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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이야기
잣나무 배 <황진이>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을 법한 시이다.
● 반달을 노래함 <황진이>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
슬픔에 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수착곤산옥 재성직녀소 견우이별후 만척벽공허
* 이 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시인데 황진이가
자주 불러 황진이의 시로 오인되고 있다는 학설도 있다.
● 산은 옛 산이로되... <황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 청산은 내 뜻이요… <황진이>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 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님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맛깔난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V가 하노라
-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님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의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을 전한다.
●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에
자세히 전한다.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했다.
벽계수가
그 말을 따라서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i았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청산리 벽계수야...
"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가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가 웃으며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
라며 가버렸다.
벽계수는
매우 부끄럽고 한스러워했다.
한편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에는
조금 달리 나와 있다.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
● 어져 내 일이야… <황진이>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이별의 회한을
노래한 것으로 황진이가 시조의 형식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시조이다.
●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황진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 別金慶元 (별김경원) 김경원과 헤어지며 <황진이>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 朴淵瀑布 (박연폭포) <황진이>
一派長川噴壑? (일파장천분학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玉碎徹晴空 (주용옥쇄철청공)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한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사랑한 박연폭포. 송도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유려한 표현은 박연의 장관을 짐작케 한다.
박연폭포는 현재 개성시 개풍군(開豊郡) 천마산(天摩山) 기슭에 있다.
● 滿月臺懷古 (만월대회고) 만월대를 생각하며 <황진이>
古寺蕭然傍御溝 (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 (연하냉락잔승몽)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嶸破塔頭 (세월쟁영파탑두)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 (신송억득번화일)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 松 都 (송 도) 송도를 노래함 <황진이>
中前朝色 (설중전조색)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寒鐘故國聲 (한종고국성)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南樓愁獨立 (남루수독립)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殘廓暮烟香 (잔곽모연향)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 황진이는 옛 고려의 수도인 송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송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남아
있는 몇 편 안 되는 황진이의 시 중에 두 편이 송도를 노래한 것이다.
● 相思夢 (상사몽) 꿈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訪歡時歡訪? (농방환시환방농)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 이 시는 김안서 작사, 김성태 작곡으로 <꿈길에서> 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만들어졌다.
● 서경덕의 시조
*<성옹지소록>에 보면 황진이가 거문고를 즐기는 모습이 나온다.
-황진이는 성품이 소탈하여 남자와 같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불렀다.
-평생에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선생의 거처에 가서
한껏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서경덕 또한
거문고를 즐겼으며, 거문고에 대한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있다.
그의 성리설은
우주의 근원과 현상세계를 모두 '하나의
기(一氣)'로 파악하였는바,
그는
이 하나의 기를 '태허(太虛·우주 생성 이전의 상태)'
개념으로 표출하고'선천(先天)'과 일치시켰다.
모든 현상세계가
생성되어 나오는 동정(動靜) 생극(生克)의 계기는
이 하나의 태허 속에 내포되어있으며,
'기'가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는
'이(理)'를 '기'의 위에 두기를 거부하고
'기'가 생성 작용하는
'후천(後天)'의
현상세계에서 그 정당성을 잃지 않게 하는
자기통제력으로 파악하였다.
즉 '이'는
'기를 주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기'의
한 속성으로 한정한 것이다.
그가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과
<줄 있는 거문고에 새긴 글>을 나란히 지었던
것도 바로 소리없는 가운데
소리를 듣는
음악의 본체와 소리 속에서 음률의 조화를 즐기는
음악의 응용으로,
'태허―선천과 동정―후천'의
구조로 이루어진 그의 기철학적 세계를 생생하게
암시해주는 것이다.
無絃琴銘(무현금명) 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琴而無絃, (금이무현) 거문고에 줄이 없는 것은
存體去用. (존체거용) 본체(體)는 놓아두고 작용(用)을 뺀 것이다.
非誠去用, (비성거용) 정말로 작용을 뺀 것이 아니라
靜基含動. (정기함동) 고요함(靜)에 움직임(動)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聽之聲上, (청지성상)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不若聽之於無聲, (불약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樂之刑上, (악지형상)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不若樂之於無刑. (불약악지어무형)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樂之於無刑, (악지어무형)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
乃得其 , (내득기 )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
聽之於無聲, (청지어무성)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乃得其妙. (내득기묘)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다.
外得於有, (외득어유) 밖으로는 있음(有)에서 체득하지만,
外得於無. (내득어무) 안으로는 없음(無)에서 깨닫게 된다.
顧得趣平其中, (고득취평기중) 그 가운데에서 흥취를 얻음을 생각할 때
爰有事於絃上工夫 (원유사어형상공부) 어찌 줄(絃)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가?
2.
不用其絃, (불용기현) 그 줄은 쓰지 않고
用其絃絃律外官商. (용기현현율외관상) 그 줄의 줄소리 밖의 가락을 쓴다.
吾得其天, (오득기천) 나는 그 본연을 체득하고
樂之以音. (락지이음) 소리로써 그것을 즐긴다.
樂其音, (락기음) 그 소리를 즐긴다지만,
音非聽之以耳, (음비청지이이)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요,
聽之以心. (청지이심)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彼哉子期, (피재자기) 그것이 그대의 지표이거늘
曷耳吾琴. (갈이오금) 내 어찌 거문고를 귀로 들으리?
琴銘(금명) 거문고에 새긴 글 <화담 서경덕>
1.
鼓爾律, (고이율) 그대의 가락을 뜯으며
樂吾心兮, (락오심혜)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諧五操, (해오조) 여러 가지 곡조를 고르되
無外淫兮 (무외음혜) 밖으로 지나치진 않는다.
和以節, (화이절) 강단으로써 조화시키어
天其時兮, (천기시혜) 날이 가고 사철이 바뀌듯하며,
和以達, (화이달) 통달함으로써 조화시키어
鳳其儀兮. (봉기의혜) 봉황새도 법도를 따라 춤추게 한다.
2.
鼓之和, (고지화) 그것을 뜯어 조화시킴으로써
回唐虞兮, (회당우혜) 요순시대로 돌아가며,
滌之邪, (척지사)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
天與徒兮. (천여도혜)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
操?洋, (조아양) 높다란 소리?넓은 소리를 타지마는
人孰耳兮. (인숙이혜) 그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繁而簡, (번이간)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有如味兮. (유화미혜) 간략한 데 뒷맛이 있느니.
偶吟(우음) 우연히 짓다 <화담 서경덕>
殘月西沈後(잔월서침후) 잔월도 서쪽으로 진 뒤에
古琴彈歇初(고금탄헐초) 오랜 거문고 타기를 비로소 쉬네
明喧交暗寂(명훤교암적) 밝고 소란함과 어둡고 적막함이 섞이니
這裏妙何如(저리묘하여) 이 속의 오묘함이 어떠하냐
● 청초 우거진 골에... <백호 임제>
*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 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풍류의 참 佳客 황진이 누구를 위한 吟詠이었나
< 먹과 청의 조화 >
※ 황진이의 인생과 시문학..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황진이..
그녀의 이력이 단순한 조선 중기 명종조 화류계의 명기로,
음풍농월의 명인으로, 그렇게 알고있으나,
그 이면 또한
자신을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가엾은 영혼이
타고 가는 상여위에 자신의 저고리를 벗어주어
그 가는 자의 영혼을 달래,
순탄히 그 가는 저승으로의 길을 가게 했던
것으로 알고있다.
때문에 자신의 일생이
만인을 위한 꽃이 되어버린 숙명적인 여인으로 누구나
그렇고 그렇게 황진이를 인식하여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
흐르는 진실, 사랑 그리고 그녀 의 시문학 등
그녀가 소유했던 삶 속의 모든 것들은
우리후대 인들이
그녀의 심오한 내면세계를 모르고 한 말이 거의
태반인 것 또한 사실이리라 생각해본다.
그러면 그녀가 가졌던
사유 인생관 그리고 애정관을 그녀의
한껏 승화된 마음의 창,
그녀의 작품들
한시와 시조란 이름의 열차를 타고 조선 중기의 옛 시대로
시간 여행을 松都의 옛 길로 떠나 보기로 하자.
그녀는
한시보다 시조의 대가로 알려져 있으나 한시에도
아주 능했음을 다음 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 詠半月. 반달을 노래함..
誰斷崑山玉 누가 곤륜산 옥을 떼어내어
裁成織女梳 직녀의 빗을 만들어 주었는가
牽牛離別後 견우신랑 직녀아내 이별 후
愁擲壁空虛 시름에 겨워 허공에 던져두었네
崑崙山은 전설상의 산으로 거기에는 옥이 많이 난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쪼금 찍어낸 참 빚 모양의 달이 은하를 배회한다는
황진이의 섬세한 기지야말로 시인의 경지를 초탈한 선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감히 이拙人은 생각해보는 것이다.
황진이의 그 경지는 李白 杜甫 孟浩然를 넘어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한 누이로 자리 매김 하는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특히 시를 사랑하는 이 세상의 여인들은 황진이의 다정다감한 그 韻을 사랑하리라.
黃眞伊 朴淵瀑布 徐華潭(徐敬德) 이세 傑物이 松都三絶이라,
사람들은 그 으뜸이 황진이라 했다한다니......
< 墨竹圖 >
* 送別蘇陽谷詩..
月下庭梧盡 밝은 달 아래 뜨락 오동잎 다 지고
霜中野菊黃 서리 내려도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있구나
樓高天一尺 누각 높아 하늘과 지척의 거리
人醉酒千觴 사람은 취하고 남겨진 술잔은 천이라
流水和琴冷 흐르는 물 차가운데 거문고는 화답하고
梅花入笛香 매화가지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와라
明朝相別後 내일 아침 그대, 나 이별 후
情與碧波長 정은 물결 따라 멀리멀리 가리라.
이 시는 황진이가 蘇陽谷(蘇世讓)과 이별 할 때 지어준 시라 하는데
그 節奏感이 음악처럼 물 흐르듯 壓卷이다.
流水와 冷은 소양곡을 말함이요
菊花 梅花는 황진이 자신을 隱喩한 것이라 생각해본다.
여기서 소양곡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라고 하는데
그는 여색에 신중하기를 친구나 후학들에게 역설하면서
내가 만일 여색에 眈溺하며는 나을 개새끼라(犬子) 부르라 하였다,
하지만 그는 황진이의 미색과 풍월에 현혹되어 自繩自縛 하였다하니
그를 친구들은 犬子님 하고 불렀다한다.
풍류란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 石榴의 孤獨 >
* 청산리 벽계수..
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에는 重臣 李氏 碧溪守와의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碧溪守는 벽계고을의 수령으로 목민관을 지칭하는 말로
지금의 개성 부근으로 추정하고있다.
이와 음이 같은 "碧溪水"라 하고 자신의 기명인 "明月"을 짜 넣은
황진이의 예리한 기지이리라 생각해 본다.
황진이는 순수하지 못한 꾀임 수로 자신을 가까이 하고자 한
벽계수를 이 시조를 지어 말에서 떨어지게 하였다 하는데
이는 엉뚱한 생각을 품은 벽계수를 보기 좋게 골탕먹이는
황진이의 여유로운 풍류의 여운이 아닐까..?
蛇足하면 이 시조는 엉큼한 자 벽계수를 보기 좋게 조롱한
축객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역설적으로 벽계수를 조롱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 시조를 듣고 낙마한 어리버리한 벽게수란 자는 진정 풍류를 알았단 말인가?
* 산은 옛 산, 등.. 2수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 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가.
이 두 수 시조에는 한 인걸에 대한 애도와 추모의 정이 담겨있다.
인걸은 누구였을까.
문헌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으나 徐敬德을 말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황진이가 평생 성인으로 우러러 사모한 인물이 서경덕이었기 때문이라
졸인은 생각도 해본다..
한때 황진이는 속세를 떠나 산수를 즐겼다 한다.
금강, 태백, 지리 등 여러 산을 유람하고 송도로 돌아온 것은 화담이 세상을 뜬 후였다.
그녀는 화담정사의 물가에 나 앉아 "지나가는 것은 물과 같은 것, 밤 낮 없이 멎지 않는다"
"(서자여사逝者如斯)" 라는 논어 말씀을 되 챙겨본다.
생전의 화담을 애도하고 추모한 시조는 "유한한 인생의 한 철학을 담고 있으면서도
說理가 아닌" 정서적인 멋을 느끼게 한다.
남성을 "물"로 여성을 "산"으로 비유한 것도 진이의 機智에 찬 풍류이리라 느껴본다
어촌의 노옹
情 恨의 時調 3수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더냐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타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1-
내 언제 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2-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드란 굽이굽이 펴리라.
-3-
이 세 편은 情恨의 시조다. 상대방은 누구였을까.
이에 따르는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다.
기생이었으니 각기 다른 대상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보면 이는 황진이의 풍류를 모르는 이야기다.
이는 한 사람에 대한 애틋한 情恨을 노래한 連作으로 보아야 한다.
1.에서는 이별에 아무런 안달 없이 보내놓고 나서야 그리워지는 사랑을,
2 .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철이 바뀌어도 잊을 수 없는 그 사랑을,
3에서는 그 사랑과 다시 만날 밤의 정경을 상상으로 담아낸
일련의 작품으로 볼 수밖에 없어
윗 삼 수도 역시 對象人이 스스로 도인, 묵객 蘇陽谷(蘇世讓)으로 추측할 수 있다.
< 수 묵 蓮 >
* 明月이 된 황진이...
멀티미디어는 표시되지 않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황진이는 송도출신(開城) 명기로 그녀의 妓名은 明月이라고 누구나 알고있다. 중종 때 황 아무개 進士의 庶女로 태어났으며, 經書에 능하고 詩 ·書·音律에 뛰어났고, 더구나 아름다운 용모는 타인의 追從不許였다 한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相思病으로 죽자
妓界에 투신했다 하니 인간의 길흉화복은 알 수 없는 미스테리이리라
● 잣나무 배 <황진이>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을 법한 시이다.
● 반달을 노래함 <황진이>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
슬픔에 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山玉 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수착곤산옥 재성직녀소 견우이별후 만척벽공허
* 이 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시인데 황진이가 자주 불러 황진이의 시로
오인되고 있다는 학설도 있다.
● 산은 옛 산이로되... <황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 황진이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하고 있다
황진이가 사랑한 남자들
평생을 불꽃같은 의지로 자기 삶을 살았던 황진이 그녀는 어떤 사람이건 자기가 좋아하면 사랑했고, 언제나 표표히 떠났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얼마나
쓸쓸했을까. 평생 목숨을 걸고 사랑하며 매달릴수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렇게 훌훌 떠날수 이었을까. 그녀는 모든생을 걸어볼 사람이 없었기에 누구든 붙들지 못하고 방황했던것이 아닐까
황진이, 언제나서 언제죽은지 잘 모른다. 몇몇 기록에는 1520년에서 1560년대 아버진 신분이높은 양반이고 어머닌 노래를 잘부르는 맹인이었다고 한다.
설문조사결가 여대생중 제일되고 싶은 사람1순위인 황진이 그는 타고난 미모뿐만아니라 감동적인 문학작품 때문이 아닌가 한다.
칼바람부는 한겨울밤의 사무치는 기다림을 노래한 이 시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사랑하는 님 오시는 날 밤이면 구비구비 펴리라..
조선중기 백호 임제는 그녀를 위해 많은 글을지었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돼
임지로 가는길에 황진이 묘를 찾아 지은 이시 때문에 파직을 면치못했다.
청초우거진 골에 자는듯 누운듯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있느냐
잔들어 권할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
그를 스쳐간 수많은 남자중에 정녕 그가 사랑했던 남자는 누구인가.
알려진 사람으로는 서경덕,벽계수,소세양,이사종,이생등이지만 더많지않을까 한다. 한말의 문장가 김택영의 소호당집에는 그녀의 첫남자는 이웃에사는
서생이었다. 상사병으로 죽은 서생의 상여가 황진이 집앞을 지나자 한발짝도 움직이지않아 황진이 저고리로 관을 덮자 움직였다고 한다.
또한 천마산 지족암에서 30년을 수도하고있는 지족선사를 찾아가 하룻밤에 파계시키고 떠나왔으나..
두번째로 찾아간 남자는 당대의 주자가 화담 서경덕을 찾아가 유혹했지만
동요하지않아 천하의 황진이도 서경덕은 허물수없는 요새였던것으로 전해온다.
황진이의 연인중 소세양이란 사람은 황진이의 뛰어난 소문을 듣고 내가 황진이와 30일간 함께살고 곧장떠나와 다시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않겠다고 호언장담
하던 소세양과의 사랑도 이별앞에 시 한수로 잡았다.
달빛아래에 오동잎 남김없이 떨어지고
서리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시드네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없네
흐르는 물소리는 차갑기만하고
매화향기는 피리소리에 어리는 구나
내일아침 우리둘 이별하고나면
사무치는 정 길고 긴 물결따라 멀리멀리 가리라...
황진이를 만나면 현혹되지않고 쫗아버리겠다던 벽계수도 시한수로 침몰시켰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가 좋아했던 남자는 냉철한 이성으로 욕구를 절제할 줄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자로부터 선택되기보다는 스스로 남자를 선택하여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과 만나면서도 언제나 사랑을 떠나 보내야 했다. 사랑을
보내는 그 밤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래서 그녀가 남긴 이시는 가슴을 더욱
아리게 한다.
임은가고 가버린 임은 오지않는다.
밤이 깊어도 오지않는 임을 기다리는 밤은 덧없다.
행여 추호라도 임을 속인일이 없는데
온다던 임이 오지않는 밤에
가을바람에 지는 나뭇잎 소리는 가슴을 친다.
황진이는 죽을무렵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말고 동문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를 삼도록 하시오 하고 말해 그대로 따랐으나 한남자가
장사지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황진이는 우리나라여성들이 가장 닮고싶어하는 사람이다. 조선을빛낸
신사임당, 허난설헌을 제치고 열광하는 이유는 그녀앞에 닥친 한계를 넘어
자유와 해방을 찾아 살다간 사람이다.
전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다간 뭇
사람과 달리 불행에 도전하면서 가야하는 새로운길을 선택한사람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말한"창조란 불행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금 그어 나가는것이다"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사람 바로 황진이가 아닌가 싶다.
출처 똑바로 살아라, 신정일 저
*황진이 시조 다섯편* .bbs_content P { MARGIN: 0px } #uploader_replyWrite-328 { VISIBILITY: hidden }
1) 다정다감하고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
황진이는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고 알려진
조선 중종 때의 송도출신 기생이다.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과감하고 적나라한 애정표현으로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청산(靑山)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에 견주어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妓)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속세를 멀리하고 성거산 화담에 집 짓고 도통하는 서경덕 선생을 유혹하려 했다가 실패하여 일생 동안 흠모하여 가르침을 받으며 송도삼절로 박연폭포(절승), 서경덕(절윤), 황진이(절색)을 자칭하였던 황진이는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고 하며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고 한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황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野史)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재상 송순(宋純), 황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宗室) 이언방(李彦邦), 재상 소세양(蘇世讓)등이 있고, 황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許筠)과 이덕형(李德炯), 유몽인(柳夢寅)등이 있다.
성격이 활달하고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던 그녀는 30년간 면벽한 채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며 도로아미타불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2) 황진이(黃眞伊)의 출생과 기녀(妓女)가 된 동기
본명이 진이요, 별명이 진랑이며 기명이 명월인 황진이는 중종때 송도의 이름 높은 명기로서 출생에서부터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그의 부친인 황진사가 길을 가던 도중 병부교 아래 맑은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름다운 처녀인 진현금에게 물을 청하고 서로 나누어 마실 때 마주치던 눈길이 인연이 되고 한 쪽박의 물이 합한주가 되어 당대의 절세가인 황진이를 낳았다고 하는 '황진사서녀'라는 설과 '장님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황진이의 확실한 생몰년대는 미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중종(1506∼1544)대와 명종(1544∼1567)대를 두고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 사적 인물 중 화담 서경덕(1489∼1544)과 백호 임제(1549∼1587)의 작품상의 연대 배경으로 볼 때 절정의 기녀 생활은 명종대까지로 보나 출신과 기녀 생활은 중종대이므로 중종조 사람으로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진이가 기녀가 된 이유에는 구구한 전설이 많은데, 그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일거일동이 예절바름에 감탄해서 연정을 품었던 이웃에 사는 '홍윤보'라는 총각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으나 어려서부터 같은 이웃에서 자라온 진이의 모습이 그의 마음 속에 큰 비중으로 자리를 잡아 갔으나 커서 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그녀는 자기가 생각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자꾸자꾸 멀어져 갔다. 진이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기회도 영영 오지 않았다. 마침내 상사병으로 몸 져 눕게 되고 안타까움을 하소연도 못한 채 아지랑이가 운무처럼 내리는 이른 봄 어느 날 눈을 감고 말았다
장례행렬이 지나 가는 도중 진이의 문앞에 이르러선 움직이지 않아 열 다섯 앳된 처녀가 된 진이가 평소에 즐겨 입던 속적삼과 꽃신을 주어 운구를 덮게 하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감정이 예민한 사춘기의 진이는 항상 마음이 괴로웠고, 날이면 날마다 자기를 그토록 애절하게 그리다가 죽어간 넋을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미모로 인하여 또 다른 총각을 죽일까 염려하여 호화롭고 귀염 받는 생활의 행복을 버리고 스스로 명월이라 하며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설, 또한 자신이 서출임을 비관하여 기생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3) 黃眞伊의 로맨스
38세라는 짧은 일생을 불처럼 뜨겁게 태우며 살다 간 황진이는 세상의 풍류남아와 영웅호걸은 원근을 불문하고 모두가 자기의 임이요, 사랑이라고 했다. 30년을 두고 면벽 참선한 지족암의 만석선사를 파계시킨 일, 여색에 지조를 뽐내던 벽계수 이창곤을 달밤에 만월대로 유혹하여 그의 자존심을 한 수의 시조로 여지없이 무너뜨린 일,
한양에서 내려온 양곡 소세양과 더불어 생갑사 치마자락을 끌고 천수원 허물어진 누대 위에서 훗딱 꿈결같이 지나버린 30일의 너무나 짧은 사랑의 아쉬움에 한 시라도 더 붙들고 싶어했던 그 뜨거운 밤과 자기 곁을 떠난 후 영영 찾아 오지 않는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리워하고 다시 보고 싶어 독수공방의 서러움을 안고 베갯머리 적셨던 그 긴 밤 하며,
명문 재상가의 이생도령과 함께 산 좋고 물 좋은 명산대천을 찾아 금강산에서 시작하였다가 중도에 헤어지고 혼자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팔도강산을 유람하던 시절… 다시 반겨주는 이 없는 송도 땅으로 돌아와 지난날의 남가일몽을 생각하며 허무감을 씹으면서 아아 부귀영화도 싫을세라… 청춘도 사랑도 덧 없어라…한숨 지었던 여인 황진이.
선전관이었던 명창 이사종과의 6년 동안의 동거생활. 이 때 황진이는 아주 평범한 한 사람의 아낙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지아비 섬기며 행복을 찾는 그런 여자로서의 운명을 다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1) 송도3절(松都三絶)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 화담은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 들과 지리산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燎)·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박순(朴淳)·민순(閔純)·박지화(朴枝華)·서기(徐起)·한백겸(韓百謙)·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황진이는 한평생 서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늘 거문고와 녹주를 가지고 화담이 사는 초야에 가서 즐기다가 가곤 하였다.
하루 이틀 만남이 깊어짐에 따라 화담과 황진이는 스승과 제자로서의 정이 이성으로서의 정으로 변해 갔지만 도덕이 높은 화담은 글을 배우러 오는 그녀를 허심탄회하게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녀 역시 스승으로서의 존경을 넘어서는 마음의 흔들림을 붙잡으려고 몹시고심했을 것이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임의 정(情)이 녹수(綠水) 흘러간들 청산(靑山)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니져 우러 예어 가는고.
'자신의 뜻'을 변함없는 '청산'에, '자꾸만 변하는 임의 정'을 '녹수'에 비유한 진이의 심정을 읊은 시조이다. '청산(진이)'은 기다리고 있으나 '녹수(서화담을 비롯하여 부운거사, 이석, 소양곡)'는 왜 말없이 흘러만 가는고. 사랑을 기다리면서 보내고 참으면서 후회하는 토속적 집념성이 흐르고 있으며 아마도 그녀의 앞을 떠나간 임들은 모두가 이 녹수처럼 울고 떠났을 것이다.
이런 감정의 갈등 속에서 진이가 화담을 찾는 날이 뜸해지자 서경덕은 그녀를 기다리는 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을 것이다.
밤은 깊고 적막한데 낙엽이 구르는 소리에 놀라 영창을 열고 혹시나 그녀가 올까 기다리고 있는 화담 자신의 모습에 고소를 머금으며 다시 문을 닫고 불은 껐으나 잠이 오지 않아, 어둠 속에 홀로 앉아 기다려지는 심정을 읊었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그렇게 고고한 화담도 인간인지라 사랑에 대한 순결하고 겸허한 인품이 솔직히 나타나 있고, 그의 고독한 심정이 눈물겹도록 여실히 나타나 있다. 산마루에 잎이 지고 낙엽이 떨어질 때는 독수공방의 외로움이 더욱 적적하고 자기 곁을 떠난 님(진이)을 찾는 담백한 정이 넘치는 시상이라 할 수 있겠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는 모든 남성을 자기에게 굴복시키고자 하였으나 벽계수의 근엄함을 쉽게 꺾은 마음 뒤에 오는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었다. 믿음직한 한 남자의 가슴에 안겨 지아비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을 꾸미는 평범한 아낙네의 생활을 갖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남달리 다정다감한 그녀였기에 텅 빈 가슴의 허전함은 그녀에게 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왔으리라.
불면의 밤을 지새며 찾아오지 않는 님을 서로 기다리는 심사를 담은 이 두 시조를 통하여 서화담과 황진이가 서로 떨어진 처소에서 낙엽 지고 구르는 소리에 행여 님의 발자국 소리인가 하여 귀를 세우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산(山)은 녜ㅅ산(山)이로되 물은 녜ㅅ물 안이로다
주야(晝夜)에 흘은이 녜ㅅ물리 이실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갓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베 치마 두른 채 한 많은 유람을 마치고 온갖 회포를 달래주는 정든 송도 땅을 찾으니 누구하나 반겨줄 이 없는 슬픔이 밀려든다. 자연은 옛 그대로이나 자기와 사랑하던 임, 서경덕은 물과 같이 흘러갔으니 뇌리에 스치는 허전한 마음은 형언할 수조차 없다. 스승처럼 애인처럼 흠모해 오던 서화담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고 설움이 밀려와 지은 시조이다.
떠나간 임은 잊어야 하건만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줄 것을 스스로 마음 속에 기약해 보는 체념 못할 집념이 넘치는 사랑의 심정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2) 이사종(李士宗)과의 6년간의 계약결혼
황진이는 자신이 정복할 수 있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자신이 사랑을 바쳤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났다. 진이에게 있어서 첫 남자였던 부운거사 김경원이 그랬고, 서화담이 그랬으며, 양곡 소세양이 그랬다.
진이가 당대의 명창 이사종을 만난 것은 27세 때였다. 화담이 생전에 거쳐하던 서사정 초당을 찾아 보고 오던 길에 마침 박연폭포와 송악산을 구경하고 오던 이사종을 만났다.
김경원, 서화담, 소세양처럼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별의 두려움이 오죽이나 컸으면 천하의 황진이도 아예 너무 깊은 정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사종과는 약속하에 사랑을 속삭였다. 이사종에게서 3년, 황진이 집에서 3년 도합 6년간의 애정생활을 마치고 깨끗이 이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대판 계약결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유감없이 정염을 불태웠던 이사종과 헤어진 황진이는 떠난 이사종이 그리워 삭풍이 휘몰아치는 엄동설한 긴긴 밤이면 이사종의 따뜻한 품을 그리는 마음에 그 옛날 부운거사 김경원을 사모하며 읊었던 시조를 새삼스레 떠올린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동짓달의 긴긴 밤'이라는 시간을 공간화하여 내가 그리는 임이 오시는 날 그 긴긴 밤에 쌓이고 쌓였던 정을 풀겠다는 허전한 마음의 하소연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소식이 없이 뜬구름처럼 사라져 버린 부운거사. 가을에 떠나 동짓달이 되어도 무심하니 낙엽처럼 쌓인 정을 잊지 못하고, 아랫목에 깔아 둔 이불 속에서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찾아주겠지 하는 수동적 사랑의 기다림이 섬세한 여성의 감정 속에 애절히 묻어나고 있다.
(4) 황진이의 작품 속에 담긴 애증일심(愛憎一心)
1) 별김경원(別金慶元)
相思相見只憑夢 생각고 보고픈 마음 만날 길은 다만 꿈낄 뿐
濃訪歡時歡訪濃 임을 찾아가 반겨할 땐 임은 나를 찾아 오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컨대 이후부터는 서로가 어긋나는 꿈길을
一時同作路中逢 같은 때 같이 떠나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그립고 야속한 사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첫 남자인 부운거사를 아무리 기다려도 만나는 길은 꿈길 밖에 없는데 내가 당신을 꿈속에서 만날 때는 당신은 나를 찾아 꿈속을 헤맬테니 언제나 서로가 만나지 못하고 어긋나기만 하지 않은가. 이 다음부터는 서로 같은 꿈을 꾸되 같은 시각에 꾸어서 찾아가는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오죽이나 좋겠냐는 것이다. 황진이의 부운거사에 대한 연연한 정이 아쉽게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낙엽 지는 소리에 행여 님의 발자국 소리인가 하여 속으면서 부질없는 생각 말자고 고개를 저었지만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또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곤 했던 서화담과, 한편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외롭고 쓸쓸한 밤 혹여나 님이 오시나 하며 낙엽 구르는 소리에 귀를 세우며 추야장장 긴긴 밤을 지새우며 기다리는 황진이. 이 두 사람은 서로 님이 오는가 보다 하고 기다리기만 하느라 만나지 못하고 가슴 속 깊이 꽁꽁 숨겨놓은 안타까운 사랑의 감정에 비해 보면, 김경원을 그리는 황진이의 위의 시는 훨씬 적극성을 띄고 있다.
서로 각기 와주기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시각에 반대 방향에서 같은 지점을 향하여 나아가서 중간에서 엇갈림이 없이 만나자고 하는 것을 보면….
2) 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
古寺簫然傍御溝 개울 곁 옛 절은 쓸쓸도 하네.
夕陽喬木使人愁 석양에 키 큰 나무 애를 끊노라
烟霧冷落殘僧夢 남은 중 꿈속에 차가운 안개
歲月쟁嶸破塔頭 깨어진 탑머리에 세월 간 자취
黃鳳羽歸飛鳥雀 봉황새 어디 가고 참새만 나니
杜鵑花發牧羊牛 진달래꽃 핀 곳에 염소를 치네.
神古憶得繁華夢 호서롭던 그 옛날 그려 보나니
豈意如今春似秋 오늘 이리 쓸쓸할 줄 뉘 알았으랴.
부운거사와의 첫사랑의 홍역을 지독하게 치르고 난 진이는 부운거사와의 모든 추억을 떨쳐버리려고 어느 봄날 만월대에 올라 인생무상과 허무를 슬퍼하며 지은 시이다. 꽃다운 젊음이 시들어 가도 아쉬워 할 그런 황진이가 아니지만 이 만월대 회고시야말로 인생 허무를 잘 표현하고 있다.
3) 영반월(詠半月)
誰斷崑崙玉 (수단곤륜옥) 곤륜산 옥을 그 누가 다듬어서
裁成織女류 (재성직녀류)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던고.
牽牛一去後 (견우일거후) 그리운 견우님 떠나가신 뒤
愁擲碧空虛 (수척벽공허) 서러워 허공 중에 던져 버렸네.
이 시는 직녀의 옥절같은 초승달을 쳐다보며 임을 생각하는 가련하고 요염한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양곡 소세양과의 이별이 가까움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이별의 슬픔을 초승달에 기탁하여 간접적으로 읊은 노래이다. 양곡 대감이 더 머물러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한시이다.
4) 정별양곡소세양
月下庭梧盡 (월하정오진) 달빛어린 뜰에는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서리속에 들국화 시들어 가네.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누대는 높아서 하늘에 닿고
相盞醉無限 (상잔취무한)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구나.
流水和琴冷 (유수화금냉) 차가운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피리에 감겨드는 그윽한 매화 향기
今日相別後 (금일상별후) 오늘 우리가 헤어진 후면
憶君碧波長 (억군벽파장) 그리움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이 시에는 소세양과 천수원에서 놀던 그 사랑과 행복을 잊지 못하여 이제 떠나려는 소판서를 하루라도 더 잡아두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 있다. '오늘 서로가 헤어진 후면 그리움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로 끝맺은 진이의 정성에 소판서도 하룻밤을 더 머물면서 사랑을 불태웠었다. 가라는 말에 섭섭히 떠나는 임이 있는가 하면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임도 있는 것이다.
황진이가 일생을 통해 남성으로서 사랑했던 이가 바로 소세양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소세양을 떠나 보낸 뒤 남긴 시조 한 수.
어저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르다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정이란 그 대상이 가까이 있을 때보다 .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더 그리워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아아 내 일이여 그리워할 줄을 몰랐단 말인가.
있으라고만 붙잡았다면 굳이 버리고 갔을까마는
보내 놓고 나서야 그리워지는 정을 나도 어인 일인지 모르겠구나.
몸부림을 치며 그리워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양곡 소세양이었다. 떠나는 양곡 대감을 말없이 보내 놓고 등잔불에 비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독수공방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가슴 속에 듬뿍 담은 채 가련하고 애절한 여성의 한 많은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는 시조이다.
5) 풍류묵객들과 떠도는 명월의 방랑
당시 근엄하기가 이를 데 없어 여자를 멀리 하며 명성 높은 황진이 소문을 듣고도 일소에 붙였다는 종실(宗室) 벽계수가 어느 날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 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가 이때 위의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 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유랑도중 식량이 떨어지자 민가와 절에서 걸식하곤 했는데 이생은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하산 해버리고 말지만 홀로된 그녀는 걸식하거나 때론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하면서 금강산 전역을 전부 구경하고서야 송도로 돌아간다. 이러한 그녀의 성정에서 자연과 동화되고 싶어할 만치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속속들이 함몰되기를 기원하는 황진이의 또 다른 모습 즉 구도자적 자세를 만나게 된다.
황진이의 작품에 나타나듯이 사랑했기 때문에 때로는 증오하게 되고 증오하기 때문에 반항하게 되는가 하면 곧 후회를 금치 못하는 심정이 되기도 하지만 자기의 심정과 행동을 분별 못하는 그런 사랑의 신비성을 황진이는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자존심이 증오심으로 증오심이 곧 후회를 낳게 되고 후회하는 까닭에 연민과 애정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 애증일심(愛憎一心)이 아닐까 한다.
(5) 황진이(黃眞伊)의 임종(臨終)과 백호(白湖) 임제(林悌)
그녀의 출생이 신비 속에 쌓여있듯이 그녀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으나 몇 군데 그녀의 유언에 관한 이야기가 성옹직소록에 보인다.
죽음을 앞둔 진이는 지나온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후회도 원망도 없는 고요한 체념관이 가슴에 가득한 채 '내가 죽거든 울지도 말고 고악(鼓樂)으로서 상여를 전송해 달라'고 한 말은 일세의 명기다운 얘기이나 '생전에 업보로 관도 쓰지 말고 동문밖에 자기의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으라'고 한 것을 보면 너무도 자신을 잘 알고 있었던 한 여인의 가혹한 자학의 채찍이기도 했다
어쨌든 진이는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재질이 너무 뛰어나서 오히려 그녀 한 인간으로서는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렇게 자유분방한 여인이어서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여인이었는지도 모른다.
황진이가 죽고 난 뒤의 이야기로는 나중 기생 한우의 가슴 속에 평생토록 연모의 정을 심어 주었던 자유 활달한 호남아요 당대의 한량이었던 백호 임제가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평소에 보고 싶었던 황진이를 찾았는데 이미 고인이 된 뒤라 백호는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술을 권하며,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뭇?는다
잔잡아 권하리 업스니 글을 슬허 하노라
하며 노래했고, 그렇게 사모하며 보고 싶어 하는 사람도 한 번 죽으면 잡초가 우거진 무덤에 백골만 묻혔는가 하는 덧없는 인생을 한탄하는 애끓는 심정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으니 생전에 명성을 떨쳐 세인의 심금을 울리던 사람도 죽음이 가련하다는 허무감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백호( 白湖) 임제(林梯)는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하고 말았으며 이 후 사색당쟁의 벼슬길을 스스로 버리고 야인으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평소 인연이 되지 않았지만 사모하였던 여류 시인의 무덤에 술 한잔 올렸다는 사연으로 관직을 떠나 사림에 묻히게 된 표상이 고금을 두고 짙은 그림자처럼 드리워지고 있다.
(6) 여성의 정한을 노래한
기녀들은 남성과의 접촉이 자유로왔던 관계로 이성애에 굶주린 남성들의 좋은 사랑의 대상물이 되기도 했으나 그들의 신분이 천인계급이었던 관계로 사랑은 일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아 숙명적인 비연의 주인공이 되어 고독과 상사고(相思苦)속에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기녀들이 읊은 별리, 고독, 상사로 이어지는 비련의 작품에서 원사(怨辭(詞))를 발견할 수 없다는 데서 기녀의 비련의 생활이 훌륭한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황진이 문학은 이별의 한과 그리움으로 일관된 문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한국문학에 있어 이별의 한을 노래한 작가는 많지만 황진이처럼 절실하게 세인의 가슴을 울렸던 작가는 드물 것이다.
황진이의 작품에는 그녀의 진실한 인간의 숨결과 몸부림이 스며 있다. 작품 내용도 기녀였기에 겪어야 했던 고독, 실연, 체념, 상사, 별리의 아픔이며 뭇 남성들과의 로맨스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절의, 연회석에서 남성들의 요구에 의해서 즉흥적으로 읊은 노래에는 황진이 문학의 독특한 멋과 기지가 넘쳐있는 한편으로 여성의 정한을 노래한 대표적 기녀시인으로 그녀가 간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남긴 주옥같은 작품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황진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해어화(解語花)로 존재했겠지만, 오늘날까지 숭앙을 받고 있는 것은 그녀의 문인(文人)다운 풍모, 즉 8 수의 시조와 6수의 한시(漢詩)가 전해져 오고 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잘못 알고있는 황진이 시
알고 싶어요.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위 시는 이선희씨의 '알고싶어요' 가사를 황진이의 시에서 따왔다고 전해지는 시지만
사실은 황진이의 시가 아니라합니다.
소설 "토정비결"을 쓴 이재운이라는 작가가 계십니다.
그분이 주간조선에 연재하는 소설(청사홍사)중에 황진이에 관한 소설이 있었는데,
그 내용중에 소세양이라는 사람에게 보내는 사랑의 시를 어떻게 만들까 하는것으로
한참 고민하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양인자님의 노래가사를 보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여 원작자의 허락을 받아
한시로 번역하여 황진이의 시로 소설에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쩌다보니 마치 황진이의 작품을 양인자씨가 번안해서
노래로 나온것처럼 잘못 알려졌지요.
오늘 어느분의 지적으로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철학자들] 서경덕, 은둔의 철학자
황진이가 사모한 사내…“종달새는 왜 나는가?”
송도삼절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황진이는 개성에 살던 여자 소경의 딸이다. 성격이 쾌활하였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노래를 잘 불렀다.
산과 물을 찾아 놀기를 좋아하여 풍악산, 태백산, 지리산을 두루 다니다 금성(지금의 나주)에 이르렀다. 마침 고을의 원님이 잔치를 베풀어 감사를 대접하고 있었다. 기생들이 가득히 앉아 있었는데, 황진이는 헤어진 옷을 입고 세수도 제대로 안한 채 윗자리에 앉아 태연히 이를 잡으며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황진이는 평소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여 거문고와 술을 들고 화담의 집을 찾아가 놀곤 하였다. 황진이는 말하기를 “지족선사는 30년간 벽을 보고 수도를 하였다 하지만 나에게 무너졌다. 그런데 화담 선생은 여러 해 동안 친하게 지냈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분은 진실로 성인이시다.”
일찍이 황진이가 화담에게 "송도에 삼절이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화담이 "삼절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황진이가 "박연폭포와 선생님과 저입니다." 하고 답했다.
이에 화담이 크게 웃었다."
송도삼절(松都三絶).
송도(지금의 개성)의 빼어난 것 세 가지라는 말이다.
박연폭포와 서경덕 그리고 황진이를 그렇게 부른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이 일화는 서경덕의 인품을 잘 보여준다.
서경덕(1489년~1546년)는 조선 11대 임금 중종 때 사람이다. 이 시기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TV 드라마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했던 시대이다.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첩 정난정 등이 드라마 소재로 자주 등장하였다.
중종은 사림파인 조광조를 등용하여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조광조는 덕치를 근간으로 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주장하여 왕에 대한 교육을 중시하였다. 또한 당시의 집권 세력인 훈구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파를 대거 합격시켰고, 훈구파의 공훈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자신을 계속 교육시키려는 조광조에 대해 염증을 냈다.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공훈이 삭제된 것에 불만을 품고 계략을 꾸몄다. 결국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는 제거되었다. 중종은 훈구파에 대한 견제를 위해 사림파가 필요했고, 그 수장인 조광조를 등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가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하려 하자 제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서경덕은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 조광조가 거듭 요청했음에도 그는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또한 그의 은둔생활은 자신의 철학과 연관된 것이었다.
격물을 통해 이치를 깨닫다
서경덕은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후일
"나는 스승을 얻지 못하여 학문을 익히고 깨닫는데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독학을 통해 자신의 학문을 이룩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학문을 '자득지학(自得之學)', 즉 스스로 터득한 학문이라 부른다.
그가 독학을 한 데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스승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14세 때에 선생을 정하고 공부를 하였는데, 선생이 <상서>의 기삼백(朞三百) 대목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선생을 두지 않고 홀로 독학을 하였다고 한다. 18세 때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러 학문의 방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때의 감격을 그는 "우리가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격물치지'. 알기 위해서는 사물을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이백이나 두보의 시에서 시구를 찾는 버릇이 여전히 있다면,
소씨(昭氏)의 거문고와 같지 않겠는가.
시가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 그 뜻을 잃지 않는다면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는가."
- 서경덕, <송심교수서>
소씨의 거문고는 <장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소씨가 거문고를 타니 제대로 나오지 않는 소리가 있고, 거문고를 타지 않으니 소리가 제대로 나온다는 말이다. 스스로 연구하여 시를 짓지 않고, 이백이나 두보의 시구를 모방하는 자세에 대한 비판이다.
격물, 즉 사물에 대한 연구. 이것이 서경덕의 학문하는 방법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에 천지만물의 이름을 써 붙여 놓고, 그것을 하나하나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3년을 연구한 끝에 그는 "나는 20세가 되어서야 한 번 저지른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게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연구는 주로 주변 자연 환경에 집중되었다. 종달새는 왜 나는 걸까, 바람은 왜 부는 걸까. 이러한 것들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
그는 연구를 통한 발견에 기쁨과 자부심을 느꼈다. 자신이 도달한 경지에 대해 이렇게 시로 썼다.
"눈에는 발을 드리우고 귀에는 문을 닫았지만,
솔바람 시내 소리는 더욱 뚜렷하기만 하구나.
나를 잊고 물(物)을 물대로 보게 되니,
마음이 어디에 있든 절로 맑고 따뜻하구나."
- 서경덕, <무제>
나를 잊고 물을 물대로 본다는 것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말한다.
이런 경지에 다다르니 눈귀를 가려도 바람 소리, 시내 소리를 뚜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서경덕은 자연에 대한 탐구를 통해 물아일체에 이르렀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우주만물의 근원은 기(氣)
서경덕은 오랜 연구를 통해 무엇을 알아냈을까. 다음의 시를 보자.
"바람이 지나간 뒤 달은 밝게 떠오르고,
비온 뒤 풀 냄새 향기롭다.
하나가 둘을 타고 있는 것을 보니,
물(物)과 물이 서로 의지해 있구나.
오묘한 낌새를 꿰뚫어 얻어,
방을 비우고 앉으니 빛이 생겨난다."
- 서경덕, <천기>
바람이 불고 난 뒤에 달이 밝고 비가 온 뒤 풀 냄새가 향기롭다는 것은
서경덕이 자연을 관찰한 결과이다. 그것은 물과 물이 서로 의지해 있음을 말한다. 하나가 둘을 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서경덕은 <원리기>에서 "하나의 기(氣)가 음양의 두 기를 가지고 있어서 음양의 두 기가 하나의 기에서 나타나는 원리"라고 말한다. 이런 오묘한 이치를 알게 되니, 방을 비워도 즉 마음을 비워도 진리를 얻게 된다는 얘기이다.
서경덕이 얻은 이치는 기에서 물이 생겨났고, 물과 물은 서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밝혀낸 진리에 대해 <태허설>에서 재차 설명을 한다.
"태허는 비어 있으나 비어 있지 않다. 태허는 곧 기이다. 태허는 끝이 없고 기 또한 끝이 없다."
- 서경덕, <태허설>
태허와 기는 만물의 근원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태허와 기는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태허인 기는 만물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기이하고 기이하다. 묘하고 묘하다. 갑자기 튀어 나오고 홀연히 열린다. 누가 그렇게 하였는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 - 서경덕, <태허설>
기의 운동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기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운동한다는 얘기이다. 기는 만물의 근원 즉 만물의 재료이자 만물의 창조자 즉 운동의 주체이다. 기의 역할과 작용에는 인간의 정신도 포함된다. 이 점에서 기는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과 다르다.
사람과 자연이 모두 기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서경덕은 자연의 연구를 통해 물아일체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아일체를 주장하는 철학에 도교가 있다. 서경덕은 도교로부터 몇 가지 아이디어를 차용하였다. 예를 들어 태허는 장자가 사용한 개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철학과 도교 철학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혀놓았다.
"노자는 유에서 무가 생겨난다고 말하는데, 이는 태허가 곧 기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태허에서 기가 생겨난다면 기가 생겨나기 전에는 기가 없는 것이니,
태허는 죽은 것이다. 태허에서 기가 생겨난다면 기는 시작과 끝이 있는 한정적인 것이 된다."
- 서경덕, <태허설>
태허와 기를 분리하는 도교 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이 둘을 구분하면 만물의 근원과 운동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태허는 만물의 근원이고 기는 운동인데, 기 이전에 또 다른 운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기의 무한성은 부정되고, 기인 태허 역시 부정되어 버린다는 얘기이다.
생성과 극복의 통일
서경덕의 철학은 김시습의 제기한 기일원론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김시습은 만물의 시작과 끝이 음과 양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긴다는 주장에 머물렀다. 서경덕은 이를 체계화하여 만물의 구성과 생성 원리를 밝혀놓았다. 다음의 설명을 보자.
"태허가 움직여 양을 낳고 조용히 하여 음을 낳는다. 기가 모여 두텁게 쌓인 것이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모여 있던 사람의 기가 흩어지는 것은 몸과 영혼이 흩어지는 것이다." - 서경덕, <태허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소멸하는지를 밝혔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서경덕은 기의 운동 법칙 또한 밝힌다.
"태허는 하나이지만 그 속에 둘을 포함하고 있다. 이미 둘이기에 그것은 열리고 닫히고 움직이고
멈추고 생성하고 극복한다." - 서경덕, <이기설>
또한 그는 생성과 극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는 둘을 생성하지 않을 수 없고 둘은 능히 스스로 극복한다. 생성이 극복이고 극복이 생성이다. 기가 미세하게 움직이든 크게 움직이든 생성과 극복이 있다." - 서경덕, <이기설>
만물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데 외부의 힘은 필요하지 않다. 내부에서 스스로 생성과 극복의 운동을 한다.
생성과 극복. 요샛말로 바꾸어 놓으면 조화와 투쟁이다.
이런 두 가지 운동과 그것의 통일을 통해 만물이 생성, 유지, 발전을 하여간다고 서경덕은 말한다.
조화만을 강조하는 입장도 투쟁만을 강조하는 입장도 반대한다. 원효의 화쟁사상과 상통하는 얘기이다.
서경덕의 철학은 정통 성리학과 대치된다.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세계와 자연과 인간을 설명하는 철학이다.
이 둘 중에서 성리학은 이치를 말하는 이를 더 중시한다. 이는 귀한 것이고 기는 천한 것이다. 서경덕은 이런 구분을 부정한다.
"이는 기를 주재한다. 주재한다는 말은 바깥에서 주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 만약 선행한다면 기를 유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서경덕, <이기설>
이는 기에 포함된 것에 불과하다. 이를 앞세우게 되면 태허와 기를 분리하는 도교와 마찬가지로 만물의 생성과 운동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이다. 서경덕은 이를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의 독자성은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기가 중심인 것이다.
은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서경덕은 자신이 발견한 원리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였다. 종달새는 왜 나는가. 떨어지려는 음기와 솟아오르려는 양기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종달새는 날아간다고 하였다. 부채를 부치면 왜 바람이 부는가. 부채가 공간 가득히 차 있는 기를 밀어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서경덕은 여기에서 멈추어 선다. 그는 <송심교수서>에서
"군자가 학문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학문으로써 그치는 것을 아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학문으로서 그친다는 말은 사회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그는 일체의 벼슬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철학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해 설명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당대에 미칠 파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회 현실에 대해 입을 닫고 철저히 은둔자 생활을 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학문의 대부분은 성현들이 밝혀놓았기에 나는 그 분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부분을 밝혀내려 했다"고. 이것은 자신의 철학이 미칠 폭발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최소화해 보려는 의도된 발언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이 철학에 대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는 그의 주요 철학 저작인 <원리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생사론> 등을 죽음에 임박하여 썼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성현들이 밝히지 못한 부분을 밝힌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철학이 정통 성리학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것임을 잘 알았다.
서경덕은 성현의 글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사물을 연구하여 자신의 철학을 세웠다. 그는 스스로 우주의 비밀을 풀었다고 자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내놓는 데는 소극적이고 신중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아직 그의 철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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