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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황금동' 여성들은 5.18민중항쟁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한 구체적이고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황금동' 일대는 유흥업소가 주류인 번화가로 금남로, 도청과 인접한 곳이었다. 일반상가와 비교되는, 호객에 용이한 개방적인 구조의 가게들이 경쟁하듯 다닥다닥 밀집해 있었다.
비슷한 모양에 복잡한 구조의 상가 지형은 계엄군들에게 쫓기는 시민들에게는 최적의 피난처였다. 상품을 진열, 판매하는 일반 상가건물과는 다른 유흥업소 특유의 내부 구조도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형태였다. 은신에 유리하고 시위 격전지 금남로와 가깝다는 지정학적 특징 외에 시위군중이 황금동 골목을 도주 경로로 택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황금동 여성들은 항쟁 전, 후에도 부담스러운 시위 군중을 결코 내치는 법이 없었다. 금남로와 도청 앞 광장에서 전개된 시위와 집회의 뒤끝은 항상 백골단과 시위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으로 확전되곤 했다. 경찰, 백골단에게 쫓겨 충장로 지나 황금동까지 도망쳐온 학생이나 시민들에게 이 여성들은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다. 영업상의 불이익과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사람들을 적극 숨겨주고 보호했다. 그런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5.18의 시위군중 역시 본능적으로 황금동 골목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5.18광주민중항쟁 기간동안 실로 많은 시위군중이 그녀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계엄군들은 사적인 영업 장소에 함부로 들이닥쳐 범인 은닉의 혐의가 짙은 업소 여성들을 상대로 살벌한 추궁과 수색을 벌였다. 황금동 여성들은 계엄군들에게는 폭도들을 고질적으로 숨겨주는 공범자로 이미 찍힌 상태였다. 남성들을 상대하는 직업여성인 그녀들은 계엄군들을 따돌리는 데 탁월한 전략가들이었다. 침착하고 태연하게 기지와 지략을 발휘하여 계엄군들의 살벌한 추격을 무력화시키곤 했다.
영업 근무 복장인 한복치마 안에 사람을 감싼 채 탁자 밑에 숨겨 놓고 앉아 능청스럽게 계엄군을 상대했다는 일화는 시민들의 경험담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한복치마 안에 사람을 숨기고 앉아서 딴청을 피우는 것이 급박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임기응변이었다. 그만큼 시위 군중을 숨겨주는 일이 그녀들로서도 위험과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다.
황금동 여성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시민들의 다양한 무용담은 두려움과 공포로 기억되는 80년 5월의 풍경을 드물게 감동과 스릴로 회상할 수 있는 무궁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당시 그녀들의 치마폭이란 취객들을 홀리는 변장이 아닌 수많은 생명을 소생시킨 천사의 날개였다. 도시의 따뜻한 음지 '황금동'은 그녀들이 있어 혁명의 꿈과 희망이 물결치는 황금빛 골짜기였다.
부조리한 사회구조의 가장 큰 피해자인 최하위계층 여성들이 민주주의 투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정황이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믿기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80년 광주는 상식과 통념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별천지였다. 거리의 넝마주이, 구두닦이, 성판매 여성들까지 평범한 시민들과 공평하게 세상의 주인 노릇이 가능했던, 완벽한 대동 세상이었다. 그 중 황금동 여성들은 단연 시민들의 주의를 끌었다. 금남로에서, 충장로에서, 황금동에서, 병원헌혈대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녀들의 강렬한 모습은 시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을 특정한 5월 관련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수록한 자료 문서, 영상, 사진 어디에도 그들에 관한 제대로된 기록은 없다. 취사봉사대 양동시장 대인시장 상인들, 산수동 광천동 지산동 학동 주민들, 전남대학교 학생들, 시민군, 여성가두방송원들, 차량경적시위대 택시운전사들, 기름을 무상으로 제공한 주유소업주 등 구역별, 성별, 역할별로 분류된 어느 단체명에도 그녀들은 소속되어 있지 않다.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이라는 항쟁 일원으로서의 고유명칭 하나 얻지 못한 채 기록에서 소외되었다.
'황금동 여성들'의 '대단했던' 에피소드들은 시민들 사이에 가끔 전설처럼 회자될 뿐 정통역사의 한 페이지도 할애받지 못한 채 야사로 밀려나 버렸다. 80년 당시 그들을 불결한 병균의 보균자로 단정 짓고 헌혈 대상에서 걸렀던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이 3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경직된 역사 관념과 무관심의 형태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제가 당시 그분들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부상 치료받고 나오니 옷하고 신발을 구해다 저에게 입혀주더군요. 옷은 다 찢기고 신발도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없었거든요. 근데 그분들이 알아서, 헌옷이긴 하지만, 옷하고 신발을 챙겨줬습니다."
한광진 5.18광주민주화운동 부상자회 사무총장의 기억이다. 그는 당시 부상, 치료과정에 황금동 여성들의 도움으로 큰 위기를 모면했다고 회상했다. 옷과 신발을 챙겨주고 길 안내를 해주는 그 여성들이 '황금동 여성들'이라는 건 병원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말해줘서 알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선 그분들이 저에게, 어느 길로 가면 계엄군이 있으니 피해서 가라며 안내를 해 줬습니다. 그분들이 길을 일러주는 바람에 계엄군들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분들을 찾느라고 황금동을 다 뒤졌어요. 근데 못 찾았죠."
"선생님께서 나중에 황금동을 찾아가셨다고요?"
"네. 그분들 덕분에 제가 목숨을 구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당시 그분들이 안전한 길을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분명 계엄군에게 큰일을 당했을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 고맙다는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못 찾았습니다. 집들이 다 비슷비슷해서, 황금동을 다 뒤졌는데도 끝내 그분들을 못 찾고 말았습니다."
광주시민이라면 누구나 황금동 여성들을 비롯한 넝마주이, 구두닦이, 거지 등 무연고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과 부채감을 안고 산다. 그들은 모두 하층민들로 뚜렷한 연고가 없다는 점 때문에 희생자 집계에도 대부분 누락될 수밖에 없었다.
5.18민중항쟁 기록물 보존 작업에 많은 시민이 직접 참여했다. 후세에 올바른 5.18을 고증하기 위한 시민들의 정성이 문서, 영상인터뷰, 육성, 사진 기부 등 다양한 형태로 취합되었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겪은 생생한 5.18 경험담을 귀중한 사료로 제공했다. 그 덕분에 현재 5.18광주민중항쟁은 방대한 양질의 자료를 유산으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에 관한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황금동 콜 박스 여성들'의 존재를 언급하는 간접 증언 한 줄조차 찾기 힘들다.
황금동 여성들의 5.18 참여는 역사에서 공백 상태로 배제되었다. 38년 세월, 80년 5월의 명예와 영광, 아픔을 공유하는 후일담 안에서도 그녀들은 철저히 침묵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지금 우리는 사회 의식이 꽤 성숙한 것처럼 위시해도 과거 화류계 종사자의 커밍아웃 행위를 편견 없이 받아들일 만큼 너그럽진 않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그 시절의 유흥업소 경력 누설이 전제되는 경험담을 1인칭 고백으로 기대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자료 수집 방식의 한계에 갇혀 황금동 여성들의 5.18 참전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광주시민들의 기억에서만 맴돌 뿐 대외적 공신력을 전혀 얻지 못한 채 영영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황금동 콜 박스 여성' 경우처럼 화류계 여성들이 불의에 항거하며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집단차원의 저항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드물다. 그만큼 황금동 여성들의 에피소드들의 감동 지점은 영화보다 극적이고 소설보다 감동적이며 상상보다 허구적이다.
또 다른 시민 정경숙(여, 53세)씨는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남다른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그는 중학생으로 집이 역시 금남로에서 멀지 않은 '동명동'이었다. 주민들이 단체로 시민들 물을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물이랑 밥 지어서 날라주고 와서 엄마랑, 동네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러는 거예요. 시내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로 열심히 한다고. 음식도, 시민군들 뒷바라지 하는 것도 황금동 여자들이 제일 열심이라고."
그는 어릴 적 친구들이 황금동 주택가에 살아 자주 놀러 가곤 했다고 한다.
"엄마랑 동네 어른들이 하는 말 듣고 신기했어요. 황금동 여자들이 열심히 한다는 거요. 어릴 때 황금동 친구 집에 놀러 가면서 그 앞을 자주 지났거든요. 친구 집 갈 때마다 무서워서 잘 쳐다보지도 못했던 여자들이 음식하고 물 나르고 한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됐어요. 그분들이 헌혈도 제일 많이 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죠."
그러면서 그는 황금동 여성들이 5.18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세한 원인을 금남로와 가까운 환경 탓으로 확신했다.
"우리 동네만 해도 금남로하고 가깝다 보니 주민들이 똘똘 뭉쳐 시민군들 뒷바라지 하고 남자들도 많이 나갔어요. 오죽하면, 그 후에 우리 동네는 5월에 제사가 한꺼번에 몰린 동네가 되 버렸어요. 그만큼, 시내 가까운 영향이 컸죠. 그런데 황금동은 어땠겠어요. 금남로랑 딱 붙어 있잖아요."
지금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는 정씨는 타지에서 가끔 5.18 경험을 말할 때라도 황금동 여성들 이야기는 잘 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처음, 사람들이 황금동 이야기를 들려주면 잘 믿으려 하지 않고 되레 꾸며낸 이야기 대하듯 하곤 했던 경험 때문이다.
(중략)
'황금동 콜 박스 여자들'이라는 세간의 호칭은 그들의 모호한 정체성을 말해준다. 광주민중항쟁의 주역 '황금동 주민'인 자연인집단으로 존칭되어야 한다. 그것이 38년 동안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다. 대외적으로 백지상태인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광주시민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존중받아 마땅할 의인들이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와 존중에서 배제된다면 자유, 평등, 인권, 정의, 민주주의의 가치를 표방했던 5월 정신에도 배치된다. 그해 봄, 이 도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도덕적 의무는 이 여성들에 의해 역으로 실현되었다. 광주는 80년 5월의 황금동 여성들에게 빚졌다.
현재 황금동 일원은 대대적인 도심 정비 사업으로 예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최신 유행과 세련된 문화의 거리로 일신하여 젊은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핵심 번화가로 변모했다. 그 옛날 직업여성들의 호객행위와 폭력배들의 무질서가 난무하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지금 그 거리의 활기찬 자유와 세련된 문화를 만끽하는 젊은 세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전 그곳에서 자신들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반강제로 억류된 채 웃음을 팔아야 했던 슬픈 사연을. 그럼에도 그곳은 아름답고 용감한 여성전사들이 진지를 구축하고 적들로부터 무고한 시민들을 지켜낸 혁명의 사적지라는 사실을.
황금동에선 혁명의 꿈과 낭만이 황금처럼 물결쳤다. 그렇게 어느 해 봄 황금동 지명에 얽힌 유래는 전설이 되었다. 80년 5월 황금동의 여성들은 봄날의 광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혁명의 꽃이었다. 38년 동안의 잠복기는 증명한다. 그들은 타락, 퇴폐, 문란, 무질서를 퍼뜨리는 무서운 보균자가 아니었다. 자유, 민주, 정의, 사랑, 연민 등의 강력한 항체를 지닌, 그들의 피는 뜨겁고 맑았다.
첫댓글 지금쯤 다들 어디에들 계실까요 어디에 계시든 행복하셨으면 좋겠긔
진짜 전혀 들어본적이 없었긔,,학교에서 그렇게 518공부할 때도 언급조차 없었내..이렇게 알게되니 너무 감사한 분들이긔
자꾸 여성을 지우더라긔. 전태일만 남아있고 여공은 사라졌는데.. 가끔 사진에 보면 여성분들도 같이 항쟁하고 계시더라긔.
2222
5
666666 여성이 사라지는 게 안타깝긔
몰랐긔ㅠㅠ
정독했긔. 생전 처음 들어보긔ㅠㅠ 아직도 배울 게 많긔ㅠㅠ
처음알았긔 ㅠㅠㅠㅠㅠㅠㅠ
이 주제로 예전에 광주비엔날레에서 전시도 했었긔 저도 그때 보고 첨 알았긔
황금동이면 지금 문화전당 옆길이고요 구시청 일대인데 광주시민이라면 너무 잘 알죠. 지금도 유흥가는 유흥간데, 젊은 사람들 가는 술집, 식당 집중적으로 있어요 옛날엔 그랬네긔. 하...그분들은 지금 뭐하실까요 부디 지금은 잘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한분이라도 나와서 명예를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이긔.
처음 알았긔 얼마나 많은 분들이 역사에서 지워졌을까요...
이렇게 역사속에 잊혀져간 여성들을 계속 발굴해 나가야할 것 같긔. 진짜 대단하시긔!!!
처음 알았긔
대단하시긔 큰 일 하셨긔..ㅠㅠ
처음 알았긔ㅜㅠㅠ너무 대단하시고 감사하긔ㅠㅠㅠ잊지말아야겠긔
그 상황에서 저렇게 할 일을 하신다는 게... 정말 대단하시긔ㅠㅠㅠ 잊지 말아야겠긔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정말 쉬운 일 아니였을 텐데 대단하시긔ㅠㅠ 비록 직업상 이유로 본인을 드러내기는 어려우시겠지만 그렇다고 역사에서 지워지지는 않았으면 좋겠긔
성매매가 자발적이었어도 이 분들은 다른의미로 의인이고 영웅이긔
처음 알았긔 감사합니다ㅜㅜ
너무 찡해요 ㅜ 영화화되었으면좋겠어요 항거 영화 검색하다 보러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