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어린나이에 전쟁이 터져 같이 교육받던 경찰동기생들과 잠시 내려오신 남한이었는데 그길이 가족들과의 영영 헤어짐이 되버릴줄이야 꿈에도 모르셨겠지요. 남한의 육군에 들어가 열심히 싸우셨지만 결국 쪼개져버린 조국땅에서 늘 가족을 그리워하시던 그마음을 저는 미국에 와서야 어렴풋이 알수있게되었읍니다. 그러다가 딸의 요청으로 어머니와 함께 다시한번 고국을 떠나셨건만 제 기분만 더중요했던 딸은 텍사스로 떠나버리고 그나마 주변환경이 한국과 비슷한 메릴랜드에서 삼십년을 넘게 사신 아버지. 평생을 늘 그리움속에 살아오셨는데 어쩌면 가시는길마저 그리 홀로 가셨읍니까. 그리 홀로 훌훌 털고 가시니 홀가분하신가요.
딸만 셋이었지만 한번도 아들타령을 하지않으신 아버지는 특히나 둘째인 저와 유난히 가까우셨지요. 어릴때부터 늘 아버지의 어깨위에, 발위에, 늘 매달려있던 저. 누워계실때면 영락없이 달라붙는 저 비행기를 태워주시고, 양반다리하고 신문보시는 아버지의 넓적다리에 기어코 머리를 얹으면 읽어주시던 왈순 아지매와 고바우 영감. 가난하던 밥상머리에 딸들에게 들킬새라 엄마가 밥속에 숨겨넣은 계란후라이를 숭늉가지러 엄마가 나가실때 얼른 제밥속으로 나눠주시던 아버지. 한여름 한강의 밤섬으로 놀러갈때 나룻배 타고가는 가족들과 달리 헤엄쳐가시는 아버지등에 매달려가던 나. 술에 취해 퇴근하실때면 늘 노래를 흥얼대며 들어오셔서 술냄새난다고 찡그리던 제게 턱수염을 비벼대시며 지갑을 열어 호기있게 지폐를 뿌리셨지요.
아버지의 그러한 사랑속에 한번도 딸이라서 부족한 자식이라는 생각은 해본적도없던 제게 당시 사회의 관습은 참 낮설었읍니다.
아침에 가게에 심부름가면 가끔씩 뜻하지않게 그날 아침의 개시손님이 되고 저는 소금뿌림을 받는 재수없는년이 되어 주인이 뱉는 가래침을 뒤로한채 다른가게로 가는적도있었고, 어쩌다 앉아있는 남자의 머리나 어깨에 손이 스치게되면 버릇없는 계집애가 되었읍니다.
제일 듣기싫고 이해할수없던말은 바로, 어디서 계집애가? 라는것으로 아버지에게선 한번도 들어보지못한말이었지요.
잘난듯 기고만장한 백인들의 사회에서 당신의 손자가 하루는 묻더군요. 엄마는 어떻게 늘 당당해?
돈보다 더, 교육보다 더, 관습보다 더, 저를 자신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것은 바로 당신의 사랑이었읍니다.
당신이 제 아버지셨기에 저는 행운아였읍니다.
제가 당신의 딸이었기에 당신은 홀로 가버리셨네요.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외롭지않으시겠지요.
안녕, 아빠.
첫댓글 어쩌면 우리 아버지 같으신 분이 또 계십니다 그려
꿈동산님 아버지 그리워 하시는 그 마음이 꼭 제 마음입니다
딸 만 여섯~아주 무섭게 나무라시는 말씀이
이 놈들아..
그 시절 아들 선호 시대였어도
어느 집 아들보다 더 귀히 사랑해주셨던 울 아버지..
추운 겨울 바깥에서 세수하면 춥다고
수건을 뜨시게 적셔서 닦아 주셨지요
엄마는 짐짓 나무라지만 얼굴은 환하게 웃으시던..
그리운 아버지 울 아버지 입니다
그러셨군요. 저희식구들은 저만 빼고 다들 아버지를 무서워했었지요. 전 특별히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된후 왜 저만 사랑하시는지 여쭤보니 아니라시더군요. 다 같이 사랑하지만 제가 유난히 달라붙는 성격이었다구요. 즉, 저는 사랑을 쟁취했다고할까요? ㅎㅎ
아버지 이야기에 이리도 콧등이 찡해지는군요.
저도 젊은시절 아버지를 떠올리니 또 다시
콧등이 찡해집니다.
당시의 사회는 참 혼잡한 시대였지요. 아버지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며 자란 딸들이라면 참 신식가정이었던것같아요.
훌륭한 아버지이셨네요.
늘 아버지가 그리우시겠네요.
어머님 돌아가시고 생전의 어머님 목소리나 영상을 만들어 놓지 못한게 후회가 됩니다.
지금도 어머님 목소리가 듣고싶네요.
좋은날 되세요.
살기가 힘들때면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받으며 자란 소중한 나! 라는것을 상기하며 기운을 내곤했지요. 넘어지신후 응급실로 가셔서 동생과 함께 가려고 아침 비행기를 기다리고있었는데 급히 가버리셔서 아쉬움이 큽니다. 하지만 얼굴 표정이 편안해보여서 맘이 놓였어요.
아버님이 떠나셨군요!
뵈러간다 하고 안오시길래
푹 놀다 오시는갑다고
혼자 생각했었네요.
고단한 삶 착하게만 살다가신
우리들의 엄니 아부지들
많이 그립습니다!
고인의 명복을빕니다!!!
감사합니다. 결국 혼자서 가버리신것이 너무도 가슴이 메였는데 뷰잉때 모습이 평안하셔서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한많은 시절을 살아오신 세대에 이산가족의 아픔은 너무 잔인하였지만 이젠 그동안의 외로움을 다 뒤로하고 가족들과 재회하셨겠지요.
@꿈동산 (미국, 텍사스) 저는 좋은자식이 아니었어요.
꿈동산님 같은 사랑스런
딸을 키우시며 부모님께서
행복하셨을거라는 생각이듭니다.
@더감 하이고~~ 저는 완전히 특이한 존재였어요! 고집도 똥고집에 못한다는일은 더 골라가며하고.… 저의 부모님 배꼽쥐고 웃으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