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전 사량벌국'장수'와 후 사벌 '왕'
동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랜 기록으로 평가받는사마천「 사기 」, 반고의「한서」., 범 엽의 「 후한서 」 와 함께 진수의 「 삼국지 」 (三國志) 는 '전사사' ( 前四史 )로 불리며 동아시아 역사를 집대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사서들은 역대 학자들이 매우 중시하였다. 이들 중 진수의「 삼국지 」 는 기전체로 된 삼국의 역사여서 표(表)나 지(志) 의 편제가 없다.
본디 이들 위 (魏)- 촉 (蜀)- 오 ( 吳) 의 3지 (志)는 독립되어 있지만 후세인들이 합쳐서 한 책을 편입시켰다. 그런데 위의 군주를 ' 제'(帝)라 칭하여 「 위지 」(魏志)만 제왕의 사적을 기록한 '기' (紀)를 편재한 반면 촉과 오의 군주는 ' 제'라고 칭하지 않아서 「 촉지 」 , 「 오지 」에는 없이 ' 전' (傳)에 넣고 있다.「 삼국지 」는 한나라 이후 위촉오 삼국시대의흥망성쇠와 이들 삼국 간의 정치,군사 투쟁.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실적을 전체적으로 반영하고 있어 이 시대 연구에 중요 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삼국지 」에는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대한 기록을 싣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이 사서는 서기 3 세기 중엽의 각 민족의 민족지 ( 民族誌 )적 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서 사료 기술의 맥락을 살펴서 원용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후삼한 즉 원삼국 시대의 지형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진한은 처음 여섯 나라로 구성되었지만 점차 나뉘어져 열 두 개 나라가 되었다. 변진 또한 열 두나라이다.
또 여러 조그만 벌읍 (別邑) 이 있다.각각 우두머리가 있는데 큰것은 신지 ( 臣智 ) 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 ( 險側 ), 그 다음은 번예( 樊濊 ), 그 다음은 살해 ( 殺奚 ), 또 그 다음은 읍차 (邑借)라 한다. (······) 변한 진한을 합치면 스물 네 개 국이다. 큰 나라는 사오 천가가 되고, 작은 나라는 육 칠백 가가 되어 전체는 사 오만 호이다. 그 중 열 두 나라는 진왕 (辰王)에 소속되었다. (······) 토지는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오곡과 벼를가꾸기에 알맞다. 또 누에치기애 밝아 비단을 만들었으며 말과 소를 타고 부렸다. 시집가고 장가가 예속은 남자와 여자와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으로 죽은 자를 보내는데. 그 뜻은 죽은 자로 하여금 날아오르게 하고 자 함이다. [「위략 」(魏略)에 이르기를 ' 그 나라는 집을 지음에 나무를 가로쌓아서 만드는데 마치감옥과같았다'고 한다. ] 나라에는 쇠 [ 鐵 ]가 나는데 한 (韓)· 예 (濊)· 왜 (倭) 모두가 가져간다. 모든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쇠를 쓰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또 두 군에 도 공급해 주었다. 풍속에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거문고 [ 瑟 ] 라는 악기가 있는데 그 모양은 축(筑)과 같 았으며 그것을 타는데 역시소리와 곡조가 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문득 들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고자 하였는데 지금 진한인들은 모두 편두(扁頭)이다. 남자나 여자나 왜에 가까워 역시 문신 (文身) 을 하였다. 보병전에 익숙하였는데 병장기는 마한과 같았다. 그 풍속에 길을 가다가 만나면 모두 가면서 길을 양보한다. 변진은 진한과 서로 섞여 있다. 역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진한과 같고 언어와 법속도 서로 비슷하나, 귀신을 제사지내는 것은 다르다. 부엌을 모든 문은 서쪽에 두었다(하략). (······) 라고 하였다. 36 ) 상고기 고조선 이래 소국의 지배자 혹은 통솔자를 '거수'(渠帥) 또는 '長帥'로 불렀다.
전삼한과 달리 후삼한 즉 원(原)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진한12국과 변한나 12국 때 이들의 이름은 대게 진왕(辰王)밑에 '신지'(臣智)와'읍차'(邑借)혹은'신지', '험측'(險側),'번예'(樊濊).'살해'(殺奚),'읍차' 등으로 불러왔다. 나라의 크기에 따라 우두머리의 크기도 위계가 있었다. 신지 - 험측 - 번예 - 살해 - 읍차의 위계는 '가'와 ' 호'의 규모에 따라 붙여진 통치자의 위계라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분화와 삼조선의해체이후 이주가 시작되면서주민들은 반도로 내려와 낙강 서북부와 동남부에 정착했을 것이다.
기원전 2 세기경에 낙강 서북부에 형성된 사량벌국 37 ) 은 경북 상주에 있었던 고대국가였 다. 사량벌국은 초기의 목책 혹
은 토축성을 기반으로 이웃의 소국을 병합하면서 세력을키워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의 성곽은 대개 목책 (木柵 ) 에서 토축성 (土築城)으로 그리고 석축성 (石築城) 으로발전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석성(石城 ) 은 삼국이 고대국가로발전을 시작한 3 세기 이후 산성에 먼저 나타났을 것 38 ) 이다.
당시 사량벌국은 소국이었지만 여타의 소국과 달리 낙강 동남부에 자리한 경주의 사로국에 맞선 강력한 소국이었다.
이 때문에 사량벌국은 제일 규모가 큰 소국이어서 이곳의 통치자를 '신지'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사량벌국의 장수인 ' 신지'가 머문 곳은 어디였을까? 고고학계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이부곡 토성이 왕도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은 없다. 아마도 신지는 이일대의 왕성에 머물며이웃의 작은소국들을병합해 가면서 강력한소국으로발전해 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사량벌국 왕도와 이부곡 토성 일대 - 상주시 낙상동, 사별국면 금흔리, 엄암리 일원
고대 사랑벌국의 권역은현재의상주시, 사벌국면, 외서면, 은척면, 문경의 산북면, 산양면, 영순면, 예천의 풍양면과 용궁면 일
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벌 국의 왕도로 추정되는곳은 이부곡토성을 포함하여 병성천으로둘러싸인 내부의 성 안산 (17
0.8 미터 ). 낙상산, 둔진산일대로서 현재의 상주시 낙상동과 사벌국면 금혼리와 엄암리 ( 엄정 ) 일원으로 확인되고 있다. 상주평야의 중앙에 있는사벌들판의 서편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나가며 둘러싸고 있는 가장높은구릉인 성안산 ( 171.4 미터 ) 동쪽 사면 및 능선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서쪽으로 외서천과 동천이 만나 북에서 남으로 흘러 능선의 남쪽 경계인 낙상산 (154.3미터)부근에서 병성천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고고학적 발굴 유적과 유물 등을 종합하여 이부곡토성의 입지를보면능선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이 지역의 중심부를 관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영남대로와 낙동대로및경상대로 등의 주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러한 입지와 지형을 보게 되면 이곳이 사량별국의 왕도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성을 다스리려면 팽지와 산자락을 이용한 성이 자연스럽다.이렇게 본다면 흔곡 마을 일대를 사량벌국의 중심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 사량벌국의 지배층은 기원전 2 세기 경에 고조선 해체 ( 108 ) 이후 내려온 신한조선의 해씨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불한조선의 기씨가 신한 (=왕)을 참칭한 이래 고조선이 분화되면서 한나라와 흉노의 난을 피해 내려오자 압록강 아래에자리를잡고 있던 삼조선 중의 하나였던막한조선 즉 말한조선한씨가월지국(공주)으로 천도하면서 임진강 이남의 강토를 나눠준 낙강가로 내려와 자리를 잡은 신한조선의 해씨게였을것이다.낙강 가로 내려온 이들은 진한계로서 이서국 ( 伊西國, 청도 ), 음즙벌 국 ( 音汁伐國, 안강 ), 실직국(悉直國, 삼척), 압독국 ( 押督國, 경산), 비지국 (比只國, 창녕), 다벌국 ( 多伐國, 대구 ), 초팔국 ( 草八國, 합천 초계 ), 소문국 (召文國, 의성) 감문국 ( 甘文國 김천 ), 골벌국 (骨伐國, 영천 ), 사벌국 (沙伐國, 상주) , 사로국 ( 斯盧國, 경주) 39) 의 12 국으로 분화되어 각기 소국을 세웠던 것으로 집 작된다. 이들 중 해씨계였던 사량벌국과 박씨계였던 사로국은여타의국과 달리 강건한 소국을 세워 나갔다.
변한게 또한 12소국을 세웠다.「삼국지 」 「 위지」'진변한'조의 기록처럼 고녕가야국은 진한 12 국에 들어있지 않고 변한계에 들어 있다. 고녕가야국은 변한계의 미리미동국 ( 彌離彌凍國, 推封, 경남 밀양 ), 접도국(接途國, 칠포국,경남 함안 ). 고자미동국 ( 古資彌凍國, 경남 고성. 소 가야 ), 고순시국 ( 古淳是國, 경북상주함창,고녕가야 ),반로국 ( 半路國, 대가야 ), 낙노국 ( 樂奴國, ?), 미사마국 ( 彌烏邪馬國, 경남 밀양 ),감로국 ( 甘路國, 감문국, 경북 김천 ), 구야국 ( 狗邪國, 경남 김해, 금관가야 ). 주조마국 ( 走漕馬國, 졸마국 ),안야국(安邪國, 경남 함안, 아라가야 ), 독 로국 (瀆盧國,거칠산국,부산동래) 12국 40) 중의 하나인 구야 즉 금관가야 이외에 나머지 오 가야 중의 하나로 기술되어 있다.
가야6국으로 분화된 불한조선의 기씨와 나머지 6개의 소국으로 분화한 변한과 달리 낙동강 동남부에 자리를 집은 이이 세운 소국은 사로국이였다. 사로국을 세운 이는 북부여 왕 해모수의 딸 파소와 태백신주 박원달 ( 朴元達, 毫元達 ) 사이에서 태어난 박혁거세 였다. 그러 니까 박혁거세의 외할아버지는북부여의 동명제인 해모수 (解慕激) 였던 것이다.41)이렇게 본다면 신한조선을이은북부여의 해씨계가 세운사랑벌국과 해모수의 외손자인박혁거세가 세운 사로국 즉 신라는 외 가로 연결되고 있다.
해씨계 일파는 북부여에서나와졸본 부여로 부터 성장한 뒤 고려로 이어졌다. 그리고 해씨의 후손인 주몽은 ' 하늘에 뜬해가 높다'고 해서 성씨를 고씨(高氏 )로 바꾸었다. 42) 이렇게 본다면 전 사량벌국의 해씨계와 후사벌국 의 박씨계는해모수의딸 파소와 박원달사이에서 시작된 외가의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이해 되며, 고구려 고씨계와 신라의 박씨계와의 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신라의 김씨 (알지,金日磾)계와도 다른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3 ) 상주의 사랑벌국은 금강 수계권과 남한강수계권 양쪽을 이어지는 요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금강 수게권과의 관계는 상주 금혼리 토광목관묘 유적이 진천송두리토광목관묘와 유사하므로 진천 - 청주 - 보은 - 화령 - 상주로 문화통로가 설정된다 44 ) 는견해는 주목된다. 또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의 아달라왕 때 이미 계립령과 죽령을 열었다는 기사를 소백산맥 이남의유력한정치 집단인 사랑벌국의 활동 내용으로 해석 45 ) 한 건해도 주목된다.
이러한 견해들은 사량벌국이금강수계와 남한강수계로 문화통로가 열려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 46 ) 해 준다. 진한12국의국명과「 삼국사기 」의기록을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진한 11 국이 사로국에 복속되었으며 사로국왕이 곧 진한왕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량벌국이 사로국에 복속된 시기는 첨해왕 대인 247 ~ 261 년이다. 첨해왕 3 년 ( 249 ) 여름 4 월에 왜인에게 서불한 ( 抒弗邯 )우로(于老) 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록에 의하면사랑벌국은 249년 이전에 토멸된 것으 이해된다. 봄 정월'에 늙은장수 우로(于老)가 병사를 보내사랑벌국[사벌이라고도한다]에보애 나라를 멸하였다.
사랑벌이 예로주터 신라에굽혔는데 이제 백제를 섬겨서다.47)첨해왕 재위 때 사량벌국은 예로부터 우리 ( 신라 ) 에게 복속되어 있었는데 홀연히등돌리고 백제로 돌아가니 우로가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토멸하였다. 48김부식의「삼국사기」<석우로전>에는 첨해왕 때에 우로가 사랑벌국을 토멸하였다는 기사가실려있다 하지만 이 기록에는우로의 토벌 연대가 분명하지않다.
그런데「삼국사절요」에는 '봄 정월'로 기록되어 있으며이렇게 본다면 첨해왕 3년째인249년'봄 정월'로 추정된다.
상주 : 첨해왕 대에 사빌국을 취하여 주 (州) 로 삼았다. 49 )
청해왕이 언제사벌국을 취하여' 주'로 삼은 것은 첨예왕 대 (247 - 261 년 ) 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몇 년에 ' 주'로 삼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사량별국의 주민들의 강제이주기록에 의하면 아마도유레이사금 10년 (293) 이전에 주로 삼았을 것이다.
유례 이사금 10 년 ( 293 ) 봄 2 월에 사도성 ( 紗道城, 영덕) 을 개축하고 사별주의 호민(豪民 ) 80 여가를 이주 시켰다.)첨해왕
때에 석우로가 사량벌국을토멸했고 유레왕이 사벌주의 호민80 여가를 이주시켰 다 51 )는이들 기록 사이에는 많은 일들
이있었을 것이다.
이들 기록은 아마도 사량벌국이 249 년에 봄 2월에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이주 직전까지 그 잔존 세력들이 사량벌국의 부흥운동을이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이에 신라 왕실은 토멸한 지 44 년만인 293년에 이곳에 남아있던 사량벌국의 호민 (豪民) 즉 재물이 넉넉하고 세력이 있는 백성들 80 여 가를 영덕에 개축한 사도성으로 강제 이주시킨 것 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신라에 마지막에 병합된 전 사랑벌국의 동치자의 성씨가해씨였다
면 사량벌국과 사로국연맹에서성장해 간 신라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신라 왕실은 예로부터강력했던사량벌국의 고토를 법흥왕 11 ( 12)년 (525) 에 ' 상주' (上州 ) 로 삼고 ' 군주' (軍主)를 두었다가. 진흥왕 18년 (557)에 다시 감문소국을 청주 (靑州 )로삼고군주 (軍主)를 두었다. 진평왕 때 청주를 페지하고 일선을 일선주 (一善州 ) 로 삼고 군주(軍 主)를 두었 다. 신문왕 7년(687)에 다시 ' 상주' ( 上州 )를설치하고 성을 쌓았으며, 경덕왕 16 년 ( 757 ) 에 다시 상주(尙州) 로 고쳤다. 52 ) 이러한 일런의 조치를 통해 신라 왕실은 이 지역을 특별히 긴밀하게 다스렸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 16 년 (757)겨울 12 월에 사별주를 상주로 고치고1 주 ·10군 · 30 (31)현을 소속시겠다. 53 ) 상주 ( 청효현, 다인현. 화창현 ) 는 예천군 ( 영안현, 안인현. 가유현, 은정현 ). 고창군 (직령현, 일 게현, 고구현 ), 문소군 ( 진보현. 비옥현, 안현현, 단밀현 ), 숭선군 ( 효령현, 이동혜현, 군위현 ), 개령군 ( 어모현. 금산현, 지례현, 무풍현),영동군(양산현, 황간현), 관성군(이산현, 안정현), 삼년군, (청천현.기산현), 고녕군 (가선현, 관산현, 호계현 ). 화령군 (도안현 ) 10 군을 통솔하게 된다.
경덕왕은 재위 16 년 (757) 에 이르러 통치의 기반인 주 - 군 - 현 편제가 본격적으로 실시한다. 그 결과 사벌주 즉 상주는 이제 10 권과 30 ( 31 ) 현을 통솔하는 주의 치소가 된다. 이때에도 사량별국의 고토는 '군'이 아니라 '주'였다. 사랑벌국을 토멸하고 '주'로 삼고 ' 행정적 통솔자인 ·총관' (摠管 )을 두지 않고 군사적 통솔자인 '군주'(軍主 ) 가 머무르는 치소를 두었다는 것은 이곳이 여전히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게 한다. 그러면 전 사랑벌국을 다스렸던 거수의 성씨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통치자는 과연 누구였울까?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것을 찾아보려는 노력이없었다.
전 사량벌국이 후 사벌국과 어 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지 않았다. 논자는 이전의 사랑벌국과이후의 사벌국을 구분해 보기 위해 ' 사랑벌국'과'사벌국'으로 국가명을 달리 표기하였다. 그렇게 해야 이들 전후 사별국의 정치체의 성격 및 단절과 연속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 볼 수 있기 때문이 다. 이부곡 토성은(吏部谷)에 세워진 토성(城)으로서후삼한 즉 원삼국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일부 연구에서는 이부곡 토성이 5세기 무렵 신라의 사주 사벌지역 진출에 따른 가장 이른시기에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는 치소성으로 파악하고,신라의영역 확장과 방어,거주민에 대한 통치기능을 수행하
하지만 이곳에 상주의 사량벌국이 있었다면 사량벌국의 왕도가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 고 통치자인 장수 즉 신지가 머무르는 왕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 신라의 명향력이 미치기 이전이라면 아마도 목책 내지 토축성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 신 라에서 다시 증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량벌국의 왕도에 머무르는거수인 장수가 이곳에서 백성들을 다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량벌국의 왕도를 다른곳에서찾 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토성은 산성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평지와 산지를아우르며세운 성이다.
현재의 상주시 낙 상동과 사벌국면 금혼리그리고엄맘리(엄정)일원에 자리하는 이부곡 토성과 엄암리 토광묘 유적이 자리한 지역은 당시의 초기 정치체였던 사랑벌국이있었던 왕도이자 중심지였다.
이부곡 토성은 둘레가 1,239미터인 포곡형 토성이다. 대개 평면형태로 볼 때 산봉우리에다 가 원형 혹은 타원형 테를 두른 것처럼 보이는 테외식 ( 山頂式 ) 과 달리 포곡식은 성 내부에 게곡을 포용하여 축조한 성이다. 성의 본체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계곡 부근의 평탄지로 내려와 계곡을 감싸고 다시 능선으로 이어져 올라가축조된형태를 보인다.
포곡식 산성은 성벽이 자연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 축조되므로 불규칙한 부정형의 형태를보이며 이때문에 대부분의성의규모가 매우 크다. 성 내부에 물이 일정한 장소, 즉 계곡 쪽으로모여들어 성 밖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수구 (水口) 가 설치되기도 한다. 포곡형 토 성인 이부곡 토성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부곡토성은 하천강변 분지상의 충적평야 안에 돌출한 구릉지에 자리하고 있다.
무문토기 산포지 및 와질토기 산포지와 함께분포하고 있어 원삼국시대의활동무대로 추정되고 있다. 55 )
여러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상주 사량벌국은 이곳의 이부곡 토성을 왕도의 중심지로 삼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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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陳壽,「 三國志」 권30「魏書 」 「 東夷傳 」, 韓 조.
37)이 글에서는 전 ' 沙梁伐國' 과 후 ' 沙伐國' 을 구분해 쓰기
로 한다. 「 삼국사기 와 」「 삼국사절요 」사료에도 ' 沙梁伐國' 을 앞선 國名 으로 쓰고 있다. 신라 景明王 의 5 자였던 沙伐大君 즉 朴彦昌 이 세운후 사벌국과 그 이전에 이부곡토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였던 沙梁伐國 과 구분해 기술하기 위해서이다.
38)조희열.「 상주 오봉산남산고성 」, 앞의 책. p. 113.
39)陳,「三國志」,「魏志」,辰卞韓 조,
40)신채호,「단재신채호전집제1권역사:조선상고사」(천안:독립기념관운 한국독립동사연구소,2007),p657,그는"卞韓은彌離彌凍,接途,古資彌凍,古淳是,半路,藥奴,彌鳥那馬,甘路,拘那,走漕馬,安那,瀆盧 등 12부의 통칭이라며 이중 古淳是國의'古淳是'는 古寧伽倻-今 尙州 咸昌 間의 공갈못이니 공갈은 古寧伽倻의 促音이오"라고 하였다. 그는 지금 상주의공검과 함창 지역이 고녕가야
국의 중심이라고 보았다.
41)崔勉吉 초록, 「 鴻史桓殷 北扶 제 26 세 東明帝, 王子 20 년 조. pp. 355 ~ 369. 당시 고조선과 북부 의 통치자는 모두 ' 배감'으로 불렀다. 해모수 즉 ' 해 ( 를 닮은 ) 모습'은 단군조선의 제 25 세인 목제 ( 솔 를 이은 제 26 세 ( 북부여의 제 1 세 ) 헌왕 ( 추노 ) 이래 고조선 (「 단군세기 」) 의 제 47 세 ( 북부여의 제 22 세 ) 인 종왕 ( 고열 ) 으로 마지자 북부여 제 23 세 해섬왕 ( 고달 ) - 제 24 세 소문왕 ( 마갑 ) - 제 25 세 근왕 ( 이춘 ) 6 세가 된 동명제 ( 해모수 ) 이다. 동명제 즉 해모수의 아들이 졸본에 도읍을 세우고 국로를 고구려로 동명왕 ( 주몽 ) 이다. 그는 ' 하늘의 해가 높게 떠 있다' 고 해서 ' 高' 로 姓氏 를 삼았다.
42)一然.「 三國這事 」 「 記異」, 高句麗 조.
43)서동인, 앞의 책. p. 25
44)홍지윤, 앞의 글. 1999.
45)이형우, 앞의 글, 1996.
46)한기문, 앞의 글, p. 141. '
47)金宗瑞 외.「三國史節要 」권3."春正月, 遺干老将兵討沙梁伐國 [ 一云沙伐滅之, 沙梁伐舊屈新羅 今貳於百濟也.
"이것은「 삼국사기 」에 없는 기사이다. 그리고「 三國史記 」 권 45, 「 列傳 」.< 昔干老傳 > 에도沾解王 대에 干老 가 沙梁伐國 을 토벌하였다 는 기사가 실려 있다.
48)金富軾. 「三國史記 」권 45,「 新羅本紀 」.< 列傳 >, '昔于老' 絛." 沾解王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 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49 ) 金富軾,「三國史記」권34「新羅本紀」.<地理1>."尙州.沾解王時,取沙伐國爲州."
50 ) 金富軾. 「三國史記 」권2.「新羅本紀 」제2.儒禮尼師今.10년2월조,"儒禮尼師今,十年 春二月 條."築紗道城. 移
沙伐州, 豪民八十餘家. "
51 ) 후대의 대가야 유민을영덕의 사도성으로 이주시켰다는 것과 겹쳐진 것으로 볼 수 있을것 같다. 일부 연구에서는 대가야
유민을 고녕가야 권역인 함창으로 이주 시켰다는 것으로보고 있을뿐 상주 함창에 고녕가야의 정치체가5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52 ) 金富軾, 「 三國史記」권34「 雜志 」제3.<地理1>新羅.법흥왕11년은12 년으로 보아야 양 보통 6년(525 ) 에「신라본기 」법흥왕12년에 부합하는 기사가 있다.
53 ) 金富軾, 「三國史記 」권9 「新羅本紀 」제9. 景德王.16년12월 조.여기에는10군30현이 아니라10군31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라마도 숭선군의 爾同兮縣(지금은 알 수 없다)을 제외한 통계로 보인다.
54 ) 박달석, 「 상주 사벌지역의 공간 변화 」, 「 제 3 회 고녕가야 학술대회 겸 제 32 회 한국불교사학회 한국불교사연구소 집중세이나 자료집 : 경북 상주 고녕가야의 유적과 유물 」, pp. 17 ~ 20.
55 ) 박종익,「상주 병풍산성」 「 상주 병풍산 」( 서울 : 민속원, 2014 ), p.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