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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노스님의 그 다음 이야기 과경 편역/정원규 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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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과 참선
참선하는 뜻은 매우 높고 깊으나, 염불수행이 가장 빠르고 알맞은 방법이며 대업왕생(帶業往生, 여러 가지 업장이 남아있으면서도 염불을 하여 불보살님의 인도로 극락왕생하는 것)할 수 있다고 한다. 선종(禪宗)의 참선은 상상(上上)의 근기가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좋을지를 물어왔다.
내 생각에는 만약 엄격히 계율을 지키지 않고 금생에 지은 죄업을 참회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매일 염불독경을 많이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부처님과 인연을 맺을 수는 있어도 삼계를 벗어날 수는 없으며, 장래 다시 인간 몸을 받았을 때 불법을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대업(帶業)’은 숙세의 업을 가리키며, 단지 금생의 죄업을 참회하고 다시는 짓지 않으면 숙세의 업을 가진 채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능엄경』에서 이르기를, “몸에 한 등을 켜거나 한 지절을 태우거나 한 주의 향(香)을 태우면서, 자신이 지은 무시이래의 묵은 빚을 일시에 갚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지적하는 것은 숙세 업의 빚은 결코 등을 켜고 지절을 태우고 향을 사른 후 다시 업을 지어도 대업왕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금생에 단지 염불은 할 줄 알되 오계를 지키지도 못하고 십선(十善)을 닦지도 못한다면, 이 사람은 금생의 업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업 왕생할 수 있겠는가?
선종을 수행하는 사람도 염불하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 근세 선종의 태두이신 허운 노스님을 포함하여 역대 선종 조사들의 사진이나 화상을 보면, 모두 손에 염주를 들고 두 눈을 내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 생각에 떠나지 않았다.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심(淨心)의 방법이다. ‘선(禪)’은 정려(靜慮)의 뜻이다. 고요히 자기가 지은 십악(十惡)을 생각하면서 성심으로 참회하고 마음속으로 염불하면서 자기가 상해를 입힌 중생을 위하여 회향하면, 죄업을 참회할 뿐 아니라 잡념도 없애기 때문에 일종의 참선을 잃지 않는 좋은 방법이다.
단지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산란하지 않게 하면서 극점에 다다르게 되면 저절로 천지를 감동시키게 될 것이며, ‘막다른 곳에서 길이 열리는〔柳暗花明又一村〕’ 때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염불하는 것이 누구인가〔念佛是誰〕?’라고 참구하다 보면 무념처(無念處)에 다다르게 될 것이며, 그것이 무한대로 연장될 것이다. 유념(有念)에서 무념(無念)이 되면 깨달음의 시기가 가까이 온 것이며, 당신 스스로 그 가운데의 묘미를 맛볼 것이다. “자기가 먹은 밥이 자기의 배를 부르게 한다.”는 경계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정력(定力)이 있게 되면 깨달음은 바로 눈앞에 있게 된다.
염불도 마음을 깨끗이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염불의 일념으로 망념(妄念)을 대체하면서, 잡념이 일어나면 다시 염불 일념으로 다잡는다. 이렇게 염불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구슬로 꿴 듯이 일념이 이어져 무아(無我)의 경지에 다다르면, 바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가게 되며 지혜가 현전하게 된다. 따라서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염불은 무상심묘선(無上深妙禪)이다.”라고 한 것이다. 참선, 염불 모두 자기의 심지(心地)를 밝히는 방편으로서 모두 마음을 깨끗이 하는 법문이며, 같지만 같지 않고 다르지만 또 다른 것이 아니다.
도를 증득하는 방법은 같지 않지만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방법이 자기에게 적합한지, 어떤 방법으로 득력(得力)할 것인지는 깊이 생각하여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일단 하나의 방법을 선택하였으면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조금 해보다가 경계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다른 방법으로 바꾸면, 그것은 마치 십자로에서 어느 길이 서울로 통하는지 몰라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면서 영원히 서울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과 같다. 법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당신에게 적합한 것이 바로 가장 좋은 법문이다.
‘수행(修行)한다’고 하는데, 닦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언행이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모두 지혜를 열어 성불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다. 조연(助緣)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십악을 금하고 십선을 닦는 것이다.
정말로 결심하고 행하면서 지속하면 득도(得道)할 수 있으며, 제불보살께서 기뻐하고 천룡팔부 등 호법신장(護法神將)이 공경하므로 도를 얻는 데 많이 도와준다. 어느 날 당신은 일념지간에 지혜가 현전할 것이며, 그것은 불보살이 당신을 가지(加持)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묘법 노스님과 십여 년 동안 전국으로 다니면서, 진심으로 계를 지니고 선을 닦는 사람을 수십 명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노스님의 교화를 받아 일념 간에 오안육통(五眼六通)이 열리고 각자의 특색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결코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한 것도 아니다. 지속적으로 계를 지니며 선을 닦아오다가, 시기가 도래하니 자연히 스님의 교화(혹은 불보살의 몽중교화)를 받게 된 것이다.
일단 지혜가 현전하니 무명(無明)이 저절로 타파되어, 삼계를 벗어나고 과(果)를 증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계를 지키지 않고 십악을 끊지 못하면서 단지 좌선하며 삿된 지혜가 나타난 사람에게 의지하면, 도를 잃을뿐더러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이 다하면 지혜가 없게 되고, 죽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불법을 듣고 믿으며 계를 지닐 수 있는 사람은 근기가 매우 높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권유로 불법을 배워 정도로 돌아온 사람은 상근의 사람으로서, 단지 힘써 노력하면서 물러나지만 않으면 반드시 금생에 도를 성취할 수 있다.
『능엄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음녀, 과부, 도둑, 백정이라도 보살, 나한이 다시 인간 세상에 왔을 가능성이 있다. 단지 미혹하여 깨닫지 못한 까닭이며, 일단 머리를 돌리면 반드시 성취가 있을 것이다.
깨달음을 열고 지혜가 열리는 것은 단련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여 얻는 것이다. 열심히 계정혜(戒定慧)를 닦으면 반드시 탐진치(貪嗔癡)가 소멸된다.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수행을 떠나면 불도를 이룰 수 없다. 수행은 바로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입장권이다.
지혜를 여는 게(開慧偈)
법에 정해진 것은 없지만 계(戒)를 근본으로 삼고
죄업을 참회하는 마음이 진실하며
행주좌와 모두 부처님을 염하면서
오래오래 지속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며
마음 밖에서 구하지 않으면 스승은 저절로 오며
수양버들 우거지고 꽃이 필 때 또 하나의 마을이 나타나네.
자료출처 : 불자모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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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