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통조경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의 순리를 거역하지 않고 동화되도록 하는데 있다. 즉 인공구조물인 건축물이 한국인의 자연관에 일치되도록 노력해 왔는데 그 결과가 정원에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상에 따라 정원을 조성할 때는 지형을 함부로 변형시키지 않았으며, 물의 이용에 있어서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을 이용할뿐, 인공적인 힘을 가하여 하늘에 쏘는 분수를 만들지 않았다. 꽃이나 나무는 생성하는 생물이므로 관상수 따위를 심어 인공의 수형을 만드는 가지치기 작업을 피하였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 국화, 연은 선비들이 좋아 하였고 느티나무, 회화나무, 벽오동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복숭아나무, 주목, 배롱나무, 동백나무, 버드나무등으로 원림을 조성하고 감, 대추, 모과, 앵두, 살구, 밤, 배, 산수유,호두, 포도등은 민가에서 많이 심었다. 또 직간(直幹)으로 자라는 나무보다 사간(斜幹)으로 자라는 나무를 좋아하였고, 인공 열식의 배식보다는 자연스러운 배식을 했다. 조형물은 자연과의 조화로 구성되어야 했으므로 건물을 세울때 터를 잡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그러기에 자연의 순리가 조원의 기본 질서로 존중되어 조원의 원리가 되었다. 정자나 누각을 배치할때도 자연의 조화를 먼저 생각하여 연못이나 강가, 산자락에 세워 원을 감상하는 장소로 삼았다.
한국의 조경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동양조경의 한 범주로서만 인식되어 왔다. 이는 한국조경에 대한 체계적·과학적 연구가 아직도 미흡하고 유적과 사료들을 제대로 발굴·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 조경의 특징과 장점을 세계에 알리는 데 등한시한 것도 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숲이 유난히 많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가졌기 때문에 조경도 자연히 자연과 동화된 자연풍경식 조경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기본 양식에 있어서는 중국 조경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세부양식에 있어서는 누구나 한 눈에 보아도 중국이나 일본과는 또 다른 특징과 양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특징과 차이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미의식과 자연관, 신앙체계를 엿볼 수 있다.
한국정원의 특성
한국의 전통적 조경양식 또한 자연풍경식이면서 상징성을 부여한 사의적(寫意的)인 특색을 지녔으나 중국이나 일본처럼 여기에 너무 치중하거나 집착하지는 않았다. 보다 자연주의적인 경향이 우리나라 조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지형지세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때,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평지는 적고 자연굴곡이 많아서 대규모의 택지를 조성할 경우, 자연지형이 항상 포함되게 된 데 그 연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자연장애를 토목학적으로 처리해 평지화 하기보다는 자연의 고유 형상을 되도록 수용해서 집터나 정원에 끌어들였다. 신령사상을 가진 우리 민족으로서는 산신령또는 조상님의 신기(神祇) 서린 자연을 내 맘대로 뜯어고친다는 것은 천벌 받을 일로 여겼던 것이다. 자연히 주거지와 구조물들의 자연성이 살아 숨쉬게 되고 자연을 닮아가게 된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자연굴곡을 준 중국이나 일본과는 형태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내용과 방법론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중국처럼 동굴, 바위 등을 인공적으로 만들거나, 높고 거창한 누각은 짓지는 않았으며, 일본처럼 수목을 지나치게 자제하거나, 특정 수목을 지나치게 선호하거나, 인공을 가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연못이나 누각, 화단 등은 직선으로 처리해서 자연과 대비를 이루도록 의도하였다. 주변 경관이 불균일한데 다시 건조물들을 불규칙하게 처리할 경우 오히려 어지럽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반면에 직선 처리된 방지(方池), 사괴석(四塊石), 굴뚝, 화단(花壇), 안뜰은 단아하고 절제된 느낌을 준다. 자연미를 최대한 배려하면서 도형적인 대비효과를 가미한 것이 바로 우리 전통조경의 가장 뛰어난 미학이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직선화된 여러 동의 건축물들을 배열할 때는 비대칭적인 균형을 이루도록 계획하였다. 곡선이 많을 때는 직선으로 대비하고, 직선이 많아질 때는 일부의 방향 또는 동선을 곡선으로 처리해서 대비와 강조효과를 주는 것이다. 가령 6개의 네모를 일정하게 배치하기보다는 그 중 1개의 방향을 틀어 놓을 때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이것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홀수 배치의 미학이자 고도로 계산된 미학인 것이다. 즉, 우리 민족은 크고 작은 형체들이 기하학적으로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것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비대칭의 동적인 균형미를 중시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은 정원양식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한국 정원의 미는 무위자연과 겸양의 미덕, 그리고 약간의 대비를 가미한 개성미라고 할 수 있으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순천주의(順天主義)' 정신이 내면에 흐르고 있다.
2. 한국의 전통정원의 종류
(1) 신 림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인 삼국유사 의 고조선조에는 "단군왕검이 무리 삼천을 이끌고 태백산 산상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라고 기록되어있고 신라가 三山五岳 제사 지낸 일이나 고구려, 백제가 모두 산천에 제단이 있음을 알리는 글이있다. 고구려의 소수림왕릉이 있던 소수림이나, 신라의 김알지가 탄생했다는 계림등은 모두 국가가 보호하는 신성한 神林이었다.그리고 마을마다 산천신에 제사 지내는 신단이 있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부락제를 지내는 당산의 신목이 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성황림이다. 신목으로 천연기념물로 보호되는 나무는 다음과 같다. 삼척군 도계의 긴잎느티나무, 전남 보성군 벌교읍의 은행나무, 강진 대구면의 푸조나무, 주문진 교향리의 밤나무, 울진군 후정리의 향나무, 제주 성읍의 느티나무와 팽나무, 제주시의 산천당 곰솔, 승주군 쌍암면의 이팝나무, 안동군 송사동의 소태나무, 청송군 관동의 왕버들 등이다.이들 나무나 숲은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부락민이 공동의식으로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자연의 형태로 유지되지만 산림의 수목이 고사하게 되면 인공적인 식목도 하고, 제단을 조성하기도 하며, 제사를 지내면서 춤과 노래 등의 행사도 갖는 원시적인 원림이라 하겠다.
(2) 민 가
18세기에 이중환이 쓴 택리지'복거총론'에는 주택의 입지론이 씌어있는데 "첫째 지리, 둘째 생리, 셋째 인심, 넷째 산수"라고 하였다.
①지리의 조건은 수구가 넓지 않으며, 사람의 왕래가 잦은 관문이 있고, 안으로는 평야가 전개된 곳으로 햇빛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넓은 들이 있는 곳이 길한 곳이라고 했다. 산세는 해가 지고 뜨는 시간이 길어야하며, 주위에는 낮은 산들이 수려하게 둘러 서있고, 흙은 모래땅으로 굳고 촘촘하면서 맑고 찬 샘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점토층이나 누런 황토거나 자갈밭이면 인재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②생리(生理)는 인적, 물적 자원이 집중되어 교환이 용이한 장소로 꼽았다.
③인심은 자신과 자녀의 교육을 위하여 지방의 풍습이 순후한 곳을 말하고,
④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곳을 말하였다.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 제1권 복거의 '방앗간(안확(安確))조'에 보면 "무릇 주택에서 왼쪽에 흐르는 개울과 오른쪽에 긴 길과 집앞에 연못과 집 앞에 연못과 집 뒤에 언덕이 있는 것이 가장 좋고, 여의치 못할때는 동쪽에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를, 남쪽에 매화나무와 대추나무를, 서쪽에 치자나무와 느릅나무를, 북쪽에 살구나무와 벗나무를 심으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대신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 서쪽 언덕에 대나무 숲이 푸르면 재물이 불어난다""문앞에 대추나무 두 그루가 있고 堂앞에 석류나무가 있으면 길하다" "집 마당 가운데 있는 나무를 한곤(閑困)이라 하는데 마당 가운데 나무를 오래 심어 놓으면 재앙이 생긴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마을들은 이러한 조건들을 이상으로 해서 배치되었다. 좋은 마을의 형태는 마을 앞에 작은 동산이 있고, 맑은 개울(객수(客水))이 흐르며, 산을 등지고 앞으로 들이 전개된 그런 지형이었다.
(3) 궁궐의 조경
궁은 제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곳으로 수도의 도시 계획까지를 규정짓게 하는 중심이 되었다. 삼국시대 초기의 왕궁터는 발굴 조사에 의한 확실한 궁원터가 밝혀진 것이 없어 어렵다. 그러나 신라의 월성이나 백제의 풍납동 토성이나 몽촌토성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성 외곽에 물을 넣어 적을 방어하는 해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궁궐은 외조, 치조, 연조, 상원의 네 공간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외조는 신하들이 평시의정무를 보고 궁을 지키는 수직업무를 하는 공간으로 풍수설에 의해 개울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나가고 있고 이를 어청(御淸)이라 한다.왕궁 앞 정문 안에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를 심어 원림을 조성하는 것은 중국 주나라 때부터 괴목밑에 3공이 앉아 정사를 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왕궁의 별칭이 괴신이라 하고, 정승이나 판서의 직위를 느티나무, 회화나무의 위치라 하여 '괴위'라고도 한다. 이로인해 궁궐의 문 앞에는 꼭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였다.
--치조는 왕이 의식을 행하거나 조회등 정무를 하는 공간으로 이 공간은 수목을 심어 조경하지 않는다. 회랑 안 정전 마당은 억센 돌데기 기법을 사용한 판석을 깔아 햇빛으로 인한 빛의 반사를 막고 거닐 때 미끄러지지 않게 하며, 절묘한 구배를 주어 배수를 과학적으로 처리한 뛰어난 건축술과 완숙한 조각술로 장식한 신성한 건물임을 상징하고 있다. 편전은 왕이 신하들과 정치를 나누는 곳으로 공식적인 치장이 가미되어 화계가 구성되어 있으나 원림은 조성하지 않는다.
--연조는 왕이나 왕비 등 왕족이 생활하는 침전공간으로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정침의 주변에는 화계를 조성하였고, 화계의 단에는 화목과 수조, 괴석대가 배치되었다. 대비의 침전은 언제든지 중궁전의 동쪽에 두는 법으로 대조전의 마당에는 화목을 심지 않는다. 그러나 대비가 오래 살도록 축수하는 뜻으로 화담에는 거북문, 천도, 모란, 매화, 국화, 연꽃 등이 배치되고 "만수"라는 글자 무늬도 새겨 있다. 후원의 뒤뜰 담에 붙은 굴뚝에는 해, 달, 바다, 거북, 불노초, 학, 구름, 거북, 사슴, 소나무 등이 화전으로 장식되었다.
--상원은 왕이나 왕족이 휴식하고 유회하는 후원공간으로 주로 원림으로 구성되어있다.
(4) 서원과 별서의 조경
한국의 서원이나 별서의 유적은 15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조선 유학자들은 중국의 주자가 1183년 중국 숭안현 무이산계곡 승경인 무이구곡에 건립한 무이정사가 최고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은 주자처럼 은둔하는 행동을 미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서원을 조영하거나 은둔의 별서를 건립할 때 주자의 무이구곡을 모방하려 하였고, 그를 흠모하여 조영 속에 상징화하였다. 서원이나 별서의 조원은 자연주의 바탕 위에 이루어졌으며, 현실의 명리를 떠나 선현의 학문을 수학하고 사색하는 공간을 조성한 것이다.
(5) 사 찰 조 경
절이란 스님들이 불상을 모셔 놓고 불도를 수행하는 곳으로 인도의 마가다국 국왕 빔비사가 석가의 방문을 기념하여 석가와 그의 제자 1000명의 수행 장소를 대나무 숲에 마련해주었는데 이것을 승원 또는 중원이라 불렀고 절의 시초가 된다. 이 승원, 중원을 인도의 범어로samgharama라 하는데 중국인들이 승가람마라 번역하였고 이를 줄여 가람이라 한다. 사찰의 조경은 조선시대의 배척과 화재로 인한 소실 등으로 뚜렸한 양식을 밝히기는 어려운 상태이나 1960년대 이후로 꾸준한 발굴 작업을 통하여 대략적인 양식을 발견해 가고 있다.
--고구려의 불교는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의 전진으로 부터 전래되어 소수림왕 5년에 '이불란사, 초문사'가 최초로 건립되었다. 고구려 사찰의 특징은 당시 궁궐제도를 본 떠 남북을 주축으로 남쪽에 정문이 있고, 1탑3금당식의 배치로 중앙에 목탑을 두고 동, 서, 북에 금당을 설치하고 당시 금당은 안에서 예불을 드릴 수 없는 형태였으므로 금당 주변에 회랑이 발달하고 야외에서 예불을 드리는 관계로 석등이 발달 하였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원년(384) 중국의 동진으로 부터 였다. 백제시대의 문화의 특징이 귀족문화였고 귀족문화의 속성이 규칙에 억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가람의 배치도 그 영향을 받아 1탑1금당식,1탑3금당식, 3탑3금당식 등 다양하고 틀에 억매이지 않은듯 하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눌지왕(411~457)때, 고구려 묵호자에 의해서 였으나 공인은 법흥왕14년(527) 이차돈 순교에 의해서 였다. 신라시대의 사찰로는 황룡사만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 배치를 알 수 있는데 금당이 동서로 주축을 이룬 1탑3금당식이다.
--통일신라는 문헌에 있는 유명한 절만도 50여 개를 헤아릴 만큼 많은 절을 건립하는 등 불교가 융성하였다. 가람의 형태도 그동안의 1탑식 배치에서 2탑식으로 변형되고 선종의 영향으로 산지가람이 발생하였고, 또 중국의 영향으로 암굴 사원 형태인 석굴암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말기에는 지리도참 사상에 의해 어떤 주축의 형식보다는 지형에 따라 동과 서(감은사지), 남과 북(불국사) 등의 주축으로 가람을 배치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가람의 형태가 비슷한데 고려시대 사찰은 대체로 풍수에 의해 들어설 곳이 정해지게 되고 가람의 형태는 평지인 경우 2탑식, 산지인 경우 1탑식으로 나타났으며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불교가 해이해져 가람의 배치도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양상을 나타냈고, 조선시대의 사찰은 국가적 차원의 억압으로 특별한 형태를 구축하기 어려운 상태여서 고려시대와 별다른 형태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주로 사찰에는 연못을 만들어 피안의 세계및 해탈을 통한 정토의 세계에 대한 염원을 정원에 나타냈으며 모든 사찰의 금당이나 강당 앞 회랑 안에는 화목을 심지 않았다.
(6) 누 원
樓란 기둥이 층 받침이 되어 청(廳;마루)이 높이 된 다락집을 말한다. 누의 기능은 휴식하거나 연회나 시회도 하고, 문루나 망루, 포루처럼 감시하거나 조망하는 군사 시설의 기능도 했다. 누를 분류해 보면 왕궁 안에 있는 문루나 경복궁의 경회루, 창덕궁의 주합루 등이 있고 지방 관청에서 세운 남원의 광한루, 삼척의 죽서루, 밀양의 영남루, 강릉 경포대 그리고 성에 소속된 진주성 촉석루와 진남루공주 공산성 공북루 등이 있다. 사찰의 누로서 불국사 범영루, 선암사의 강선루등이 있다. 정자가 개인적인 기능의 건물이라면 누는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행유하는 공공 기능의 건물이다. 누는 경관을 바라보는 기능을 주안으로 한 것이기에 누가 있는 원림은 산책하는 보도가 없어도 된다. 동양의 조원이 정적이고, 서양의 조원이 동적이라는 견해는 바로 누나 정자의 기능에서 잘 나타난다.
(7) 묘 림
중국의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고구려무덤은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는데 주위에 소나무, 잣나무를 심어 울창하다"라고 하였다. 이는 중국 통구 지방에 있는 기단식 적석분을 말하는 것으로 주위에 송림이 우거졌던 것이다. 삼국시대 고분은 거의 풍수지리설에 구애받지 않고 조성되어 들이 강, 산자락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봉분에 12지신상이 조각되고 혼유석, 문무석, 능비 등이 배치되면서 풍수설의 영향을 받는다. 신라 오릉등 일반적으로 묘역의 주위에는 모두 송림으로 묘림을 조성하고 있다.
고려 왕릉은 4단의 단을 조성하고 제일 윗단에 봉분, 곡담, 석상, 망주석이 서고 제2단에 석등과 문인석,제3단에 무인석,제4단에 제각과 능비가 서는 형태를 갖춘다. 조선시대 초기는 고려 능제를 따랐고, 동구릉의 선조릉은 왕릉과 계비릉 사이에 신도를 판석으로 조성하였으며, 개울에 석교를 놓고 능역을 잔디로 밝게 조성 하였다. 15세기 여주 세종릉에는 홍살문 밖 재실 사이에 방지(方池)를 조성하였고, 금곡의 고종황제릉 앞에는 중국 명나라 황제릉의 제도를 도입하여 일자 제각, 홍살문 안에는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등의 석상이 신도 양쪽으로 배열되었다. 홍살문 밖에 원형의 큰 연지가 조성되고 능역주위는 송림이 울창하다. 조선 왕조의 능은 풍수설의 영향으로 능이 있는 곳의 산세가 앞이 오므라든 지세로, 음택의 이론을 적용한 것이다. 일반 민묘(민묘)는 봉분 앞에 상석, 망주석, 석인, 묘비가 배치되고 묘주위에는 송림을 조성하고 봉분의 위는 잔디로 밝게 처리되어 있다.
3. 우리나라 전통조경의 구성 요소
(1) 굴 뚝
우리나라의 굴뚝은 온공이라는 독특한 난방방법으로 인하여 연기를 처마밖으로 내뿜는 배연설비로서 갖는 일반적인 기능이외에 중요한 수경요소로서의 장식적인 기능을 갖는 것이 특이하다,규모가 큰 경우에는 뒷마당에 조성된 후원의 화단에 까지 연장되어 조직적 조경요소가 되며 사면에 아름다운 문양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십장생이 새겨진 경복궁내의 해광전의 굴뚝과 용, 학, 박쥐, 모란, 대나무, 매화, 소나무등이 장식된 경복궁 아미산에 있는 교태전의 굴뚝이 있다.
(2)담 장
담장은 건축물과 같이 적극적으로 공간을 한정하는 수직요소이다. 이러한 담장의 일반적 기능은 경계의 표시와 불리한 외부환경에 대하여 방어적인 기능을 갖는 것이 보통이나 우리나라의 담장은 그러한 기능 이외에 장식적인 문양을 새겨 넣으므로 중요한 수경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또 민가의 나즈막하게 설치된 형식적인 담은 방어적인 기능은 거의 희박하며 심리적인 공간형성의 기능이 우선적이며 외부환경을 담장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수법의 한 요소로서 사용되어 담장 내부만을 정원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외부경관 모두를 정원으로 확대 시키는 우리나라 정원의 구성원리를 잘 이루고 있다. 또한 한 집안이라 하더라도 안채와 사랑채 별당 사이에 낮은 담장을 두기도 했는데 이는 남자와 여자의 생활공간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담장은 사괴석으로 쌓거나 검은 벽돌로 쌓고 위에는 기와지붕을 하는데 때로는 밑 부분만 사괴석으로 쌓고 윗 부분을 검은 벽돌로 쌓기도 하였다. 이들 담장에는 여러 모양의 장식문양을 넣어 이른바 화초장을 만들기도 한다.또 몸체와 떨어져 굴뚝을 세우는데 대개 담장에 붙여서 역시 검은 벽돌로 쌓고 또 장식문양을 놓아 담장과 같은 의장을 하고 있다.담의 종류는 궁의 외담인 사고석담, 궁이나 절 만가의 잡석담과 토담, 궁의 내담인 전담, 화담, 초가의 바자울 등이 있다.화담은 화려한 무늬나 글시 및 그림을 장식한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것은 경복궁 내의 자경전 담이다. 이 자경전은 원래 자미당의 터로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2년에 재건하고 그 후에도 두 차례나 화재를 입어 1666년에 복원한 집이다. 이 집의 담은 모두 화담으로 축조하였는데 후정의 십장생이 장식된 화담 연돌은 조선시대 궁전 화담의 제 일품이라 하겠다. 궁의 외곽 담장은 사괴석으로 샇았으나 전(殿)의 담은 모두 전장이나 화담으로 꾸며 온화한 분위기를 이룬 것이 특색이다. 또 경복궁 아미산에 있는 교태전의 굴뚝에는 용, 학, 박쥐, 모란, 대나무, 매화, 소나무 등이 장식되어 있다. 창덕궁의 대조전 후원과 낙선제의 화담도 대단히 아름답다. 절의 담으로는 강원도 낙산사의 전담이 대표적이며 토담이나 바자울의 자연스러운 모습은 안동 하회마을에 많이 남아있다.
(3) 다 리
다리는 개천을 건너가기 위한 일반적인 기능 이외에 개천을 건너가는 과정 자체가 공간변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므로 사찰이나 궁궐등에서는 왕의 권위의 상징, 속세와의 경계등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활용한 예가 많이 있다.이외에 수경요소로서 갖는 자체형상의 아름다움과 landmark로서의 가치 역시 중요하다. 재료는 목재와 석재가 많이 사용되었고 형태는 크게 홍교(무지개 다리)와 평교로 나누어지며 어느정도 규모를 갖추려면 홍교가 보편적이다. 불국사 구품은지에서 법당에 오르는 청운교, 창덕궁의 금천교, 선암사의 승선교 등이 아름다운 석교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으며 남원 광한루의 오작교는 천상의 은하세계를 건너는 의미로 사용한 좋은 예이다.
(4) 보 도
보도는 조원 공간 속에서 동선의 기능을 한다. 흔히 지세를 따라 자연스럽게 설치하였고 때로는 게단을 놓거나 다리를 설치하였다. 다리는 석교, 목교, 단교, 징검다리, 외나무다리 등이 있었다. 이 다리에는 아름다운 석수(石獸)나 꽃무늬들이 조각되고 난간이 설치되기도 했다. 한국 원의 보도에는 배수시설이 따로 설치되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은 자연속에 동화되어 갔다.
(5) 동 물
苑에 동물을 기르는 것은, 만물이 생장하는 자연의 섭리를 배우며 움직이는 기능과 관상적 기능을 부여하였다. 391년 백제 진시왕이 궁원에 진귀한 새들을 길렀고, 647년 신라의 문무왕은 동궁에 원지를 파고 진귀한 새와 이상한 짐승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1038년의 왕궁의 동쪽 못에 백학, 거위, 산양을 길렀음이 고려사에 보인다. 1497년 연산군은 창덕궁 후원에 온갖 새와 짐승을 길러 사냥을 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6세기에 조성된 소쇄원의 지당에 물고기를 길렀음이 소쇄원도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한국 조원 공간 속에는 백조, 공작, 거위 사슴, 산양, 노루, 잉어, 거북, 꿀벌, 닭 등이 사육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6) 연 못
우리나라에 물을 이용한 수경의 조성은 삼국시대부터 그 흔적을찾아 볼 수 있으며 그 종류는 지당(池塘), 계간(溪澗), 정천(井泉) 등이 있다. 낮은 곳에 물이 괸것을 池, 뚝을 쌓아 물이 괴도록 한것이 塘이라 하는데 이를 다시 호안에 곡선으로 저성한 曲池와 직선으로 처리한 方池, 곡선과 직선을 혼합한 苑池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지당의 형식은 樓, 亭 등의 건축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경우 정형적으로 처리한 것, 즉 방지의 형태가 많이 나타난다. 여기에 다시 인공적인 중도의 유무 또는 중도의 갯수에 따라 1도형, 2도형, 3도형, 4도형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신라의 문무왕이 조성한 경주 안압지는 절묘한 굴곡의 곡선과 여러번 꺽이는 직선을 혼합한 원지로 누각이 배치되었으며 못 속에는 방장, 봉래, 영주의 3신도로 보이는 3개의 섬이 조성되어 있다.불국사 9품연지는 타원형으로 섬은 없었고 신라의 도성인 월성은 주위에 해자를 가지고 있었다. 청평사 神苑에는 방형지당이 남아있고 조선왕조의 왕궁원지, 창덕궁의 부용지와 애연지 등이 모두 방지이다. 창덕궁 후원의 반도지와 창경궁의 춘당지는 곡지인데 이는 일제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원으로 퇴계가 조성한 도산서당의 정우당, 양산보가 조성한 소쇄원의 지당, 윤선도의 보길도 세연정지, 다산초당의 지당, 남원 광한루 방지, 강릉 운정동에 있는 선교장의 활래정지 등이 모두 방지들이다. 그러나 특이하게 양산 통도사의 구릉지와 승주 선암사의 삼인당, 안동 병산서원의 광영지는 타원형이며 전남 광양 세창의 만귀정 원지와 수원성 용연의 곡지이다. 대체로 왕궁내의 지당은 다듬은 장대석으로 정연하게 쌓았으며 서원, 민가, 사찰 등의 지당은 모두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다. 지당속의 섬은 신선도를 상징하고 있는데 경주 안압지의 섬은 절묘한 굴곡으로 조성되었고, 그외 대부분은 원형이나, 방형의 섬도 있다. 경복궁 경회루의 방지 속에는 방형의 섬이 3개 있고 그중 제일 큰 섬에 경회루가 건립되어 있다.내를 막아 자연스러운 못을 만든 것이 제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윤선도가 만든 보길도의 세연정 옆 계류에 있다. 계를 가로질러 판석을 조립하여 뚝처럼 막아서 자연스러운 지소를 만들었는데 물이 넘칠 때에는 이 판석 뚝으로 인하여 폭포가 되고 물이 적을 때는 석교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있다.
溪澗은 원래 자연 그대로 원래에 들어와 있는 것이 많으나 인공으로 조성한 것도 있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이나 소쇄원의 오곡류 계류는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이지만 7세기에 조성된 경주 안압지의 물넣는 계간은 전부가 인공으로 만든 계간이다.지당에 물을 넣는 기법으로는 경주 안압지처럼 폭포가 되도록 만든 현목이 있고, 경복궁 향원지처럼 평면으로 물이 잠겨들게 넣는 自溢이 있으며, 경복궁 경회루 방지처럼 연못바닥에서 물이 솟아나게 잠류의 기법이 있다. 한편 못에서 물을 빼는 시설은 대부분 일정 수면에서 넘쳐 흐르게 하는 것이 많다. 경주 안압지는 수면을 자유롭게 조절하기 위하여 수출구에 높고 낮게 구멍을 뚫어 물마개를 막아 놓았다.연못가나 섬에는 괴석을 배치하고, 못속에는 연꽃을 심은 것이 가장 많으나, 소쇄원 지당처럼 순체를 심은 것도 있다. 못가의나무는 버드나무와 목백일홍이 가장 많고 섬속에는 소나무, 대나무가 가장 많다.
井泉은 원에 생기를 준다. 경주 분황사의 신라샘은 유명하며 김유신의 저택터에는 제매정이란 우물이 남아있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 옆에 인조가 만든 어정은 약수로도 유명하다. 경복궁 향원정 북측에 있는 열정도 물이 맑고 차며 도산서원의 열정, 소쇄원 오곡문 밖의 샘들이 유명하다. 이와같이 살아있는 땅은 인체의 혈관 속에 피가 흐르듯이 지하에 맑고 찬 수맥이 흐르고 있어며 그 지하수가 곳곳에 솟아 샘이 되며, 샘이 있는 원을 名苑이라 부른다
(7) 器 具
우리나라 정원에 사용된 기구로는 물을 담아 뜰에 놓아두는 물확(돌확, 석대), 이보다 규모를 조금 크게하여 물을 담고 연을 키우는 석연지, 평평한 자연석이나 잘 다듬은 판석을 뜰에놓고 걸터 앉거나 차를 끊이는 석상,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때 딛는 하마석 등이 있다. 또 흐르는 물을 원내에 끌어 들이는 홈대, 물레방아도 원내에 도입되었다. 그외에 마당의 고저차를 연결시켜주는 석단, 화계, 석계 등도 중요한 구성요소였는데 특히 후원의 조성된 화계에는 굴뚝, 석함 등이 놓여졌다. 삼국시대 궁이나 절에는 석조가 설치되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석연지가 법주사에 있으며 경주 안압지의 水入시설도 거북같은 형의 석조 2개가 남아있다. 백제의 석조는 금주박물관과 부여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원형, 타원형 등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한 것들이고 통일신라와 고려의 석조는 장방형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것으로는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 마당과 경복궁 교태전 후원인 아미산 및 대원군의 저택인 운형궁내에 소형 석조가 남아있다. 사찰이나 소쇄원내에는 지금도 물을 대는 나무 홈대가 남아있다. 원내에 물레방아를 설치한 것은 소쇄원도에서 잘 볼 수 있으며 遊船으로는 경주 안압지에서 신라배가 발견되었고,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나 경복궁 경회루 방지에도 游船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특이한 것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포석정지의 석구이다. 이는 곡수연(曲水宴)을 베풀던 곳인데 구석에 물을 흐르게 하여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또 지당에 물을 넣는 시설로 사용한 용머리 조각들은 경회루 방지에서 볼 수 있다.
(8) 가 산
중국의 진, 한시대 이래 중국대륙에 널리 유행한 신선설에 의하면 동족에 인간이 다다를 수없는 三神山이 있어 이를봉래, 방장, 영주산이라 칭하고 여기에는 신선들이 불로장생의 영원한 삶을 즐기는 至樂의 공간이 있다고 믿어 왔다. 이러한 신선설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연못에는 그 가운데에 섬을 쌓아올려 이 섬을 신선이 산다는 仙山의 하나로 가상하여 조석으로 이것을 바라보아 신선의 응덕을 입어 불로장생할 것을 희구하였다.이러한 예로 평양의 동명왕릉앞의 절터 후원에서 고구려의 석가산이 발굴되었고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안압지에서도 연못가운데에 봉래, 방장, 영주산인 三神島가 조성되어 있고 동쪽 호안가에는 무산12봉이 조성되어 있다. 또 조선시대에는 조성된 남원 광한루 방지속에도 삼신도가 조성되어 있으며 담양 소쇄원에는 소형의 석가산이 조성되어 있다. 반면에 풍수설에 의한 가산의 예도 볼수 있는데 이는 지세가 虛하다하여 조산을 하기도 하였는데 서울 종묘의 남산가산이 이러한 예이다.
(9) 화 목
우리나라는 사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인공적인 식재에 있어서 상록수를 심기보다는 활엽수에 의하여 절기에 따라 변하는 초봄의 신록으로부터 개화, 결실에 이르는 계절감을 화목에서 얻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즐겨 식재된 수종은 은행나무, 단풍나무, 배나무, 동백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회화나무, 서어나무, 참나무, 팽나무, 살구나무, 주목, 소나무, 파초, 무궁화, 목련, 석류나무, 유자, 모과나무, 등과 화초류에는 국화, 난, 연, 작약, 창포, 봉선화, 등이 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의 화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과 유적지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시대의 화목은 느티나무,회화나무, 버드나무, 배나무, 잣나무, 소나무, 모란, 복숭아나무, 대나무, 산수유, 연, 철쭉, 인삼, 은행나무, 뽕나무, 박달나무, 난초, 자작나무, 국화 등이며 기화이초(寄花異草)를 심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빈번히 나타나는 화목은 소나무, 대나무, 두견화, 오동나무, 동백, 귤나무, 장미, 포도, 향나무, 금잔화 등이다. 조선시대는 매화, 국화, 작약, 감나무, 왜철쭉, 해당화, 소철, 백합, 종려, 맥문동, 봉선화,해바라기, 주엽나무, 담팔수, 식나무 등이다.이들 화목은 자연스럽게 군식이나 산식형태로 심어져으며 줄을 지어 열식으로 심지 않았던 점은 특징적이다. 창덕궁 후원의 원림은 인공으로 심은 주목 등의 수종이 많으나 인공을 가하지 않은 자연 식생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여 있다. 꽃이 좋거나 열매가 좋은 화목은 대개 집 가까이 담 옆이나 후원가에 심어졌으며 궁이나 절의 정전이나 민가의 앞마당 가운데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 경상도나 전라도의 민가 후원은 죽림으로 조성된 것이 가장 많다. 또한 민가에서 감, 대추, 모과, 배 등을 많이 심은 것은 조상의 제상에 올리는 제과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