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사람들끼리 - 이용악
다시 만나면 알아 못 볼
사람들끼리
비웃이 타는 데서
타래곱과 도루모기와
피 터진 닭의 볏 찌르르 타는
아스라한 연기 속에서
목이랑 껴안고
웃음으로 웃음으로 헤어져야
마음 편쿠나 슬픈 사람들끼리 *
* 시골사람의 노래 - 이용악
귀맞춰 접은 방석을 베고
젖가슴 헤친 채로 젖가슴 헤친 채로
잠든 어미네며 딸년이랑
모두들 실상 이쁜데
요란스런 달리는 마지막 차엔
무엇을 실어보내고
당황히 손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몇 마디의 서양말과 글짓는 재주와
그러한 것은 자랑삼기에 욕되었도다
흘러내리는 머리칼도
목덜미에 점점이 찍혀
되레 복스럽던 검은 기미도
언젠가 쫓기듯 숨어서
시골로 돌아온 시골사람
이 녀석 속눈썹 츨츨히 길다란 우리 아들도
한번은 갔다가
섭섭히 돌아와야 할 시골사람
불타는 술잔에 꽃향기 그윽한데
바람이 이는데
이제 바람이 이는데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
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
* 꽃가루 속에 - 이용악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 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서 살며시 흩어 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
*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이용악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 최후(最後)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갈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이 아무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
* 하나씩의 별- 이용악
무엇을 실었느냐 화물열차의
검은 문들은 탄탄히 잠겨졌다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남도 사람들과
북어 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이랑
나눠서 요기하며 내사 서울이 그리워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간다
푸르른 바다와 거리 거리를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을
갈 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헐벗은 나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슬라브의 늙은 병정은 잠이 들었나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우에
우리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쳐다보는 하나씩의 별 *
* 오랑캐꽃 - 이용악
ㅡ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ㅡ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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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용악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시는 잘 쓰셨네요.
시 하나는 속임없이 본대로 느낀대로...
잘 쓰셨습니다. 북녘의 차거운 겨울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