방에게서 답을 얻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오. 물론 그 순간에 상대방이 자기 입으로 그런 답을 하는 것을 스스로 듣게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미래의 답을 위한 길을 닦아놓는 것이기도 하오.
정치하고 좀 비슷한 것 같군요. 예하.
바로 그거요. 다만, 불가능해 보일지 몰라도, 교회의 장점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다룸으로써 아래 있는 것을 다스린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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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양한 종교 대표자들과 다양한 사상 학파의 철학자들, 다시 말해서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늘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을 묶어서 커다란 통합 학문적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야기해 두고자 한다.
이들은 죽음 없는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숙고하는 동시에 사회가 직면할 새로운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예측하는 까다로운 과제를 맡게 될 것이다.
앞으로 다칠 문제의 핵심은 이런 잔인한 질문으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긴 인생을 살고자 하는 야망을 죽음이 잘라주지 않을 경우 그 노인들을 다 어떻게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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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업계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위협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보험연합의 회장은 언론에 그렇게 밝혔다.
지난 며칠 동안 보험회사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편지들, 마치 하나의 초안을 베낀 듯 대체로 똑같은 표현으로 작성된 수많은 편지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편지들은 모두 편지를 쓴 사람의 생명보험 계약의 즉시 해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편지들은 죽음이 스스로 활동을 중단했다는 잘 알려진 사실을 고려할 때 아무런 보상의 기약도 없이 엄청난 보험금을 계속 내서 보험회사만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완전히 멍청한 짓이라고까지는 말 못해도 불합리한 짓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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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래가 불가피하게 신의 부재, 아니 실종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새로운 태도는 아니었다. 추기경 자신이 총리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비록 구구절절이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이 있을 수 없는 일의 신학적 함의를 이미 드러낸 바 있다.
죽음은 신이 자신의 왕국으로 이르는 길을 갈아 젖히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농기구임이 분명하므로, 이제 논란의 여지없는 분명한 결론은 모든 거룩한 이야기가 불가피하게 막다른 골목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신랄한 주장은 비관적 철학자 가운데 가장 연장자의 입에서 나왔는데,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떴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모든 종교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는 죽음이오, 우리가 먹을 빵을 필요로 하는 만큼이나 종교는 죽음을 필요로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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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못 들었어, 그 나무토막으로 뭘 만드냐고 묻잖아.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아들이 하던 일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늙어서 손이 떨리면 문간에 앉아서 밥을 드시게 해야 할 거 아니예요.
아버지가 할아버지한테 그런 것처럼 말이에요. 그때 쓸 사발을 만들고 있어요.
그 말이 마법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아버지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진실과 그 빛을 보았다.
아버지는 당장 자신의 아버지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으며, 저녁 시간이 되자 직접 의자에 앉히고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먹인 다음 턱을 살며시 닦아주었다.
자신은 여전히 그렇게 해줄 수 있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의 나무 깎기는 중단되었고 나무토막은 깎다만 상태로 그대로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아무도 그 나무토막을 버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교훈이 잊히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언젠가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마무리 지을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 말했던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의 질긴 생존 능력을 고려한다면 그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까.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일어날 것이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살아서 그것을 다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어쨌든 모든 것을 팔레트의 왼쪽에서만 가져온 색으로 칠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마디 덧붙여야겠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신문이 먼저 이따뜻한 이야기를 집단 기억의 먼지 낀 선반에서 건져내 거미 줄을 털어버리고, 그런 다음에 어떤 텔레비전이 이 이야기를 각색한다면, 한때 사회에서 육성했던 영성이라는 비물질적 가치의 계발이나 숭배를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상을 지배하는 저열한 물질주의에 인간의 의지가 사로잡혀, 많은 가족의 양심이 박살나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지가 강하다고 상상했지만, 사실 그것은 치유 불가능한 무시무시한 도덕적 허약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자, 그 소년이 화면에 나타나는 즉시 인구의 반이 눈물을 닦으려고 손수건을 찾으러 달려갈 것이며, 나머지 반, 그들보다 금욕적인 기질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반은 말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저지른 또는 너그럽게 보아 넘긴 어떤 악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반드시 빈말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도 할아버지를 구할 시간이 있기를 바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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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에 있는 부대들은. 그들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라는 게 뭐요.
자살자들의 이동에 장애물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실은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난 그 부대들이 공격을 막으려고 거기 있는 줄 알았는데.
그런 위험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다른 나라 정부들하고 협정을 맺었습니다.
모든 게 통제 하에 있습니다.
연금 문제만 빼고 말이지.
죽음 문제만 빼고지요.
전하, 우리가 다시 죽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왕은 연금이라는 말 옆에 엑스 표를 하고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 주어야겠군.
그렇습니다. 전하, 무슨 일이 일어나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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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보다 훨씬 심각했다.
죽음의 일방적 휴전이 지속되던 일곱 달 동안 죽음 직전에 이른 대기자 명단은 육만 명이 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육만이천오백팔십 명이었다.
이들 모두가 한 순간에, 죽음의 힘이 꽉 들어찬 순간에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인간들이 비난받아 마땅한 잔악한 행동을 했던 사례에서만 비교의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죽음은 혼자서는,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늘 인류가 자기들끼리 죽인 것보다 훨씬 적은 수를 죽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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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가 매일 보는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이 가학적 잔혹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죽음은 잔혹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생명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냥 미처 생각을 충분하게 하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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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보받는 사람들이 토해내는 절망과 고뇌의 외침을 들을 여유가 없다.
이런 절망과 고뇌의 감정은 어떤 경우에는 죽음이 예측했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라질 운명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일을 정리하지도, 유언장을 작성하고, 세금을 완불하지도 않는다.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일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룬다.
물론 그 마지막 순간은 가장 우울한 작별을 하기에도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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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부장관이 교회가 제공하는 치료를 서둘러 모방하여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들을 구하고자 파견한 정신의학자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신의학자가 환자를 괴롭히는 고통을 덜어낼 가장 좋은 방법은 우는 것이라고 조언을 하다가 자신도 바로 다음 날 우편함에서 똑같은 봉투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는 발작을 하듯이 흐느끼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면 정신의학자와 환자 둘 다 똑같은 불행을 앞에 두고 눈이 빠지도록 울부짖으며 상담을 끝내곤 했다. 그러나 정신의학자는 설사 불행이 닥친다 해도 자신에게 는 여전히 살 날이 이레, 백구십이 시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곳에서 준비되고 있다고 하는, 섹스, 마약, 알코올을 이용한 방탕의 자리를 몇 번 즐긴다면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좀 쉬워질 것도 같았다. 물론 그런 부절제한 행위가 저 위에서 천상의 보좌에 앉을 때 이 세상을 더 강렬하게 그리워할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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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렇다. 죽음이 가장 피곤하게 생각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모든 곳의 모든 것을 동시에 보는 상태를 중단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죽음은 신과 흡사하다.
인간의 감각 경험을 바탕으로한 입증 가능한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신과 죽음, 이 지고의 존재들이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고, 즉 편재한다고 믿는 데 익숙해 있다. 편재한다는 말은 다른 많은 말처럼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면, 아니, 말이란 아주 쉽게 우리 입을 떠나는 것이므로, 아에 말로 표현을 해보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모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신이 어디에나 있고 죽음도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정말로 모든 곳에 있다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있는 그 무한한곳에서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신은 의무적으로 전 우주 어느 곳에나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면 그가 우주를 창조한 것이 의미가 없을 터이기 때문에, 신이 이 작은 행성 지구, 신은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을 작은 행성, 이런 생각을 해본 사람은 달리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이 작은 행성에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하지만 죽음, 우리가 몇 페이지 앞에서 말했던 그 죽음은 배타적으로 인류에게 묶여 있다.
우리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얼마나 집요한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사람들조차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그녀의 눈길을 느끼지 않는가. 이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죽음이 우리와 공유해 온 역사 전체에서 아주 드문 경우,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의 인식 능력을 우리의 인간 수준, 즉 한 번에 한 가지만 보는 수준, 어떤 한 순간에 오직 한 곳에만 있는 수준으로 낮추려 할 때 얼마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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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이 도시에서, 이 나라에서, 온 세상에서, 자연의 가장 엄격한 법칙,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모두 강요하는 법칙, 살고 싶냐고 물은 적이 없고 죽고 싶냐고 묻지도 않을 법칙을 어긴 사람이 사는 유일한 집이다.
이 남자는 죽었다. 죽음은 생각했다. 죽을 운명에 처한 모든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다.
필요한 것은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치거나 아니면 거절할 수 없는 자주색 편지를 보내는 것뿐이다. 죽음은 이어서 생각했다. 이 남자는 죽지 않았다.
이제 몇 시간 뒤면 잠을 깰 것이다. 매일 그러는 것처럼 침대에서 나올 것이다.
뒷문을 열어 개가 정원으로 나가 변을 보게 해줄 것이다. 아침을 먹을 것이다.
욕실에 들어갔다가 세수와 면도를 하고 개운한 표정으로 나올 것이다.
거리로 기운차게 나갈지도 모른다. 개를 데리고 나가 모퉁이 신문 판매대에서 아침신문을 살지도 모른다. 악보대 앞에 앉아 다시 슈만의 세 환상곡을 연주할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는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이 죽음에 관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자신이 불사의 존재나 마찬가지 임을 모른다.
자신을 바라보는 죽음이 자신을 죽일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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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들의 순수한 논리는 당신, 죽음이 가장 크다고, 다른 모든 것보다 크다고, 우리 모두보다도 크다고 말해 준다. 아니, 어쩌면 당신이 늘 가장 큰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으로 설명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그 음악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눈부신 달빛은 만일 그가 자고 있었다면 비추나 마나였을 것이다. 그래, 우연이다.
당신은 침실로 돌아가 소파에 가서 앉았을 때 다시 아주 작은 죽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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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다시 한 번 수의를 걸친 해골이다. 두건은 이마까지 푹 눌러쓰고 있다.
그래서 두개골의 가장 흉한 부분은 가려져 있다.
물론 그녀가 이 문제에 정말로 신경을 쓴다 해도, 지금 그렇게까지 가릴 필요는 없었다.
여기에는 그 섬뜩한 모습에 겁을 먹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것은 손가락과 발가락의 뼈 끝 부분뿐이기 때문이다.
발가락은 판석 위에 올라가 있지만, 판석의 얼음장 같은 냉기는 느끼지 못한다.
손가락뼈는 강판을 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죽음의 역사적 포고들을 다 모아놓은 책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 여기에는 모든 규칙 가운데 첫 번째 규칙, 즉 단순한 두 마디, 너는 죽여라, 하는 말로 정리된 규칙에서부터 최근의 부록과 부속물까지 다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죽음의 방식과 변형들이 다 나열되어 있다.
그 목록은 끝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은 자신의 조사 결과가 부정적인 데 놀라지 않는다.
인류의 모든 대표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완전한 정지, 결말, 끝, 죽음을 결정하는 책에 생명과 산다 같은 말, 나는 살아 있다와 나는 살 것이다 같은 말이 나 오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 책에는 죽음을 위한 공간만 있지, 누가 죽음을 피하면 어떻게 하느냐에 관한 터무니없는 가설을 위한 공간은 없다. 어쩌면, 열심히 찾아본다면, 한 번, 딱 한 번, 어떤 불필요한 주석에서, 나는 살았다 하는 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탐색은 한 번도 진지하게 시도된 적이 없다.
이것을 보면 죽음의 책에 살았다는 사실 자체는 언급될 가치가 없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 이유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죽음의 책의 다른 이름이 無의 책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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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끝났을 때 여자의 두 손은 이제 차갑지 않았다.
남자의 두 손에는 이제 불이 꺼져 있었다. 그래서 손이 손을 만나러 갔을 때, 그들의 손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새벽 한 시를 한참 지난 시간에 첼리스트가 물었다.
호텔로 데려다 줄 택시를 부를까요
여자가 대답했다. 아니오. 당신하고 여기 있을래요.
그러면서 여자는 입술을 내밀었다. 그들은 침실로 들어가 옷을 벗었다.
일어날 것이라고 기록된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 또, 그리고 또다시. 남자는 잠이 들었다.
여자는 잠이 들지 않았다.
이윽고 여자는, 죽음은 일어나, 음악실에 두고 왔던 가방을 열고 자주색 편지를 꺼냈다.
여자는 편지를 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피아노 위, 첼로의 두 현 사이, 아니면 침실, 남자의 머 리를 받치고 있는 베개 밑.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엌으로 들어가 성냥을, 변변찮은 성냥을 켰다.
그녀는 한번 슬 쩍 보는 것만으로도 종이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여자, 전에 뭐였는지도 모를 먼지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 여자, 손가락만 대도 종이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죽음의 편지, 죽음만이 없앨 수 있는 편지에 불을 붙인 것은 단순한 성냥, 평범한 성냥, 매일 보는 성냥이었다. 재는 남지 않았다.
죽음은 침대로 돌아가 두 팔로 남자를 안았다.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는 죽음은 잠이 자신의 눈까풀을 살며시 닫는 것을 느꼈다.
자신에게 무는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