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는 “교향곡은 하나의 세계와 같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예민했으나 양심적인 음악가였던 그는 청년 시절에 자신이 동경했던, 적어도 세계의 일부라고 믿었던 이상주의적 서정과 평화로운 목가풍을 마침내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그리하여 교향곡 5번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으로 막을 올립니다.
1악장은 특이하게도 장송행진곡(Trauermarsch)이 10분 넘게 펼쳐지는 ‘해괴한’ 악장입니다. 게다가 군대의 행진 나팔처럼 들려오는 도입부의 트럼펫 팡파레. 그것은 오늘날 매우 감각적인 록음악처럼 들려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빈 사람들이 듣기엔 진부하다고 느낄 만큼 ‘보편적인 나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러는 별다른 음악적 가공 없이 ‘날것’ 그대로의 나팔소리를 교향곡의 입구에 깃발처럼 내걸었습니다. 게다가 이어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연주하는 가요풍의 선율은 또 어떤가요? 마치 ‘저잣거리의 엘레지’와도 같은 그 선율은 군대의 행진나팔과 어울리면서 혼돈과 광란, 때로는 절규의 장면들을 펼쳐놓습니다. 말러는 그렇게 통속을 끌어들이면서 당대 사람들에게 여전히 익숙했던 ‘음악다움’과의 결별을 시도했거니와, 아울러 화해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치달려가는 세상의 단면들을 복잡하게 뒤엉킨 리듬과 선율로 묘사했습니다. 그리하여 훗날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 첫번째 악장에서 어떤 파탄을 예감하는 “불길한 꿈”을 읽어내지요.
수많은 음악 연구자들이 입을 모아 얘기하듯이 2악장은 추락의 악장입니다. 치솟아 오르거나 가득 차올랐다가 힘없이 주저앉아 소멸하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주제를 재현하다가도 중간에 고개를 푹 떨군 채 그대로 침잠하고 맙니다. 아도르노는 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을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설명했거니와, 이른바 ‘파현’(破顯, Durchbruch)이 바로 그것이지요.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인간이 기계 부속처럼 맞물려 들어가 있는 사회의 맹목적 세계 운행에 대한 대응”이라는 해석입니다.
호른이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는 3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입니다. 스케르초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주시간이 약 20분에 달하는 이 악장에는, 말러의 교향곡에서 빈번히 얼굴을 내비치는 왈츠풍 무곡이 역시 등장하지요. 그러나 그 춤은 빈의 은성한 무도회를 연상케 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골들의 괴기한 춤처럼 들려옵니다. 이어서 4악장 아다지에토(adagietto)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베니스에서의 죽음>(1971) 덕분에 유명세를 얻은 악장이지요. 하지만 말러가 “사랑의 고백”이라고 아내 알마에게 설명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 이 악장은 유명 인사들의 장례식장에서 빈번히 연주되면서 ‘엇갈린 수용’의 한 사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5악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문제적 악장’입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경계인이었던 말러는 마지막 악장에서 결국 한계를 보이고 맙니다. 앞의 3개 악장에서 ‘세계와의 갈등’이라는 측면을 극한까지 묘사했던 말러는 마침내 마지막 악장에서 힘이 빠진 모습을 드러내지요. 음악사적으로는 베토벤 이후부터 낭만까지를 관통해온 ‘어둠에서 광명으로’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도르노는 이 절충주의적인 마지막 악장에 대해 “강요된 화해”라는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말러의 교향곡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가장 널리 알려진 4악장부터 먼저 들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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