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28 교정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경부고속철도 완전개통, 서울-부산 2시간 18분 28일 오전 KTX2단계 구간 개통식가져, 다음달 1일 새벽 5시부터 본격 운행 경부고속철도(KTX) 2단계 동대구-부산 구간이 28일 오전 개통식을 갖고 다음달 1일부터 본격적인 운행에 들어간다. 한국철도시설공단과 코레일은 이날 오전 11시 부산역 3층 중앙홀에서 김황식 국문총리와 허남식 부산시장,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을 비롯한 유관기관 단체장과 시민 1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KTX2단계 구간 개통식을 가졌다. 지난 2002년 착공에 들어가 총사업비 7조 9천454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KTX2단계 구간이 개통함에 따라 서울-부산 총 연장 417.5km를 잇는 경부고속철도(총사업비 20조 7천282억 원)가 착공 19년만에 완전개통하게 됐다. 부산CBS 박중석 기자 jspark@cbs.co.kr /CBS 노컷뉴스 2010-10-28 14:52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617863
2009 - 마이클 잭슨 유고 영화 전세계 동시 공개 지난 6월 25일 사망한 마이클 잭슨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오늘 전 세계 25개국에서 동시에 개봉됐습니다. 다큐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은 올해 7월 런던을 시작으로 50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던 마이클 잭슨의 생애 4번째 월드투어 리허설 장면과 공연에 사용될 예정이었던 미 공개 영상을 담고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기 위한 이 영화는 2주동안 한정 상영됩니다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리허설을 마이클 잭슨의 개인 소장용과 콘서트용으로 촬영된 영상은 마이클 잭슨이 런던으로 떠나기 8일 전까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빌리진 등 '디스 이즈 잇' 투어에 부르기 위해 준비한 18곡이 수록돼 있습니다. 오늘 미국 로스앤젤레스 극장에서는 시사회전에 레드 카펫이 마련돼 제니퍼 로페즈, 패리스 힐튼 등이 모습을 드러냈고 서울을 포함한 세계 12개 도시에 위성으로 생중계되기도 했습니다. [문화] 박진현 기자 /KBS 뉴스 2009.10.28 (16:17) http://news.kbs.co.kr/article/culture/200910/20091028/1874020.html
2008 -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 창원에서 개막 ‘람사르 총회’ 창원서 막 올랐다 습지의 보전과 지속 가능한 이용을 추구하는 람사르협약 제10차 당사국 총회가 28일 오후 경남 창원컨벤션센터에서 150여 나라 정부 대표와 습지 관련 전문가 등 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막했다. 이날 개회식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아힘 슈타이너 유엔환경계획(UNEP) 사무총장, 줄리아 마르통 르페브르 국제자연보존연맹(IUCN) 사무총장 등 환경 관련 국제기구 대표 등이 참석해 총회 개최를 축하했다. 이 대통령은 축사에서 “습지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인류가 아끼고 가꾸어 나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며 “훼손된 습지와 하천을 되살려 놓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창원/조홍섭 환경전문기자, 권태호 기자 ecothink@hani.co.kr /한겨레 2008-10-28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318627.html
2005 -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 국립중앙박물관 용산시대 개막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개관] 크다… 멋있다… 감격스럽다 민족 문화의 전당인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에 28일 개관했다. 1997년 공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대역사를 마무리한 중앙박물관은 이날 오전 10시 개관식을 갖고 오후 2시부터 일반 관람객을 맞이했다. 개관식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사회 각계 인사, 주한 외교사절, 외국 주요 박물관 관계자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중앙박물관은 부지 9만2900여 평, 건물 연면적 1만4000여 평, 전시 면적 8100여 평으로 건물 연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6번째 큰 박물관이다. 새 박물관엔 국보와 보물 150여 점 등 총 1만1000여 점의 문화재가 전시돼 있다. 관람료는 올해 말까지 무료이고 내년부터는 500∼1000원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문을 연 이래 여섯 차례나 이사를 했던 중앙박물관이 광복 60년 만에 세계적인 수준의 전용 건물을 갖게 된 것이다. 개관 첫날 박물관엔 관람객 2만여 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관람객들은 동아일보사가 특별 제작해 배포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올 가이드’를 보면서 명품을 감상했다. 특히 국보 86호 경천사 10층 석탑,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국보 191호 신라 황남대총금관 등의 명품과 최근 일본에서 되돌려 받은 북관대첩비 주변에 관람객이 많았다. 아사히TV와 아사히신문을 비롯해 일본 언론이 북관대첩비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을 취재하는 등 외국 언론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동아닷컴 2005.10.29 03:06 http://www.donga.com/fbin/output?f=jvs&code=jv_&n=200510290105
- World series rivals
2004년 오늘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했다.
- 100억불 수출의 날 기념, 1977
1980 - 전두환대통령,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임명 국가보위입법회의 [國家保衛立法會議] 제5공화국 헌법(1980. 10. 27 공포) 부칙 제6조에 따라서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한 입법기관. 1980년 10월 발족하여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전개될 정치의 틀을 강압적으로 재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입법의원 81인으로 구성하였다. 조직과 운영을 위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권한과 기능은 국회와 같다.
1977 - 자연보호협의회 발족 자연보호중앙협의회 [自然保護中央協議會] 자연보호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단체로 국토를 소중히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자는 취지에서 자연보호협의회라는 이름으로 1977년 10월 28일 창립되었으며, 1979년 4월 자연보호중앙협의회로 개칭되었다. 자연보호를 위해 자연의 실태를 종합적으로 조사, 보호대책을 마련하고 국내외 관련단체와의 유대강화를 위해 1979년 1월에 국제자연보존연맹(IUCN)에 가입하였고, 제14·15차 총회에 대표를 파견하기도 했다. 기구로는 회장 밑에 사무국을 두고 전국 시·도·군·구에 자연보호협의회를 설치하고 있으며, 직장·지역단위로 조직된 자연보호회가 운영되고 있다. 이 밖에 자연보호명예감시관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978년 10월 5일 <자연보호헌장>을 제정·선포하였고, 격월간으로 《자연보호》지를 발간하고 있다. /yahoo
1973 - 이집트의 작가 타하 후세인(Taha Husain) 사망 타하 후세인 [Taha Husain, 1889.11.14~1973.10.28] 이집트 작가 타하 후세인 사망 20세기 아랍 문학을 대표하는 깨어있는 지성인으로 평가받았던 타하 후세인이 1973년 10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1971 - 티토 유고대통령 미국 방문
1969 -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아동문학가 코르네이 추코프스키(Chukovsky, Korney) 사망 추코프스키(추콥스키) [Chukovsky, Korney Ivanovich, 1882.3.31~1969.10.28] 본명은 Nikolay Vasilyevich Korneychukov. 러시아의 문학비평가·언어이론가·번역문학가·아동문학가. 흔히 근대 러시아 아동 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교육을 마친 뒤 저널리스트로서 경력을 쌓아 1901~05년에 오데사의 일간지에 기고하는 한편 2년간 런던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어서 1905~08년 및 풍자 잡지 〈시그날 Signal〉의 편집을 맡았으며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에 관한 비평서를 비롯해 러시아 문학의 3세대를 포괄하는 회고록·비평 등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가 디킨스, 마크 트웨인, 휘트먼 등 영국 및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의 번역과 비평, 특히 19세기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에 관한 필생의 연구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관한 글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악어 Krokodil〉(1917)·〈그들을 깨끗이 씻겨라 Moydodyr〉(1923)·〈커다란 바퀴벌레 Trakanishche〉(1923)를 비롯한 수많은 운문 동화들은 그 분야의 고전으로 꼽힌다. 이들 작품의 정교한 운율과 가볍고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답답함과 단조로움을 일소해버렸다. 단체행동과 사회적 책임의식이라는 상투적인 주제는 언제나 생생한 이야기 자체에 종속되는데 이야기는 주로 일상적 상황이나,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동물을 기초로 한 환상적 내용을 포함한다. 이 동화를 각색한 연극·영화 및 오페라와 발레(프로코피예프가 몇몇 작품을 연출했음)도 20세기 전반에 걸쳐 소련 내에서 해마다 인기를 누렸다. 아동 언어에 관한 그의 연구 〈2~5세 Ot dvukh do pyati(1933)는 어린이를 둔 부모를 위한 인기 있는 지침서로서 20판 이상 발행되었다. /브리태니커
1959 - 쿠바의 혁명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ienfuegos, Camilo) 사망 시엔푸에고스 [Cienfuegos (Gorriarán), Camilo, 1932.2.6~1959.10.28] 28일 쿠바 아바나의 엘 마엘콘 거리에서 군인들이 혁명영웅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를 기리며 묵념을 하고 있다.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의 장군이었던 시엔푸에고스는 혁명군의 승리 이후 1년이 채 안된 1959년 10월 28일 그가 탔던 비행기와 함께 바다 위에서 사라졌다. 비행기와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쿠바 군인들은 매년 10월 28일 그를 기리며 바다에 꽃을 던진다. 로이터 /동아닷컴 2008-10-30 http://photo.donga.com/usr/photopro/phnview.php?cgubun= 200306130004&cpage=154&photo_idxno=114051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아십니까? 미국을 등에 업은 바티스타 군사독재 정권을 몰아낸 쿠바 혁명의 네 영웅을 꼽는다면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 그리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피스보트가 쿠바에 도착한 지난달 28일은 마침 시엔쿠에고스가 1959년 비행기 추락사고를 유명을 달리한 지 36년째 되는 기일이었다. 쿠바에서는 볼리비아군에게 게바라가 체포된 10월8일부터 이날까지 20일 동안을 추모기간으로 정해 놓고, 시대를 앞서 살다 요절해 간 두 사람의 넋을 기리고 있다. 게바라의 유명세에 가려 나라 밖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쿠바 안에선 시엔푸에고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날렵한 베레모를 쓴 채 언제나 심각한 표정인 게바라의 초상과 달리 밀집모자를 쓴 시엔푸에고스의 초상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논쟁적이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게바라와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동지였다고 전해진다. 혁명 직후 대중 연설을 하던 카스트로가 고개를 돌려 연단에 있던 시엔푸에고스에게 “카밀로,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잘 알려져 있다. 카스트로의 투옥과 이어진 국외추방의 도화선이 된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시엔푸에고스는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근거지로 한 쿠바 혁명 과정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이른바 ‘혁명군 제2대’를 이끌며 투쟁을 주도했다. 혁명 뒤 숨지긴 전까지 10개월 남짓 기간 동안에는 토지개혁을 주도하는 한편, 군의 최전선에서 신생 혁명을 무너뜨리려는 ‘반혁명 세력’ 소탕작전을 지휘했다. 시엔푸에고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선 논란이 분분하다. 심지어 그를 반공주의자로 분류하는 이들까지 있다. 그의 부친과 형이 유명한 급진 좌파 활동가였던 것으로 미뤄 이는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가 스탈린식 교조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점에는 상당수 역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는 혁명 뒤 카스트로가 이끄는 국가평의회의 교조적 행태에 유감을 표시하며 공직에서 물러날 뜻을 밝혔다가 반역죄로 몰린 혁명동지 우베르 마토스의 투옥을 끝까지 반대했었다. 마토스는 이후 20년 간 카스트로의 감옥에서 투옥생활을 한 뒤 현재 미국에서 반 카스트로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혁명이 성공한 지 10개월 만에 시엔푸에고스가 숨졌을 때 게바라는 “카밀로와 같은 인물은 숨을 거둔 뒤에도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다”며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영혼은 인민들이 명하기 전까지 영원히 그들 곁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헌사한 바 있다. 매년 10월8일 추모기간이 시작되는 날 쿠바 전국의 소년단원은 “체 게바라 같은 삶을 살겠노라”는 엄숙한 다짐을 한다. 반면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숨진 10월28일엔 수많은 이들이 강이나 바닷가를 찾아 꽃 한 송이를 물 위에 띄우며 그의 넋을 기린다. 시엔푸에고스의 주검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 2005-11-15 오후 01:26:46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79781.html
1958 - 요한 23세, 제262대 로마 교황에 선출 로마의 교황(재위 1958∼1963).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북부 알프산 자락의 소토 일 몬테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안젤로 G.론칼리. 북이탈리아 밀라노 출생. 1904년 사제에 서임된 후, 1931년부터 교황청의 외교관으로 활약하다가 1953년에는 추기경, 베네치아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1958년에는 교황에 선출되었다. 6년간의 재임기간이었으나, 1962년 가톨릭의 교회쇄신과 현대에의 과감한 적응을 지향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고, 1963년 회칙(回勅) ‘지상의 평화’를 발표, 세계평화 ·남북문제 ·노동문제 등 현대 인류사회의 여러 가지 현안 해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 65년 바티칸 제2차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내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naver
1955 - 마이크로소프트사 사장 빌 게이츠(Gates, Bill) 출생 게이츠 [Gates III, William Henry "Bill", 1955.10.28~ ] 마이크로소프트 설립, 빌 게이츠(William Henry Gates III) 출생 [오늘의 IT소사]10월 28일 1955년 마이크로소프트사 설립자인 빌 게이츠 사장이 미국 시애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게이츠는 시애틀의 명문 사립중고등학교인 레이크사이드에서 13세의 나이로 처음 컴퓨터를 접했다. 이어 1975년 하버드대학 2학년이던 19세의 나이에 학교를 중퇴하고 폴 앨런과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했다. 빌 게이츠는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성장을 예측하고 첫해 컴퓨터 언어 프로그램인 ‘베이식’을 개발했으며 포트란 등 후속 프로그램의 출시로 1978년 매출액이 처음으로 100만달러를 넘어섰다. 빌 게이츠는 이어 90년대 초반 그래픽환경을 지원하는 윈도 3.1의 성공으로 컴퓨터 업계의 황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후 윈도우 95·98·2000·XP 등 컴퓨터 운영체계를 개발해 시장을 독점하며 고속 성장을 거듭해왔다. /전자신문 2003-10-28 08: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5&oid=030&aid=0000048086
1954 - 대한적십자사 창립 5주년 기념식 역사속 오늘 [1954년 10월 28일] 대한적십자사 창립 5주년 기념식 1954년 오늘! (대한적십자 창립일은 10월 27일입니다. *_@)
- Match Marcel Cerdan contre Tony Zale. Roosevelt Stadium. New Jersey. USA 1948
1949 - 프랑스의 권투선수 마르셀 세르당(Cerdan, Marcel) 사망 세르당 [Cerdan, Marcellin "Marcel", 1916.7.22~1949.10.28] [역사 속의 인물] 피아프의 연인 佛 권투선수 세르당 역대 프랑스 권투 선수 중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마르셀 세르당은 19살 때인 1934년에 프로에 데뷔, 48연승을 거두며 주목 받았다. 이후 연승 중간에 패배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실격패였을 정도로 그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 웰터급 챔피언을 거쳐 유럽 웰터급 챔피언이 되었고 체급을 올려 미들급 정복에 나섰다. 1948년, 미국의 토니 자일을 꺾고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 된 세르당은 일약 파리 사교계의 명사로 떠올랐다. 세 아이를 둔 유부남이었지만 그는 유명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연인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우 헌신적이었고 진정한 사랑을 느낀 피아프는 그를 기린 노래 '사랑의 기쁨'을 불러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미국의 제이크 라모타에게 패해 타이틀을 내준 세르당은 라모타와의 리턴 매치를 앞두고 피아프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1949년 오늘 숨졌다.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그는 117전 109승 4패 66KO승의 전적을 남겼고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세르당과 피아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영화 '라비앙 로즈'(2007년 작)에서 다뤄졌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1년 10월 2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1359&yy=2011
- Vote of Oct. 28, 1940 refusing Italy's ultimatum. "OXI" means "NO."
1940 - 그리스, 이탈리아 최후통첩 거부 [책갈피 속의 오늘]1940년 그리스, 伊최후통첩 거부 1940년 10월 28일 오전 4시경 그리스 아테네 주재 독일대사관. 파티가 끝나갈 무렵 에마누엘레 그라치 이탈리아 대사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그리스 총리에게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1929 - 세계 경제 대공황 확산
대공황의 시발점 블랙먼데이 머니투데이 김경환 기자 /머니투데이 2008.09.30 14:47 http://stock.mt.co.kr/view/mtview.php?no=2008093014412394661&type=1&outlink=2&EVEC
1922 - 무솔리니, 로마 진군 1922년 10월 28일 아침 이탈리아 파스타 임시 수상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의용군인 `검은 셔츠단` 4만명이 로마로 진군했다는 긴급보고가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 분쇄` `위대한 이탈리아`를 외치며 퀴리날궁을 향해 행진하는 이들을 제지하는 군경은 보이지 않았다.
- Prohibition Enforced, by Ben Shahn
[오늘의 경제소사/ 10월 28일] <1535> 금주법 1919년 10월28일, 미국 의회가 볼스테드법(Volstead Act)을 통과시켰다. 정식 명칭이 전국 금주법(National Prohibition Act)인 이 법의 통과로 이듬해부터 술의 제조와 판매, 수송과 수출입이 전면 금지됐다. 폐해에도 정치권은 금주법을 감쌌다. 표를 의식해서다. 금주법이 최대 이슈였던 1928년 대선에서는 옹호자인 공화당의 후버가 대통령에 뽑혔다. 금주법이 폐지된 것은 1933년. 대공황을 맞아 대형 사업을 벌이던 루스벨트 행정부는 세수확보를 명분으로 헌법까지 수정하며 술에서 세금을 걷었다. 이후 금지법은 악법의 대명사로 굳어졌다. 우리에게는 이런 게 없을까. 인터넷 규제에서 경제 규제까지 반시장적 법률이 낭비와 악을 부른다.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0/27 17:27:27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0/e2009102717271997490.htm
1918 -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선언 제1차 세계대전 중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전을 바라면서도 참전해야 하는 불운을 겪었으며, 마사리크·베네시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헝가리에서 분리된 슬로바키아와 더불어 단일국가를 형성하였다. 1918~1938년까지의 기간은 제1공화국시대인데, 1918년 10월 28일 독립이 선언되고, 1920년에는 헌법이 채택되어 마사리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1927년, 1934년에는 재선되었다. 그 결과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두 민족 외에 독일인 ·헝가리인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로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국가가 되었다. /naver
1914 - 미국의 의사, 의학자 조나스 소크(Salk, Jonas) 출생 소크 [Salk, Jonas Edward, 1914.10.28~1995.6.23] 소크는 최초로 유효한 소아마비 백신(소크백신)을 개발한 미국의 의사이다.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소아마비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52년 미국에 5만 8,000명의 소아마비 환자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3,000명 이상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사태가 발생하자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기존의 이론으로는 항체를 형성하는 데 소아마비 바이러스의 활성인자가 필요하다고 알려져 왔으나 그는 비활성 바이러스가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백신을 개발해서 인체실험을 시작했고, 그 실험은 자신과 가족들에게도 행해졌다. 1954년 미국의 180만 취학아동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이 이루어졌고, 1955년 4월 12일 마침내 백신의 효력과 안전성이 공식 발표되었다. 그 결과 1962년까지 새로운 소아마비 발생건수는 대략 1,000건으로 떨어졌고, 1995년 소아마비는 웨스턴 헤미스피어 전지역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으며 이제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에 감염된 사람이 에이즈 환자로 진행되는 것을 막는 백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미국 자유훈장 등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각 개인들은 그들의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각자 표현하고 실행해야 하는 예술을 내부에 지니고 있다."
- 조나스 E. 솔크, 1991
- 'Portrait of John Edwards'
베이컨 [Bacon, Francis, 1909.10.28~1992.4.28] 더블린 출생. 16세 때 가정을 떠났으며, 런던·베를린·파리 등지를 방랑하면서 독학으로 그림과 실내장식을 익혔다. 그후 런던에 정착하여 장식관계의 일로 생활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민간방위업무에 종사하였다. 대전 말기부터 유채화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어, 강렬한 표현력으로 주목을 끌었다. 주제가 되는 인물이나 동물은 과거의 명화(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등)나 사진을 통해 얻고, 이를 상징적인 유기적 형태로 변형시켜,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폐쇄공간 안에 배치하였다.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작품은 초현실주의에 가까웠지만, 근년의 작품에서는 모티프의 변형과 격렬한 필치에 추상표현파와 비슷한 점이 보인다. /naver
- 한국 YMCA 50주년기념 (1953.10.25. 발행) - 우리나라 YMCA 창립 90주년 기념 (1993.10.28. 발행)
1903 - 황성기독교청년회 발족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정동유니온클럽에서 창립 총회를 열었다. 꼭 100년 전 오늘, 참석자들이 헌장 초안에 만장일치로 서명함으로써 서울 YMCA가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창립 첫 회원은 미국·영국 등 6개국 37명으로 구성했다. 청년회 설립은 1899년 기독청년 150여명의 서명을 받아 언더우드·아펜젤러가 한국 YMCA 창설을 촉구하는 서한을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제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설립 초기, 고종은 청년회를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와 유사한 정치단체로 생각해 내심 불안하게 생각했으나 곧 오해가 풀려 1908년 종로의 현 위치에 회관이 개관될 때는 황태자를 보내 축하해 주었다.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란 말은 ‘청년회’가 처음 사용한 말이었는데 다른 단체가 너도나도 자기 명칭으로 삼으려 하자 청년회가 그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정부에 진정서를 내는 해프닝도 있었다. 청년회는 선교활동에 힘을 쏟고 농구·스케이팅·배구 등 근대 스포츠를 도입하는 것 못지않게 민족 독립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06년 도쿄에 설립된 한국 YMCA는 2·8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됐고,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9명이 YMCA와 관계 있는 인물이었다. /조선
1886 - '자유의 여신상' 제막
1885 - 스웨덴의 정치가, 총리 페르 알빈 한손(Hansson, Per Albin) 출생 한손 [Hansson, Per Albin, 1885.10.28~1946.10.5] 스웨덴의 사회민주당 정치가, 총리. 1932~46년 4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내면서 1930년대초의 경제불황에서 나라를 구하고 중요한 사회복지법안을 제안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 스웨덴이 중립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했다. 정치에 입문한 한손은 사회민주당의 당수가 되어(1925) 군비지출을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새로운 전함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지원했고, 1928, 1932년에 사회민주당의 완전한 무장해제 계획안에 반대했다. 그는 정부의 공채위원회(1929~32)에서 일하다가 1932년 총리가 되어 농민당과 연합하여 강력한 불황타개 계획안에 대한 의회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한손 내각은 공공시설 건축을 위한 조치를 시행하고 농업지원 정책과 재정확대를 꾀했으며, 실업보험(1934)과 노후연금제도(1935, 1937)를 시행했다. 1936년에 노동자의 임금은 경제공황 이전의 수준으로 올라갔고, 1930년대말에는 실업률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1936년부터 한손은 스웨덴의 방어시설 확대를 지지했고 불가침조약을 맺자는 독일의 제의를 거부했으며,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과 상호안전보장 협정을 맺으려고 애썼다. 1939년 12월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 겨울전쟁이 벌어지자, 한손은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 이 내각은 스웨덴의 중립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손은 사회민주당 단독내각을 구성했지만 이듬해에 죽었다. /브리태니커
1874 - 중국의 혁명가 황싱[黃興] 출생 황싱 [黃興, 1874.10.28~1916.10.31] 중국의 혁명가. 자 극강(克强).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출생. 우창[武昌]의 양호서원(兩湖書院)을 졸업한 후 탕차이창[唐才常]의 자립군(自立軍) 봉기에 가담하였다가 난을 피하여 1901년 일본에 유학하였다. 1903년 귀국하여 쑹자오런[宋敎仁] 등과 함께 화흥회(華興會)를 조직하고, 가로회(哥老會)와 결탁, 창사에서 거병(擧兵)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하였다. 1905년 도쿄[東京]에서 쑨원[孫文] 등과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 그 서무간사(庶務幹事)가 되어 쑨원 다음가는 지위에 있었다. 이 후 광둥[廣東] ·광시[廣西] ·윈난[雲南]에서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지휘했고, 1911년의 광저우[廣州]에서의 봉기 때에는 죽음을 면하였다. 같은해 우창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한커우[漢口] 방위에 실패하였다.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에 가서 혁명정부 수립에 분주,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임시정부에서는 임시 대총통 쑨원 밑에서 육군총장(육상)에 취임, 사실상의 수상이라 일컬어졌다. 이 무렵부터 쑨원파와 사이가 멀어졌고, 1913년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반대하는 제2혁명에서는 난징에서 거병하여 실패하고 미국에 망명, 쑨원의 중화혁명당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제3혁명(1915) 후 1916년에 귀국하여 쑨원과도 합작하였으나, 얼마 후 상하이에서 과로로 죽었다. /naver
1866 - 스페인의 작가 라몬 델 바예 잉클란(Valle-Inclan, Ramon del) 출생 바예 잉클란 [Valle-Inclán, Ramón Maria del, 1866.10.28~1936.1.5] 스페인의 소설가·극작가·시인. 감각적인 언어로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갈리시아의 시골에서 자랐고 법과대학을 나와 멕시코 시를 다녀온 뒤 마드리드에 정착했다. 마드리드에서 그는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최초로 주목을 받은 작품인 〈소나타 Sonatas〉(1902~05)는 4편의 중편소설로 아름답고 풍부한 산문과 세련되고 우아한 퇴폐주의적 어조가 특징이다. 가장 뛰어난 에스페르펜토(무섭고 몹시 불쾌한 사람이나 사물을 뜻함) 양식의 희곡으로는 〈보헤미아의 빛 Luces de Bohemia〉(1920)·〈돈 프리올레라의 질투 Los cuernos de Don Friolera〉(1921) 등이 있고, 대표적인 후기 소설로는 〈La corte de los milagros〉(1927)·〈Viva mi dueño〉(1928) 2편이 있다. 이밖에 미완성작 〈Baza de espadas〉(1958)는 역시 미완성으로 출간한 9권짜리 연작 역사소설 〈이베리안 서클 El ruedo ibérico〉(1927~28)의 일부분이다. 이 연작소설 중 완성된 작품들은 19세기 말엽 스페인의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타락을 다루고 있다. 그의 〈Tirano Ban-deras〉(1926)는 라틴아메리카의 한 독재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브리태니커
1846 - 프랑스의 요리사 오귀스트 에스코피에(Escoffier, Auguste) 출생 에스코피에 [Escoffier, (Georges-)Auguste, 1846.10.28~1935.2.12] 프랑스의 요리사. '요리의 제왕'으로 알려져 있다. 런던의 사보이 호텔(1890~99)과 칼턴 호텔에서 요리장으로 일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에스코피에는 12세에 요리 일을 시작하여 74세에 칼턴 호텔에서 은퇴할 때까지 62년 동안 요리를 했으며, 그의 일생은 이 직업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890년에 문을 연 사보이 호텔에 요리장으로 발탁되면서부터이다. 에스코피에는 1893년 사보이 호텔에 묵었던 유명한 여가수 넬리 멜버를 기념하기 위해 페슈 멜바(피치 멜버)라는 요리를 만들었다. 1899년에는 칼턴 호텔로 자리를 옮기고 그후 23년 동안 고급 요리를 계속 만들어내 엄청난 명성을 쌓았다. 빌헬름 2세는 어느날 "나는 독일의 제왕이지만 당신은 요리의 제왕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 요리가 해외에서 명성을 얻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1920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928년에는 훈장을 관리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마리 앙투안 카렘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저서로는 〈르 카르네 데피퀴르 Le Carnet d'Epicure〉(1911), 필레아 질베르 및 에밀 페튀와의 공저인 〈요리의 길잡이 Le Guide Culinaire〉(1903)·〈메뉴책 Le Livre de Menus〉(1912)·〈나의 요리법 Ma Cuisine〉(1934) 등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일류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하나인 사립종합대학 하버드대가 1636년 10월 28일 설립되었다. http://iam0101.new21.net/zbxe/?mid=study_history&category=2443&document_srl=3053
1492 - 콜럼버스 쿠바 발견 항해의 준비는 핀손 3형제의 협력을 얻어 진행되었는데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3척에 1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마침내 파로스 항구로부터 그토록 꿈꾸어오던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카나리아 제도에 정박한 후 9월 6일, 고메라 섬을 떠나 북위 28˚선상에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침편차와 사르갓소 해의 불안을 극복했다. 10월 12일에는 구아나하니라고 불리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지금의 와틀링 섬)에 도착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한 부분에 도착한 것으로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기 위해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제자') 섬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곧 원주민인 인디오들로부터 황금과 향료가 나는 땅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쿠바 섬으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아이티 섬)까지 항해했다. 그러나 1492년 크리스마스 밤, 산타마리아 호가 좌초하여 난파했기 때문에 급히 나비다 거류구를 설치하여 약 40여 명의 인원을 잔류시킨 뒤 귀환길에 올라 1493년 3월 15일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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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