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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사범11회 동기 21명이 9월 23일부터 10월 1일까지 7박 9일간(기내 1박) 터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기에 그 기행록을 올리니 참고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모 속 자료는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자료이니 감안 하고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기록자 김정태 드림 터키 여행 기행록
이스탄불 「블루 모스크 」앞에서
◉준비 : 거의 해마다 시행하는 안사11회 동기들의 해외여행에 대한 제안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몽골로 가자는 의견에서 중국(개봉,낙양,등봉,정주,초작)으로 생각이 옮겨 갔다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멀리 가고 나이 더 들어서 가까운 곳으로 가자는 의견에 따라 최종에는 터키로 결론이 났다. 중간에 발칸 3국으로 가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거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결국 터키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행사도 하나투어로 했다가 신영호 회원이 추천한 롯데 홈쇼핑에서 운영하는 LOTTE JTB가 시행하는 프로그램의 내용이 더 충실하다고 해서 여행사까지 바꾸었다. 동행 회원 모집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모두 자기가 좋아서 하는 여행이라 권해서 될 일도 아니지만 안동에서 천세창 회원 내외분, 그리고 대구에서 이평직 회원이 합류하여 21명의 여행단을 꾸리게 되었다.
◊방문 지역 인천→이스탄불(1)→트로이→아이발릭(1)→에페소→파묵깔레(1)→안탈리아(1)→카파도키아(1)→앙카라(1)→이스탄불(1)→인천
◉일정표 터키 국내 교통편 : 모두 전용버스 이용
◉출발 ◦ 출발 시각이 오후 2시 25분이지만 11시 30분까지 인천 공항 3층 A카운터 15-16번 테이블 LOTTE JTB 여행사 직원 앞으로 모이라고 해서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늦은 사람 없이 다 모여 가방에 붙일 명찰 받고 [롯데 홈쇼핑 방영 터키 일주 9일]이란 설명 자료도 받았다. ◦ 짐을 부치고 보안 검사를 받고 출국 심사도 마치고 각자 헤어져 면세점에서 기념품도 사고 게이트 앞으로 가 탑승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 우리 비행기는 대한항공 KE955편으로 오후 2시 25분 제 시간에 추발하여 10여 시간을 날아 터키의 이스탄불 공항에 현지 시각으로 오후 7시 경에 도착 하였다. 여행사에서 준 비행시간 보다 좀 일찍 도착을 한 것 ◦ 항로는 황해를 건너 북경 아래로, 중국 영토에 진입하여 곧바로 서쪽으로 날았다. 티벳을 거쳐 카자흐스탄 남부와 우즈베키스탄 상공을 경유하여 카스피해를 건너 흑해의 북쪽, 그러니까 우크라이나의 남부 해안을 스치듯이 지나 터키 영공으로 들어갔다.
◉터키 도착 ◦ 이스탄불 아타투르크(ATATURK)공항에 내려 가이드 김명식씨와 미팅을 한 후 터키 여행을 시작하였다. * 김명식씨는 3개월 간 선배들에게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고 가이드 생활 시작했다고 함 ◦ 아타투르크(ATATURK)공항은 1998년도에 완공한 공항인데 우리의 인천공항 만은 못해도 괜찮은 편임 ◦ 저녁식사는 기내식으로 했기에 우리의 숙소 아시얀호텔(GRAND ASIYAN HL)에 곧바로 갔다. 호텔은 공항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이스탄불의 첫 인상은 복잡하고 길 좁고 차 많고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 포터에게 짐을 맡기고 각자의 객실로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좁은 호텔이었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 수 밖에...... 그냥 잤다. ◦ 가이드는 김명식씨로 자기의 신상을 자세히 밝히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본관이 함창 김씨라는 것과 훤칠한 키에 미남이고 크지 않은 목소리로 우리를 잘 설득하고 이끌어 주었다. 터키 역사에 매우 밝고 터키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영양 사람이고 어머니는 울진 사람이란다. 우리 일행도 그의 리드에 잘 따랐지만 여행 내내 한번도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잘 지냈다. ◦ 터키와 우리와는 지금 시차가 6시간이 난다. 우리의 오후 6시가 터키에서는 정오가 되는 것. 그러나 10월부터는 섬머타임이 해제되기에 시차는 7시간이 된다. ◦ 터키의 국토 면적은 한국의 3배 정도이고 인구는 7,800만 명이나 된다. ◦ 터키 땅의 3%가 유럽이고 97%가 아시아이지만 국민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은 유럽인임 ◦ 현지 통화(通貨)는 리라(Lira)이고, 1리라는 한화로 700원으로 치면 됨 *유로화는 1유로가 한화로 1600-1700원으로 환산하면 됨 ◦ 국민 소득은 우리의 절반인 1만불. ◦ 한국 교민은 2,000명 정도 거주 ◦ 국토가 넓어 우리가 이번 여행에서 관광버스를 많게는 9시간을 타야하고 가장 적게 이동하는 게 5시간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이제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다.” ◦ 터키의 사정 : ‘여기는 터키다’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기 바람. 터키가 나쁘다가 아니고 그러려니 하시기 바람 *욕조는 아예 마개가 없다 - 물 넘치지 않게 하기 위해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온다. *식당에서 빈 그릇을 얼른 가져간다. (남은 음식이 있는데도 가져 가려해서 ‘야!’하고 소리 질러 만류했다.) ◦ 터키의 호텔들은 방음 시설이 좋지 않아 말소리가 옆방까지 들리니 조심 하기 바람 ◦ 우리는 터키 땅의 절반에 해당하는 서부와 중부를 여행. 지역마다 기후가 다름. 지금 남쪽은 덥고(트로이와 아이발릭, 에베소는 낮 기온이 30-31℃) 북쪽은 서늘하니 옷차림 고려하기 바람 ◦ 이스탄불 - 지금 심각한 문제가 교통 체증 ◦ 주의 *우리가 묵는 호텔은 전부 1박만 하고 이동하므로 옷장에 옷 걸어두고 다음 행선지로 떠나면 찾기가 어려움 *일교차가 심하므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옷차림 주의 바람 ◦ 수돗물은 석회가 다량 녹아 있어서 절대로 먹어서는 안됨. 씻는 데는 문제 없음 ◦ 관광버스 안에서 운전기사가 차 안 냉장고에 시원한 물을 채워 두었으니 1$에 두 병씩 치고, 가이드에게 물 달라고 하면 가이드가 소비한 물을 체크하여 우리의 공동경비에서 나중 정산하기로 함 ◦ 화장실은 유료인 곳(2인에 1$)이 있는데 이것 또한 우리가 사용한 머릿수대로 가이드가 계산하고 나중 공동경비에서 정산하기로 하여 불편 없이 먹고 쌌다. 로마 시절에도 화장실은 유료였단다. ◦ 아침에 침대 머리에 팁으로 1$를 놓을 것. 버스에서 호텔 객실까지 가방 옮겨 주면 포터에게 1$의 팁 줄 것, 이것도 가이드가 다 주고 공동경비에서 정산하기로 함. ◦ 우리들은 행운아다. 왜? 우리가 9일간 탈 관광버스는 출고된지 1주일 밖에 안된 새차이기에 하는 말. 운전기사 이름은 페티.
☼9월 24일☼ ◦ 모닝콜 : 06:00 식사 : 07:00 출발 : 08 :00 ◦ 오늘의 일정 여기 유럽 쪽 이스탄불에서 → 다스다넬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트로이 → 아이발릭 ◦ 아침에 일어나 우리 부부가 호텔 주위 산책을 나왔다. 호텔을 나선 시각이 06 : 20쯤인데 걸 거리는 아직 어둑어둑하고 지나가는 행인도 드물었다. 강도가 우리를 덮치면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좀 무섭기도 했다. 길모룽이를 꺾어 나가니 멀리 지중해의 보스포러스 해협이 보였다. 호텔로 돌아오니 천세창 회원 부부도 다른 방향으로 산책을 하고 돌아와 호텔 밖에서 만났다. ◦ 처음하는 호텔 조식은 보기에는 호화찬란했으나 느끼한 게 우리 한국 사람 식성에는 맞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게 올리브였는데 누르스름한 것과 검으스름한 것 두 가지가 나왔는데 몸에는 좋다고 하나 맛은 당기지 않았다. 여행하는 동안 아침 호텔식에는 거의 다 올리브가 나왔으나 그걸 담아가는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토마토와 오이는 제맛이라 계속 가져다 먹었다. ◦ 우리가 묵은 터키의 호텔에는 모두 커피포트가 없었다. 대신 식당에서 뜨거운 물을 공급해서 각자가 가져간 일회용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먹었다. ◦ 터키의 모든 식당에서는 김치를 꺼내 먹을 수 없다. 김치 냄새를 터키인들이 무척 싫어해서 가이드가 첫 번째 주의 사항으로 일러 주었다. 우리 김정자 사장께서 김치를 제법 많이 가져갔으나 보따리 채 가이드에게 주어버렸단다. 가이드가 횡재한 셈!!! ◦ 유럽 전체와 터키에서는 물 이외의 음식을 관광버스 안에서 먹을 수 없다. 특히 오징어는 가장 기피하는 냄새란다. ◦ 터키 여행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호텔의 엘리베이터였다. 제법 큰 호텔에서도 모두 2-3인승, 또는 4인승이어서 큰 가방까지 들면 세 사람 이상 탈 수 없었다. 아침 식당 내려 갈 때와 아침 짐 갖고 내려 갈 때면 한꺼번에 투숙객이 내려가야 하므로 거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일행들이 한두 사람만 타고 가방을 몽땅 실어 내려보내고 사람은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것이다. 이것도 3-5층이면 몰라도 7-9층에서 내려오자면 고역이었다. ◦ 또 터키의 엘리베이터는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구시대 제품이었다. 목적한 층에 오면 병풍식 접이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이 때 손으로 바깥문을 밀어야 바깥문이 열리는 괴이한 형태여서 정말 짜증났다. ◦ 관광버스에 가이드가 두 사람 *터키에서는 외국인이 관광 가이드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차의 터키인 가이드는 “갑시다”와 “빨리빨리” 두 단어 이외의 한국말은 전혀 못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가이드 김명식씨가 진짜 가이드인 것 *터키인 현지 가이드의 역할은 관광지 입장권 구입, 맨 뒤에서 낙오자가 없는지 살피는 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고나 문제 발생 시 터키인 가이드가 실력을 발휘해 해결하면 우리나라 가이드가 못하는 일을 잘 해결 해 준단다. 터키인 현지 가이드의 이름은 ‘쿅한’. ◦ 가이드와 운전기사 팁은 한국 여행사에서 이른대로 1인당 하루 10?(유로)씩 9일간 90유로를 지불했다. 21명이니까 1890유로, 한화로 환산하면 300만원이다. ◦ 간단한 현지어 공부 *안녕 하세요? : “네르하바” *감사합니다 : “싸울” ◦ 아침 8시에 아시얀호텔을 출발하여 계속 서쪽으로 달려 다스다넬 해협까지 달렸다. 도선(渡船)으로 해협을 건너기 직전에 곧바로 점심 식사를 했으니 버스를 4시간 가까이 탄 셈. 터키의 북쪽 유럽에서도 그렇게나 멀리 서쪽으로 달려야 다스다넬 해협에 이른다는 말. ◦ 점심식사는 고등어구이가 나오는 케밥. 누군가 말하기를 터키에 가면 반드시 고등어를 곁드린 케밥을 먹어보라고 하였다는데 내 입이 요상한지 맛있다고 말 할 수 없었다. 야채와 빵, 그리고 맛이 이상한 죽(스프)이 나와 빵에 찍어 먹으니 괜찮았다. 빵이 많이 남았는데 그게 아까와 우리 권오기 친구가 다 걷어서 들고 나왔는데 그 빵 처분이 궁금.... ◦ 터키인들은 유럽 연합에 가입하기를 갈망하고 있음. 그러나 유럽 여러 나라들이 이슬람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 때문에 가입이 안 되고 있음 ◦ 터키의 인구가 너무 많아 EU에 가입할 경우 유럽인들의 일자리를 뺏을 것을 심히 우려하고 있음. 터키 국민의 평균 연령이 30세 미만으로 인구로 보아 젊은 국가 ◦ 독일이 터키가 EU에 가입하는 것을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있음. ◦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EU 가입이 희망적인 게 현실 ◦ 터키의 헌법에 정교 분리(政敎 分離) 명시 *이슬람 정부가 들어서면 군부가 개입해서 이를 저지하도록 헌법 조문에 명시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도록 함 ◦ 정교 분리 정책의 實例 1. 군부 개입 지양 2. 종교 재판 폐지 3. 이슬람식 여성 차별 금지 4. TV에 출연 시 히잡 착용 안됨. 그러나 지금은 자유 ◦ 민주주의를 시행. EU회원국과 상호 존중 ◦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ATATURK)는 정경 분리, 여성 해방, 姓을 만들어 붙이는 개혁 정치를 함 ◦ 내부적으로는 쿠르드족과의 민족 차별이 심각한 문제 ◦ 터키의 부적(符籍) 「나자르본쥬」 : 전체 모양은 둥근데 안에 파랑색 둥근 원과 흰색 원이 있다. 터키에서는 이 파란 색이 악귀를 쫓고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여긴단다. 관광 상품 매장에는 어디서나 다 팔고 있었는데 터키인들은 가정집은 물론 식당, 가게, 심지어 관광버스에도 이 부적을 걸어 두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이 부적을 아무도 사지 않았다. 왜? 한국 귀신은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 ◦ 터키인들의 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미신이 많이 퍼져 있다. ◦ 문맹자에게 좋은 글귀를 적어주면 그걸 부적 삼아 걸어 둠 ◦ 해협은 좁아 도선(渡船)으로 20분 남짓 걸렸다. 도선(渡船)은 제법 큰 배로 아래층은 자동차를 싣고 2층은 승객이 탔다. 아래층에 관광버스 몇 대와 트럭 몇 대와 승용차 여러 대를 실었으니..... ◦ 이제부턴 아시아(亞細亞)다. 트로이 유적지까지 달리고 달렸다. ◦ 터키에서는 지하철 공사 어려움 : 공사 중 유적이 발굴 되는 일 많아서 * 땅 파는 대형 공사장에는 고고학자가 60명이 계속 일함 *유물이 발견되면 노선 바꿈 ◦ 현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저 터널 공사 중 ◦ 터키를 여행하며 느낀 점은 이 나라 전역에 강우량이 무척 적어 농사도 어렵고 강우량 부족으로 농작물은 키가 작거나 땅에 깔려 자라는 작물이 많았다. 토마토와 포도가 지주 없이 땅에 깔려 자라는 것이 신기했다 밀도 키가 무릎까지 밖에 자라지 않는단다. ◦ 평균 강우량이 750-800mm 사이 ◦ 한국에 터키가 소개된 것 : 월드컵 이후. 그 전에는 성지 순례의 일환으로 터키를 방문했음 *터키에는 기독교 성지가 7곳 있음 *6.25때 한국을 도와 한국이 부자 나라가 된 것을 뿌듯하게 생각함 ◦ 작년에 터키에 들어 온 한국 관광객 : 10만 명 ◦ 작년 한 해 터키 전체의 관광객 : 2,700만 명. 전체 관광객의 1%가 한국 관광객 ◦ 2008년 한해의 관광 수입 : 20조 원 ◦ 터키 관광 중 이스탄불 관광이 50%, 지방 관광이 50% ◦ 유적은 그리스와 로마 당시의 유적이 많음 ◦ 지금은 유럽 연합에 가입하려고 노력 중 ◦ 언덕이 많아 철도 교통이 발달되지 못함. 자동차 교통 위주임 ◦ 이스탄불에 아주 큰 버스터미널이 있다. *버스로 유럽 각지로 갈 수 있음. ◦ 터키 국민의 95%가 무스림이다.(이슬람) ◦ 전국에 이슬람 사원이 3,000개가 넘음 ◦ 헌법에 이슬람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게 못 박음 ◦ 남자가 수염을 기르던 말던, 여자가 히잡을 쓰던 말던 자유(종교의 자유) ◦ 카톨릭의 수장(首長) - 로마 교황 이슬람의 수장 - 오스만터키 황제 ◦ 이슬람 사원 첨탑의 용도 : 하루에 5번 하는 기도 시간을 첨탑 상부에 설치한 확성기로 알림 *터키의 길잡이 : 첨탑(어느 첨탑에서 몇 번째 골목에서 우측으로....) ◦ 이슬람사원은 국가의 「종교청」에서 국비로 지어 줌. 사원의 주변 인구 수를 감안하여 사원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첨탑의 수로 주변 인구를 짐작할 수 있음. 첨탑 1개이면 대략 500명-1,000명이 거주 ◦ 큰 도시 - 모스크에 첨탑 시설 시골 마을 - 일반 건물에 첨탑(이런 사원은 적었다) ◦ 이스탄불의 인구 : 1,250만 명. 비공식 집계로는 1,500만 명 ◦ 터키의 경제 : 자급자족함. 삶이 풍족함 ◦ 6.25 때 터키에서 한국에 파병할 지원병 모집 : 14,900명이 자원하여 파병함. 1950년 10월에 부산에 도착. 전사자가 720명인데 부산 UN묘지에 묻혀 있음. ◦ 을지로와 소공동에 터키인들이 집단 거주하며 무역업을 하거나 포목점 운영을 함 ◦ 터키는 자기 나라 역사 교육을 매우 소중히 여기고 비중도 큼 ◦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양국 관계 좋아짐 ◦ 2000년도 서울 월드컵 : 터키는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 *터키와 브라질 간 축구 : 한국 주심의 오심으로 페널틱 킥 줘서 “한국이 터키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라며 분노 *터키와 중국 간 축구 : 한국민들 터키를 응원 - 불신이 어느 정도 회복 *한국과 터키 4강전 : 홍명보의 백패스를 받아 터키가 골인, 터키가 3위 한국이 4위 *길거리 응원 : 아주 좋게 봄. 우리가 한국인이란 걸 알면 “대-한민국 짜짜짝 짝짝”을 하며 반색을 함. 특히 권오기 회원은 이들과 맞장구를 잘 춰 줌 *45년간 우리를 짝사랑한 셈 *결과적으로 한국이 터키에게 배은망덕한 꼴 ◦ 1999년에 대지진으로 사망자만 2만 명이 발생.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까지 포함하면 4만 명에 이르름 *구조대 파견 : 이웃 그리스와 불가리아에서 많이 도움 * 우리 나라에서도 3일 후 구조대를 파견하여 성실히 구조함 *23억원 모금해서 한국 정부가 전달 ◦ 현대, 삼성, LG의 신뢰가 큼 ◦ 현대자동차 터키 현지공장이 있어서 주민과 친교 쌓음 ◦ 끝없는 밀밭 지대를 지나감 - 지금은 추수가 끝나 빈 밭 뿐 ◦ 해바라기를 많이 재배하는데 키가 아주 작음 - 건조한 기후라서 ◦ 올리브 : 지중해 연안에서만 재배하는데 9월에서 11월 사이에 수확함 ◦ 터키의 여름 - 건기 겨울 - 우기 ◦ 내일의 일기 예보 : 날씨 좋음. 다만 일교차가 커서 밤에는 추우니 감기 조심 ◦ 고속도로 제한 속도 : 110Km, 단 고속버스나 관광버스는 100Km ◦ 차들은 거의 매일 세차를 하기 때문에 모두 깨끗함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세차해 주는 사람이 있어 적은 돈으로 세차함 ◦ '마르마라해‘를 지나감.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곳 ◦ 자기 집 창문을 주 3회 닦아 유리창이 반짝반짝 거림 *유리창이 더러운 집은 터키인이 아닌 외국인이 사는 집 ◦ 대도시의 가정에서는 주로 갈탄을 연료로 해서 주위를 지나가면 매케한 냄새가 남 ◦ 태양열 주택이 매우 발달해 우리가 서부 해안지대를 지날 때 거의 모든 집의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해 둠. 태양열 집열판이 없는 집이 거의 없음 *건조한 기후라 매일 맑은 날이 계속 됨으로 태양열을 이용하기에 아주 좋은 기후를 가짐
◈터키의 역사를 돌아보면 ◦ 터키의 역사 - 소아시아 역사 *메소포타미아 문명 -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 ◦ 터키 以前 - 그리스 로마 문명 ◦ 터키의 언어 - 우랄알타이 언어로 語順이 우리와 같아 배우기 쉬움 *국민의 기질도 우리와 비슷함 ◦ 흉노족(훈족) - 중국 진나라 때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음 *공주를 흉노 왕족에게 시집보내 친교를 맺기도 함 ◦ 흉노족은 한족에게 쫓겨 서쪽으로 이주 - 터키 ◦ 게르만족은 흉노족에게 쫓겨 서쪽으로 이주하여 현재의 독일 건설 ◦ 돌궐 - 흉노 다음으로 제국 형성.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가짐 *7세기에 터키로 넘어와 용병 생활 ◦ 돌궐 다음으로 「셀축투르크」국가 세움 * 기독교도들인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대파하고 이슬람인 셀축투르크 강성 ◦ 「오스만투르크 제국」 : 35개국을 정벌하여 500여 년간 지배 *영토는 현재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고 북쪽은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제국이다. *세금 수입만으로 국민들이 잘 삼 *19세기에 들어와 유럽 - 세계로 항해를 해 인도와 아메리카를 지배했으나 오스만투르크- 그러지 못해 국력이 위축됨 *케말파샤의 등장으로 터키공화국 수립 촉진 *1922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멸망하고 「터키공화국」이 들어섬
◦ 터키를 관광하자면 간략한 터키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가 가능함으로 여기에 기술한다.
◦ 터키 - 인종 차별 없음.
*유목민의 특성 : 이방 민족을 만나면 반갑고 그들을 통해 외지의 새로운 정보를 얻음
◦ 터키는 세계적인 물 부족 국가
◦ 터키는 전력 사정도 안 좋아 주 1회 정도 단수 단전이 발생
◦ 매장 문화 - 묘지가 市內에 있고 사망 후 24시간 안에 매장을 함.
*묘지는 이슬람의 메카(사우디아라비아)를 향해 조성함
◦ 다스다넬 해협을 배로 건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트로이 유적지가 있었다. 관광버스에서 내리자 우리 눈에 들어 온 것이 그 유명한 「트로아 목마」, 그걸 본 모두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 엉성해서 우리의 머릿 속 목마와는 거리가 멀어 나온 웃음이었다. 일부는 몸 속 계단을 통해 목마 안으로 들어가 보고 일부는 바깥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목마 안으로 들어 간 일행들이 목마 안 창 밖으로 빼꼼히 머리를 내밀기에 그 모습을 찍어 드렸다. .
◦ 트로이 유적은 사실 글로 표현하기가 난감하다. 워낙 훼손이 심하고 또 서로 다른 시기 즉 1기에서 9기에 걸쳐 형성된 문화 유적이라 같은 지역이라도 층마다 서로 다른 期에 형성된 유적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이를 이해 하자면 터키의 고대 역사를 알아야 하고 또 神話까지 통달해야 이해가 갈 수 있어서 듣는 기록자의 머리는 마치 수세미처럼 얽혀 말 그대로 亂麻로소이다.
현장 사진을 보면 약간은 이해가 될 터인즉 안사11 카페 {서울 소식 725와 726번}을 보시기 바란다.
◦ 트로이의 유물을 터키, 그리스, 독일, 러시아가 각기 자기 나라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 트로이 관광을 마치고 이제 아이발릭으로 이동한다. 트로이에서 아이발릭까지는 관광버스로 2시간 거리 ◦ 아이발릭으로 가는 해안과 비탈진 밭은 모두 올리브 농원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비탈 산을 개간하여 올리브 농원으로 만든 것이 기적 같은 일. 그 넓은 비탈 산의 잡목을 제거하고 잡초를 없애고 올리브를 가꿀 수 있을까? 올리브 나무 밑에는 잡초도 거의 다 제거해 우리나라의 비탈 밭에 복숭아 과수원을 일군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 넓이가 우리의 복숭아밭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넓었다. ◦ 이 올리브 열매는 9월부터 11월까지 모두 일일이 사람 손으로 딴단다. 우와!!! 참말로 놀랄 일이다. ◦ 그리스와 터키는 세계 최대의 올리브 생산국 ◦ 올리브 나무는 묘목을 심고 난 후 8년-20년 간 수확할 수 있단다. ◦ 터키의 옛 사람들 - 수렵 생활 ◦ 수메르족 - 강 유역에서 농사를 지음. 물 끌어올리고 관개시설 해 농사지은 유적 있음 *당시 쇠로 무기를 만들고 농기구를 만들어서 씀 ◦ 아이발릭에 도착해 해변에 있는 마레(MARE)호텔에 투숙
◦ 저녁 식사 후 우리는 해변으로 나가 죽기 전까지 머릿속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을 낭만의 시간을 마련했다. 신춘자 회원과 김정여 회원이 인천공항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산 양주 2병과 각자가 가져 온 마른안주를 들고 해변으로 나갔다. 김정태는 현지에서 맥주 10병을 샀으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두고두고 나중에 마셨다. 해변 해수욕 후 쉬는, 누울 벤치들을 모아 테이블을 만들고 의자를 만들어 말 그대로 임시 연회장을 만들었다. 야!!! 정말 근사하다!!! 몇 순배 향기로운 위스키 잔이 돌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기름을 쳤는데 시동이 안 걸리고 배기간?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18세 청춘 남녀가 되고, 20대 청춘 시절로 돌아갔다. 독창도 나오고 스물 한명이 입을 모아 부른 합창도 나왔다. 와이리 좋노? 기분 째지게 좋다!!! 우리는 하나 되었다. 마지막엔 세계적인 명곡(?), ‘한빛 밝은 이 나라 새녘 복판에....’를 목소리를 높혀 휘나레를 장식하였다. 유행가처럼 멀리 가로등이 졸고 있는 으스름 밤, 정말로 분위기 쥑여주는 근사한 밤이었다.
아이발릭의 해변에서 꿈 같은 낭만의 시간을 갖다!!!
☼9월 25일☼
◦ 모닝콜 : 6시, 아침식사 : 7시 출발 : 8시
◦ 오늘의 일정
아이발릭 → 쉬린제 마을 → 에베소 → 파묵깔레
◦ 아이발릭 ↔ 에베소 : 3시간 30분 소요
◦ 에게해 : 성서에서 이름 유래
*에게해의 99%가 그리스 영해
*에게해에는 섬이 많아 다도해
◦ 길을 달리다가 길 가 노점에서 싱싱한 생 무화과를 팔기에 3Kg을 샀다. 오늘 밤 호텔에서 나누어 먹어야지....
포도주 무료 시식을 하며
◦쉬린제 마을은 아이발릭에서 에페소로 가는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 이 마을은 꼬부랑 산길을 한참 올라가 거의 산꼭대기에 있지만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 이 마을은 포도주 생산지이자 과일주를 만드는 곳이다. ◦ 입구의 노천 레스토랑에서 우리에게 포도주를 무료 시식을 시켜 주며 자기 집 포도주를 사란다. 홍보 요원 역을 하는 터키 젊은이의 익살이 가당찮다. 배꼽을 잡게 했다. 거기다가 우리의 월드컵 응원 구호를 선창하며 따라 하란다. “대-한민국 짜짜짜 짠짠”을 되풀이 하란다. ◦ 포도주 시식을 하고 길을 따라 올라가니 길거리 가게에서 여러 가지 관광상품을 팔고 있었다. 과일로는 무화과, 석류, 포도 등등... 그리고 요란한 색깔인 접시들, 그리고 예쁜 공예품들....
◦ 이용걸 회원이 들려 준 어제 아이발릭 지역 신문에 난 기사
*실제로 아이발릭 지방지에 난 기사 같기도 한고 ‘왠 그런 기사가?’라고 의아해 할 친구도 있을 텐데 그 답은 그대가 내려 주길 바라며 기록자는 판단은 유보한다.
◦ 터키 여행에서 추천할 곳을 꼽으라면 아래 세 가지를 꼽겠다. 1. 이스탄불의 소피아 대성당 2. 가파토키아(괴뢰메 골짝기, 베르벤토 계곡, 버섯 모양의 바위가 장관인 파샤바, 비둘기 집으로 유명한 웃추히사르) 3. 에페소 유적지 ◦ 에페소 유적지 중 복원 된 곳은 15%에 불과 함. 지금도 계속 발굴 작업 중이므로 100% 복원된 모습을 보기란 우리 세대로서는 불가능.... ◦ 기록자는 그리스를 가보지 못했지만 여기 에페소 유적이 그리스 유적보다 못할 게 없다는 선입견이 들었다. 1500년이 지난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 이 정도라면 당시의 문명은 대단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유적의 규모와 돌을 다루는 솜씨가 현세의 여러 가지 건축물과 석공예품과 비교해도 더 훌륭했으면 했지 뒤처지지 않을 그런 대단한 유물을 보았다. 벌어진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깨진 돌 조각품까지 카메라에 담아왔다. ◦ 당시의 화장실 문화를 보고 경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목욕탕에서 쓴 더운물을 아래의 화장실로 흘러 내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했고, 추운 겨울에 하인들이 벗은 엉덩이를 화장실 돌에 미리 앉게 하여 차갑지 않게 한 거라든지 응가 볼 일을 보는 귀족의 앞에서는 악단이 음악까지 연주 했다니 당시의 귀족의 위세까지 짐작이 갔다. ◦ 에페소 유적지는 눈으로 본 것을 기록하기에는 나 김정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그 자료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 하겠다. 넓은 아량으로 양해를.....
◦ 에페소 유적지를 관광한 후 파묵깔레로 이동했다. 에페소 ↔ 파묵깔레 : 2시간 30분 소요 ◦ 폴라트 호텔(POLAT HTL) 투숙 *우리가 전 일정 중 유일하게 묵은 5성급 호텔 *저녁 식사 후 호텔 내 야외 온천욕 하다. ◦ 호텔에서 밖으로 조금 나가면 조그마한 야시장이 열리고 양고기구이에 생맥주 한 잔 할 수 있다는데 모두들 호텔 내 야외 온천을 하겠다고 해서 온천욕 함(기록자는 양고기 구이에 생맥주 한 잔 하고팠는데....) ◦ 오다가 길 노점에서 산 생 무화과를 나누었다. 1인당 3개씩.... ◦ 이날 밤에 몇몇이 이평직 회원의 방에 모여 9월 24일 해변에서 밤 정취를 즐기며 파티를 열었을 때 다 못 치운 양주를 비우고 온갖 담화를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9월 26일☼
◦ 6시 모닝 콜, 7시 식사, 8시 출발 ◦ 우리가 묵은 온천은 상당히 컸다. 우리가 잘 방은 로비와는 상당히 떨어져 위로 돌아 올라가야 했다. 일행들의 숙소는 숲속 길을 걸어 올라가 8브럭에 배정 되었다. 우리 방은 831호실 ◦ 여기 폴라트 호텔(POLAT HTL)과 오늘 관광할 석회봉까지는 차로 15분 거리 ◦ 식당이 매우 컸다. 우리 일행 21명 빼고는 모두 백인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 아침 식사 후 짐 가방을 방문 앞에 내놓고(호텔 포터가 옮기기로) 홀가분한 차림으로 로비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 내 손가락에 왠 고추장이 묻은 것 같아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입으로 빨아먹었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그 부위에 계속 고추장이 묻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여겨 가까운 야외 수영장 물에 손을 씻었는데 아니 또 고추장이? 알고 보니 손가락에서 피기 난 것!!! 이런 둔한 인간아!!! 완전 코메디를 한 기분. 집 사람의 도움으로 1회용 밴드로 손가락을 감았다. ◦ 뒤따라 일행이 내려오기에 야외 온천 풀을 배경으로 사진 몇 컷을 찍고 나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폴라트호텔 야외 온천 풀 앞에서
◦ “파묵” - 목화 “깔레” - 성(城) *이 지역에서는 목화 재배가 성했다. 지나가다가 하얀 목화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목화밭을 자주 보며 지나감 ◦ 파묵깔레 유적지에서는 우리가 방문 했을 때에도 우리 눈앞에서 발굴이 진행 되고 있었다. ◦ 히에라폴리스를 중심으로 10Km 이내에는 건축 신축 허가 안남 ◦ 이곳은 헌병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 치안 상태는 타 지역 보다 좋음
◦ 하얀 종유석이 흘러내려 계단식 절벽을 이루고 있는 석회붕과 노천온천이 있는 곳이다. ◦ 세상에!!! 신의 조화가 분명한 하얀 계단식 논!!! 그리고 흰 어름이 녹아내리다가 다시 얼어붙은 듯한 울퉁불퉁한 절벽!!! 또 어제 내린 눈이 언덕에 쌓인듯한 곳!!! 이것이 모두 온천수에 녹아내린 흰 석회가 만들어 낸 작품들이다. ◦ 이곳엔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우리 일행은 한곳에다 신발을 벗어두고 그 유명한 파묵깔레의 석회봉엘 들어섰다. 발 아래의 바위가 약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 눈앞에 펼쳐진 눈(雪) 세상!!! 이 모든 것이 눈이 아니라 흰 석회란다. 계단식 논 모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온천수가 흐르는 도랑에 발을 담그고 일행 모두가 전깃줄에 앉은 참새마냥 일렬로 앉아 흐르는 따뜻한 온천수에 담근 발의 느낌을 즐겼다. ◦ 우리 일행은 신발만 벗었지만 서양 백인들은 모두들 수영복 차림이다. 노천 온천이니 수영복을 입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 노천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을 찍고 또 찍었다. 집에 와 사진을 보니 그것 또한 작품이었다. ◦ 온천수의 수온은 37-38℃. 뜨겁지 않았다. ◦ 신발을 찾아 신고 반대편엘 가니 더 장관이 펼쳐졌다. 계단식 논 모양이 더 크고 더 많이 형성되어 있었다. 세상에!!! 분명 신의 작품이었다. ◦ 파묵깔레를 뒤로하고 내려오니 바로 앞에 의복 매장이 있어서 들렀다. 눈 화장을 시꺼멓게 한 이쁜 아가씨가 애교가 철철 넘치게 부리며 일행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한 가지도 사지 않았다. 미안, 죄송... ◦ 터키의 중요 산업 : 면화 재배와 양 가죽 제품 수출 ◦ 우리는 길이가 1,000Km나 되는 「타우르스산맥」을 넘어간다. 터키의 남부를 동서로 뻗은 이 산맥은 우리나라로 치면 백두대간과 같다.
◦이 동굴은 안탈리아로 가는 길가에 있는 아주 작은 동굴로 일부러 찾아오기에는 너무나 작은 동굴임 ◦ 동굴 안에는 파묵깔레 처럼 계단식 논 같은 석회가 만든 층층이 있었다 ◦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깥에서 인공으로 물을 끌어들여 폭포를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 동굴이라 참 웃기는 관광지도 있구나 싶었다. ◦ 이 동굴 옆에서 동굴보다 더 신기한 장면을 보았다. 작은 연못이 있는데 사람이 다가가자 난데없이 거북들이 수십 마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 아마 여기를 찾은 관광객들이 거북이에게 먹이기를 준 모양. 우리에게는 거북이에게 줄 아무 것도 없어 미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 여기 동굴 근방에는 석재공장이 많았는데 거의 다가 대리석 가공 공장이란다. ◦ 자기 소유의 산에서 대리석이 발견 되면 커다란 횡재를 하는 것이란다. ◦ 터키에서는 산모가 출산일이 닥아오면 성인(聖人)의 묘지를 참배하는 풍습이 있음 ◦ 남자 아이가 7살이 되면 할례를 함. 성인식에 해당 ◦ 초등학교는 8년의 의무교육 실시 ◦ 중매결혼이 많음 ◦ 혼수로 남자는 집과 가구를 준비하고 여자는 침구와 입을 옷을 준비함 ◦ 결혼식 잔치는 3일 간 치름 ◦ 집의 굴뚝에 병을 세워 놓음 * 병이 1개이면 시집보낼 처녀가 1사람 있고 * 병이 두 개 세워져 있으면 시집보낼 처녀가 2사람 있다는 표시 * 작은 병이 세워져 있으면 - ‘시집보내기 아깝다.’ * 큰 병이 세워져 있으면 - ‘빨리 시집보내야 되겠다.’ ◦ 총각은 돌을 던져 굴뚝의 병을 깨뜨려야 선을 볼 수 있음 ◦ 처녀가 직접 만든 음식을 선 보러 온 총각에게 대접하는데 *총각이 맘에 들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국을 끓여 대접함 *총각이 맘에 들지 않으면 맹물에다 소금만 넣어 총각 대접함 ◦ 안탈리아로 가는 도중 어느 호텔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호텔 식당답게 메뉴도 다양하고 보기에는 좋았다. 그러나 음식이 우리들에게는 맞지 않았다. 역시 느끼한 게 흠. 그 식당에서 한국인이 식사를 함으로 환영한다는 표시로 우리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테이블 시작 지점에 꽂아두었는데 우리 지우림 회원이 태극기의 오류를 발견해 식당 관계자에게 왜 오류인지를 인식 시키고 시정을 요구했다. 오류인 점은 깃대를 건곤 쪽에 붙여야 되는데 이감 쪽으로 깃대가 가게 한 것. 오류에 대한 시정 여부는 알 길이 없음
◦ 터키의 남쪽 지중해 연안 최고의 휴양도시. 독일인과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 ◦ 인구 100만 명
◦ 상당히 큰 이 도시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경. ◦ 도시 초입에서 커다란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의 동상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터키인들은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를 존경해 거의 모든 도시에서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동상을 볼 수 있단다. ◦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의 뒤를 따라 상당히 먼 거리를 걸었다. 우리가 갈 목적지는 신시가지를 거쳐 구시가지를 관광하고 바닷가에 이르러 「안탈리아 유람선 관광」을 하기 위함이다. ◦ 구시가지의 입구에는 BC 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대리석 문인 하드리아누스의 문을 통과하여, AD 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성모 마리아를 위한 교회였다가 7세기 이후 모스크로 사용되었던 이울리 미나렛교회의 탑을 바라보며 계속 바닷가를 향하여 걸었다. ◦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 우리와 함께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커다란 개새끼 한 마리가 우리 일행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상당히 온순해 보이고 마치 주인 따르듯 계속 우리 일행의 다리를 스치듯 걸었다. 어디까지? 바닷가에서 우리가 유람선을 타기까지 따라 왔으니 아마 1.5Km는 따라왔을 거다. 왜, 무슨 개가? 먹이를 얻어먹으려고 주인 없는 떠돌이개가 관광객 뒤를 따라 온 것. 터키에는 이런 개가 많단다. 참 희한한 일도 다 봤지. ◦ 떠돌이 개와 고양이가 많은데 주민들이 이들에게 먹이를 잘 주고 官에서는 예방접종까지 맞춘단다. ◦ 우리나라에서 남의 아이를 “참 예쁘다”라고 하지 않고 “고놈 참 밉게 생겼다”라고 하듯이 터키에서도 자기의 귀여운 자녀를 “우리 못난이”라고 한단다. ◦ 유람선을 타기 전에 우리는 그 유명한 터키 아이스크림을 보았다. 쫄깃쫄깃한 터키의 아이스크림 돈두르마스(Dondurmasi), 양이나 염소의 젖 을 넣고 난초의 뿌리 가루, 과즙을 넣어 떡메 치듯이 계속해서 치대고 누르 며 반죽을 하면 아이스크림은 찰떡 같이 되어 흘러내리지 않는다. 우리 한국 말로 "쫀득쫀득한 아이스크림 사세요"라고 호객을 하는 아이스크 림 장수, 쇠막대 끝에 아이스크림을 달고 아가씨들이 아이스크림을 잡으려고 하면 쇠막대를 뺑글 돌려 잡을 수 없게 장난을 친다.
◦ 유람선 관광은 약 1시간. 아름다운 지중해 유람선 관광이다. 딴 여행사에선 30유로의 선택 관광이지만 우리에겐 포함 관광이다. ◦ 바다를 나서며 오른 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이는데 이 절벽이 안탈리아를 지키는 천혜의 요새 노릇을 했다고 한다.
◦ 절벽에는 인공 폭포가 있는데 유람선이 폭포 가까이 접근해 유람선에서 일하는 매우 잘 생긴 젊은이가 수영복 차림으로 폭포에 물맞이 쇼를 보여 주었다. 이 기록자가 그 젊은이에게 손짓으로 바다로 다이빙을 하라고 했는데 그건 예정에 없는 거라 할 수 없다는 몸짓을 보내 왔다. ㅋㅋㅋ......
◦ 바다에 나가 멀리서 보는 안탈리아는 매우 아름다웠다. 해변 가까이 지어진 예쁜 건물들도 유람하는 우리에겐 좋은 볼거리가 되어 주었다.
◦ 승선하여 40여 분이 지나자 매우 빠른 음악을 들려주며 아까 폭포에서 물맞이 하던 잘 생긴 총각이 우리 일행들에게 춤추기를 유도했다. 그 녀석 온몸을 흔들며 추어대는 춤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우리도 따라 한참을 신나게 흔들었다. 나중에는 키 잡이 청년까지 합세하여 군무를 추었는데 우리의 경리 책임자 신춘자 회원이 팁을 몇 닙 주는 것 같았다.
◦ 링 호텔(RING HOTEL) 체크 인 하다.
☼9월 27일☼
◦ 오늘은 9시간이나 버스를 타는 날이다. 우리 여행 중 가장 긴 시간이다.
◦ 오늘은 안탈리아에서 출발해 오부룩을 보고 콘야를 경유하여 카파도키아까지 가는 것. 서울과 부산을 왕복하는 거리다.
◦ 오부룩에 도착하기 전에 메마른 땅 외딴 곳에 있는 실크로드 상인들이 묵었다는 건물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무려 1,000Km나 되는 타우르스산맥을 넘어 온 터키 내외국인들로, 지리상으로 여기서 점심을 먹기에 적당한 지점인듯 많은 사람들로 식당은 꽉 차 있었다. 우리를 빼고 거의 다 서양 사람들이었다. 식단은 스프에 빵에 그저 그런 것. 후식으로 사과를 한 개씩 주어 달게 먹었다.
오부룩 한은 실크로드의 한 부분으로 대상들이 나타를 이끌고 지나가다가 묵은 곳이다.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내부는 보지 못하고 겉만 보았다.
오부룩 담수호는 호수의 크기는 작지만 깊이가 150m나 되는 민물 호수다. 최대 수심이 150m이나 된다니 놀랄 일. 이 호수가 생긴 것은 땅이 함몰되어 생긴 호수라는 설과 운석이 떨어져 패인 자리라는 설이 있으나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한다. 파란 호수와 파란 하늘이 어울려서 외로운 곳에 있는 호수가 더 외로워 보였다.
◦ 옆에 있는 매장에 들어가 실크로드 상인들처럼 휴식을 취했다. 터키홍차를 한 잔씩 들고.....
◦ 매장 안에 터키 명물인 물담뱃대가 있길래 물담뱃대를 물고 사진도 찍었다.
터키의 명물 물담배 피우기
❊ 오늘 날 터키의 중요 문제꺼리
◦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족, 유대인과 터키인이 단합하지 못하고 있다
◦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 13만 명 피살 사건으로 두 나라는 국경까지 폐쇄했다가 작년에 개방
◦ 과거의 역사 관계로 그리스 등 주변 국가와 사이가 안 좋음
◦ 쿠르드족이 4,000년 간 살았으나 성경 속의 「메디아」 이외에는 국가가 없음
‘쿠르드인에게는 친구는 없고 오직 山 만 있다.’ - 터키 동부의 산악지대에 거주하기 때문
◦ 역사적으로 나라간 힘의 균형을 이루는데 쿠르드족이 큰 역할을 함
◦ 터키 안에 사는 최대 부족이지만 방송에서 쿠르드어를 쓰지 못하게 함 - 지금은 허용
◦ 아르메니아인들은 손재주가 좋아 터키석 가공은 주로 아르메니아족이 해냄. *기능 우수
◦ 터키가 팔레스타인 구호물자를 수송 - 수 개월 전 이 비무장선을 이스라엘 군이 공격, 터키인 9명이 죽음 *터키 내에서 이스라엘 규탄. 이스라엘을 침략자로 단정
◦ 지금 터키에는 에르드와르 총리가 막강한 세력을 갖고 국민의 지지 굳음. 그러나 총리는 이슬람 색채가 강해 EU연합 가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
◦ 에르드와르 총리의 정부가 작년에 8.5%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 국민들이 신임함
◦ 올해 에르드와르 총리가 이웃 시리아를 방문했을 때 시리아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음
*이스라엘과 다툼이 잦은 시리아 편을 들고 미국에 대해 할 말을 다하는 에르드와르 총리를 아랍계 중동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고 열렬한 호응을 보내 앞으로 중동 아랍계의 맹주가 되지 않을가 전망함.
◦ 콘야에서는 별다른 관광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는 터키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이기에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콘야를 소개한다.
◦ 콘야는 평야지역으로 1시간을 달려도 산이 없음 ◦ 밀밭이 끝없이 이어져 콘야를 ‘터키의 젖가슴’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 사탕무도 재배하는데 사탕무로 설탕을 만든다. 옛날에 이곳에서는 설탕을 금과 같이 여긴 적도 있었다. ◦ 호박 농사 : 지금 보이는 들판에는 잎은 없고 누런 호박만 뒹굴고 있음. *호박을 농기계로 수확하고 분쇄하여 씨앗만 채취하는 장면 봄. 우리 눈엔 호박 농사를 짓는 목적이 호박씨 채취라니 신기함 ◦ 그 외 감자 농사, 살구 재배를 많이 한다. ◦ 터키인들은 자국에서 만든 와인을 좋아하는데 터키의 포도는 껍질이 두껍고 지주 없이 땅에 누워 자라는 포도가 많이 생산된다. ◦ 동굴이 많은데 와인을 저장하고 감자를 저장하는데 유용하게 사용 ◦ 기원 전 2,000년부터 사람들이 동굴 생활을 했다는 유적 있음 *동굴은 비바람 피하고, 전쟁 피하고, 로마군의 박해 피하는데 효과적임 ◦ 터키 안에 자연 호수가 450개, 인공 호수가 350개나 있는데 호수의 물을 끌어 농사에 이용 ◦ 콘야의 인구는 100만 명이나 살고 있는데 10년 안에 인구가 배로 늘어 난 도시 ◦ 종교(이슬람) 때문에 술 판매가 적음 ◦ 선출직 -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가? - 얼마나 이슬람 신도로 착실한가? ◦ 이들이 잘 말하는 “인샬라” 는 ‘신의 이름으로’라는 의미, ‘최선을 다한다 ’, ‘100% 책임을 다 한다’라는 의미 ◦ 이들은 곧장 ‘내일까지’란 약속을 잘 하는데 그 내일을 한 달로 봐야 한다. ‘내일 해 주겠다’ - 그대로 믿으면 안됨 ◦ 터키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 : 이스탄불에 1,000명 앙카라에 500명 ◦ 터키에서는 법적으로는 1부 1처제, 시골로 가면 일부 다처제 상존 ◦ 옛날 남자들이 전장에 나가 죽는 수가 많아 과부 구제책으로 1부 다처제가 생김. 동생이 형수와 사는 경우 많았다고 함 ◦ 지금도 중동 일부 국가에서는 일부 다처제 허용 ◦ 터키인들은 육포(肉脯)를 좋아하고 잘 만듬 ◦ 중동 국가의 이슬람인들이 돼지고기를 안 먹는 이유 1. 돼지는 느려서 유목민이 기를 수 없음(이동이 안됨) 2. 육포 불가능 3. 습한 곳에서 자라는 돼지는 건조한 기후에서 생육이 어려움 ◦ 이슬람 신자 : 지구상에 15억 명 ◦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이란 말은 미국인들이 만든 말 ◦ 한국에도 7만 명의 이슬람 교도가 있다고 함 ◦ 터키인들이 지금의 터키 땅에 정착한 것이 고작 500년 전, 그 전에는 유목 생활함 - 외인(外人) 만나면 반가와 하고 호기심으로 외지 사정 물음 ◦ 유목 민족 : 우유, 치즈, 요쿠르트, 양모 생산 농경 민족 : 땅에서 농산물 생산 ◦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방어의 역사 ◦ 음식물 전파 : 소주는 원나라에서 전함 - 안동과 제주도 : 육포, 요쿠르트, 버터 등 ◦ 터키인들 대화 문화가 발달 : 식사 중에 가족(자녀)과 대화 많이 함
카페트 매장에 들르다 ◦ 카페트를 직접 짜서 판매하는 매장에 들렀다. 카페트 짜는 일은 여자들이 하는데 그 여공들은 보통 가정 집 부인들로 집안일을 하다가 농한기라던가 여유 시간이 있으면 공장에 나와 카페트를 짠다고 했다. ◦ 여공의 눈앞에 방안지(方眼紙)에 그려진 카페트 도안이 있는데 그걸 직접 보고 실의 색을 바꾸기도 하고 짜기도 했다. 그 재주가 놀라왔다. ◦ 전시 판매를 하는 매장에 안내하여 여러 가지 문양의 제품을 보여 주는데 화장실 문 앞에 두는 발 닦는 것이 20만여 원이나 했다. 거실에 까는 건 다 몇 백만은 되었다. 일행 모두 보기만 하고 홍차만 얻어 마시고 나왔다.
◦ 이곳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호수의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호수다. 지금은 건기라서 눈에 보이는 호수 바닥이 전부 하얀 소금으로 뒤덮혀 있었다. 길이 80Km, 폭 20Km. ◦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소금 위를 걸었다. 희희낙락 웃으면서... 짝을 지어 사진도 찍고... ◦ 여기서도 우리 대한민국의 국력을 새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 관광객이 들르는지 호수 입구에 소금을 이용한 가공 제품을 선전하는 간판이 있었는데 맨 위에 한글, 두 번째 일본어로 제품 안내를 하고 있었다. 지구 반대 편 터키에서 한글을 보니 감개무량!!! ◦ 동굴 호텔 「아크욜 AKYOL HOTEL」에 체크 인 ◦ 가방을 객실로 옮겨 놓고 벨리댄스를 보러 나섰다.
◦ 공연장 입구는 마치 창고의 입구 같이 허술했으나 공연장 안은 잘 꾸며져 있었다. 중앙이 무대이고 관람석은 방사선형으로 배치하여 어느 자리에서나 잘 보이게 배치되었다. ◦ 우리 자리는 미리 예약이 되어 있어서 자리에 앉았다. 미리 빈 접시와 빈 글라스, 그리고 사과와 밀감과 과자 등이 차려져 있었다. 자리에 앉자 터키 술과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데) 앞앞에 놓인 큰 빈 접시에 음식을 날라다 줬다. 맥주는 무한 리필이라서 기록자가 사람 수대로 21컵을 주문했더니 참 한심하게도 너도 나도 맥주를 안 먹겠단다. 나이가 주량을 말하는가 봐!!! 퇴장할 때 보니까 1/3은 남겨서 좀 부끄러웠다. ◦ 공연은 앞부분은 터키 민속 공연이고 뒷부분에 밸리댄스를 추었다. 앞부분에서 밸리댄스를 추니까 한국과 일본 관광객들이 밸리댄스만 보고 중도에 거의 다 퇴장을 해 공연 분위기를 망치기에 밸리댄스를 뒷부분으로 옮겼단다. ◦ 공연 내용은 전형적인 터키 민속춤으로 빠른 템포로 상반신은 움직이지 않고 발을 빠르게 움직이는 군무(群舞)를 보여 주었고, 정지 동작에서는 치마가 보통이지만 빙글빙글 돌면 제법 두껍고 화려한 치마가 우산처럼 펼쳐지는 춤, 그리고 하렘에서 금방 나온듯한 화려한 옷차림에 머리에 금빛 나는 장식을 한 무희들의 춤도 보여 주었다. 끝부분에 가서야 두 프로 정도를 배꼽춤을 보여 주었다. 빠르게 엉덩이를 돌리는 장면은 TV 등에서 가끔 보아왔기에 그리 신기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터키 현지에서 오리지널 밸리댄스를 보았다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나 할까?
☼9월 28일☼
◦ ‘좋은 말이 나는 땅’이란 의미 ◦ 동굴 호텔 「아크욜 AKYOL HOTEL」에 투숙하다 ◦ 이 동굴호텔은 언덕을 깎아 굴을 파고 객실을 넣은 이상한 호텔인데 객실료가 보통 호텔보다 비쌌다. 여행사에서도 이걸 들어 특이한 상품이라 선전을 했다. ◦ 카파토키아는 우리나라 배낭 여행자들이 2박 3일 코스로 호응을 하고 많이 찾는 곳
◦ 터키 여행에서 우리가 이용한 상품에서 유일한 선택 관광 상품인 열기구를 일행 13명이 탔다. 상품 대금은 유로화로 170유로, 한화로 환산하면 27-8만원이나 하는 고가 상품이다. 평소 타기 어려운 열기구로 카파토키아 상공을 날아본다는 것도 매우 뜻 깊은 경험이라 하겠다. ◦ 열기구(벌룬)를 탄 일행 신영호 내외, 천세창 내외, 이평직, 김경자, 김덕자, 김정여, 김정자, 신춘자, 광주 박용희씨 내외
◦ 여행사에서 준 일정표에는 「하멜 계곡」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우리의 가이드 김명식씨가 말하기를 「하멜 계곡」은 속칭이고 정식 명칭은 「베르벤트 계곡」이란다. 여행에서 귀국하여 LOTTE JTB에다 오류를 정정하라고 일러 주었다. 아마 낙타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낙타를 의미하는 「하멜」이란 속칭이 붙은 모양이다. ◦ 낙타 모양으로 생긴 바위 등 신기한 바위들이 연속된 계곡이다. 차에서 내려 사진 몇 장 찍고 이동했다.
◦ 원뿔 모양의 바위가 연이어 있다. 마치 죽순처럼.... 색깔은 갈색. 이런 바위가 있는 마을이 괴뢰메 마을이고 이런 바위들만 가득한 골짜기가 괴뢰메 골짜기다. 원뿔 모양의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사람이 살기도 하고 수도사들의 수도 도장이기도 하단다. ◦ 괴뢰메 골짜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올라 골짜기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터키 홍차도 마시며 쉬었다. 여기서도 그 유명한 터키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는데 안탈리아 해변에서도 못 먹어 보고 여기서도 흥정은 잔뜩 해놓고 비싸다고 홍차로 돌려 맛보지 못해 못내 서운했다. 아이, 터키 아이스크림 먹어 봤으면.... ◦ 괴뢰메 마을에는 365개의 교회나 수도처가 있음 ◦ 성 바실 : AD369년에 이곳에서 태어난 성인(聖人) *수행을 하고 자선 사업을 많이 함. 정통 크리스찬 *황제의 박해도 굴복하지 않아 성인으로 추대됨 ◦ 배낭 여행자들이 많이 묵고 이들이 오토바이를 대여해 부근 여행을 함 ◦ 여기 매점에서 한글로 된 「카파도키아-역사의 요람」이란 책이 10유로라는데 깎아서 8유로에 샀다. 잔돈 2유로 대신 땅콩 1봉지를 받아 일행에게 나눠 줬더니 너도 나도 책을 사 땅콩 풍년이 되었다.
◦ 웃츠히사르는 ‘비둘기집’이라고도 한다. 괴뢰메 골짜기에서 3Km 떨어진 곳에 웃츠히사르 성채가 있다. 괴뢰메 골짜기와 같이 온통 응회암으로 덮혀있던 곳인데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방어를 목적으로 굴을 파고 살았으나 바위들이 부식되어 오늘과 같은 비둘기집처럼 되었단다.
◦ 이곳이 영화 「스타워즈」를 촬영한 곳이라 한다. 이곳의 사진과 합성해 장면 연출
파샤바(버섯마을)계곡
◦ 괴뢰메의 파노라마를 지나서..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가 보니 텔레비젼에서만 보았던 그리고 스머프 마을의 모티브를 여기서 얻었다던 곳! 바로 카파도키아 파샤바 지구(地區)란다! 바위의 모양이 꼭 버섯 같기도 하고 참 신기한 파샤바 지구, 바위 중간중간에 난 구멍에서 수도사들이 피신해서 살았다고 한단다. 참 안쓰러운 일, 버섯 모양의 암석들이 너무 신기했다. 정말 버섯 같았다. 이게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니, 더더욱 신기했다. ◦ 첫 머리에서 감탄을 했는데 들어가서 오른 쪽 가파르고 미끄러운 언덕을 기다싶이 올라가자 거기에는 더 많은 버섯(?)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정말 신의 조화로다!!! ◦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250만 년-1만 년 사이에 터진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쌓인 위에 용암이 덮혀, 무른 화산재는 더 깎기고 단단한 용암은 덜 깎기어 버섯 모양이 되었단다.
◦ 이곳에서 실제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독교 박해를 피해 250년간 살아단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햇빛을 보지 못해 팔 다리 기형아가 탄생하기도 했단다. 250년!!! 30년을 1대로 보면 8대가 이 지하 도시에서 일생을 보낸 것, 어떤 사람을 평생 해를 보지 못하고 태어나 죽은 이도 있었단다. 우리의 친구 권오기 장로가 내 뱉은 한마디.... "예수가 뭐길래..."
*로마의 '카타콤베'는 지하 묘지이고 이곳은 사람이 기독교 박해를 피해 의도적으로 건설해 실제로 사람이 살있던 지하도시이다.
터키석 매장에 들르다 ◦ 의무적으로 들러야 하는 여러 매장 중 하나인 터키석 매장에 들렀다. 코가 높고 가슴 볼륨이 대단한 아가씨가 우리를 맞았다.
◦ 터키, 파키스탄, 중국 등지에서 많이 산출되는 보석
◦ 터키에서는 손재주 좋은 아르메니아인들의 세공으로 만들어짐
◦ 터키석이 파란색을 띤 보석이란 사실까지 처음 안 기록자는 그리 비싸지 않아서 妻에게 U$100짜리 목걸이를 하나 선물했더니 여자 일행들이 처에게 ‘시집 잘 왔다’고 추겨 세웠다. 무척 쑥스러웠다. 나 말고도 몇몇이 터키석을 산 모양....
◦ 매장에서 나와 매장 마당에서 또 한 번 권오기 회원의 리드에 맞춰 ‘맷돌체조’를 하여 이를 본 터키인들을 놀라게 했다. 고개와 허리를 숙여 심호흡으로 들이 쉰 다음 허리를 꺾으며 내지르는 “합” 소리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따르르르르”를 할 때는 우리도 우습지만 주위의 시선을 모두 모으게 하고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맷돌체조 만세!!!
「맷돌체조」세계화하다
항아리 케밥으로 점심 식사하다
◦ 말로만 들어 온 ‘항아리 케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다. 건장한 종업원 두 사람이 작은 식당용 수레에 항아리를 싣고 와 우리 일해 중 경기도 광주에서 온 분의 부인이 앞으로 나가 우리나라 떡시루 밀봉 하듯 밀가루로 밀봉한 것을 제거하고 항아리에 담긴 음식을 네모난 용기에 부었다.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고 실제로 맛도 우리 식성에 맞았다. ◦ 타원형의 용기(우리나라 옹기 초벌구이 한 듯 불그스레한 옹기)에 양고기와 여러 가지 야채와 양념을 넣은 후 우리나라 오리구이 하듯 항아리 채 구워낸 음식이다.
◦ 터키의 인기 스포츠 : 축구
*영국의 홀리건이 축구 관람하러 왔다가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초상이 든 화폐로 축구장 의자를 닦자 이를 본 케밥 식당 주인이 칼로 찔러 유럽컵 터키 개최 취소한 일 있음
◦ 터키탕 본래의 모습 : 샤워하고 맛사지하고 차 마심
*이것을 일본이 본 따서 여자가 맛사지, 퇴폐적으로 변질함
*일본의 ‘터키탕’을 한국이 본 따옴 - 터키 정부에서 터키탕 본래의 모습을 변질 시킨 「터키탕」 명칭을 쓰지 말라는 요청으로 한국에서 「터키탕」이 없어짐
◦ 터키의 수도이자 터키 제3의 도시로 정치, 경제, 행정의 중심지
◦ 남아있는 유적지 없음
◦ 인구는 400만 명
◦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ATATURK)의 묘소가 있음
◦ 앙카라 시내에 「한국공원」이 있는데 우리가 이 앞을 밤에 지나감. 밤에는 공원의 문을 잠가서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버스에서 내려 철책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기만 함. 공원 안에서 커다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철책에는 태극기와 터키 국기 문양이 선명히 보이게 장식 되어 있었다. 그리고 탑 모양의 조형물이 있었는데 이는 충혼탑이라 했다. ◦ ROYAL CARINE HOTEL에 투숙
☼9월 29일☼
◦ 앙카라 ↔ 이스탄불 : 400Km로 5-6시간 소요
◦ 터키의 학제 : 8년의 의무교육
*초등 5년, 중학교 3년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교하는 학생들 : 시골 초등학생까지 교복을 입음
*국가에서 교복 입도록 통제하지는 않지만 대개 교복 입음
◦ 고등학교 - 실업고등
- 공업고등
- 인문고등
*직업학교가 많음
◦ 대학은 국립이 많음. 학비가 거의 무료이고 장학금 제도 완비, 기숙사가 많음
*100%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가 많음
*1-4학년 : 실무교육을 많이 함.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실무에 임할 수 있음
◦ 의원 내각제이고 대통령은 얼굴 마담 역할이나 하고 실제로는 수상이 통치
◦ 대통령과 총리의 임기는 4년이고 국민 직선 투표로 선출
◦ 군 입대
*고졸 이하는 15개월 간 복무
*대졸 - 15개월 간 사병으로 복무하는 것과
- 3년을 장교로 복무하는 것 중 택일
*1512유로(한화로 7,000만원 정도)를 내면 기초군사훈련만 하고 군 면제
◦ 군대 안 갔다 오면 친구들에게 놀림 당함
◦ 군 복무 지역
*위험지역 - 돈 없고 빽 없는 집 자녀
*안전지역 - 유력 인사 자녀
◦ 시내버스 안에서 노인들에게 자리 양보하는 게 필수
- 안하면 모두 눈길(눈총) 보냄
◦ 출발지였던 이스탄불에서 서쪽으로, 그리고 서쪽 해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중부를 거쳐 다시 이스탄불로 되돌아 왔다. ◦ 보스포러스 해협 위에 걸린 현수교(懸垂橋)인 제1대교를 건너 이스탄불 시가지를 눈으로 구경하며 들어갔다. 전체적인 인상은 ‘복잡하다’였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 그리 넓지 않은 길에는 왠 차들이 그리 많은지.... 교통 지옥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도시다. 여기가 터키라는 걸 느끼게 하는 것은 거대한 모스크에 치솟은 첨탑이다. 크고 높아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이슬람 사원이다. ◦ 이스탄불 관광은 걷는 투어가 많단다. 그리고 유적지가 많은 것도 이스탄불 관광의 특징이다. ◦ 로마 문화 → 비잔티움 문화 → 오스만터키 문화 *비잔틴 = 동로마 ◦ 토인비가 말하길 이스탄불은 ‘운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라 했다. ◦ 1500년 전에 쌓은 성벽이 우리가 묵은 호텔(CITY WALL HOTEL)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 십자군 전쟁 시 로마를 출발한 십자군이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을 지나 출정 *십자군 전쟁은 1095년에 시작하여 1270년까지 175년 간 지속됨 *당시 ‘성지 순례를 하면 죄를 사하노라’라는 로마 교황청의 발표로 성지 순례자가 많았다 *이슬람 세력인 셀주크투르크족이 성지인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크리스트교 순례자를 박해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 황제는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자원하여 모인 110만 명에 이르는 십자군이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출정하게 되엇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 - 십자군은 전쟁에서는 패했지만
① 교황과 봉건 영주(기사)의 세력은 약화된 반면, 왕권이 강화되었다.
② 도시와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③ 유럽인의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다.
◦ 터키인들의 이상한 행동, 턱을 올리면서 혀를 찬다. 이는
‘안한다’ 또는 ‘안먹는다’ 등 부정을 표현하는 방법
◦ 흑해(黑海) : 흑해는 바람이 많이 불어 늘상 풍랑이 심해 배를 타고 고기잡이 나간 어부의 아내는 ‘남편이 사고를 당할가 봐 가슴이 새까맣게(黑) 탄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 「닥터 피쉬」라는 물고기 : 온천지대의 따듯한 물에서만 서식하고 욕객의 피부 각질을 뜯어 먹는 물고기로 무좀이나 건선, 아토피 피부병 환자의 환부를 쪼아 피부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에서는 이 물고기의 외국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
◦ 1999년 터키 대지진 : 진도 7.6으로 전후 20Cm, 상하 80Cm 진동한 지진
*지진 전에 지은 건물들은 벽돌 강도가 낮았고, 철근도 규격 미달 제품을 썼으므로 화를 키움
*지금은 엄격한 내진 설계를 하여 시공
*지진 후 연 평균 7%의 고속 성장 지속
◦ 터키에 있는 현대자동차 공장 - 연간 10만대 생산
*종업원들 : 세계 유수의 공장에서 근무하는데 대해 자부심 느낌
◦ 난방 - 라지에터를 사용하여 더운 물로 공기 난방. 겨울에는 갈탄을 때서 난방
◦ 가정집에서는 샹들리에 조명을 좋아함
◦ 집안 바닥은 모두 카페트 깔아 놓음
◦ 단독 주택은 거의 없고 6-7층의 다가구 주택이 많음
◦ 집은 구입 하던가 월세로 삼 - 전세 제도가 없음
*월세 : 보증금으로 월세 2개월 치를 내고 월세 100만 원 등
◦ 집은 재산이 아니라 ‘거주’의 개념
◦ 물가가 비싸서 경제면에서 효율적인 대가족제도 선호함
◦ 자동차를 많이 가짐. 이스탄불 시내에는 1000만 대의 자동차가 있음
◦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늘어나자 결혼 연령 높아짐
*자녀가 보통 2-3명이지만 차츰 1명의 자녀 가지는 경향 늘어 남
◦ 매 맞는 남성이 늘어 남
◦ 식당에서 써빙은 남자가 하고 여성은 주방 일 봄.
*우리가 9일 간 여행하는 동안 식당에서 여자를 본 일이 없었다. 아직은 이슬람 전통으로 여자가 바깥일을 하는 것을 경계하는 풍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짐작이 감
◦ 가정에서도 여자가 음식 만들고 남자는 날라다가 식탁에 차리는 게 보편적임
◦ 담배에 대해 사회가 관대한 편임. 그러나 공공 장소나 공항에서는 금연.
*父子가 한자리에서 담배를 피움
*가끔 중학생이 가이드에게 ‘담배 1가치 달라’고 해 황당해 한 경우 있음
◦ 터키인들의 평균 수명 - 68세
◦ 할례는 여자는 하지 않고 남자만 함
◦ 가정 생활 : 한국과 거의 비슷
◦ 이스탄불의 도시 구조 : 아시아 지역 - 거주 지역 유럽 지역 - 일터
◦ 보스포러스 제1대교 : 길이 1Km, 높이 63m.
*연말에 불꽃놀이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임
*건설 당시에는 걸어서 건너도록 허용 했으나 자살자가 너무 많아 지금은 걸어 통행하는 걸 불허
◦ 이스탄불시의 넓이 - 서울의 3배
☼9월 29일☼
◦ 오늘의 모든 일정은 모두 이스탄불 시내에서 이루어진다. 길게 타던 버스 투어가 없어서 좋으나 막힌 이스탄불 시내를 다니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
◦ 보스포러스 크루즈는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좁은 바다, 해협 유람선 관광이다. 유람선을 타고 1시간여를 달리며 아름다운 이스탄불을 관광 하는 것. 맑은 지중해, 푸른 하늘, 옛 도시와 어울린 그림엽서 속에 빠져들었다.
◦ 일행 남자들은 전망이 좋은 탁 트인 2층에서, 여자들은 모두 1층 선실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가며 유람을 했다. 2층에서도 1층에서 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스피커를 통해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 와!!! 좋다.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썩 어울린다. 깨끗한 양안(兩岸)의 건물들.... 완전 그림이다. 바닷가에 정박하고 있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배들도 좋은 그림을 그리는데 한 수 더 보탰다. 그림 같은 집과 수목들도 아름답다.
◦ 흑해 쪽으로 가서 제1대교 밑을 지나 제2대교까지 올라가 되돌아오는 코스다. 긴 현수교를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보다가 바로 밑을 지나는 기분도 아주 좋았다.
◦ 가는 길 왼편에는 「돌마바르체 궁전」이 보이고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블루모스크」까지 시야를 돋보이게 했다. 들었는데도 이름은 모르는 대학교 건물, 성채 요새...
◦ 우리 곁을 흑해에서 나오는 초대형 화물선이 2척이나 지나갔다. 선체의 길이만도 어림으로 200m는 되는 것 같다. 보스포러스 해협이 물류 이동에 커다란 몫을 함을 체감했다.
◦ 터키 관광에서 가장 먼저 꼽히는, 그리고 이스탄불에서 꼭 찾는 곳이 소피아 성당이다. 그리스도교 성당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다시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바뀌어 온 역사의 현장을 찾았다.
◦ 우리나라의 모든 사찰이 어제 지은 듯 화강암으로 온갖 치장을 하고 단청으로 완전 새 건물로 만들어 전국 사찰이 다 똑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고 옛스러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비해 여기 소피아 대성당은 고색창연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 1500년의 역사가 말하듯 중앙에 기둥 하나 없는데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당시에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불가사이한 일이다.
◦ 횟칠한 걸 벗기자 예수와 마리아의 벽화가 나온 것이 정말 감탄스러웠다.
◦ 소피아 대성당을 보고 15분 정도 걸어서 찾은 곳이 그랜드바자르다. 시장의 중앙에 큰 통로가 있고 양 옆으로 5,000개나 되는 점포들이 온갖 상품들을 진열해 놓고 팔고 있었다. 주변의 성점을 합하면 1만 개나 된단다.
◦이곳은 쇼핑을 하기 위해 찾는다기보다 하나의 관광지를 찾는다는 생각으로 둘러보라는 가이드의 말에 따라 주어진 시간 안에 골목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정말 많은 가게와 함께 많은 종류의 상품을 팔고 있었다. 각종 금·은·동 세공품, 장식품, 보석류, 카펫, 공예품, 가죽제품, 도자기, 토산품 등 각종 제품들을 취급하고 있다.
◦ 기록자는 작은 물담뱃대 1개를 샀다,. 그리 색깔이 요란한 볼펜도 3자루 샀다.
◦ 우리가 ‘TAXY’로 쓰는데 터키에서는 ‘TAKSI’로 표기하더라!!!
◦ 터키 여행 중 단 한번 「고려정」이란 식당에서 한식으로 오늘 저녁 식사를 했다. 한국에서라면 아무 특징 없는 식단이었지만 꿀맛이었다. 우리 입에는 역시 한식이 최고.
◦ 시티 월 호텔(CITY WALL HOTEL)에 체크 인
☼9월 30일☼
◦ 터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 가방을 호텔 로비에 두고 널찍한 호텔 마당에서 이것도 마지막, 맷돌체조를 했다.
◦ 우리가 묵은 시티 월 호텔(CITY WALL HOTEL)에서 몇 걸음 안가 모퉁이를 돌아가자 성벽이 나타났다. 우리의 호텔 이름도 이 성벽 이름에서 따온 것.
◦ 호텔을 출발해 한참을 이 성벽을 따라 움직였다. 이 성벽이 이스탄불을 지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단다. 그러나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는 법, 이 성벽이 무너지자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다.
◦ 둘레가 14Km이고 4각형 성탑으로 정면 방어용
◦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에 해자(垓字)를 둔 철옹성이어서 외침에 끄떡도 없었음
예쁜 터키 아가씨 둘을 혼자 차지한 천세창 회원
◦ 이스탄불 전경이 바라보이는 피에르롯티 언덕에서 차 한잔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 산 아래에서 곤도라를 타고 올라갔다. ◦ 이곳의 카페테리아는 주변 경관이 아름답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롯티가 표현 한대로 유리바다에 구르듯 빠르게 움직이는 크고 작은 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석양의 황금빛으로 물든 골든 혼의 모습은 가슴 벅차기까지 하다. 왠지 신비스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곳에 앉아 마시는 차 한잔은 독특하기만 하다. ◦ 이곳은 이스탄불의 공원묘지다. 그런데 터키 사람들은 우리처럼 묘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아기엄마 혼자서 유모차를 끌고서 공동묘지인 피에르롯띠 언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가롭게 산책을 한다. 이들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마을 안에 무덤과 주택을 마련하고 함께 그 공간을 이용한다. ◦찻값이 여행 경비에 포함되었기에 우리는 느긋이 홍차를 앞에 두고 아름다운 보스포러스 해협을 내려다보았다. 해협을 통과하는 배들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원경으로 보스포러스를 넣어 사진도 찍고 근경으로 찻집 탁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귀국해서 사진을 보니 낭만적인 분위기가 그저 그만....
◦ 방이 243개난 되고 건축비가 5,000억 원이나 들어간 대단한 궁전이다. ◦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 지었다니 지은 목적이 호화로운 궁전을 짓고자 함이다. ◦ 이 궁전을 짓기 위해 과도하게 국력을 낭비해 오스만터키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니 아이러니.... ◦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ATATURK)가 살았던 궁전으로 아타투르크가 이곳에서 9:05에 서거해서 지금도 09:05를 가리키며 멎어 있는 시계가 궁전 안에 걸려 있다. ◦ 여름에만 사용하도록 만든 「여름궁전」으로 난방 시설이 없다. ◦ 바닷가를 매립하여 지었기에 석재를 사용하면 침하하여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둥은 속은 나무로 하고 나무의 겉만 대리석으로 입혀 장식함 ◦ 세계에서 5번째로 크고 호화로운 무게가 4.5톤이나 나가는 샹데리아가 있고 값진 도자기와 호화로운 집기들로 가득하다. ◦ 커다란 홀은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 내부의 어떤 유물도 만지지 말 것. 전시물은 모두 실제로 사용하던 것
◦ 궁전 앞에서 마침 임무교대를 한 병사들이 지나가는 장면과 맞닥뜨렸다. 병사 한 명이 부동자세로 근무하고 있는 장면은 마치 마네킹 같았다. 특히 단도(短刀)를 허리 뒤에서 잡고 있는 자세가 특이했다. ◦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서야 하고 관람을 마치고 나간 인원만큼만 들여보내 긴 줄을 오래 동안 섰다. ◦ 정원도 매우 아름답게 꾸며 놓아 사진을 여러 컷 찍었으나 궁전 내부는 사진 촬영을 못하게 해 벗님들께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도네르 케밥으로 점심식사하다 ◦ 구운 닭고기를 곁드린 도네르 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접시에 구운 닭고기와 야채 썬 것, 그리고 밥을 담아낸 케밥 식사를 햇다. 터키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양고기와 쇠고기, 닭고기 요리가 많이 나왔는데 우리는 닭고기 요리를 여러 번 먹었다. 느끼한 것이 많았는데 여기 것은 괞찮았다. *어제는 쇠고기를 구어서 만든 「아데나 케밥」을 먹었다.
라이브 인 리더(LIVE IN LEATHER)에 들르다
◦ 한국인이 경영하는 선물 용품 매장 「LIVE IN LEATHER」에 들렀다. 장미기름, 올리브유, 가방, 혁대 등등 선물 용품을 파는 매장에 들렀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매장이라 많이들 구입했다. ◦ 시식용으로 터키 떡이라고 주는데 여러 개 집어 먹었다. 떡이라기 보다 과자에 가까웠다. 크기와 모양은 밀크캬라멜 비슷. ◦ 여기서 산 물건은 이 가게에 맡겨 놓고 걸어서 「톱카프 궁전」을 관광 하고 찾아가기로 하고 가게를 나섰다.
◦ 여기서도 수비하는 군인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긴하나 돌마바흐체 처럼 엄격하지 않은듯 했다. ◦ 마침 보석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관람했는데 보석들의 가치가 엄청나 보였다. ◦ 내부에 있는 역사적 전시물들을 보긴 했는데 기억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 ◦ 관람을 하고 궁전의 뒤로 가니 보스포러스 해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바람도 쏘이고 사진도 찍고 쉬기도 하고... ◦ 일행이 다 오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만 오면 다 온 거야!”라고 할 정도로 늘상 뒤처지는 친구가 있어서....
◦ 술탄아흐메트 사원(블루 모스크) 바로 앞에 있는 광장으로 로마시대 대경기장 유적이다. 서기 203년 이곳에서 전차경주가 최초로 열렸다고 하며 당시에는 세계의 각 지역에서 가져온 기둥, 조각상, 오벨리스크 등이 이곳에서 전시되었다고 전해진다.
◦ 지금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들었다는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479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들여온 뱀 머리의 오벨리스크, 940년 콘스탄티누스 7세가 만든 콘스탄티누플 오벨리크가 남아 있다.
◦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에서 만들었다는 그 거대한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를 당시 어떻게 여기까지 옮겼으며 또 그 거대한 석조물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지 불가사이한 일이다.
◦ 이 사원에 입장해 기도를 하기 위해선 먼저 발을 씻어야 하는데, 마침 우리가 방문할 때가 곧 기도 시간이 닦아 오기에 사원 밖에서 수도에서 발을 씻는 장면을 목격했다. 발 씻는 청년의 양해를 구하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수도와 앉을 자리가 20여 개나 되었다. ◦ 천정 돔 내부를 푸른 색 타일로 꾸며서 블루 모스크라고 하나 정식 명칭 은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란다. 밖에서 본 전체 모습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돔이 어울려서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어서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 블루 모스크의 정면에서 우리 일행들 전체 사진을 찍었는데 어디서 갑자 기 또 개새끼 한 마리가 사진 화면 중앙에 떠억 들어와 찍혔다. 참 기가 막 히고 코가 막힌다!!! ㅋ ㅋ ㅋ .....
◦ 여자들이 쓴 히잡 : 그 질이 천차만별
*부자집 여자들은 고급 실크 제품을 쓰고
*가난한 집 여자들은 면제품을 씀
◦ 동방정교의 대주교가 이스탄불에 있는데 이 분이 이슬람의 수장(首長)
◦ 러시아 정교와 아르메니아 정교의 뿌리는 동방정교
◦ 이슬람 사원의 창에는 모두 굵은 철망 씌움
- 도둑 예방
- 집시들이 밤에 몰래 들어가 자는 것 방지
모든 여행 일정 마치고 공항으로...
◦ 21:20에 KE956편으로 이스탄불 출발하여 인천으로
☼10월 1일☼
◦ 10:40 예정보다 20분 빨리 인천공항 도착 그리고 해산(解散)
◦ 작은 사고 하나도, 아픈 사람도 하나 없이 여행을 마치게 됨을 큰 손뼉으로 축하드립니다.
유익하고 보람 있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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