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 대한 감사
엊그제 말복이 지났고 엿새 뒤 다가올 처서 절기가 기다린다. 간밤에 이어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잠시 그쳤으나 낮에도 한두 차례 더 강수가 예상된 팔월 셋째 수요일이다. 비로 인해 이틀 연속 야외 활동에 제약이 따를 듯해 하루 일정을 어떻게 보낼지 섣부른 판단이 어려웠다. 그동안 우리 지역은 강수량이 부족해 비가 더 와야 했는데 이만큼이나마 내려 다행이다.
비가 하루 내내 온다면 도서관으로 나가 대출 도서를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려와도 되겠으나 그렇지 않을 듯했다. 생필품 마련을 위해 동네 농협 마트에서 시장을 봐 올 일거리도 있었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온다는 구실로 집에 머물며 마냥 책을 펼쳐 읽음은 비생산적 시간 활용인 듯해 베란다 창밖을 연신 바라봤다. 구름이 잠시 걷혀 맑은 하늘이 비쳐 텃밭으로 걸음을 나섰다.
평소는 텃밭에 나갈 때면 날이 덜 밝은 여명에 집에서부터 걸어 창원축구센터 뒤 비탈로 올라갔다. 오늘은 새벽까지 비가 부슬부슬 내려 길을 나서지 않다가 아침 식후 집 앞에서 101번 시내버스를 타고 창원대학과 도청 앞을 둘러 법원 근처에서 내렸다. 변호사 사무실이 밀집된 빌딩을 지나 축구센터 체육관 곁 언덕으로 오르니 길섶의 풀잎에는 물방울이 맺혀 바짓단이 젖어왔다.
날이 밝아온 아침나절이지만 여러 세대에서 참여한 인근 텃밭 동료들은 아무도 나타나질 않았더랬다. 아마도 낮에 비가 더 내릴 기미라 텃밭 걸음을 머뭇거리는 듯했다. 나는 신발과 바짓단이 풀잎의 물방울에 흠뻑 젖은 채 텃밭 밭둑으로 올라 배낭을 벗고 할 일을 구상했다. 이번엔 비가 그친 뒤 땅이 젖어 있는지라 가을 푸성귀인 무와 배추를 심을 터를 일구지 않을 생각이다.
장마가 오기 전 열무를 심어 싹이 잘 터 자라던 잎줄기는 벌레가 꾀어 녀석들에게 보시하고 말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두 차례나 그랬는데 모두 내 탓이었다. 벌레가 꾀지 않도록 파종 직후 부직포를 덮어주든가 약을 뿌려야 했는데 그 과정을 생략했으니 거둘 열무가 한 줌도 없었다. 열무가 싹이 터 싱그럽게 자랄 때 나는 이걸 거두면 이웃과 나눌 생각부터 먼저 했더랬다.
처서 이후 가을 푸성귀를 심을 자리는 밑거름으로 퇴비와 복합비료를 뿌려 삽으로 땅을 일구어 놓았다. 며칠 뒤 젖은 땅이 마르면 이랑을 지어 무와 배추 씨앗을 심고 해충을 구제할 약도 뿌려줄 참이다. 지난번 가을 감자와 쪽파는 심어 두었는데 이번에 내린 비로 땅속에는 싹이 틀 준비를 하지 싶다. 가을 무와 배추 말고도 아욱과 상추도 심어보려고 씨앗을 준비해 놓고 있다.
이번 텃밭 걸음은 푸성귀를 마련하는 일이 기다렸다. 전 경작자 할아버지가 묵혀둔 부추밭을 늦은 봄에 다시 일구어 몇 차례 부추를 잘라 먹었다. 부추는 텃밭에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령사였다. 부추 꽃대가 올라 하얀 꽃을 피우면 절기는 입추를 지나서 처서였다. 하얀 꽃대가 솟는 부추를 잘라 검불을 가렸다. 호박잎도 따다가 누렁호박을 발견하고 애호박을 하나 땄다.
동부밭으로 가서 꼬투리가 여문 동부 열매를 땄더니 양이 제법 되었다. 이미 세 차례 수확한 동부인데 앞으로 두어 차례 더 딸 열매가 있을 듯하다. 동부 열매를 따 놓고 고구마밭으로 가 넝쿨을 들추어가며 보드라운 잎줄기를 따 모았다. 고구마는 가을에 캘 덩이뿌리보다 먼저 여름에 잎줄기를 따서 채소로 잘 먹고 있다. 잎줄기의 껍질을 벗겨 데쳐 나물이나 된장국을 끓여 먹는다.
텃밭으로 올라 부추를 자르고 호박잎과 동부 열매와 고구마 잎줄기까지 땄다. 그와 함께 애호박과 오이와 청양고추도 보태졌다. 텃밭에 들릴 때마다 땀 흘려 일한 노력에 비해 거두는 수확물이 많아 매번 흙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다. 손에 봉지를 들고 텃밭을 내려오면서 올봄 나에게 경작권을 넘긴 이 씨 노인이 땅은 정직하다고 했었는데 그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다. 22.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