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니'를 '이미' 살아가는 사람들
'아직'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
문제 속에 들어 있는 답안처럼
겨울 속에 들어찬 햇봄처럼
현실 속에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좋은 세상에 절망할 때
우리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삶들을 보아
아직 피지 않는 꽃을 보기 위해선
먼저 허리 숙여 흙과 뿌리를 보살피듯
우리 곁의 '이미'를 품고 길러야 해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이미'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박노해 시인의 <아직과 이미>라는 시 입니다.
아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여인에게 아이의 출생은 '이미' 현실이 됩니다.
우리의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신학(神學)에서도 '아직과 이미'(Not Yes and Already)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온전한 모습으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당신과 함께 '이미' 시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는 것이라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에게 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쓰신 분들은 메시아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계셨습니다." (요한1,14)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요한 1,5)
시인은 사람들이 '아직 아니'에 절망할 때 '이미'를 보아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시인은 이미 문제 속에 답이 들어있다고 노래합니다.
한 겨울 속에 이미 봄은 들어와 있고, 현실 속에 이미 미래는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날 고향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 골라 읽으십니다.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신의 사명에 대해 비장하게 선포하시는 듯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던지시는 출사표(出師表)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면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여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일.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알리는 일.
눈면 이들이 다시 보게 되는 일.
억압받는 이들이 해방되는 일.
이런 일들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아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일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지금 여기에서 '이미' 경험되어야 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며 '하느님 나라의 이미 오심'을 살곘다고 다짐하십니다.
하루하루 그분은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이미 와 있음'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가시는 길이 될 것입니다(나는 길입니다/-路運進).
박노해 시인의 시에서 마지막 부분이 바로 그런 뜻일것입니다.
저 아득하고 머언 '아직'과 '아마' 사이를
하루하루 성실하게 몸으로 생활로
내가 먼저 좋은 세상을 살아내는
정말 닮고 싶은 좋은 사람
푸른 희망의 사람이어야 해
이런 사람들 사이에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박신부의 묵상 산책
ㅡ모든 것 안에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ㅡ5권 중에서
서울 대교구 상도동성당 주임사제이신 박성칠 미카엘 신부님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