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으로 본 수필의 단계적 층위
- 욕망의 구조와 양상을 중심으로 -
권대근
문학비평가, 문학박사
I. 들어가며
라캉은 프로이드의 이론에 소쉬르의 언어학을 접목시킴으로써,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계승하여 한 단계 발전시킨 라캉의 언어에 대한 통찰은 프로이트의 시각보다 한층 깊고 예리하게 ‘무의식’에 접근하게 해주었다. 마음도 언어처럼 구조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라캉 이론의 핵심이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꿈꾼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듯, 문학작품에 대한 프로이트의 분석이 작품보다는 작가 개인의 심리에 비중을 두었다면, 라캉은 ‘문학 작품’ 자체에 시각을 고정시킴으로써 ‘언어’에 집중하였다고 하겠다. 라캉이론의 수필단계론과의 접맥 가능성은 여기서 출발한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의식과 무의식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라캉은 해석을 다르게 하였다. 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의식 세계에서 서로 소통하는 방법은 언어에 의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에 있는 펜을 독자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그 펜을 직접 들고 와서 보여주는 것이 펜을 정확하게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외연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펜’이라는 언어로 표현한다. 상대방은 실재로 펜을 보지 않아도 펜의 실물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언어란 소통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언어의 법칙, 즉 문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실재의 대상물로 소통되는 것이 아니고, 언어라는 상징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음도 언어에 맞추어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런 차원에서 라캉이론은 서정시학인 수필과 관련성을 갖는다.
언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의식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이 세상에는 산도, 나무도, 물도, 하늘도, 집도 , 새도 있다. 언어가 만들어낸 질서와 일관성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는 그 사물이 아니고, 그 사물을 대신하여 기호로 나타내는 대용물일 뿐이다. 우리의 삶도 어떤 대상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상상과 관념을 투사하여 보는 경향이 많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꿈이 없으면, 얻으려는 대상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을 잡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난다. 그러나 욕망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와 보여지는 나를 인식한다면 행복한 수필적 삶이 되지 않을까. 의식의 세계에 질서를 주는 것은 실물이 아니고 바로 언어다. 즉 언어는 실재를 상징으로 대체한 것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이론으로서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도입했다. 이 이론은 정신분석 이론으로 쓰이지만 문학이론으로도 접목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수필가의 의식구조 및 수필의 질적 수준도 욕망의 구조와 양상에 따라 삼단계라는 계층적 층위를 가진다고 하겠다.
II. 펼치며
A. 자크 라캉에 대하여
그는 1901년 프랑스 도매상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부장적인 할아버지가 그의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할아버지는 그의 연약한 아버지를 짓눌렀다. 그는 네 아이 중의 장남으로서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였다. 성격적으로 보면, 관계가 단절되어 회복할 수 없으면 앙심을 품음으로써 나르시스적인 취약성을 보였으며, 편집증 환자라는 말을 들었고, 과장적 자아, 나르시시즘적 성격장애를 보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일찍이 소쉬르의 탁월성을 깨닫고 언어학과 기호학적 통찰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프로이트 이론을 재정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전후의 소쉬르와 프로이트를 극적으로 개조하며, 라캉은 프로이트의 텍스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노선에 따라 수정한다. 특히 그는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었다’라는 이론과 ‘꿈작업(dream work)은 기표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런 놀라운 통찰이 뜻하는 바를 세심히 밝히는 가운데 라캉은 현대 정신분석학을 태동시켰으며 기호학의 제2주자로 부상된다.
B. 언어와 무의식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알다시피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의 경험이 무의식 속에서 발견해낸 것은 언어의 구조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실의 모든 효과는 정신과 아무 상관없이 문자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정신의 허세가 사라지게 되었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살펴보면 모든 면에서 문자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 담론이나 텍스트 구조 속에서 또는 관용어법 속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소쉬르가 분명히 한 것처럼, 언어의 구조는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개인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규약으로서, 객관적 구조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기호들을 조직해내는 고유한 규칙에 의해서이며, 이러한 규칙을 우리는 흔히 언어구조라고 부른다. 여기서 언어가 발화주체에게 봉사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기능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구조는 각각의 주체가 그 정신적 발전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용하려는 어떠한 개인도 그 기호들이 조직되는 그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기호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언어적인 규칙들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발화하는 주체는 언어의 노예로 나타나고, 나아가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이름(기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표를 조직해내는 언어구조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한 언어적인 구조에, 즉 기표를 조직해내는 규칙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기표들은 주체를 복속시키는 물질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표들의 구조가 주체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물질적인 힘을 그는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여기서 ‘물질성’이란 말이 실증주의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관념들과 달리 다양한 개인들에 대해 기표의 구조가 갖는 강제성과 구속성을 뜻한다는 점이다.
라캉 말대로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무의식에 대한 연구 역시 무의식의 기호들이 조직되는 규칙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론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담론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의 차이는 재현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기호가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여 표상하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증상이나 꿈은 직접적으로는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의 현전이며, 언어와 담론에서 은유와 환유가 표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호들이 조직되는 방식인 것처럼, 무의식에서 은유와 환유 역시 증상이나 꿈이 조직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또한 기호의 의미는 기표들 간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고, 그 기표들의 결합을 통해 정해지듯이, 증상이나 꿈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 결국 라캉은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한다.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작동하게 됨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는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로이자, 타자와 주체의 개념에 이르는 중심적인 테제이기도 하다. 라캉은 기표(S)와 기의(s)가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룬다고 본다. S/s에서 바bar는 이 양자를 가르는 구분선이며 기표가 기의에 이르는 것에 저항하는 저항선이라고 한다. 소쉬르는 기표의 자의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기표와 기의간의 관계는 자의적이란 것이다.
C. 라캉의 정신분석이론과 욕망의 구조양상
(1) 상상계와 오인의 구조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이 시기는 자아가 형성되는 영역이다. 대략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나타나지만 그 시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상상계는 상징계에 진입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작용하는 영역이며 인간이 죽는 순간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영역이다. 상상계를 지니고 있어 인간은 불가능한 이상을 갖는다. 상상계는 '거울단계'로 특징지어진다. 상상계를 규정짓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이중성과 동일화가 그것이다. 아이는 자신과 자신의 거울이미지를 동일화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관념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는 결여나 상실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소외일 따름이다. 아이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거울의 이미지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실물이 아니라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계는 차이성보다는 동일성에 기초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아이는 자신의 자아를 거울상에 비추어 규정한다. 거울상은 내면으로 투사되어 자신을 형성한다. 내면의 자아에 의해 거울상은 전적으로 동화되거나 소유될 수 없으므로 이중성은 남는다.
수필가 지망생이 문단에 등단하여 신인의 이름으로 수필을 처음 쓰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완성되는 수필이 상상계적 수준에 해당한다. 어느 정도 수필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하고 나면 상징계로 진입하고, 수필의 완성 단계에서는 실제계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울리며 반가워한다. 아이는 그 속에 비친 모습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고 하여 주체의 형성에 원천이 되는 모형으로 제시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는 없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도 완전한 것으로 가정한다. 이 형태는 정신분석 용어로 이상적 자아ideal-I라 부르는데 타자에 의해 보여짐을 모르는 객관화되기 전의 ‘나’에 해당된다. 거울단계는 ‘상상계the Imaginary’라고도 한다. 거울단계는 비활동성 혹은 고착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신경증환자는 모두 이 단계에 머물러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그는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인 혹은 환상의 단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에 타자의식이 전혀 없다.
이런 상황에 수필가와 수필창작의 경우를 대입하면, 자신이 중고등학교를 통해 배운 수필에 대한 지식, 즉 어렴풋이 개략적으로 알고 있는, 이를테면,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는 오도된 정의를 그대로 믿고 누구나 수필을 쓸 수 있는 바, 자신도 경험을 사실 그대로 적으면 수필이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상태에 해당된다. 이 단계에서 수필가는 수필은 비전문적인 글이고,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여기의 문학, 무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에 따라 쓴 글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다. 더욱이 문학상 공모에서 당선되고 심사위원이 격려해 주기 위해 쓴 격려성 심사평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여 자신이 완전한 작가가 된 듯 착각하고, 자신이 글이 아주 잘된 글인 줄 안다. 부끄러움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장 활발한 창작의욕을 보이는 시기도 이 단계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수필가는 수필을 문학 나아가 예술이라는 차원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수필의 바운드리 내에서 생각한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자신의 욕구를 쾌락지향의 원칙에 따라서 행동한다. 배가 고프면 무조건 충족만을 요구한다. 충족의 연기라든지, 욕구의 억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어른이 신생아처럼 행동하면 비정상이라는 판정을 받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어울려서 살지 못한다. 어린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욕구를 연기하거나, 참는 법을 배우므로 사회구성원으로 진입하여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단 역시 신인작가와 프로작가가 엄연히 병존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특색이지만 거울단계의 습작기에 있는 작가 지망생은 수필에 대한 막연한 개념으로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쳐 문단에 나와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라캉 이론에서와 같이 처음 문단에 등단하여 수필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써놓은 자작 수필을 보고, 기쁨에 차있다. 전혀 문학수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단계의 신인수필가는 수필이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라는 것을 모른다. 따라서 자신의 쓴 글, 붓 가는 대로 쓴 자신의 글이 제대로 된 글로 안다. 아직까지 작품활동을 통해 자신의 글에 대한 검증을 받은 바도 없고, 수필가로 인증 받은 데 대한 도취감이 사라지지 않은 까닭이다. 이는 수필을 쓴 신인수필가가 자신이 써 놓은 수필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데 있고, 자신이 써 놓은 수필을 총체적이고도 완전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쓴 수필은 자신의 수필이 타자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모르는 객관화되기 이전의 수필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 시기를 신인작가기라 할 수 있다. 이때는 자신의 수필에 대한 비판이나 비평을 받으면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 쉽다. 또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수필 쓰기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격려와 용기를 주는 것인데, 이런 사유를 알지 못하는 신인 수필가는 스승이나 비평가의 조그마한 격려성 멘트에 오만해져서, 신인 인정이 바로 작가 인정이라는 구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필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의 수필은 풍경에 해당된다.
(2) 상징계와 욕망의 구조
아이가 언어의 체계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현실계와의 철저한 분리를 마무리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표는 현실적인 것과의 모든 연관을 끊고 자기 폐쇄적인 영역에 머무는 것이 보통이다. 생물학적 육체와의 연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분리는 자신의 본능에서 소외되는 것인데 정작은 이를 통해 욕망이 형성된다. 자연의 흔적은 최소화되고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주체로서 남게 된다. 상징계로의 진입은 바로 무의식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무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언어로 대표되는 문화적 체계의 미리 정해져 있는 질서에 따라 욕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무의식이란 원본을 상실하고 언어를 통해 간접적인 매개만이 존재하는 욕망을 의미한다. 아이는 언어의 체계 또는 기표의 체계, 즉 상징계에 진입하는 결과로 현실계와 상상계에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욕구와 요구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으로 남는다. 이에 따른 상실감 또는 결여감의 자리가 욕망이 위치하는 곳이다. 라캉의 경우 욕구와 요구란 상징계로의 진입 이전의 것이며 욕망은 그 이후의 것이다. 수필도 무의식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 창작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상징성이다. 상징은 지시하는 대상이 있다. 대상을 찾는 것은 바로 자기 성찰인 것이다. 의식세계에서 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자아다. 넓은 의미에서 무의식은 의식의 그림자다. 그림자는 내 인격에서 제외된 부분이다. 그림자를 의식세계로 이끌고 나와서 나의 인격으로 통합하는 것이 인격의 폭을 넓히고, 의식의 시야를 확대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수필가의 성찰이 일어난다. 수필다운 수필을 써야 한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상징계가 상상계와 다른 점은 상상계가 동일시를 원리로 하고 있다면 상징계는 차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이차적 동일시, 즉 상징적 남근과의 동일시를 상징계는 원리로 한다. 현실계를 상실의 자리로 남겨두고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은 자연의 영역에서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아이에게는 사회 안에서 하나의 주체로 살아갈 지위에 이르는 일이다. 상상계에서의 자아는 타인의 자아라고 간주되는 이미지를 따라 이루어진다. 그것은 대상 a를 내면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상징계에서 의식의 주인은 자아다. 자아의 바깥세계와 자신의 내면세계를 모두 대면한다. 자아가 외부세계와 마주할 때는 외부세계가 요구하는 기대에 맞추어 주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이때의 인격 양식을 외적 인격, 페르소나라고 한다. 자기 나름의 기준을 폐기하고, 본격수필의 이론에 따른 창작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상징계에 진입하면 이제 주체는 기표체계를 통해 정립된다. 따라서 주체와 상상적 자아는 분열된다. 이를 통해 이전에 상상적 자아에 의해 파악되던 대상 a 는 상실된다. 대상 a를 다시 규정하자면, 그것은 주체의 분열에서 상실된 대상으로서 상징계에서 언어화된 대상으로 자리 잡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무의식화되기 때문에 결코 그 충족을 바랄 수 없는, 끝없이 유예되는 대상이다. 이제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욕망의 근원이 된다. 아무리 상징계적 거세를 극복했다고 해도 상상계적 요소가 남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다. 프로이드는 인간이 상상계를 떠나와서 인간이 불안하다고 이야기한다면, 라캉은 상상계에 계속 집착함으로써 불안하다고 한다.
‘상상계’는 ‘상징계the Symbolic’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이자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거울단계는 사라지거나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 페르소나는 사회 환경에 따라서 자기에게 요구하는 대로 그에 맞추어 생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체면, 도리, 본분을 지키며 행동하는 양식을 취한다. 상징계로 진입한 신인 수필가는 자기 마음대로, 붓 가는 대로 수필을 썼던 스타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다. 체면이나 도리, 본분은 본격수필의 작법을 의미하며, 문법을 뜻한다. 수필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 즉 수필의 작법을 알고 써야 하는 전문적인 글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신인작가기를 거친 수필가는 상징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라캉 이론의 중요한 가정인 상징계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어라는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상징계라고 한다. 아이는 언어 습득을 통하여 사회진입을 한다. 이것은 상징계의 진입이라고도 한다. 이로써 라캉의 마음구조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상징계를 도입하였다. 상징계의 자아가 페르소나와 동일시하여 외부세계의 요구에 잘 순응하면 할수록 내면의 세계, 즉 무의식과는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상징계는 실재의 경험을 언어로 바꾸어서 표현하는 시기다. 이때 언어는 실재를 사진을 찍듯이 표현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경험한 것이 사회가 허용한 것으로 보이도록 합리화 과정을 거친다.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경험은 의식의 세계에서 추방해 버린다. 추방은 심리용어로 억압이라 하고, 억압된 것들이 무의식을 구성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 언급되는 언어는 말을 하는 주체의 입맛에 맞도록 가공되어진 것이다. 이 때 수필가는 실재 경험의 주인인 동시에 말하는 자로서 언어의 주인이기도 하다. 실재와 실재를 가공하여 표현한 언어의 차이만큼이나 ‘나’라는 사람도 두 개로 나뉘어서 차이가 난다.
이 과정을 수필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대입해 보면, 경험이 수필이라는 형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사실 그대로가 아니고 필자의 입맛에 맞게 변형이 일어난다. 똑 같은 사안을 두고 글쓰기 하는 개개인이 모두 자기의 입맛에 맞도록 가공하여 표현한다고 하면 결과물인 수필의 표현에 차이가 나고, 개인의 특질이 나타난다. 이 차이가 언어가 바로 말을 하는 사람의 개별성을 나타내는 지표임을 의미한다. 말을 하는 나는 말을 듣는 상대방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고, 존재하게 된다. 언어에서 나타나는 개별성으로 언어의 주인인 나는 자아라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자아를 인식하는 일은 ‘나’로서가 아니고, 나 아닌 비아와 대비하였을 때 나타나는 차이에 의하여 가능해진다.
요약하면 언어는 실재의 경험이나 대상을 지칭한다. 그러나 언어체계로 상징할 때는 실제와 차이가 난다. 나와 너가 소통하는 방법은 언어에 의한다. 언어는 어릴 때부터 습득하는 것이다. 나와 너의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나와 너가 공통으로 언어의 법칙, 즉 문법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같은 체계에 사는 사람은 공통으로 언어의 문법을 습득하므로 언어습득은 곧 사회진입을 의미하고 상징계 진입을 의미한다. 언어에서 ‘실재’는 일상적 사건에 해당하며, 언어체계로 상징될 때는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된다. 일상에서 쓰는 언어와 문학적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필가는 사실을 바탕으로 진술하는 데서 나아가 수사법을 활용하여 언어를 문학적으로 변용하여 나타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시기의 수필가는 수필을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문학의 바운드리 내에서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문법을 가진 언어에 의해서 체계화된다. 사회구성원은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고,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시킨다. 언어는 상징이다. 상징은 실재의 경험 자체가 아니다. 언어 속에서 형식적인 개념으로 바뀌어서 소통되는 것이다. 상징의 조건으로 상징이 지칭하는 대상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상징과 대상은 당연히 가치가 다른 체계로 구성된다. 상징을 나타내는 것은 언어만이 아니다. 사회적, 문화적 상징이라고 할 때는 생활의 실재적 여러 요소들이 포함된다. 서약, 약속, 법률, 의례, 대의명분, 신, 조국, 윤리적 규범 등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회적 상징은 반드시 명확하게 표현해야 할 규범을 나타내므로 담론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상징계는 언어의 세계이자 질서의 세계이므로 초기 신인의 원초적 모습은 사라지게 되고 변증법적으로 연결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수필가는 언어의 형상화에 관심을 가지고 언어가 만들어내는 유희를 즐기려 한다든가 또는 사회적 질서, 정신세계를 포함하는 세계의 질서가 깨어지는 모습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기도 하는 작품이 나오게 된다. 신인기의 작품은 ‘자신이 상상한 것을 그대로 작품에 직설적으로 표출하게 되는 것에 반하여 상징계에 진입한 작가는 일상적 사건을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시켜 인식과 형상에 의한 문학수필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필의 발전 단계는 일상적 사건에서 문학적 사건의 승화로 인해 생활수필에서 문학수필로 발전하게 된다.
오르게스는 <담론과 상징>에서 상징이 되는 과정은 상상에서 시작하여 상징으로 완성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상징이 되는 과정에는 상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였다. 한 개인의 자아, 욕망, 생활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언어를 통해서만이, 즉 상징적 영역을 통해서만이 언급될 수 있다. 상징적 영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여과되면서 왜곡이 일어나므로 거짓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언어의 주인이므로 언어화할 때는 내가 사회체계에 종속하고자 하는 내 뜻이 담기게 마련이다. 여과되는 과정이 수필 창작에서 실감의 유리와 실감의 보수에 해당하며, 여기서 느낌이나 생각 같은 거친 감정이 문학적으로 정서화되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를 예를 들어 보자. 감각적인 충동에 의하여 욕구가 일어나면 환상을 통해서 정서화하고, 사회 속에서 행동하므로 인간화가 일어난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성적 충동이 일어나면 사회적 금기이기 때문에 그 여인에게서 직접적으로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없다. 환상 속에서 그 여인과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정서화한다. 환상은 예술작품이나 다른 사회체계가 허용하는 방법으로 행동하므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된다. 그때 실제의 성적 충동을 예술에서 정서화하여 표현하므로 차이가 난다. 따라서 집단 생활에서는 심리적이고, 지적인 활동에 의해서 반드시 여과작용이 일어난다. 여과되고 난 우리의 삶은 원래의 본질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된다. 여기서 예술작품의 자리에 수필을 넣으면 문학수필로서의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문학적 감동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 단계의 수필은 정경에 해당된다.
(3) 실재계와 변증의 구조
현실계는 인간이 직접적으로 인식하거나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재계에 속하는 대표적 두 가지는 개인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생존하기 위해 충족시켜야 할 욕구와, 그것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상의 세계 즉 사물들의 세계이다. 따라서 현실계란 부분적으로 마주칠 수는 있지만 그 전체로 볼 때나 원래의 모습으로는 감추어져 있는 세계이다. 실재계란 라캉이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적 사항으로 보고 있는 결여의 배경이다. 물론 출생은 결여의 시작, 출발이다. 실재계의 또 다른 흔적은 성감대로, 이는 문화적, 사회적 규정에 의해 형성된다. 대상 a 는 구체적이고 의식적인 경험에서 인지된 것이 아니라 아직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수준에서 파악된 것이기 때문에 상세한 모습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상징계에 있던 작가는 상징계에 머물러 있던 자신의 환경에 또다시 좌절을 겪은 후 실재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실재계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식의 출발을 상상계라는 오인의 구조로부터 시작하기에 자아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절대적 주체란 없다. 그러므로 주체의 형성에서 거울단계의 설정은 데카르트의 이성절대주의는 물론이고, 실존주의나 현상학이 암시하는 실존적 자아까지도 거부한다. 그들은 모두 이 오인의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 흠집 없는 이성, 혹은 현실원칙에만 굳건히 서 있는 의식의 체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오인의 구조를 실재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라캉은 의식이 지닌 환상을 강조하기에 자기의 의견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을 환자의 범주에 넣는다.
실재계로 진입한 작가는 자신이 그동안 겪어왔던 상상계의 오인구조를 실재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킨다. 그러면서 상상계의 작품과 상징계의 작품이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초보적 이미지의 고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존재의 본질을 읽을 수 있도록 하고, 고착으로부터 해방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 내게 된다. 수필이라는 작품과 수필가의 의식구조는 발전단계를 거쳐 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수필가의 의식구조와 수필 창작의 발전단계는 사실과 일상적 사건 ->진실과 문학적 사건 ->인식과 예술적 승화를 거쳐, 일반수필(정) -> 문학수필(반) ->예술수필(합)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창작 현장에서 수필가에게 주어지는 고민의 하나는 철학성의 포착 문제다.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제재를 통해서 먼저 철학적 인식과 깨달음에 이른 뒤, 그것을 다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형이하학적 제재를 매체로 삼아 형이상학적인 인간과 우주의 본질을 해명하려는 사람이다. 하나의 제재가 우주와 인간을 잇는 상징적 의미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치열한 제재 통찰과 적확한 언어 사용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심오한 인식의 세계에 도달했다 해도, 그것을 문학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면 쓸모가 없다. 수필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수사법을 잘 활용해야 한다. 수사는 표면적으로는 언어 간 이동되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대상이 만나서 관계를 맺는 두 개의 플러스가 아니라 두 개의 곱하기가 될 만큼 엄청난 의미와 정서적 증폭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언어의 원자 폭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효과의 극대화는 물론, 인습적인 수사가 아닌 참신한 창조적 수사일 때 드러난다는 것이다. 갈등이 없는 수필은 단조로움을 주기 쉽고, 입체감 있는 플롯이 없어 내용 전개가 평면적으로 흐르기 쉬운 수필은 독자들에게 권태감을 주기 쉽다. 아무리 고량 진미라도 늘 먹으면 신물이 나고 듣기 좋은 콧노래도 계속 들으면 범상해지는 법이다. 따라서 수사법을 통한 낯설게 하기는 수필문의 예술적 표현 효과를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수사법의 새로운 이해를 통해 수필 쓰기에 있어서 표현 효과를 극대화한다면, 미적 구조로서의 수필이 갖는 특성이 제대로 발휘되어 고상한 쾌락을 독자에게 안겨 줄 뿐만 아니라 주제 의미화의 취약성을 극복한 예술수필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수필가는 수필을 문학에서 더 나아가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는 노력을 보인다.
수필은 예술이다. 예술이 목표로 하는 것은 미의식이다. 그리고 미란 감각적인 것이다. 단순히 지적이고 또는 의지적인 표현만으로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없다. 지적이고 의지적이며 훌륭한 어떤 내용이 있어도, 그것이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미와 감정적으로 인간을 감동 시킬 수 있는 맛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맛있는 수필이 되게 창작해야 한다. 향기를 주는 글맛도 있어야 한다. 사람의 냄새도 풍겨야 한다. 당연히 주제의식은 인간성 회복에 두어야 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예전보다 사회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깊지 못하다. 이러한 현대인을 위해 인간 사랑을 주제로 내세우는 수필이어야 한다. 신선한 상상력으로 복잡한 인생을 송두리째 엿볼 수 있는, 미학적으로 의미 있게 압축된 형상미가 주는 손맛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의 눈으로 현실을 관통하는 인식의 눈맛도 주어야 한다. 고급수필로서의 수필의 맛은 전체적으로 무엇보다 천박하지 않은 데서 찾아야 한다. 경박하고, 우쭐거리고, 갈 길을 찾지 못해 허둥댐의 수필은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정서를 표면에 놓고 그 안에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감추고 있는 글을 독자는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수필문학은 인간 존재를 억압하는 일체의 경향들에 대한 선전포고와 한 사회의 진보 가능성과 좌절을 한 때의 기억이나 풍경의 차원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잠복된 숨은 의미로 되새기는 구원의 문학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처음 등단한 신인이 쓰는 일반수필 단계가 ‘수필적 상상계’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실감의 유리나 실감의 보수를 통해 연상과 상상을 불러오고, 주제를 의미화하여 수필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기법에 대해 수필가가 잘 모르는 상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 수필의 지식을 통해 일반수필을 쓴다. 일상적 사건을 문학적 사건으로 승화하여 연상과 상상을 통해 감동을 주는 수필을 쓰는 단계를 ‘수필적 상징계’로 본다. 상징계로 진입한 수필가는 자신이 쓴 수필이 본격수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고, 페르소나의 자아로서 사회의식을 가지며, 본격수필의 작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따라서 문학수필을 쓰기 위해 열심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본격수필 심화 과정 등록을 통해 좋은 작가 대열에 들어서고 싶어하는 것이다. ‘수필적 상상계’와 ‘수필적 상징계’가 변증법적으로 연결된 수필적 실재계에서는 오인 구조를 깔고 있지 않은 흠집 없는 예술적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본격수필을 틀을 이해하고 문학수필을 쓰는 수필가는 다시 욕망의 결핍을 느낀다. 여기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문학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의 비상을 꿈꾼다. 그것만이 남다른 수필을 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에서 ‘누군가’군에 속하기 위해 수필가는 문학의 예술적 승화를 꿈꾼다. 고도의 세련된 미적 감각과 참신한 표현법을 통해 언어예술로서의 수필을 최고의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이는 시대가 변하고, 독자의 의식과 취향이 변한다고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화를 통해 독자들을 고급독자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수필이 저급성 내지는 대중성과의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이 살아남을 길은 차별화밖에 없다. 고급수필로의 방향 전환만이 수필을 살릴 것이다. 스스로가 데카르트적인 <사유하는 주체>가 아닌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인간은 실재와 불행하지 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다고 라캉은 말한다. 우리 의식은 보기만 하는 시선(eye)이 아니라 보여짐, 응시(gaze) 가 함께 하는 중첩적인 것이다. <보여짐>을 강조하는 것이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이다. 세계 속에서 인간은 보여지는 존재다. 응시는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듯 바라보기만 하는 것에서 보여짐을 아는 순간 일어난다. 자신이 세상에 의해 보여짐을 의식할 때 주체는 고립과 소외를 벗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타자의식」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식이다. 수필 쓰기는 삶의 돌아봄이다. 우리는 수필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가슴에 불꽃을 피울 수 있으며 강과 바다를 찬찬히 여울지게 할 수 있다. 인류의 화해와 자연과 신과의 만남도 이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 지혜와 포용이 그 안에 있다. 수필은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펼치는 사랑의 향연이고 언어의 축제여야 한다. 모든 고뇌와 기쁨이 정제되어 수필의 품에 뿌리내릴 때, 우리 삶도 빛날 수 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건전한 삶의 풍토를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미를 새롭게 구축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작가가 한 작품을 낳기 위해 많은 산고를 겪으며, 인류에게 희망을 갖게 하고 고뇌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수필정신도 예술수필 속에서 빛나야 한다. 예술수필은 삶의 난관을 해결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에세이 테라피여야 한다.
나’라는 주체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데카르트식 주체는 보기만 하는 주체, 즉 보여짐을 당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은 셈이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왜 위험한가. 그것은 아직도 거울단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신경증환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 가는 것, 대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대상에서 벗어나는 반복 없이 삶은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라캉 역시 당대의 실존적 자아와 현상학적 자아를 전복하기 위해 자아를 해체하고 있다.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고립된 주체는 심한 경우 히틀러처럼 역사를 광기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라캉은 주체를 결핍으로 보고 욕망을 환유로 본다. 그것은 주체를 대상에 대한 왜곡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고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오인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타자의식>을 갖게 한다. 이 타자의식이 라캉의 이론이 지닌 미덕이요, 그의 이론이 문학이론으로 확장되는 근거이다. 이 단계의 수필은 절경에 해당된다.
III. 닫으며
라캉은 사유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인다. 그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나 성본능을 억압하고 자아의 자율성만을 강조한 모던시대 정신분석학이 보수적인 엘리트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본능을 귀환시키면서 이것에 소쉬르의 언어학을 적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언어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이 이론이 수필의 창작 단계 발전론으로 변용이 가능하다는 데 착안하여 필자는 수필가의 욕구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고, 수필도 삼 단계로 등급을 매겼다. 자크 라캉을 읽으면서 수필의 삼 단계가 생각났던 것이다. 등단하여 신인으로 수필에 대해 잘 몰라 자신의 지식 속에 있는 수필이론으로 수필을 붓 가는 대로의 양식으로 알고 쓰는 세계 -보여짐의 주체로 변한 수필가가 본격수필 이론에 힘입어 잠시 문학수필에 눈을 떠서 고급수필을 지향하는 세계, -다시 타자의식, 즉 사회의식을 가지고 완벽한 예술수필의 세계를 추구하는 단계를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접목시켜 보았다.
좀더 체계적으로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에 상응하는 수필가의 욕망 양상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상상계 - 상징계 - 실재계
동일시 - 차이 - 타자의식
오인의 구조 - 욕망의 구조 - 변증의 구조
수필의 범주 - 문학의 범주 - 예술의 범주
일상적 사건 - 문학적 정서 - 예술적 승화
풍경 - 정경 - 절경
도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수필가의 욕망 양상 및 수필의 단계도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처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등 삼 단계의 구조를 가진다. 상상계적 특성인 동일시와 오인의 구조를 수필에 대입하면, 수필의 범주, 일상적 사건, 풍경과 동일 층위에 놓인다. 상징계적 특질인 차이와 욕망의 구조는 수필 차원에서 문학의 범주, 문학적 정서, 정경과 같은 위상을 갖는다. 실재계의 타자의식, 변증의 욕망 구조를 수필에 접맥하면, 예술의 범주, 예술적 승화, 절경이란 차원으로 더 층위가 최고조에 다다름을 알 수 있다. 욕망의 발전 단계는 문학예술 분야의 창작의식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특히 과거 회상적 특성을 갖는 수필의 구조적 특성상 주체의 의식과 무의식이 언어적 기술로 표현되는 수필의 경우는 의식의 발전 양상에 있어서 더욱 라캉의 욕망이론과 유사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 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어는 차이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정의는 각기 기호학과 구조주의로 가는 토대가 되는데 앞의 것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일 대 일의 정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기의가 미끄러져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는 언어의 비유성 쪽으로 나가고, 뒤의 것은 은유와 환유의 두 축으로 정립되어 정 ․ 반의 대립항이라는 구조주의 시학을 낳는다. 라캉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여 주체와 욕망을 해석한다. 수필가는 실재 경험의 주인인 동시에 말하는 자로서의 언어의 주인이다. 무의식이 욕망의 그림자라면 수필 창작은 그림자의 재현인 셈이다. 그런 차원에서 라캉 이론과 수필창작론의 접맥이 가능하다. 문학의 언어 또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일대 일의 정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는 데서 언어는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변용될 수 있고, 욕망의 진화에 따라 수필은 풍경, 정경, 절경이란 삼 단계적 발전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언어가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지 못하고 의미가 꼬리를 물 때, 즉 기표만이 존재할 때 그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인간은 이 기표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한, 주체는 기표의 지배를 받기에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언어가 은유와 환유로 되어 있다는 해석에서 필자는 문학과 예술로의 가능성을 읽었으며,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뜻 역시 문학 속에서 수필가의 의식이 의미화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한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라면, 필자는 이를 원용해서 문학이론으로 재편성하였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라캉에 와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의 분야로 확대되었다면, 라캉의 욕망이론은 필자에 의해 수필의 단계적 발전론으로 변용되었다고 하겠다. 본고는 신재한, 인터넷 네이버 블로그와 권대근, <수필은 사기다>, 도서출판 일광, 2010 그리고 이동민, <문학치료와 수필>, 수필과 비평사, 2009를 참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