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전 이번에는 국군이 차를 몰고와서 우리들을 싣고 기차역으로 갑니다.
기차가 출발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기차가 선 곳은 대구입니다.
말로만 듣던 다구역이 엄청 큰데 놀라지만 역 안에 웬 사람들이 그리많은가?
그것은 남한 사람들이 다 대구로 피난왔기 때문에 대구가 미어터질 지경이라서
어디에나 하얀 옷을 입은 피난민들로 가득합니다.
다시 또 군인들이 트럭을 가지고 와서 우리들을 태우고 시내로 가는데
차가 밀릴정도로 사람들이 꽉 차있는 게아닌가?
1950년 7월 28일 우리가 간 곳은 도립병원입니다.
군인들이 나를 당가에 실어 병원으로 들어가는데 병원에서 송장 썩는 냄새가 가득하여 구역질이 납니다.
그리고 웬 사람들이 많은지 병원에도 흰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경상도 사람들의 유난히 목소리가 커서 그런지 병원이 아주 시끄럽습니다.
나는 어린이들만 있는 작은 병실로 옮겨졌는데 나 까지 어린이들이 4명입니다.그런데 침대가 아니고 송판때기에 다리를 박아놓은 작은 의자같이 생긴 침대인데메트리스도 없이 그냥 딱딱한 송판에 눕습니다.
형들은 황간에 두 고 왔기에 나 혼자이지만 병실의 다른 어린이들은 다 부모가 있습니다.내가 오줌을 쌀것 같고 똥을 누고 싶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너무 급해 한 아주머니에게
"저 오줌이 마려운데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자 부인이 작은 변기를 들고와서 내 바지를 열고 소변을 누게 해 줍니다.
그리고 밥이 오면 밥도 멕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의사가 부족하고 간호사도 부족하고약품도 부족하여 3일에 한 번씩 치료를 한다고 합니다.내 팔에감은 두툼한 가제와 붕대 속에서 살이 썩는 냄새가 납니다.
대구의 날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덥다고 하는데 누가 부채질을 해 줄 사람도 없어 내 전신에서는 땀이 줄줄 흐릅니다.
창문 밖에는 은행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은행 알들이 많이 열렸습니다.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보지 못하였기에 혹시 어머니가 살아서 나를 찾아올지 모른다는 환상에 젖어 하루종일 문만 바라봅니다.(계속)
첫댓글 고생의 시작입니다.
오잉? 글시가 왜 작아졌지?
어서오세요 김바우님 감사합니다.
맞아요 고생의 시작입니다
많이 힘드시겠네여.
예 정말 많이 힘들어요 감사 똘망똘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