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12 세계 관절염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09 - ‘길이 1.27cm-폭1.06cm’ 세계 최소 공룡 발자국 발견 경남 남해군 창선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새끼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천연기념물센터는 2007년 10월 창선면 주민이 발견한 소형 수각류(獸脚類)의 공룡 발자국 화석(사진 안 화살표 부분)이 지난달 영국에서 열린 69차 세계척추고생물학회에 보고돼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12일 밝혔다. 이 화석은 길이 1.27㎝, 너비 1.06㎝로 기네스북에 세계 최소 공룡 발자국으로 등재된 스코틀랜드 스카이섬의 수각류 발자국(길이 1.78㎝, 너비 1.16㎝)보다 작다. 센터 쪽은 “발자국 크기로 미뤄 이 공룡은 키가 최대 10㎝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며, 알을 갓 깨고 나온 새끼 공룡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노형석 기자,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한겨레 2009.10.12 오후 11:09;50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1580.html
2009 - 미국 캘리포니아주, 동성애 운동가 ‘하비 밀크의 날’ 제정 5월22일 동성애 운동가 ‘하비 밀크의 날’ 미 캘리포니아주 기념일 제정 미국에서 최초의 동성애자 선출직 공직자로 활동하다 1978년 암살된 하비 밀크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을 기리는 기념일이 제정됐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밀크의 생일인 5월22일을 ‘하비 밀크의 날’로 제정하는 법안에 서명했다고 주지사 대변인이 12일 밝혔다. 슈워제네거 주지사는 지난해에는 같은 내용의 법안에 대해 “밀크가 시의원으로 전국적 인물이 아니었고, 시의원으로 활동한 기간(1년)이 짧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우며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생을 다룬 영화 <밀크>에서 주연을 맡았던 숀 펜이 지난 2월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8월 미국의 안보와 국익, 세계평화, 문화예술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공적을 쌓은 인물에게 매년 주는 ‘대통령 자유메달’의 수상자 16명에 그를 포함시키는 등 올 들어 그에 대한 조명이 활발히 이뤄졌다. 에런 매클리어 캘리포니아 주지사 대변인은 “영화가 하비 밀크를 널리 알리면서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동성애자 공동체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각됐다”며 “주지사는 (동성애) 공동체가 존중받길 원한다”고 전했다. 밀크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뒤 시의원에 당선됐고 동성애자 권리 옹호를 위해 노력하다 이듬해 동료 시의원의 저격으로 숨졌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한겨레 2009-10-13 오후 09:27:45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381716.html
2005 - 중국 유인우주선 선저우 6호 발사 중 유인우주선 선저우 6호 발사 중국의 두번째 유인우주선 선저우 6호가 12일 오전 9시(현지시간) 발사됐다. 2명의 우주인이 탑승한 선저우 6호는 이날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기지에서 창정 2-F 로켓에 실려 우주를 향해 쏘아올려졌다. 탑승한 우주인은 2년여의 훈련과정을 거친 3개조 6명 가운데 선발된 페이쥔룽(40)과 녜하이성(41)이다. 선저우 6호는 지구궤도를 향해 오르면서 1단계와 2단계 추진체 분리에 성공했고 날개 구실을 하는 양쪽의 뷕체도 순조롭게 떼어냈다. 발사와 이후 과정은 중국 국영 CCTV를 통해 생중계됐다. 박기성 특파원 jeansap@yna.co.kr (베이징=연합뉴스) /한겨레 2005-10-12 오전 10:12:25 http://www.hani.co.kr/kisa/section-004005000/2005/10/004005000200510121012825.html
2001 - 노벨 평화상,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유엔(UN) 공동 수상 올 노벨 평화상,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유엔(United Nations)과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63)이 노벨상 제정 100주년을 맞은 올해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2일 아난 사무총장과 유엔이 국제사회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기여한 공로로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평화상 수상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었다. 1945년 10월 24일 설립된 유엔은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국가간의 협력을 증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해왔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인 아난 총장은 1996년 유엔 사무총장(임기 5년)으로 뽑힌 뒤 올해 6월29일 연임에 성공했으며 뛰어난 지도력과 중재력으로 국제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것은 61년 다그 함마르셸드가 사후에 수상한 이후 2번째며 유엔 산하 기관이 평화상을 받은 전례는 있지만 유엔의 수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화상 시상식은 12월 10일 오슬로에서 34명의 역대 평화상 수상자들이 참속한 가운데 열린다. 상금은 900만크로나(10억3500만원). <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 /동아닷컴 2001/10/11 23:16 http://www.donga.com/docs/intro/nobel/nobeltop.html
1999 - 5,000명의 환자에게 실험한 에이즈 백신(에이즈백스) 임상실험 성공 「에이즈백스(AIDSVAX)」가 5,000명의 환자에게 실험한 결과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이 약품의 제조회사 백스겐이 99년 10월 12일 발표하였습니다. 이 실험은 6월 미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돼 56개 병원이 참여했으며,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이 에이즈백스가 안전하고 효력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봄 3년간에 걸친 대규모 에이즈백스 실험을 허용한 바 있습니다. http://gtt.com.ne.kr/file1/health-menu2-1-24.htm
1997 - 미국의 가수 존 덴버(Denver, John) 사망 덴버 [Denver, John, 1943.12.31~1997.10.12] 존 덴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미국의 컨트리송 가수 존 덴버(Denver, John)가 1997년 10월 12일 저녁 자신의 단발 경비행기를 조종하던 중 캘리포니아주 북부 몬터레이만의 해안에 추락해 숨졌다. 53세였다. 존 덴버는 생전에 가장 자연에 가까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라는 찬사를 받던 컨트리 음악의 황제였다.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 `로키 마운틴 하이` `퍼햅스 러브` `선샤인 온 마이 숄더즈` 같은 서정적인 노래들은 우리나라에서도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본명은 헨리 존 도이췬도르프 주니어. 뉴멕시코에서 공군조종사 아들로 태어나 1964년 포크 트리오로 데뷔 1969년 솔로가수로 변신했다. 이후 30년 가까이 세계적 슈퍼스타로 각광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의 대표곡 모음집 `존 덴버 히트곡` 앨범은 무려 1천만장 이상 팔릴 정도였다. 1985년에는 냉전 이후 미국 연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옛 소련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1992년에는 서방 음악인으로는 첫 중국 본토 순회공연을 가졌다. 덴버는 지난 1988년과 1994년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음악활동뿐 아니라 기아추방운동, 동물보호운동, 환경운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특히 1976년에 비영리단체인 `윈드 스타` 재단의 공동발기인으로 참여해 지구촌 환경보호를 위한 연구와 교육에 정열을 쏟아왔다. /조선
1992 - 'Europa TELECOM 92' Conference ITU, Hungary, 12-17 Oct 1992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1999.asp
1987 - 대통령중심 직선제 개헌안 여야합의로 국회 통과 [어제의 오늘]1987년 사상 첫 여야합의 개헌 ㆍ민주화 열망 헌법에 담아내다 헌법 개정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 현대사의 영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독재 권력의 치부가 명확해지고, 더 나은 나라를 위한 국민들의 열망이 느껴진다. 1948년 헌법 제정 이후 우리의 헌법은 지금까지 모두 9번 개정됐다. 제헌국회가 마련한 건국헌법은 그 통치구조에 있어 대통령과 부통령, 국무총리가 있는 내각책임제 절충형이었다. 건국헌법은 4년 만에 바뀐다. 52년에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양원제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발췌 개헌’이 이뤄진다. 개헌은 2년 뒤에 또 단행된다. 54년에 독재 권력이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없애 장기집권을 가능케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한 것이다. 60년 6월에는 대통령제 대신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뤄지고, 11월에는 부정선거 관련자 등에 대한 처벌을 위한 소폭 개헌이 벌어진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10-11 19:19:5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0111919501
1985 - 국내 첫 시험관아기 탄생 [역사속의 오늘] 국내 첫 시험관아기 탄생 우리나라에서 첫 시험관아기가 1985년에 태어났다. 서울대 병원 장윤석 교수팀은 제왕절개를 통해 남녀쌍둥이가 태어났다고 발표했다. 첫 번째 아기는 여자로 몸무게가 2.63kg이고 두 번째 아기는 남자로 2.56kg의 몸무게로 건강하게 탄생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나, 불임으로 서울대 병원 장윤석 교수를 찾은 천근엽(31), 서정숙(28) 부부는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기로 결정했다. 노력 끝에 1985년 2월 25일 임신에 성공했고 임신 37주째인 10월 12일 천희, 천의 이란성 쌍둥이를 출산했다. 이후 남매는 건강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고 200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성년의 날’ 공익광고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천의는 병무청 신체검사에서 키 172cm, 몸무게 55kg으로 ‘2등급’ 현역 판정을 받아 2005년 3월 군에 입대했다. 시험관아기는 1978년 영국에서 처음 성공한 이후 7년 만에 국내에서 성공한 것으로 세계에서 18번째, 아시아에선 싱가포르·일본·대만에 이어 4번째 국가로 아기 시술 분야에 있어 국내 의료 기술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는 계기가 됐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7년 10월 1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535&yy=2007
1984 - 대처 영국 총리, 폭탄테러 모면 영국 런던 근교의 휴양도시 브라이튼(Brighton)에 있는 그랜드 호텔! /YTN 2012-10-12
1981 - 까라소 코스타리카 대통령 방한 "코스타리카 공화국 까라소 오디오 대통령 내외분이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초청으로 1981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우리나라를 공식 방문한다. 중미 대륙의 남부에 위치하여 파나마, 니카라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코스타리카는 1821년 9월 15일 독립하였고, 인구는 약 220만, 면적은 50900㎢이다. ... 이번 까라소 대통령의 방문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최초의 국가 원수 방문이며 양국 수교 이래로 첫번째인데, 양국간의 기존 우호 협력 관계를 가일층 강화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체신부에서는 까라소 대통령 내외隙?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양국간의 더욱 긴밀한 협조관계 유지를 기원하면서 이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76 - 스웨덴의 높이뛰기 선수 카이사 베리크비스트(Bergqvist, Kajsa) 출생 베리크비스트 [Bergqvist, Kajsa Margareta, 1976.10.12~ ] 카이사 베리크비스트 카이사 마르가레타 베리크비스트(스웨덴어: Kajsa Margareta Bergqvist, 1976년 10월 12일 스웨덴의 솔렌투나에서 태어남)는 스웨덴의 높이뛰기 선수이다. 실내 높이뛰기 세계기록 보유자이다. 올림픽에서 동메달 1개,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1개와 동메달 2개,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1개를 딴 경력이 있다. 야외 높이뛰기 개인기록은 2003년 독일에서 세운 2.06미터이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2004년의 아테네 올림픽에는 불참하였지만 2005년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재기하였다. 2006년 2월 4일 독일의 아른슈타트에서는 실내 높이뛰기에서 2.08미터를 기록, 1992년 2월 8일 하이케 헹켈(Heike Henkel)이 기록했던 2.07미터의 세계기록을 14년 만에 갱신하였다. /위키백과
1971 -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Acheson, Dean) 사망 애치슨 [Acheson, Dean Gooderham, 1893.4.11~1971.10.12] 딘 애치슨 딘 구더햄 애치슨(Dean Gooderham Acheson, 1893년 4월 11일 - 1971년10월 12일)은 미국의 정치가이다. 예일 대학을 거쳐 하버드 대학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1919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그 후 1933년 재무 차관, 1941년 국무 차관보, 1945년 국무 차관을 거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중요한 외교를 수행하였다. 1949년, 국무 장관이 되어 대소 강경 정책을 취하였다. 이듬해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연결하는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다. 이 결과 한국과 타이완이 미국의 방위에서 제외되었다. 1953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위키백과
1969 - 노르웨이 출신 피겨 스케이팅 선수, 영화배우 소냐 헤니(Henie, Sonja) 사망 헤니 [Henie, Sonja, 1912.4.8~1969.10.12] 소냐 헤니(노르웨이어: Sonja Henie, 1912년 4월 8일 ~ 1969년 10월 12일)는 노르웨이 출신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미국의 영화배우이다. 어린 시절부터 스케이트를 탔으며, 발레, 스키를 병행하며 피겨 스케이팅에 이들 기술을 접목시켜 피겨 스케이팅의 기술에 혁신적인 발전을 이루어 냈다. 1924년 동계 올림픽에 만11세의 나이로 출전하여 여자 싱글 8위에 올랐다. 1927년, 14살의 나이로 세계 피겨 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여자 싱글에서 우승한 이후 1936년까지 10회 연속 우승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동계 올림픽에서도 1928년, 1932년, 1936년에 걸쳐 3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했다. 1936년 동계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을 끝으로 프로로 전향했고,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가장 훌륭한 기록을 남긴 선수 중 하나로 유명하다. 생애 소냐 헤니는 노르웨이의 오슬로지방에서 태어났다. 모피상이었던 아버지 빌헬름 헤니는 사이클링 세계선수권자로, 그의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스포츠를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특히 소냐는 운동신경이 매우 좋아 나라 안에서 손꼽힐 정도의 테니스 실력, 곡마사의 기술과 수영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일찍이 스키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그때 피겨를 하던 오빠에게 이끌려 피겨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올림픽 3연패, 세계선수권 10연패, 유럽선수권 6연패라는 대기록을 가진 선수가 되었으며, 미니스커트 의상을 입고 경기를 한 최초의 피겨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프로로 전향 후에는 15개의 영화에 출연하여 배우로서도 명성을 이어갔다. 그녀는 세계 피겨스케이팅 명예의 전당뿐 아니라 헐리우드 스타의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 만년에는 백혈병으로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나라를 돌며 현대 미술 후원 활동을 했으며, 1969년 57세 때 노르웨이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키백과
1968 - 제19회 멕시코 올림픽 개막 1968년 10월 12일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올림픽이 표고 2240m의 멕시코시티에서 개막됐다. 125개국에서 5,498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고지의 산소부족 때문에 육상 중장거리 경기에서는 저조한 기록이었지만 단거리와 도약경기에서는 경이적인 기록이 속출했다. 대회의 스타는 소련군의 침공을 받은 체코의 여자체조 개인종합우승자 베라 카스라브스카였다. 일본은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축구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육상남자 200m에서 1위와 3위를 차지한 미국선수는 시상식에서 '블랙 파워' 데모를 일으켜 선수촌으로부터 추방되기도 했다. 대회 우승은 금메달 45개의 미국이 차지했으며, 소련(금메달 29개), 일본(11개), 헝가리(10개), 동독(9개)이 그 뒤를 이었다. /조선
1968 - 적도기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적도기니(Equatorial Guinea)는 1778년에 에스파냐가 페르난도포섬(지금의 비오코섬)을 점령하였으며, 1827년 영국이 이 섬을 에스파냐로부터 조차(租借)하였다. 1843년 영국 해군은 시설을 침례파 교회에 양도하고 철수하였으며, 이듬해 에스파냐는 이 섬을 농업식민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그 후 1850년대에는 본토쪽 리오무니 지역의 식민지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미 가봉을 식민지화한 데다 1880년대에는 독일이 카메룬을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므로 리오무니의 면적은 극도로 줄어들었다. 식민지 정청(政廳)은 페르난도포섬의 산타이사벨(지금의 말라보)에 세우고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아노본섬과 이 섬을 페르난도포주(州), 대륙의 리오무니와 그 연안의 엘로베이, 코리스코 두 섬을 리오무니주로 편성하여 통치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독립운동이 강화되어 1964년 1월부터 자치정부가 세워지고 1968년 10월에 UN 식민위원회의 권유에 따라 적도기니 공화국(Republic de Guinea Equatorial)으로 독립하였다. /naver
1965 - 스위스의 화학자 파울 뮐러(Müller, Paul) 사망 뮐러 [Müller, Paul Hermann, 1899.1.12~1965.10.12] 스위스의 화학자. 1948년 DDT가 곤충에 미치는 강력한 독성을 발견해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DDT와 DDT 유도체는 약 20년 이상 살충제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병충해를 줄이고 식량생산을 늘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25~65년 바젤에 있는 J. R. 가이기사(社)의 화학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초기에는 염료와 무두질용 시약에 관해 연구했다. 1935년 식물과 온혈동물에게는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나 가능한 한 많은 수의 해충에게는 신속하고 강력한 독성을 나타내는 이상적인 살충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살충제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화학적 안정성이 뛰어나 장기간 살충효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하며, 살충제의 제조는 경제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4년 후에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DDT)으로 알려진 물질을 합성·시험하여 이들 요구조건을 만족시킨다고 밝혔다. 1874년 독일 화학자 오트마어 차이들러는 그 화합물을 최초로 합성했으나 살충제로서의 가치를 밝히는 데는 실패했다. 1939년 스위스 정부와, 1943년 미국 농무부는 콜로라도 감자벌레에 DDT의 살층효과를 실험하는 데 성공했다. 1944년 1월 DDT는 나풀리에서 이(lice)에 의해 전염되는 발진티프스의 급격한 증가를 막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초겨울에 유행성발진티프스의 활동이 중지되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상적인 살충제가 온혈동물에게 독성이 없기를 원했으나 DDT의 광범위한 사용과 지속적인 살충효과(1968년 4.5×108㎏의 DDT가 사용한 주변환경에 잔류했었다는 평가를 내렸음)는 동물생활에 해를 주며,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파괴하는 징조를 보였다. 1970년 DDT는 더 빨리 분해되고 독성이 약한 살충제로 대체되었으며, 많은 나라에서 DDT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 Vladimir Komarov, Konstantin Feoktistov, Boris Yegorov 1964 - 소련 우주선 보스호트 1호 발사 소련, 사상최초 6인승우주선 보스호트 1호 발사 1964년 10월 12일 소련은 신형 우주선 보스호트(Voskhod) 1호를 발사했다. 이 우주선에는 세 사람이 탑승했으며, 지구를 6회 선회하고 귀환했다. 보스호트는 보스토크보다 100km나 더 높은 우주 공간을 날았다. 이어 1965년 3월 18일에는 보스호트 2호가 발사되었고, 여기에 탔던 레오노프(Leonov)는 사상 처음으로 우주선 밖으로 나가 우주 유영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머큐리 계획으로부터 제미니(Gemini) 계획으로 전환하던 중이라 아무런 성과도 올릴 수 없었다. 이 계획은 사람을 달로 보내려는 아폴로 계획과 연결되는 장기계획의 일환이었다. 이 계획은 달 여행에 소요되는 8일간의 무중력 상태에서 인간의 활동이 가능한가를 실험하는 것이었다. 이어 달 여행에 필요한 랑데부와 도킹 기술을 익히고, 공기가 없는 달 표면과 같은 진공상태의 우주공간에 나가 우주복을 실험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보스호트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뒤 5개월이나 지나서야 제미니(3호)는 1965년 3월 23일에 발사에 성공했다. http://seis.scienceall.com/book_file/ke24/ke024-072.htm
1962 - 북한-중국 국경조약인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 체결 북한과 중국이 양국의 국경을 정하는 국경조약을 1962년 10월 12일 체결했다. 북한 김일성과 중국 주은래가 서명한 이 조약은 정식명칭이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다. 총 5조로 짜인 이 조약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두만강, 그리고 서해 영해의 국경선을 명확히 적고 있다. 조약문에 따르면 백두산 천지의 경계선은 `백두산 위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마루 서남단 위에 있는 2520고지와 2664고지 사이의 안부(鞍部-안장처럼 들어간 부분)의 중심을 기점으로 동북방향 직선으로 천지를 가로질러 대안(對岸)의 산마루인 2628고지와 2680고지 사이의 안부 중심까지다. 그 서북부는 중국에 속하고 동남부는 조선에 속한다`고 되어있다. 이럴경우 천지의 55%는 북한에, 45%는 중국에 속한다. 조약은 이밖에 백두산, 압록강-두만강의 섬과 사주(모래톱)의 귀속에 대해서도 상세히 적고 있다. 이 조약의정서에는 압록강-두만강의 총451개 섬과 사주가운데 북한이 264개, 중국이 187개를 소유한다고 적혀있다. 이 조약은 1964년 3월20일 양국이 의정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됐다. /조선
1962 - 네루 인도 수상, 동북국경지대군에 중국군 축출을 명령 중국인도국경분쟁(中國印度國境紛爭)의 원인은 국경선에 대한 양자의 견해가 완전히 엇갈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인도측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대에 영국이 그 실력을 방패로 해서 멋대로 그은 ‘맥마흔 라인’(1914)을 그대로 국경선으로 보고 있는 데 대하여, 중국측은 영국 침략 이전의 전통적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주장하였다. 양국의 국경수비대가 최초로 충돌한 것은 1959년 8월 인도 북동부 국경지대와 라다크 지구에서였다. 이 때에는 1960년 4월의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네루(Nehru, Jawaharlal, 1889~1964)의 회담에 의하여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 봄이 되자 다시 인도군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여 7∼9월에 라다크 지구, 맥마혼 라인에서 중국군과의 사이에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동년 10월 인도군은 대규모의 공격을 기도하였으나 중국군의 반격으로 완패하였다. 중국군은 동년 11월 돌연 정전을 선언하고 평화회담을 제의한 후 일방적으로 철수하였다. 1962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서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의한 조정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국경지대에서는 군사적으로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으나, 국경선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naver
1960 -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 '구두 연설' [역사 속의 인물]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초프 제902차 유엔 총회가 열리고 있던 1960년 오늘 유엔 사상 가장 황당하다고 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바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구두를 벗어 책상을 치며 화를 낸 이른바 '구두 연설'이다. 발단은 필리핀 대표의 소련 비판이었다. 필리핀 대표는 연설에서 소련이 동유럽 등지에서 인민들의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앗아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흐루쇼프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다가 이어 구두를 벗어 필리핀 대표가 연설을 마칠 때까지 책상을 두드려 댔다. 미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FP)는 최근 이를 두고 '흥분한 웅변술의 고전'이라고 명명했다. 흐루쇼프의 기행(奇行)은 이뿐만 아니다. 특히 '노발대발 흐루쇼프'라는 평전이 나올 만큼 화를 잘 참지못한 성격과 관련된 일화가 많다. 1959년 미국 방문 당시 계획됐던 일정 중 디즈니랜드 방문이 안전상 이유로 취소되자 어린애처럼 화를 낸 것은 유명하다. 입도 거칠었다. 1959년 미국 방문 전 연합국의 서베를린 철수를 요구하며 회의장을 메운 서방 외교관들에게 "땅속에 묻어버리겠다"고 했다.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며 권력을 잡았으나 쿠바 미사일 위기때 보여준 모험주의로 강·온건파 모두의 지지를 상실하면서 1964년 실각했다. 정경훈(논설위원) /매일신문 2009년 10월 12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4219&yy=2009
1955 - 공자 탄신 2560주년 석전제
1955 - 해리 홀트와 버다 홀트 부부가 한국인 전쟁 고아 8명을 입양하고 4명의 입양을 주선하다 [해외입양 50주년] 故國이 못기른 20만명, 고국 그리며 산다 (발췌) 해외입양의 역사 본격적인 해외입양이 시작된 것은 1954년 이승만(李承晩) 정부가 보육원의 동의 없이도 해외입양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고아양자특별조치법’을 만들면서부터. 당시 10여만명에 달하는 전쟁고아, 혼혈아 문제를 해외입양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정부는 외국인 양부모의 요구조건에 맞는 고아를 직접 찾아다닐 정도의 적극성을 보였다. 이듬해 홀트아동복지회 창립자인 해리 홀트가 8명의 한국 어린이를 한꺼번에 입양한 것을 계기로 민간차원의 입양이 본격화됐으며 60, 7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히 증가했다. 1980년대에는 연간 7000∼8000명의 어린이가 입양됐으며 1985년에는 8837명에 달했다. 급속한 산업화로 미혼모, 이혼가정이 증가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냉담했기 때문. 이 같은 증가 추세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고아수출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으면서 점차 감소해 90년대 연간 2000명 수준으로 줄었다가 최근 경제불황과 함께 다시 2300∼2400명으로 늘어났다. 입양문제를 연구하는 엘레나 킴(미 뉴욕대 박사과정)은 “낮은 출산율, 노인인구의 증가 등 선진국형 인구 문제를 겪고 있는 한국이 여전히 높은 해외입양자 숫자를 유지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신수정기자 crystal@donga.com /동아닷컴 2004.08.01 18:46 http://news.donga.com/fbin/moeum?n=adoption$c_207&a=v&l=1&id=200408010194
1938 - 영화 '오즈의 마법사' 촬영 시작 [책갈피 속의 오늘] 1938년 '오즈의 마법사' 촬영 시작 어렸을 적 부모를 잃었으나 마음씨 좋은 친척 집에서 예의 바르게 자란 시골 소녀. 전형적인 동화 속 주인공인 도로시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자 아이가 됐다. 라이먼 프랭크 봄의 동화 ‘위대한 마법사 오즈’(1900년 출간)가 영화로, 뮤지컬로, TV드라마로 계속 변주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작품은 1939년 영화 ‘오즈의 마법사’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10120085
1935 - 이탈리아의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Pavarotti, Luciano) 출생 파바로티 [Pavarotti, Luciano, 1935.10.12~2007.9.6] 이탈리아의 오페라 가수, 리릭 테너. 테너의 음역으로 낼 수 있는 최고의 음을 훌륭하게 구사한다. 1955년 모데나의 사범학교를 졸업했고, 2년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만토바를 중심으로 개인적으로 오페라 음악을 공부했으며, 성악경연대회인 콘코르소 인테르나티오날레에서 우승한 후 1961년 이탈리아의 레조 에밀리아에서 오페라 데뷔를 했다. 1968년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데뷔했으며, 1971년부터 그곳에 정규적으로 역을 맡았다. 오페라 청중 이외에도 연주회·음반·텔레비전 등을 통한 폭넓은 청중을 가졌고, 왕성한 활동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벨칸토 오페라 가수이며 최고 음역에서도 맑은 음색을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세계 3대 테너로 불리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한 '3테너' 공연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공연을 벌였다. 잘 알려진 오페라 역으로는 주세페 베르디의 〈리골레토 Rigoletto〉에서 만토바 공작 역과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 La Fille du Régiment〉에서 토니오 역(특히 이 역은 일련의 높은 C음을 요구하는 어려운 역임),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에서 아르투로 역, 베르디의 〈아이다 Aida〉에서 라다메스 역 등을 꼽을 수 있다. 파바로티는 윌리엄 라이트와 함께 〈파바로티: 나의 이야기〉(1981), 〈파바로티: 나의 세상〉(1995)을 썼다. /브리태니커
1916 - 한국 최초의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사망 언더우드 [Underwood, Horace Grant, 1859.7.19~1916.10.12] 한국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사망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이자 격동의 구한말 한국 근대화에 힘썼던 언더우드 1세(한국명:원두우)가 1916년 10월 12일 고국 미국에서 눈을 감았다.
1909 - 스위스의 사상가, 법률가 카를 힐티(Hilty, Carl) 사망 힐티 [Hilty, Carl, 1833.2.28~1909.10.12] [오늘속으로(10월13일)] 카를 힐티 1909년 10월13일 스위스의 법률가 겸 철학자 카를 힐티가 76세로 작고했다. 힐티는 베를린 대학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가르치고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활동한 법률가이지만, 그의 국제적 명성은 ‘행복론’과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같은 에세이를 통해 확립됐다. ‘잠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는 제1부가 1901년에 나오고 제2부는 저자가 작고한 지 10년 만인 1919년에 유고로 출간됐는데, 한국에서도 여러 출판사에서 중복 간행돼 우리 독자들에게 익숙하다. 고종석 /한국일보 2003-10-12 21:0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0202747
1902 - 중국의 정치가 펑전[彭眞] 출생 펑전 [彭眞, 1902.10.12~1997.4.26] 중국의 정치가. 산시성[山西省]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타이위안[太原]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재학 중 타이위안에서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지도하였고 1923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중일전쟁 중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북방국 서기로 활약하였고, 1945년 중국공산당 제7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되었다. 중공정권 수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 위원 겸 정치법률위원회 부주임에 취임하였으며, 1951년 베이징[北京] 시장이 되었다.
- 고종황제 어극기념 우표
1897 - 고종 황제 즉위,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 1897년 10월 12일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은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이날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에서 원구단으로 나아가는 길가에는 축기를 들고 환호하는 군중들이 늘어섰으며 원구단 주위도 인파로 메워진 가운데 고종은 천지에 올리는 제사를 지낸 후 황제의 자리인 금의상좌에 올랐다. 고종은 이어 13일 자신이 황제위에 오른 것과 국호를 새로 대한제국으로 정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조서를 내리고 14일에는 이같은 사실을 한양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에 통보했다. 고종의 황제 즉위는 왕실과 조정, 국민의 삼자일치로 추진됐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한반도는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 속에서 열강의 내정간섭이 중단된 상태가 유지됐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같은 주변정세를 배경으로 비교적 활발한 근대화 개혁 작업을 추진해 갔다. 광무개혁이라 불리는 대한제국 시기의 개혁은 경제-기술면에 집중됐다. 대한제국은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민권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택했다. 내각의 폐지와 의정부 부활, 지방관제 복원 등 갑오개혁을 뒤엎는 조치가 잇달아 내려졌다. 대한제국의 정치적 성격은 1899년 반포된 '대한국 국제'에 "황제는 무제한의 군권을 소유하고 삼권을 장악한다"고 규정한 데 잘 나타나 있다. 이는 갑오개혁 때 취해진 왕실과 정부의 재정분리,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등 왕권을 제약하려는 흐름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기본성격은 기술적, 경제적 측면에서는 근대개혁을 추진하지만 정치적 측면에서는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불균형적인 근대화 정책으로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급속한 개혁을 이룰 수 없었다. 더구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그 개혁속도마저 크게 떨어지고 말았다. /조선
[그때 오늘] 고종 ‘대한제국’ 선포 … 문화선진국 의지 국호에 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회 때 온 국민을 하나로 묶은 구호는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이었다. 그 무렵부터 국가대표 스포츠 대항전을 중계하는 TV 화면 상단에도 우리나라의 공식 국호인 ‘대한민국’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주로 ‘한국’이라고 썼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 반세기 만에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데 대한 국민적 자부심이 국호에 대한 애정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리라.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이 우리 국호가 된 연유와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24680
1896 - 이탈리아의 시인 에우제니오 몬탈레(Montale, Eugenio) 출생 몬탈레 [Montale, Eugenio, 1896.10.12~1981.9.12] [오늘<1235>(10월12일)] 몬탈레 몬탈레가 신비주의자든 아니든, 그의 시는 음악에서 출발했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징집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지만, 음악은 몬탈레의 일생을 따라다녔다. 음악은 그의 시 속에서 다양한 변주와 밀도로 펄떡거리기도 했고, 시 바깥에서 시인의 생업을 감당하기도 했다. 장년기 이후 몬탈레는 밀라노의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에서 밥벌이를 했는데, 그가 기고한 기사들은 주로 음악평론이었다. 문학에 대한 글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몬탈레는 1922년부터 문학지 ‘프리모 템포’의 창간 멤버로 일했고, 일생 동안 여러 매체에 시 비평을 썼다. 그는 또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셰익스피어, 코르네유, 멜빌, 엘리엇, 오닐 같은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작가들 작품을 이탈리아어로 옮겼다. 몬탈레의 사후 그의 작품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됐지만, 생전에는 자신의 시를 스스로 프랑스어나 영어로 번역했을 만큼 외국어에 능했다. 몬탈레의 시에 정치적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는 조국의 파쇼 정권에 다부지게 반대했다. 1920년대 말부터 10년 가까이 재직한 피렌체의 가비네토 비외쇠 도서관 관장 자리에서 쫓겨난 것도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 몬탈레는 1975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10/11 14:57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410/h2004101114555025340.htm&ver=v002
1891 - 독일의 철학자, 카르멜 수도회의 수녀 슈타인(Stein, Edith) 출생 슈타인 [Stein, Edith, 1891.10.12~1942.8.9] 슈타인은 독일 태생의 철학자이자 나치에 의해 처형당해 현대의 순교자로 일컬어지는 카르멜 수도회의 수녀이다.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1904년 신앙을 버렸다. 괴팅겐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에드문트 후설과 친해졌고, 인과관계로 현상을 설명하려는 어떤 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의식으로 경험된 현상들을 기술하고자 한 후설의 철학, 즉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명성을 쌓아가다가 1921년 아빌라의 성 테레사의 전기에 깊은 감동을 받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로마 가톨릭 철학과 현상학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던 중 쾰른의 카르멜 수도회에 가입했다.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의 카르멜 수녀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네덜란드를 점령한 나치에 의해 1942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가스실에서 최후를 마감하기 전까지 수용소 내의 다른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에 의해 1987년 5월 복자로 추증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브리태니커
"진리를 희구하는 이는 스스로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신을 희구하는 것이다."
- 에디트 슈타인
1880 - 프랑스의 소설가 루이 에몽(Hémon, Louis) 출생 에몽 [Hémon, Louis, 1880.10.12~1913.7.8] 프랑스의 작가. 프랑스인들의 캐나다 개척시절을 그린 소설 중 가장 유명한 〈하얀 처녀지 Maria Chapdelaine〉를 썼다. 영국에서 언론인과 스포츠 기자로 몇 년 간 활동하다가 1911년 캐나다로 건너간 그는 농장노동자로 일하면서 〈하얀 처녀지〉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퀘벡 주 세인트존 호 지역의 거주하기 힘든 토양과 기후에 맞서 싸우는 남녀 이주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에몽이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삶을 이상화하는 데 실패했다는 일부의 혹평도 있었지만, 이 작품은 곧 캐나다 지역 작가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원래 파리에서 발행되는 잡지 〈탕 Le Temps〉(1914)에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1915년 단행본으로 출판된 이후 판을 거듭했고, 세계의 주요언어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이 출판되기 전에 열차사고로 죽어 그 성공을 보지 못했다. 1980년 니콜 드샹이 여러 해에 걸친 작업 끝에 에몽의 자필 원고를 토대로 하여 〈하얀 처녀지〉의 개정판을 내놓았다. /브리태니커
1872 - 영국의 작곡가 랠프 본 윌리엄스(Vaughan Williams, Ralph) 출생 본 윌리엄스 [Vaughan Williams, Ralph, 1872.10.12~1958.8.26] 영국의 작곡가. 다운안푸니 출생. 케임브리지대학과 왕립음악원을 나왔으며, 뒤에 M.브루흐(1838∼1920)와 M.J.라벨(1875∼1937)에게 사사하였다. 작품은 영국민요와 튜더시대의 음악이 밑바탕에 깔려 있으며, 후기에는 독자적인 음질서(音秩序)에 따랐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적이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바다의 교향곡》 《런던교향곡》, 오페라 《소몰이 휴》 《바다로 가는 사람들》, 관현악곡 《탈리스의 주제에 의한 환주곡(幻奏曲)》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합창곡 ·교회음악 ·영화음악 등이 있다. /naver
1870 - 이탈리아, 통일 완성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오스트리아·에스파냐 세력을 추방하여 봉건적 특권의 폐지, 교회재산의 몰수 등 프랑스혁명 정신을 이탈리아에 가져다주는 역할을 다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구체제(舊體制)가 부활하였으나 각지에서 입헌혁명(立憲革命) 또는 공화제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1848년 유럽의 혁명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 운동은 오스트리아의 군사력과 교황 원조에 나선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에 의하여 좌절되었으며, 입헌헌법을 유지한 곳은 사르데냐 왕국(사보이 왕국)뿐이었다.
1870 - 미국 남북전쟁의 남군사령관 로버트 리(Lee, Robert) 사망 리 [Lee, Robert E., 1807,1.19∼1870.10.12] [역사속의 오늘] 미국 로버트 리 장군 사망 로버트 리. 미국 남북전쟁(1861~1865) 당시 남군 사령관으로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준 ‘남부의 영웅’이다. 1870년 10월 12일 로버트 리 장군이 숨을 거두었다. 리 장군에 관한 이야기에는 특별한 것이 많다. 남군 사령관이었지만 그는 남부 모든 주의 연방 탈퇴에 반대했다. 노예제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고향인 버지니아주가 남부연합에 가담하자 합중국 연방군에서 퇴역해 남부군에 참가했다. 남부를 위해 싸웠지만 남·북부를 가리지 않고 양측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전쟁 관련 문서 어느 곳에도 북부군을 ‘적(enemy)’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등 남을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전 후 리 장군은 워싱턴대학교 학장(1865~1870)으로 교육에 헌신했다. 정치적으로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재건 계획 동조, 해방된 노예에 선거권 부여 및 남부 연방인 투표권 박탈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갈라진 남북을 하나로 재통합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과정에서 남부인들의 정치 참여 기회를 늘리기도 했다. 이런 행적도 그를 미국 역사에서 상징적인 인물로 남게 한 요인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10월 1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5099&yy=2006
1860 - 미국의 전기기술자, 발명가 엘머 스페리(Sperry, Elmer) 출생 스페리 [Sperry, Elmer Ambrose, 1860.10.12~1930.6.16] 다재 다능한 미국의 발명가·실업가. 자이로스코프 컴퍼스와 자이로 안정장치의 발명으로 유명하다. 소년 시절부터 기계와 전기에 대한 강렬한 흥미를 키워왔으며, 19세 때는 스코틀랜드의 한 제조업자에게 개량된 발전기와 아크 등(燈)의 개발에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도록 설득했다. 그 다음해(1880) 시카고로 가서 발전기와 아크 등을 만들기 위해 스페리전기회사라는 공장을 세웠다. 그는 회전 체인식 전기절단기를 발명한 뒤, 이를 제조하기 위해 스페리광산기계회사를 세웠다(1888). 2년 뒤 그는 수송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먼저 클리블랜드에 스페리전기철도회사(나중에 제너럴일렉트릭사가 인수했음)를 설립하여, 산업용 전기기관차와 시가전차용 전동기 전동장치를 설계했다. 1894년부터는 자신의 특허품인 충전지로 구동되는 전기자동차를 만들었다. 1900년 이후에는 C. P. 타운젠드와 함께 워싱턴 D. C.에서 전기화학연구소를 세웠다. 그곳에서 낡은 깡통과 고철에서 주석을 추출하는 염화주석추출법과, 불순납에서 연백(鉛白)을, 그리고 소금에서 가성소다를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한 이 무렵에 시카고퓨즈선회사를 세워 자신이 발명한 기계로 전기 퓨즈 선을 제조했다. 이런 동안에도 조명에 대한 흥미를 계속 지니고 있었다. 1918년에는 이전보다 6배 더 밝은 고광도 아크 탐조등을 만들어냈다. 그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수십 년 동안 장난감이었던 자이로스코프에서 유래했다. 1896년경부터 연구를 시작한 자이로컴퍼스는 1911년 미국 전함 '델러웨어호'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자이로컴퍼스를 적절히 조절하면 항상 진북(眞北)을 가리킨다. 1910년 브루클린에 스페리자이로스코프사를 설립했다. 그는 자이로의 원리를 어뢰의 유도장치, 선박의 자동조타장치, 비행기의 자동안정장치, 그리고 선박의 안정판에까지 확대시켰다. 자이로스코프사의 직계회사인 스페리사(지금은 유니시스사의 일부)는 컴퓨터, 정밀장치·제어기, 농기계, 전기·유압 장치 등을 생산했다. 그는 일생 동안 8개의 제조회사를 설립했으며, 400개 이상의 특허를 취득했다. /브리태니커
- Ando Hiroshige, Artist. - 'Eko in Drum Tower', Ryogoku
- 'Night Show at Kambara' - 'Hakone', print from the 53 stages of the Tokaido.
- 'Hodogaya', (Bridge over Waterway) - 'Kameyama', (Snow-covered Mountain slope)
- 'Splended view from bank of Sunida River' 1858 - 일본의 화가, 목판화가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사망 안도 히로시게 [安藤廣重, Ando Hiroshige, 1797~1858.10.12] 일본의 목판화가. 일본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의 대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도쿠가와[德川] 막부시대의 하급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 소방조(消防組)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무라이가 부업을 가졌듯이 소방조이던 히로시게도 화가를 부업으로 삼았다. 17년 동안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도요히로가 사망한 1828년까지는 배우와 미인을 주제로 한 판화만을 제작하였다.
- England, 5 Pounds (Banknote)
1845 - 영국의 퀘이커교 박애주의자 엘리자베스 프라이(Fry, Elizabeth) 사망 프라이 [Fry, Elizabeth, 1780.5.21~1845.10.12] 결혼 전 성은 Gurney. 영국의 퀘이커교 박애주의자. 유럽에서 교도소 개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영국 병원제도와 정신병자 처우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은행가이며 상인인 부유한 퀘이커교도의 딸로 태어나 런던의 상인 조셉 프라이와 결혼했고(1800), 대가족을 보살피면서 사역활동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퀘이커교로부터 '목사'로 인정받았고(1811), 후에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북부, 아일랜드, 유럽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사역했다. 거기서 교도소들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썼다. 예를 들어 뉴게이트 교도소에 대해 조언한 사항들은 죄수들을 성별·범죄별로 따로 수용하고, 여죄수들은 여교도관이 감시하며, 종교와 세속 교육을 적절히 제공하고, 유용한 일거리를 주라는 것 등이었다. 프라이가 내놓은 제안들은 그녀가 죽기 전에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점차적으로 실현되었다. /브리태니커
1810 - 독일 맥주축제 옥토버페스트 시작 [이 주일의 역사] 옥토버페스트 시작 △옥토버페스트 시작(1810.10.12) 정광용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7-10-08 [10:34:47]
1810 - 핀란드의 교육자 시그나에우스(Cygnaeus, Uno) 출생 시그나에우스 [Cygnaeus, Uno, 1810.10.12~1888.1.2] 핀란드의 교육자. '핀란드 초등교육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1827년 타바스테후스(헤메)에 있는 김나지움(중등학교)을 졸업하고 헬싱포르스대학교를 다닌 후 1836년 그곳의 철학교사가 되었다. 그후 비보르에서 2년 동안 부목사와 교도소 사제로 근무하는 동시에 사립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1840년 옛 러시아령 아메리카(지금의 알래스카 주 시트카)의 뉴아크에인젤에 있는 한 상업거류지에서 사제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교역소를 운영하는 교육받은 사람들과, 모피와 다른 물물교환품을 팔러 오는 원주민들 간의 대조적인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45년 시그나에우스는 유럽으로 돌아간 후 12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핀란드인 학교의 장학사로 활동했다.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와 프리드리히 프뢰벨과 같은 교육철학자에 관한 연구경험은 자신의 교육적 구상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56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의 초등학교를 완전히 재조직하겠다는 약속을 했을 때 그는 마침내 자신의 구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공익을 위해' 제안할 수 있는 핀란드 시민권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교육개혁안을 제시했고, 이것은 후에 그의 짧은 저작인 〈미래의 핀란드 초등학교에 대한 몇 가지 산고 Strodda Tankar〉에서 구체화되었다. 시그나에우스는 유치원 교육에 종이접기, 짜맞추기, 바느질, 모래·진흙·색채 놀이 같은 활동들을 도입한 프뢰벨의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아 수작업(手作業)에 중점을 둔 교육과정을 구성했다. 나아가 이러한 개념을 확장하여 농사일·원예·금속세공·목공·바구니짜기 등도 포함시켰다. 이것을 통틀어 스웨덴식 공작교육(veisto:영어로는 sloyd라 하는데 이것은 스웨덴어로 '수공'을 의미하는 slöjd에서 따온 것임)이라 한다. 시그나에우스의 노력의 결과로 핀란드 정부는 시골지역 학교 소년들과 사범교육기관의 남자교사들에게 수공교육방식을 의무적으로 부과했다. 1872년 정부는 이 방식을 도시에까지 확대했고,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나에스에 수공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1875년에는 중등교육단계의 학교(Sloyd Seminarium)도 생겼다. 수공교육에 관한 관심은 스웨덴을 시작으로 이후 프랑스·독일·영국·미국에까지 퍼져갔다. 특히 미국의 많은 학교에서는 가정경제학과 함께 교과과정에 남아 있다. 1863년 시그나에우스는 이위베스퀼레에 있는 신설 핀란드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브리태니커
1798 - 포르투갈의 국왕, 브라질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Pedro I) 출생 페드루 1세 [Pedro I, 1798.10.12~1834.9.24] 브라질 제국의 창설자이며 초대 황제(1822. 12. 1~1831. 4. 7 재위), 포르투갈의 국왕(페드루 4세). 일반적으로 '돔 페드루'로 알려진 그는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의 아들로 1807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정복했을 때 왕가와 함께 브라질로 몸을 피했다가 1821년 주앙 6세가 포르투갈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브라질에 남아 통치자로 있었다. 페드루는 브라질의 독립에 찬성하는 신하들을 자기 주위로 불러들였다. 포르투갈 의회(Cortês)가 그에게 리스본으로 돌아와 '국사에 대한 공부를 마칠 것'을 요구하자 그는 1822년 9월 7일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3개월도 안 되어 제관(帝冠)을 썼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처음에는 열렬했지만 점차 식어갔다. 1823년 브라질 의회가 자유주의적인 내용의 헌법을 제정하려 하자 페드루는 의회를 해산하고 급진파 지도자인 주세 부니파시우 데 안드라다 에 실바를 국외로 추방했다. 그러나 1824년 3월 25일 그는 국무회의가 초안한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승인했다. 헌법을 승인함으로써 퇴위당하는 위기는 넘겼을지 모르나 국민의 인기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전제주의적인 통치 방식, 의회정치에 대한 열정의 부족, 포르투갈의 내정 문제에 대한 여전한 관심 등으로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지금의 우르과이 지역을 놓고 아르헨티나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더욱 인기를 잃었다. 의회 안에 강력한 반대 세력이 등장하고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1831년 겨우 5세인 아들 돔 페드루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하여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페드루 1세는 제위에서 물러나기 전인 1826년 3월 10일 부왕인 주앙 6세가 죽자 페드루 4세로서 명목상의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다. 그로부터 2개월 뒤 그는 브라질에 있으면서 포르투갈을 위한 의회 헌장을 발포하고 조건부로 퇴위하여 포르투갈의 왕위를 마리아 다 글로리아(뒤에 마리아 2세)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온 뒤 섭정인 자신의 동생 미겔의 위협에 맞서 딸의 권리를 확고히 하려고 노력하다가 죽었다. /브리태니커
1786 - 제퍼슨, 이탈리아 화가에 연애편지 [책갈피 속의 오늘]1786년 제퍼슨, 伊화가에 연애편지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을 기초했고 훗날 3대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1786년 10월 12일 심혈을 기울여 편지 한 통을 썼다. 주프랑스 미국 공사로 파리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71012/8499324/1
1537 - 영국의 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 출생 에드워드 6세 [Edward VI, 1537.10.12~1553.7.6]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1547~53 재위). 에드워드는 헨리 8세의 유일한 적자였다. 어머니는 헨리 8세의 3번째 아내인 제인 시모어로, 에드워드를 낳은 지 12일 만에 죽었다. 에드워드는 지금까지 건강이 좋지 않은 유약한 어린 국왕으로만 알려져왔지만 최근에 나온 귄위있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죽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에드워드를 가르친 가정교사들은 그가 지성이 뛰어나고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 그리고 신학에 남달리 이해가 빠른 학생임을 알았다.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죽자 에드워드는 왕위를 이어받았다. 헨리 8세는 에드워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 위원회가 정사를 돌보도록 칙령을 내렸다. 실제로 에드워드의 외삼촌이자 서머싯 공작인 에드워드 시모어가 섭정으로서 거의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다가 1549년 파렴치한 워릭 백작(뒤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에게 타도되었다. 어린 국왕은 그저 허울뿐이고 그뒤에서는 노섬벌랜드 공작이 정부를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서머싯 공작이나 노섬벌랜드 공작이 영국의 종교개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취한 조치들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에드워드 자신의 강렬한 신앙심과 일치했다. 1553년 1월 에드워드에게 처음으로 결핵 증세가 나타났고 5월이 되자 치명적인 결핵에 걸린 것이 확실해졌다. 에드워드는 노섬벌랜드 공작과 함께 2명의 이복 누이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고 노섬벌랜드 공작의 며느리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와 그녀의 아들들을 직계 왕위계승자로 결정했다. 그결과 에드워드가 죽은 후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불과 9일 간(1553. 7. 10~19) 통치했으며 그보다 더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던 메리 1세(1553~58 재위)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에드워드에게는 효율적으로 정사를 돌볼 잠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에드워드가 만약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그의 종교적 열정과 극도의 완고함으로 인해 영국성공회는 더욱 경직되고 편협한 성격을 띠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브리태니커
1492 - 콜럼버스, 바하마 제도 발견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1492년 10월 12일 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를 탐험하는 스페인 왕실 소유의 탐사대를 이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드디어 옷을 입지 않은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 어떤 나라의 해변에 당도했다. 오랫동안 육지에 닿기를 기다려 온 그의 염원에 행운이 깃든 것으로 받아들인 콜럼버스는 이곳을 `구원의 성자`라는 뜻으로 `산살바도르`라고 불렀다.
[오늘속으로(10월12일)] 콜럼버스의 날 1492년 10월12일 이탈리아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이탈리아식 이름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 스페인식 이름은 크리스토발 콜론)가 이끄는 스페인 항해단이 대서양을 건너 현재 바하마 제도의 와틀링섬에 도착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103853
원주민에 닥친 대재앙 '1492 콜럼버스'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 17. 아메리카의 ‘발견’ ? 1492년 10월12일 콜럼버스 일행이 오늘날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했다. 현지 주민들은 과나하니라 부르던 이곳을 콜럼버스는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 명명하였다. 아메리카의 ‘발견’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미 만 년 전부터 사람들이 잘 살고 있던 곳에 어느 날 외지인들이 찾아와서 생뚱맞은 이름들을 붙이고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여튼 이날 이후로 역사의 흐름이 완전히 바뀐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방향의 변화란 말인가? 유럽의 해외팽창의 선두 국가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들 수 있으나, 이 두 국가의 팽창 과정은 성격이 다소 달랐다. 포르투갈이 상대적으로 더 ‘상업’ 지향적인 반면 에스파냐는 ‘정복’에 더 큰 무게가 실렸다. 사실 포르투갈이 진출해 들어간 아시아에서는 강력한 정치·군사 세력들이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정복을 시도할 여건이 못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와 함께 애초부터 에스파냐 인들의 심성이 상대적으로 더 군사적·폭력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에 아프리카 북부에서 건너온 이슬람 세력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가 그 이후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 세력을 차차 몰아내면서 영토를 회복하는 소위 레콩키스타 운동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국가들이 형성되었는데, 포르투갈은 일찍이 영토를 회복하고 먼저 국가 건설을 완수하였으나, 나머지 지역에서는 이슬람권과의 전쟁이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492년이라는 해는 한편으로 콜럼버스의 항해의 해이지만 동시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정복됨으로써 레콩키스타가 완수된 해이며, 또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 왕국에서 유대인을 축출함으로써 종교적 배타주의가 강화된 해이기도 하다. 에스파냐인들에게 외국인과의 접촉은 대부분 불구대천의 원수들과 전쟁을 벌이고 낯선 외지인들을 박해하거나 살해하는 경험이었다. 이때 세력이 커진 중·하급 전사 귀족들이 해외 식민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학자 랜디즈의 표현을 따르면, “말과 칼, 살인의 스릴과 약탈의 즐거움을 맛본 이 ‘귀족 훌리건’들은 무장해제가 쉽지 않은 형편이고 중앙 정부가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곤란한 인간들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법은 이들을 국외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아메리카에 도착해서 이방인을 만났을 때 에스파냐인들이 대뜸 칼부림부터 시작한 데에는 이런 것들이 배경에 놓여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에스파냐인들은 탐험·정복·상업 활동을 하면서 가공할 폭력을 휘둘렀다. 말과 칼, 창을 이용한 대량학살과 원주민 강제노역이 자행됐다. 유럽인들에겐 영광, 원주민들에겐 비극의 시작이었던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아메리카 대륙에서 에스파냐인들이 벌인 사업은 탐험, 정복, 상업이 혼재된 양상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그들이 처음 도착한 카리브 해의 섬들에서부터 무식하고 절제력 없는 선원들은 주저하지 않고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여 일대 혼란을 초래했다. 이 당시의 사정이 얼마나 참혹한지는 이 일들을 직접 경험하고 기록을 남긴 라스카사스 신부의 증언에서 알 수 있다. 예컨대 그는 이스파뇰라 섬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이렇게 적고 있다. “기독교도들은 말과 칼, 창을 사용해 학살을 시작했고 원주민들에 대해 이상할 정도의 잔혹성을 보였다. 마을을 공격하면서 어린이, 노인, 임산부, 혹은 출산 중인 여인까지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칼로 찌르거나 팔다리를 자르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마치 도살장에서 양을 잡는 것처럼 갈가리 찢었다. 그들은 한칼에 사람을 벨 수 있는가, 머리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는가, 혹은 칼이나 창을 한번 휘둘러서 내장을 쏟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 서로 내기를 걸었다. 어머니의 품안에 있는 아이를 낚아채서 바위에 집어던져 머리를 부딪치게 하든가 강물에 집어던지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자식들아, 그곳에서 펄펄 끓어라.’ … 그들은 키가 낮은 교수대를 만들어서 발이 겨우 땅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 높이로 사람을 매달아 놓았다. 구세주 예수와 12제자를 기념한다면서 13명을 이렇게 매단 다음 불타는 장작을 발치에 두어서 산채로 태웠다.” 과연 이 기록이 사실일까? 그리고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의 수는 모두 얼마였을까? 라스카사스 자신의 말에 의하면 1500만명에 가깝다고 한다. 이 기록을 놓고 후대 역사학자들 간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이 사실일 리는 없을 것이며, 라스카사스의 수치는 극도로 과장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혹은 그가 정신병자라는 말도 나왔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볼테르는 이 책이 여러 군데 과장되었겠지만, 설사 10배로 과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나머지로도 이미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메리카 주민들의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주장하는 견해를 ‘흑색 전설(Black Legend)’이라고 부르는데, 현재는 이것이 충분히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정설이다. 에스파냐 인들은 정복 지역에 요새화된 읍을 건설하고 그 주변의 땅을 분할하여 통치했다. 이것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면서 새로 획득한 영토를 관리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금을 얻으려고 했으나, 문제는 사금 채취 노동을 할 인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503년에 이사벨라 여왕이 칙령을 발표하여 현지 주민의 노동력을 할당하는 레파르티미엔토(repartimiento) 체제를 구축했다. 주민들은 무상이든지 혹은 몇 푼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정복자들을 위해 사금 채취 작업을 해야 했다. 이 강제노역 체제가 원주민 사회를 붕괴시켰다. 소박한 사회에서 평온한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가족과 떨어져 8개월 동안 일한다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으며, 여기에 질병과 백인들의 학대, 높은 자살률이 더해져서 사망자가 늘고 출산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다른 곳이라면 산악지역이나 정글로 도주했을지도 모르지만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는 그럴 수도 없었으므로 조만간 인구 전체가 사라져 갔다. 한 사회의 멸망을 대가로 해서 1503~1510년 사이에 19톤의 금이 에스파냐로 갔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에는 사람도 금도 모두 소진되었다. 서인도제도에서 이런 가혹한 방식으로 얻은 부는 다음 탐험의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에스파냐 탐험가들은 곧 대륙 본토로 공격해 들어갔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어떤 의미일까? 유럽인으로 보면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는 새로운 약동의 역사의 시작이겠으나, 원래 그곳에 살던 땅주인의 관점에서는 최악의 비극의 시작일 터이다. 어느 쪽에 중점을 둘 것인가? 많은 미국인들은 10월 12일을 ‘콜럼버스 데이’로 기념하지만, 진보적인 대학이 위치한 버클리 시에서는 이 날을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기념한다는 것이 한 가지 참고할 만한 사례가 될 것이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 /한겨레 2008-01-18 오후 07:10:20 http://www.hani.co.kr/arti/society/life/264134.html
1350 - 러시아의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Dmitri Donskoi) 출생 드미트리 돈스코이 [Dmitri Donskoi, 1350.10.12~1389.5.19] 본명은 Dmitry Ivanovich. 모스크바의 공(1359~89), 블라디미르 대공(1362~89). 쿨리코보 전투(1380. 9. 8)에서 1240년부터 러시아를 지배한 몽골의 킵차크 한국(汗國)과 싸워 이겼다. 모스크바의 유약공 이반 2세(1353~59 재위)의 아들로 겨우 9세 때 모스크바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고 3년 뒤에는 종주국인 킵차크 한국의 대왕을 설득해 수즈달의 드미트리가 갖고 있던 블라디미르 대공 칭호(1328~59년에는 모스크바 공이 차지했음)를 넘겨받았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를 넓히고 로스토프·랴잔 군주를 굴복시키며 갈리치·스타로두프 군주를 폐위시킴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킵차크 한국에 내분이 일어나자 정기적으로 바치던 조공을 끊었고 다른 러시아 군주들과 힘을 합쳐 몽골 침입에 대항했다. 1378년에 러시아군은 보자 강에서 킵차크 한국군을 쳐부쉈다. 그뒤 서부 킵차크 한국의 유능한 통치자였던 몽골 장군 마마이는 주변 군주들과 군사 동맹을 맺어 러시아 정복을 시도했으나 돈 강 근처 쿨리코보 평원에서 혈전을 벌인 끝에 드미트리에게 졌다. 이 승리로 드미트리는 돈스코이('돈 강의'라는 뜻)라는 명예스런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몽골 지도자 토크타미시가 마마이와 싸워 이긴(1381) 뒤 모스크바를 약탈하고(1382) 러시아의 통치권을 손에 넣음으로써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영토는 다시 몽골로 넘어갔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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