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학교 건축공학과3학년 -임선익
안녕하세요. 저는 임선익이라고합니다.
저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합격수기를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 감히 두서 없이
적어봅니다..
그리고.. 이번에 함께 합격하지 못하신 분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봅니다.. 결코 그 분들이 덜 고생하여서 떨어졌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걸 요즘에서야 깨달았습니다. 힘내세요.. 여러분들에겐 경찰의 꿈을 포기하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합격수기란에 글을 쓰려면 현직등업이 필요한데 그것이 되지 않아 합격수기를 못 올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59기 분들께서)
저는 시골중학교와 실업계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대학교1학년 1년간 23학점을 이수하고 학점은1.9(꼴등)였습니다.
가정형편은 어려워 기초수급대상자였습니다.
그리고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경찰이 되겠다는 꿈을..
2년2개월의 군생활. 전역하는 날 새벽까지 책을 보았습니다.
토익935, 사법고시,경찰간부 공부, 한자2급 을 가지고 부대 입구를 걸어나왔습니다. 전역날 전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서울행 버스를 타고 경찰청으로 갔습니다. 군복을 입고 경찰청 입구 앞에 서서 다짐했습니다.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복학하여 과1등을 하였습니다. 1년간 학교공부와 기독교동아리활동, 경찰간부시험 공부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제59회 경찰간부후보생시험에 합격(87년생) 하였습니다.
너무 어린 제가 감히 이 어려운 시험에 아무것도 모른채 합격한게 아닌가 싶어 빚진 기분으로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쓰면서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 싶습니다. 합격수기는 자기자랑이 반이라고 하여 주저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도 수험생일적 합격수기를 읽으며 너무 많은 위로와 격려가 되었었습니다. 어린 친구의 글이지만,
가감하여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실업계출신이신분..전에 공부를 못했던 자신의 과거의 모습때문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시는 분, 군입대를 앞두신 수험생분, 가정형편이 어려우신 분..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군 입대전
어릴 적 저는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그리 화목하지만은 못했던 시절 이였던 것 같습니다.
위로 누나가 두 분 계신데, 누님들이 초 중학교를 다닐 무렵, 제가 초등학교1학년일 무렵엔
비닐로 만든 비닐하우스에서 3년 간 살기도 했습니다. 화장실도 없고, 쥐가 다니는...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태풍이 부는 날 이였
는데, 스티로폼 지붕이 날라간 것 이였죠. 동화에서나 보았을 듯한 일이였죠. 자다가 이마에
맞은 그 빗방울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 전주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어릴 적 70~80년대 중동의 사막 한복판에서.. 가족과 조국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며 건설현장에서 일하시는 건축근로자분들을 보며...건축으로도 애국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이러한 동기로 실업계고등학교에 지원한 것이고, 사실대로 말하면 공부를 잘 하지 못했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였습니다. 총학생수가 210명 정도인 시골중학교인지라 내신은 괜찮은 편이였는데, 운이 좋게도 전주공고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동네 시장 닭집 앞에..조그마한 플랑카드가
걸렸는데, 학교선생님이 지나가며 그것을 보고 수업시간에 말해 친구들에게 웃음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모의고사450점 만점에 250점을 받고 1등을 하였던 저였습니다. 컴퓨터게임에 빠져 게임만 하는 그런 친구였고,
밤에 몰래 기숙사에서 나와 당구를 치러가던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또 운이 좋게 인하대학교 건축학과에 수시
지원하여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대학1학년이 되어서야 저는 고배를 마시게 됩니다. 당장 수업진도를 따라갈 수 없을만큼 저의 수학능력은 매우 떨어져 있었고, 혼자 집을 떠나 생활하는 데서 찾아오는 외로움, 때맞춰 찾아온 사춘기는 저를 방황케 하였습니다. 왜 사는지, 나는 왜 이 곳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공부하고 왜 돈을 버는지.. 쉽게 그 물음표에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던져 놓고서 답을 찾지 못해 또 방황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기독교동아리(ESF)에 들어가고 교회를 다니게 된 때도 이때즈음 이였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는 위의 질문들, 하지만 금새 잊어버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이였습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오늘의 열매를 맺히게 되었습니다.
1학기를 마칠 무렵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이혼하셨습니다. 집에 내려갔습니다.
그 곳엔 한 쪽 발이 없으신 외할머니와, 12년간 다니신 식당에서 해고당하셔서 법정다툼을 하고 계신 어머니, 공무원공부를 하고있는 두 누님, 17평 방한칸짜리 아파트..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는 기초수급대상자가 된 저희 가족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년 등록금 천만원짜리 대학생인 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저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대학생인 아들에게 아무말 않하시고 부족함 없이 용돈을 보내주셨던가... 내가 놀고, 먹고, 편히 자고, 시험시간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 이런 나를 위해서 450만원을 내 주셨구나..
사람이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꼭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치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저는 그 날 다짐했습니다. 이제 일어서야 겠다고..
내려온 날 다음날 부터 개학날 까지 60일간 저는 막일을 하였습니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방역작업을 하였습니다. 하루에 두번 일을 한 셈입니다. 두 달간 매일 17~8시간을 일하고 이틀 정도를 쉰 것 같습니다.
견디기 어려웠지만 어렵다고 그만 둘 순 없었습니다. 이렇게 삶에 부딪치다보면... 뭔가 얻고 깨닫겠지 하는 마음으로..하루하루를 견뎠습니다.
힘들게 일은 하였지만, 별 달라지지 못한 모습으로 2학기를 마쳤습니다. 외로워 잠시나마 사람에 기대본 적이 있었는데, 결국 상처만 받고 말았습니다. 젊은 날의 방황은 쉽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다시 공장에 들어갔고, 45일 동안 32일 정도를 연속철야근무를 하였고 철야근무가 없는 날도 15시간 이상 일했습니다. 육체의 고통으로...정신의 고통을 잊으려 하였습니다... 쏟아지는 코피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즈음, 1년간 있었던 기독교동아리에서 배웠던 성경말씀들이 조금씩 제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막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 였던 저였는데, 이러한 시간 속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이 참 가벼워졌습니다. 가끔씩 성경을 들춰보다보면,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 말씀들이 보였습니다. 어느 날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새 삶을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평소엔 제게 고통과 짐만 되었던 저의 환경들이 아주 작게 느껴지고, 평소 감사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매우 커보였습니다. 나는 우선..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했고, 젊었습니다. 죽는 어떤 이들이 꼭 잘못을 해서 죽는 것만이 아니기에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내가 그만큼 잘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모두 덤이였습니다. 자격 없이 받는 선물같은 것.
이러한 마음을 품고 저는 드디어 마음을 다 잡았습니다. 내 삶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살아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렇다면..산자로서 죽은자에 대한 의무, 건강한자로서 아픈자에 대한 의무, 젊은사람으로서 늙은 사람들에 대한 의무,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할 수 있는 자로서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없는 자에 대한 의무, 삶에 의식주에서 부족함없는자로서 태어나자 마자 기아로 죽어갈 수 밖에 없는 자들에 대한 의무...그러한 최소한의 내게 주어진 의무에만 충실할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그리고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군대생활.
두서없이 쓰는 글이라서 죄송합니다. (내일 입교를 해야 하니 시간이 별로 없군요. 그렇다고 후에 쓰자면 합격수기를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으니 졸문이지만 쓰겠습니다.)
2006년.6.5 해군에 입대하였습니다. 7주간의 훈련소시절. 누구나 힘든 이 시기에 참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후반기 4주간의 교육이 시작되었고 저는 그 때부터 펜을 들었습니다. 저의 수험기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죠.
처음 집에 전화를 하여 한 말이 다름이 아닌 중학교영어단어책을 보내달라는 것이였습니다. 하루 3시간을 넘게 자지 않고 영어단어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빛이 없는 밤엔 몰래 밖에 나가 가로등에서 공부했습니다.
교육성적이 10%안에 들면 원하는 곳으로 보내준다길래 육지근무가 그나마 책보는데 낫지 않나싶어 열심히 공부했고 육지근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예상과 달리 부대의 조리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총 5명 조리병중 4명이 병장이였는데, 막내가 힘이 들어 다른 부서로 가고 또 그 자리를 채운 막내도 못있겠다고 하여 그 자리에 제가 가게된 것이였습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저는 식당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청소만 죽어라 했습니다. 일주일간을 그렇게... 죽을힘으로 일했습니다. 그러자 병장4분의 태도도 조금씩 변화되는 걸 느꼈습니다.
그 때 가장 선임분께 감히 이병이 말을 꺼냈습니다.
"저에겐 이러이러한 꿈이 있습니다. 시키시는것 안시키시는 것 모두 죽을 힘을 다해 하겟습니다. 다만 책만 보게 해 주십시오"
예비역분들이라면 잘 아시겁니다. 이런 상황은 있을 수 없다는 걸. 그러나 그 병장들은 저의 눈빛을 보았고, 부대의 병장들에게 제가 책을 볼 수 있도록 하게 하였습니다. 그 부대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병 때부터 책을 보게 된 것입니다. 무섭기로 소문났던 그 병장들이 전역을 하며 제게 편지 한장을 써주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네가 존경스럽다.'
한자2급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자한자 외워갔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려고 군대에 온 것이 아니므로, 주어진 일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짜투리 시간에 화장실에 들어가 수첩에 깨알같이 적은 한자를 외워갔습니다. 바보처럼 한자시험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외우다가 시험이 내년 4월말에 있다는 걸 늦게 알고 9개월간을 외웠습니다. 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 시험 합격시켜주시면 공부를 계속 하라고 하시는 줄로 알고 열심히 하겠다고 그러나 떨어지면 공부 하지 않겠다고. 이런 어린아이 같은 기도를 하고 모든 걸 걸고 한자를 외웠습니다. 시험보기 전날 그 동안 썼던 깜지노트가 7권정도 되었습니다. 모의고사에선 140개를 맞았고 한껏 자만에 빠져 시험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합격, 그러나 150문제중 105개를 맞아야 합격하는 시험에서 저는 105개를 맞았습니다. 공부는 하되, 겸손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뜻인 듯 보였습니다. 저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제 영어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길어야 2시간 공부할 수 있었던터라 많이는 할 수 없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피곤하지만 최대한 집중하였습니다.
주어, 동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그 때...저는 정말 무섭게 그리고 바보처럼 공부하였습니다. 보고 또 보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또 보았습니다. 제가 머리가 썩 좋지 않다는 걸 깨닫는 때였습니다. 그래마 인 유즈 기본책을 8번 읽었습니다. 그제서야 좀 이해되었습니다. 그 후 텝스책을 사서 5번 정도 보았고, 병행하여 거로보카를 외워갔습니다. 그 즈음에 책장에 꽂혀있던 자서전들을 조금씩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병 때 서진규씨의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란 책을 화장실에서 몰래 읽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습니다. 17살의 어리고 약한 여자도 이렇게 해내는데, 앞으로 2년간의 군생활을 막막하게 생각하는 제 자신이 한스럽고 부끄러워 눈물을 흘린 것이였습니다. '7막 7장', '기적은 당신안에 있습니다'.'어머니 저는 해냈어요' 등등 여러 책을 읽으며 저는 나도 과연 이 사람들을 따라하다보면 이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버드 대학을 동경하게 되었고 사나이가 태어나 공부를 시작했다면 그 목표는 최고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버드대학을 가자는 막연한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어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였습니다.
물론 공부하는 이곳은 군대이고, 공부하기엔 어려운 곳이긴 하였지만 어렵다고 못하는 것은 아니였고 오히려 이곳에서 할 수 있다면 나가서는 더욱 못하랴는 생각으로, 이 곳에서 못하면 밖에서도 못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한창 영어공부를 하던 중에 우연히 산 위에 있는 근무지로 파견가게 되었습니다. 식중독 문제로 조리병이 조리를 해야한다고 하여 5명중 한명씩 한달에 한번 돌아가면서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그 곳에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선 4시간 정도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혼자 음식을 다 해야 했기에 좀 힘든 면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 되지 않았고 평소보다 두배 늘어난 공부시간에 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 근무지에서 내려와 저는 하나님께 두번째 기도를 드렸습니다. 전역하는 날까지 저 곳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한달 뒤, 저희 부대에 속해있던 그 근무지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몇몇 사람들도 전출이 되었는데, 제가 그 속에 끼게 되었습니다. 왜 5명 중 하필 나일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저는 처음 말씀 드렸듯이 본래 조리병이 아니기에 전출이 될 수 있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파견 온 5명중 네가 제일 열심히 하길래 너를 데려간 것이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곳에서 전역하는 날까지 공부를 하다가 내려오게 됩니다.
그 곳은 정말 공부하는데 최상의 곳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게 주어진 일을 아무 말이 나오지 않도록 완벽하게 하였기 때문이였지 않나 싶습니다. 일에서 인정을 받으니 공부한다고 핀잔을 주는 분이 없으시고, 오히려 열심히 한다고 격려해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공부도 적당히 하면 핀잔을 줄지 모르나 목숨걸고 공부하는 제 모습을 보고 누구 하나 뭐라고 하실만한 분도 없으셨습니다.
일에서 인정을 받게 되자 책임간부님께서 조리에 관해선 너한테 모든 책임을 맡길테니까 나머지 시간은 네가 편하게 쓰라고 하셨습니다. 거의 9개월간 저는 거의 모든 휴가를 반납한 채 하루 10시간 정도의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수면시간5시간, 아침.점심.저녁 하는 시간 8시간 을제외한 모든 시간을 공부로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영어공부와 함께 사시를 같이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고시채용과 검사를 함께 생각하고, 또 무엇을 하게 되건 법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전역할 때까지 형법요론 5회독 헌법1회독 경찰학개론3회독 행정학2회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2008년 1월 처음 토익시험을 보았습니다. 산에 있었기에 시험을 보려면 전 날에 밑에 내려가야 했지만 그러면 후임들이 밥을 먹을 수 없어 당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해 놓고서 산을 내려갔습니다. 새벽에는 차량지원이 안되 1시간 반가량을 어두운 겨울산을 귀에 이어폰을 꽂고 내려가야 했습니다. 4시에 일어나 밥을 해 놓고 산을 내려가 부대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시험장까지 쉴 새 없이 가서 숨도 고르기 전에 시험을 보았습니다. 12시에 시험이 끝나면 바로 부대로 복귀하여 저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4번 보았습니다.
1월 775점 2월 850점 3월 925점 4월 935점 이 나왔습니다.
만점이 목표였지만 가산점엔 차이가 없어 다른 공부를 하기로 하고 멈췄습니다. 산에 있던 1년간 잘때에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잤고, 이를 닦을 때에도 빼지 않았고 밥을 할 때도, 화장실에 갈때도 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리스닝 만점을 받았습니다. 전역 할 즈음 산에서 내려올 때 짐을 쌓는데 영어책을 세어보니 28권이였습니다.
4월 달 즈음, 전 병장 3호봉이였는데, 사령관님께서 제가 근무하는 곳에 오셨습니다. 물론 저를 위해 오신 것은 아니지만 사령관, 원 스타, 대령 여러 분, 수행원들 한 20여명이 되시는 분들이 식당에 들어오셨고 사령관님께서 혼자 식당에 있던 저에게 기립박수를 쳐 주셨습니다. 일개 병을 위하여 사령관 이하 지휘관분들이 박수를 쳐 주신 것이였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처음 자서전을 읽으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의심하며 따라해왔던 지난 2년이 떠올랐습니다.
병장 5호봉 때.. 군대로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만감이 교차하는 중에 저는 영어단어책을 집어들었습니다....가는 버스안에서.. 몇 글자 일기를 쓴 후.. 미친 듯.. 단어를 외웠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한 구석으로 갔습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밤새 영어단어를 외웠습니다. 다른 가족분들은... 저에게 아무말도 걸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상하게 바라보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것이 제가 외할머니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자신이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해 하시던 외할머니에게 드리는...손자가 드리는.. 최선의 삶.
이것은 죽은자에 대한 산자의 의무와도 같은 것이였습니다...
전역하는 날 , 전역동기들을 대표로 제명지휘를 하고서 전역식을 마쳤고 그렇게 저의 군생활을 마쳤습니다.
-군대를 앞둔 수험생분들에게-
군대는... 세상에선 배울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대를 거쳐가신 여러 예비역분들도 아실테지만..
선임 잘못 만나면 군생활 힘들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선임은 후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주변의 어려운 환경은 우리를 짖누르는 짐이라기 보다 후에 꿈을 이루는 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루었노라' 말할 수 있게 하는 악세사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군대에서 벌거벗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죠.
◆전역 후 첫번 째 시험까지
2008년 7월 말 전역을 하였습니다. 그 땐 편입을 할 계획이 있었는데 고대법대를 가기 위해 토플만점을 향해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것도 잠시 한달정도 공부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로스쿨이 생겨서 법대편입이 안된다는 사실을 전역하고 나서야 알게된 것이였습니다. 그럴바엔 그럼 학교안다니고 시험부터 합격하자는 생각으로 저는 인천에 올라왔다가 다시 집으로 내려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우연찮은 계기로 저는 이제 막 다니게 된 교회 목사님과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창 공부욕심에 가득차 있던 저의 모습,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지도 어느새 잊어버리고 공부 그 자체에 빠져서 있던 저. 그저 분주하기만하고 보기만 해도 무서운 기세로 열정을 태우던 그 때에 목사님과의 성경공부시간은 제게 올바른 길을 제시 해 주는 시간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때도 겨울이였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4시반 저는 일어나 자전거를 30분간 타고 교회로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마친 후 목사님과 2~3시간씩 일대일로 성경을 배웠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잊지 못합니다. 이 시간에 저는 꿈을 경찰로 확정하게 됩니다. 그 동안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저의 마음 속엔 나도 나 자신을 속이면서 권력과 명예, 부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그저는 고시서적을 찢어버렸습니다. (절대 사법고시시험을 나쁘게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한 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경찰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손을 뻗으면 가장 삶의 밑바닥까지 닿을 수 있는 조직... 수 많은 욕을 얻어먹으면서도...묵묵하게 일을 수행하는 경찰관들.. 밤낮으로.. 전시가 아님에도 목숨을 다해 주어진 사명에 한 삶을 고스란히 바치는 경찰...세상의 가장 더러운, 어두운, 슬픈 그 곳에 몸소 뛰어 들어 빛을 밝히는 조직이 바로 경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워있어도 가슴이 뛰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2008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집에 내려와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하루 20시간 공부했습니다.
육체의 피로...외로움... 이런 것들은 더 이상 제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험날까지.. 7과목 그래도 한번이라도 다 보고 들어가자는 심정으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민법은 3일만에 다 보았습니다.
그렇게 책을 보고 2.14일 첫 시험을 보았습니다.
경찰학개론: 77.5
형법:80
영어:82.5
수사:90
행정학:65 평균78.5
생각보다 잘 나온 점수에 희망이 부풀었습니다.
◆학교생활
2009.3월 학교에 다시 복학하였습니다. 그래도 졸업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평소관심있던 정치학과 법학, 행정학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동아리 활동을 하였습니다. 대학교의 거리를 지나다니는 수 많은 사람들.
저도 2005년에는 저 사람들 중 어느 한 사람이였을 것입니다. 그런 저에게 사랑을 전해준 사람들. 그래서 오늘 제가 이렇게 변했다고 생각하니, 저도 거리의 사람들이 그 날의 저처럼만 보여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나의 한마디가 어쩌면 무미한 삶을 살고 있는 저 사람들의 삶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을텐데..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기중엔 학교수업을 듣느라, 동아리활동, 주일엔 교회를 가느라 그리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책을 안 볼 순 없어 한달에 두 과목 1회독씩 하였습니다. 1학기 동안 4과목 1~2회독씩 하였습니다.
1학기 저는 과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꼴등이였던 전 돌아와 일등이 되었습니다.
방학때인 7,8월에 주관식 두과목을 공부했습니다. 동영상강의로 집에서 들었습니다.
2학기 때에는 주관식을 아침1시간 저녁1시간 매일 공부했고 시간이 조금 남으면 나머지 공부를 했습니다.
시험에서 행정학이 부족했기 때문에 행정학에 좀 더 집중했습니다. 보통 새벽2시까지 공부했습니다.
12월 크리스마스를 보낸후 집에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두달간... 모든 것을 걸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지금 두달... 누구나 고생을 하는 것은 똑같지만 지금 조금만 더 고생하면 합격할테고,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공부한다면 1년 더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2달 좀더 고생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한달간 14시간정도 하다가 마지막엔 19시간까지 했습니다.
원래 조금 마른편인데 살이 10k가 빠졌습니다. 빠질 살도 없는지 알았는데...
엉덩이에서 피가 났습니다. 살이 없는데 앉아만 있어서 살이 딱딱해져 조금 찢어진 듯 했습니다..
고승덕씨 자서전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이란 없다' 란 책을 두달 간 두번 정도 읽었는데 거기서도 고승덕씨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고 해서 대단하고 생각했었는데, 나도 나는 걸 보고 합격 못하면 억울하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2월25일까지 공부하고 26일 광주에 내려와서 27일 시험을 보았습니다.
경찰학개론:65
형법:82.5
영어:80
수사:87.5
행정학:92.5
행소:60
민총:71
울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조차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을 그제서야 흘렸습니다.
합격자 명단을 보고..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4시간 동안 끊임없이 축하의 전화가 왔습니다..
아... 해냈구나...
여기까지가 저의 이야기 입니다...
★과목별 교재(총회독수)
경찰학개론- 조영진 도해식(8), 실무문제집(4)
형법 - 형법요론(5) 신형법요론(3) 신형판총(4) 최신판례 2008,2009,2010
행정학- 알파행정학(2) 열린행정학(1) 선행정학(8)
수사-신우리수사(8) 실무문제집(4)
영어- 영어은...수험기간동안 따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형사소송법-김복규
민법총칙-윤동환
★공부방법
전 수험기간이 짧습니다. 더구나 여러가지를 하면서 해야 했기에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영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영어공부를 했고 편입준비도 해서 영어를 따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유는 공부양을 늘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가장 기본서와 문제집만 풀었습니다. 토탈기출등을 풀지 않았습니다. 기본서와 실무를 정확히 알고 기출문제풀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확신으로 공부했습니다.
주관식은 별표처리가 된 것만 외웠습니다. 형소는 60개정도 민법은 50개정도 외웠습니다. 띄어쓰기까지 외웠습니다... 주관식은 사례와 단문하나씩만 썼습니다. 두과목 다 하나씩 쓰지 못했는데 그래도 점수가 괜찮은 거 보면 완벽하게 암기한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무식하긴 하지만요..
단문의 목차를 수첩에 다 적고서 걸어다닐 때 보면서 외웠습니다. 밥먹을 때도 옆에 두고 외우고 화장실에서도 외웠습니다. 걸어다닐 때 보시는건 비추입니다. 교통사고 날 뻔했습니다.
저는 1년을 수험기간으로 본다면 10달은 나머지 시험 전 2달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2달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전 이 2달에 과목별로 4회독정도를 한 것 같습니다.
저는 동영상강의로 공부했습니다. 학원은 다니지 않았습니다. 돈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기에 학원을 다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좋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저는 공부시간이 하루 18시간 이렇게 했다고 적었지만 그것도 계속 그런 것은 아니고 시간이 촉박했기에 그리고 짧은 기간만 그렇게 한거여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지 하루 12시간 이상 공부하는 것은 그리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무리한 공부는 오래가지 못하고, 현명하지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대로 하시면 되겠고, 특히 꾸준한 운동은 필수 입니다.
★마치며
제 이야기가 매우 길어졌습니다. 대신 공부방법은 매우 짧네요.
제가 합격수기를 쓴 이유는 공부방법을 알려드리기 보다 공부하시다가 이 글을 읽으시면서 머리도 식히시고 가능하다면 조금 격려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사실 공부방법을 몰라서 합격하실만한 노력을 했는데도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공부방법은, 교재는 조금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저는 저의 몸짓 하나가 잘못된 지식하나가 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쉽게 엉덩이를 의자에서 뗄 수 없었습니다.
경찰이라는 직업.. 여러분들에겐 어떠한 의미이신지요.
전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경찰간부를 명예를 위해서 하려는 것이라고..
명예는 간부라서 있고 비간부라서 없고 그런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명예는 어깨에 달려있는 계급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손과 발에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묵묵히 자신들의 어깨 위에 올려진 의무를 지기 위하여 땀을 흘리시는 경찰관분들의 땀방울이 바로 명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경찰은 경찰시험에 합격해야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저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자신이 경찰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그 순간에 이미 그 사람은 경찰이 된 것이고 그 순간부터 매사에 경찰관으로서의 품의를 지키며 행동해야 합니다. 시험은..그것을 확인해 주는 절차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시험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 경찰관의 기상을 기대해 봅니다.
힘내세요...! 힘내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꿈은 이루어지면 좋고 안되면 마는 그런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경찰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충 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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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 좀 길지않나요??
예 해군이라 그런가보네요 ㅜㅜ
거짓말아님?거짓말인것같은데....합격나이가 너무 이르고.......너무 글이 장황하고 길어요....일반적인 합격수기와 너무 다른데요
원래 합격수기는 좀 각색이 되죠. 자기 군생활이 원래 람보 군생활이랑 맞먹잖아요 ㅎㅎㅎ
경찰간부셤인데 당연히 장황하죠..원래 머리가 좋은듯..아무나 저렇게한다고 저점수가 나올까?천재네..천재여
기초수급대상자 혹시 가산점 없나여? 국가유공자처럼.....아님 말고....ㅋㅋ
박수~~!!
군대생활 같이 한 후임입니다. 군대생활 구체적인 수치는 모르지만, 대략적인 군대생활은 사실입니다.. 선익아 잘살고 있니? 그 정도로 열심히 살던 사람 검색하면 몇년있다가 어떻게 살까하고 검색해봤어요. 혹시 이글 보면 01047449875 연락해 밥한끼먹자 나 31기 민성호
추가적으로 위 댓글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한데 짧게나마 저 생활에 껴있었던 사람으로써 말씀드리는데 이런 글에 거짓으로 글올릴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나태해지면 우리 임선익수병님 생각하면서 마음을 바로잡을때도 있었습니다. 평생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 옆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연락이 닿으지 모르겠지만 고맙다 선익아 합격해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