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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金九.1876.8.29∼1949.6.26)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 생. 호 백범(白凡). 안동(安東) 김씨(金氏). 부친은 김순영(金淳永), 신라 경순왕 33대 손. 아명(兒名) 창수(昌洙).
동학혁명 때 접주(接主)로 활약, 1896년 2월 황해도 안악의 주막(酒幕)에서 일본군 중위 쯔찌다를 죽이고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監理營) 감옥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탈옥, [신민회]에 가담하여 활약하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출옥, 1909년 11월 안중근의 이등박문 저격에 관련되어 투옥되었다.
1919년 상해로 망명, 임정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 1930년 [한국독립당] 조직, 1932년 1월 이봉창을 일본에 파견, 황제를 저격케 하고 동년 4월 윤봉길로 하여금 상해에서 일군 사령관 사라까와(白川義則) 등을 폭살케 하였다.
1940년 중경에서 임정 주석에 취임하고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하여 남북협상을 제창, 평양에서 김일성과 회담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되었다.
독립운동가ㆍ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로 고쳤다. 자는 연상(蓮上),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성장기의 가정환경】
순영(淳永)의 7대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傍祖)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다툼에서 청병(淸兵)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14세에 <통감> <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교주 최시형(崔時亨)과도 만났다.
【항일운동】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솟구치는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아 일본군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집행 직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었으나,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1899년 서울 새절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ㆍ이준(李儁)ㆍ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는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 고취에 열성을 다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좌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모의 혐의로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자유의 몸이 되자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8년 이동녕ㆍ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고, 1929년 재중국거류민단 단장도 겸임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마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ㆍ8 이봉창의거와 4ㆍ29 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尹奉吉)의 상해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ㆍ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다.
【광복군 운동】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역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ㆍ15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의 정치 활동】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광복정계를 영도해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ㆍ이봉창(李奉昌)ㆍ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손수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ㆍ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ㆍ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ㆍ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ㆍ김규식ㆍ김일성ㆍ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수립의 시련을 맛보고 그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자택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으며, 4월 의거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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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 호랑이, 김구>
‘팔봉산 호랑이’로 자라나 ‘상하이의 호랑이’로서 우리 겨레를 함부로 짓밟던 일본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백범 김구는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미국과 중국까지 끌어들여 1년 동안이나 합동으로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출동하려던 참에 2차세계대전이 끝남에 따라 8ㆍ15 해방을 맞게 되었다. 그는 우리 손으로 일본군을 몰아내지 못한 분함을 참고 해외에 나와있던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탈없이 귀국할 수 있도록 보살펴 준 다음 뒤따라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표범처럼 산을 잘 타고 원숭이처럼 나무에 잘 올라서 ‘팔봉산 호랑이’로 불리던 소년 김구는 어린 나이에도 마음이 넓고 또 머리가 뛰어나 이웃고을까지 알려져 있었다. 소년 김구의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알려지자 건너 마을의 정문재라는 학식이 높은 선비가 그를 불러다가 무료로 글을 가르치고 먹여 주었다. 이러는 3년 동안 그는 사서삼경은 물론 시전까지 익혀서 정 선비를 놀라게 했지만 그 당시는 나라가 어지러워서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17세의 김구가 과거에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세 되던 해 김구는 동학 접주 오응선을 만나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혁명에도 참가했으나 훈련받지 못한 군사들을 이끌고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김구는 안중근 의사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고능선이라는 유학자로부터 학문의 익혔는데 그때 고능선은,
“나뭇가지를 휘어잡고 발붙일 데가 없을 때는 절벽에서 손을 놓아 버리는 게 대장부야!”
하는 교훈을 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나라가 점점 어지러워지고 국모 민비가 일본인 깡패들의 손에 목숨을 잃자 분에 못이겨 하는 김구에게 고능선은,
“자네는 쫓기는 몸인지라 나라 안에서는 큰 일을 하기 어려우니 만주나 상하이로 건너가서 품은 뜻을 펴보는 게 어떻겠나?”
하고 권했다. 김구는 진남포에서 배를 기다리다가 민비를 해친 일본인 깡패 한 명을 죽인 죄로 투옥됐으나 그의 용기에 감동한 옥리(獄吏)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와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의 안창호를 찾아간 김구는,
“왜놈 첩자를 찾아내는 일은 내가 제일 잘할 테니 나를 임시정부 문지기로 써 주시오.”
했으나 치안과 정보를 맡아보는 경무국장 자리가 그에게 주어지자,
“난 꼭 문지기를 하고 싶었는데”
하고 말했다. 일본인 밀정이 아무리 속임수를 쓰고 들어오려 해도 귀신처럼 잡아내고 마는 그는 어느 새 ‘팔봉산 호랑이’에서 ‘상하이 호랑이’로 변해 있었다. 이승만의 뒤를 이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된 그는 돈이 없어 끼니를 굶고 방세가 밀려 집을 쫓겨나도 동지들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임시정부 간판만은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다녔다.
그는 해방이 된 후인 1945년 11월 23일 15명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다.
<김구 암살의 의혹> - 김삼웅: [주간여성](1992. 10. 11)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은 동지이면서 정적(政敵)이란 특수한 관계이다. 백범과 우남(이승만)은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함께 싸운 동지적 관계였다. 백범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적극적 항일투쟁 노선이었다면 우남은 외교적 방법으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소극적 항일 노선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백범은 27년 동안이나 중국 대륙에서 일관되게 임시정부를 이끌고 대일항쟁을 벌인데 비해 우남은 비교적 안전한 미국에서 교포들이 모아준 돈으로 외교활동에 치중했다.
이런 면에서 백범이 도덕적으로나 투쟁전과에 있어서 우남보다 독립운동의 정통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해방 후 우남은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 단독정부라도 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백범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1948년 우남 노선의 승리로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백범은 이의 참여를 거부하면서 비판자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백범이 암살당한 1949년 6월 26일은 이런 대각선상에 있었다. 우남이 대권을 차지했고 백범이 초라한 정당(한독당)의 영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해도 영향력이나 국민의 지지도에 있어서는 평행을 지키고 있었다. 더욱이 백범은 실현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대의와 독립운동의 정통이라는 명분을 한몸에 싣고 있었다. 따라서 우남은 백범에 대한 도덕성의 콤플렉스를 느끼는 상태였고, 이듬해(1950)로 예정된 2대 국회와 대통령 선거에는 한독당의 참여 가능성이 높아 재집권에도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범 암살극이 자행되고 그 배후를 둘러싸고 줄기찬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이승만 정권 12년 동안에는 ‘단독범행’으로 축소되고 그 이후 오늘까지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승만에게 보내지는 의혹은 다음과 같다.
▶백범 살해 후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조소앙은 사건 며칠 전 경무대에서 이승만과 나눈 시국담을 공개했다. 이승만은 그때 ‘백범이 공산당과 내통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린다, 그분 주변에 빨갱이가 잠입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지금까지 거명된 암살사건의 ‘중간급’ 배후자는 신성모 국방장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장은산 포병사령관, 김창룡 특무대장, 전봉덕 헌병부사령관(사건 직후 헌병사령관으로 승진) 등 친일 군부세력, 장택상, 김준연 등 정치세력, 노덕술, 최운하 등 친일 경찰 세력, 홍종만, 김충일, 엄승용 등 서북청년회원들로서 이들을 총 지휘할 지도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빼고는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승만 대통령 아니고는 이들 당대의 실력자들을 지휘 통솔할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백범이 살해당한 지 1주일이 지난 7월 2일 경교장으로 문상 행차를 나서면서 ‘한독당 내분의 소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백범의 살해는 순전히 어떤 행동 노선이 조국을 위해 더 유익한 길인가 하는 당내의 의견 차이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아직 한독당 내의 의견 대립이 외부에 알려진 일이 없는데 백범의 추종자가 그 의견 차이의 논쟁을 결말 짓고자 취한 격렬한 수단은 결국 비극을 초래했다.”
암살사건이 발생한 지 1주일밖에 되지 않고 배후세력 조사가 진행되어야 할 시점에 이승만은 이렇게 범행 배경을 한독당 내분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사건 발생 1시간 30분만인 당일 오후 2시에 전봉덕 육군헌병부사령관의 이름으로 백범 암살사건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한독당 위원장 김구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저격당해 절명했는데,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 구속 중이며, 범인이 현장에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의식의 회복을 기다려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하겠으나 단독 범행인 것 같다.”
앞서 인용한 이승만의 성명 내용과 함께 그 의도성을 짐작케 한다.
▶백범 암살사건과 관련 헌병대는 많은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하고 경교장에서는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도 의사나 서대문경찰서보다 헌병들이 먼저 나타나 스리쿼터에 범인 안두희를 싣고 사라졌다. 경교장 정문에는 헌병(책임자 김병삼 대위)들이 배치되어 일체의 출입자를 통제하면서 심지어 최대교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과 서대문경찰서장(이하성)의 출입까지 막았다. 특히 의혹을 받은 대목은 이 대통령이 중국군 헌병 대령 출신인 장흥 헌병사령관을 사건 발생 5시간만에 전격적으로 일선 사단장으로 좌천시키고, 전봉덕 부사령관을 승진 발령시키면서 이 사건을 맡도록 특별히 조처한 점이다.
헌병대의 신출귀몰한 행동과 초법적인 처사 그리고 전격적인 인사조치의 배경은 무엇인가. 인사조치의 명분은 ‘백범 측근’이란 이유지만 실제는 암살 배후를 은폐 조작하고자 하는 데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백범의 ‘측근’이라면 범행 배후를 밝히는 데 훨씬 더 열과 성을 다할 것 아닌가.
▶사건이 발생한 날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행정부 수뇌들의 행적은 범상치 않은 부분이 많다.
이 대통령은 낚시, 이범석 국무총리는 사냥, 신성모 국방은 칭병을 이유로 집에 누워 있었다. 그러나 낚시 갔다던 이승만은 경무대 연못에서 낚시질을 하던 중 암살사건의 보고를 받았고, 이총리는 수렵인들에게는 걸맞지 않은 ‘6월 사냥’을 떠났으며, 특히 신 국방의 처신은 많은 의혹이 따른다. 최대교 서울지검 검사장이 권승렬 법무장관과 함께 신 장관을 방문했을 때 아프다는 이유로 침대에 누워 있던 신성모는 백범이 피살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제 민주주의가 되겠군!’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면서 몸이 불편하다던 사람이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경무대로 향했다.
▶사건 당일 상오 9시 서울시경국장 김태선은 서울 일원에 느닷없이 특별경계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건 발생 후에는 다시 초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김태선은 초비상경계령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불의에 생긴 일이라 무어라고 말할 수 없으나, 치안은 염려할 것 없다. 초비상경계에 들어간 것은 치안상태를 우려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김구 선생께서 불의의 흉변을 당하신 데 대해 시민이 자숙하고 좀더 참된 조의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건 후에 내려진 경계령은 혹시 예상되는 혼란에 대비한 것이라 한다면, 사건 전에 선포한 경계령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수도 일원에 선포한 경계령이 대통령의 사전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승만은 이날 낮에 발생할 암살 사건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승만 정권은 백범 암살사건을 한독당 내분으로 몰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 비상식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안두희를 한독당에 입당하도록 소개한 김학규 조직부장 등 한독당 간부 7명의 구속 영장을 청구하는데 일반적 관행을 깨뜨린 것이다.
즉, 이들의 구속영장을 담당 검사는 물론 서울지방 검찰청 검사장조차 모르는 사이에 김익진 검찰총장이 직접 신청케 하고, 역시 담당 판사를 제쳐놓고 한격만 서울지방법원 원장이 직접 떼도록 한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영장 발부 경위에 대해 최대교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익진 검찰총장이 자기에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저 영감탱이(이 대통령 지칭)가 노망이 들어서…”라며 이승만의 지시였음을 폭로한 바 있다.
▶안두희는 포병 소위 신분으로 백범 선생을 암살한 뒤 육군 헌병대를 거쳐 특무대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그리고 범행 48일만에 2계급 특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장교의 승진 및 전보는 국방장관의 결재사항이어서 안두희의 특진은 당시 신성모 국방과 채병덕 참모총장 등 군 고위층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안두희는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이틀만에 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풀려나 1950년 7월 10일 다시 육군 소위로 복직하여 1951년 2월 15일 국방부령 56호에 의해 형 면제 처분을 받게되며, 같은 해 12월 25일 특명 제224호에 의해 소령으로 진급한다.
예편 뒤의 군납 특혜 등 암살범에 내려진 특진과 특혜가 이승만의 양해 없이 장관과 총장의 재량만으로 가능했겠는가.
▶이승만의 측근으로 서북청년단장 시절에는 안두희 석방을 주장하는 등 암살사건의 연루자인 김성주는 조봉암 진영으로 변신했다. [진보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사무장이 된 것이다. 이승만 진영을 떠난 김성주는 백범 암살 배후가 이승만이라는 등 사건 내막에 대해 언급하다가 헌병사령부에 체포되어 원용덕 사령관 자택에서 처형되었다.
또 하나 의문의 희생자는 장은산 포병사령관이다. 안두희 소위를 부관으로 임명하고 암살사건 하수인으로 끌어들였던 장은산 사령관은 사건 직후 유학 명분으로 미국에 피신했다가 6ㆍ25가 나자 귀국했으나 포병부대의 개편으로 상응하는 요직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은산은 안두희 배후에 대해 발설하다가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군무 이탈 죄목으로 육군 형무소 특별감방에 수용되었다. 그 이후 장은산은 자취를 감춰, 김성주의 경우와 같이 처형된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이들은 이승만을 암살 배후라고 지목하다가 비명에 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경교장에 마련된 백범의 빈소를 찾는 조문객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장례 후 오랫동안 효창공원 묘소를 참배하는 사람들을 엄중히 감시하면서 국민의 효창공원 출입을 통제했다. 또, 백범의 아들 김신(金信)씨에게 가해진 박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특히 이승만이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한독당]에 대해 용공 혐의를 걸어 멸살시키다시피 탄압을 가했다.
이런 일이 이승만 정권 12년 동안 일관되게 이루어진 것은 이승만의 백범 제거 관련 의혹을 더욱 짙게 한다.(하략)
<백범의 생애> - [동아일보](1989. 6. 26)
진실은 끝내 밝혀지고야 만다는 역사의 법칙을 무색케 하는 것이 백범의 죽음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의 정치 테러인성 싶다.
1949년 6월 26일 정오경 백범은 안두희의 저격에 의해 숨졌고, 7월 5일 성동원두에서 그의 국민장이 거행됐다. 죽음에서 장례까지 10일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조문객으로 서울 장안은 옛날 인산을 방불케 했으며, 특히 효창공원으로 가는 장례 행렬을 따르는 인파의 호곡은 건국 후 오늘까지 있었던 그 어느 장례도 겨룰 수 없는 가장 장엄하고 감동적인 장례식으로 기록되고 있다.
백범의 생애는 크게 나누어 두 단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가 그의 생애 태반을 차지하는 항일 시기요 둘째는 해방 후 조국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통일운동이다. 10대 소년으로 동학 접주가 되어 반외세 투쟁으로 시작된 그의 항일 장정(長征)은 <백범일지>와 <도외실기(屠倭實記)> 등 그의 저서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지만, 일군 중위 쯔찌다(土田讓亮)의 격살과 105인 사건, 이후 상해림정의 경무국장에서 주석에 이르는 4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일관한 그의 생애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백범의 정치적 행적이 재조명되는 까닭은 이같은 항일 장정 못지않게 해방에서 죽음까지 4년도 채 못되는 짧은 기간에 펼친 그의 통일운동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 길에 오르지만, 그의 충정은 김일성의 책략에 짓밟히고 이후 남북은 제각기 단정(單政)으로 치닫는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남북대화의 실마리를 그의 남북협상에서 찾는 견해도 있지만, 그때의 장의 행렬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구(無垢)하고 사무치는 애국정신에 더욱 감동한다.
<백범 김구 국민장- 거성(巨星) 땅에 떨어지다> - 오소백 : <해방 17년사>(1963)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상 싶었더니
1949년 6월 24일 노혁명가(老革命家) 김구 선생이 동족의 총탄에 쓰러진 지 열흘째 되는 7월 5일 선생의 영구(靈柩)는 3천만 겨레의 통곡 속에 영영 경교장(京橋莊)을 떠나고 말았다. 국민장(國民葬)이 있기까지 조객(弔客)의 연 인원수는 백만을 돌파하였고, 모여든 조객(弔客)은 문자 그대로 각계각층이었다.
삼천만 가는 길이
어지럽고 괴로워도
임이 계시오매
든든한 상 싶었더니
돌아와 모진 광풍(狂風)
…………
5일 아침 10시 45분, 선생의 영구는 영영 경교장을 떠난다. 쇼팽의 장송곡(葬送曲)인 ‘김구 선생 장송곡’에 맞추어 말없이 발인(發靷)하였다. 6명의 기마경찰대(騎馬警察隊)를 선두로 열두 명의 경찰간부가 4열 종대로 늘어섰고, 그 뒤에는 열여섯 명의 진명여중(進明女中) 생도들이 태극기를 받았으며, 그 뒤를 육해공 합동군악대(陸海空合同軍樂隊) 전구의 장병으로 군대가 동원되었고, 영여의장대(靈轝儀仗隊)로 대학생 백여 명이 늘어선 뒤를 이어 선생이 일상 타고 다니시던 애용차(愛用車)가 정채훈(鄭泰勳) 전속운전수의 마지막 운전으로 땅에 붙어 고요히 미끄러지듯 굴러가고, 그 뒤로 선생의 비서 선우진(鮮于鎭)ㆍ도인권(都寅權) 양씨가 배종(陪從), 영여의장대(靈轝儀仗隊)로 각 대학생 백 명이 따랐고 그 뒤로 사진전구 의장대로 중학생 백 명, 12명의 삼균청년회원(三均靑年會員)에 의지된 영정(影幀)이 뒤를 따른다.
또 그 뒤로 선생의 측근자 엄도해(嚴道海)ㆍ김유전(金裕銓) 양씨가 배종(陪從), 그 뒤로는 사진후구 의장대 중학생 백 명, 그 뒤로는 청악대 조가대가 따랐고. 그 뒤로는 자동차로 오세창(吳世昌)ㆍ김명준(金明濬)ㆍ김규식(金奎植)ㆍ엄항섭(嚴恒燮)ㆍ조완구(趙椀九)ㆍ조소앙(趙素昻)ㆍ이인(李仁)ㆍ김도연(金度演)ㆍ안재홍(安在鴻) 제씨가 따르고 있다. 그 뒤로 장의원이 따르고 다음은 ‘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 白凡 金九亡柩’라고 쓴 붉은 명정(銘旌)을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院養成所) 남녀동지들이 모시고 나가고, 그 뒤로는 선생의 영구를 모신 영여(靈轝)가 144명으로 된 건국실천원양성소 동지들의 어깨로 고요히 움직이고 있다.
영구 외면(外面)은 선명한 태극기로 고이 덮이었으며, 흰 바탕에 남색 테두리를 한 앙장(仰帳)이 높이 구름을 덮고 있었다. 영구 주변으로는 들국화ㆍ백합꽃ㆍ사철나무, 그리고 푸른 풀잎으로 깨끗이 장식되었다. 영구 뒤로 ‘영구후구후위(靈柩後軀後衛)’, 그 뒤로 상주(喪主), 굵은 베옷에 두건을 쓴 신씨(信氏) 내외가 따랐으며, 유복친(有服親) 친척이 그 뒤에 이으며,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ㆍ지방당부의 깃발이 백여 개가 휘날리고 그 뒤로는 유지청년 단체들이 줄을 지었다. 장렬(葬列)은 고개를 숙이고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백만 시민의 도열 앞을 엄숙히 진행한다. 서울 장안은 완전 철시(撤市)하였고, 온갖 교통도 발을 멈추었다. 이르는 곳마다 흐느껴 우는 시민들의 얼굴로 가득 찼으며, 비장한 애도가 합창에 소리 맞춰 통곡하는 것이었다.
12시 25분경 영구가 종로 4가의 한독당(韓獨黨) 중앙당부 앞에 닿자 고 백범 선생의 동지 수십 명이 당기를 들고 배례한다. 영구는 일시 머물고 시민은 한층 소리높이 애곡을 울린다. 말없이 답례하고 다시 발걸음을 뗀다. 동대문(東大門) 앞은 이를 바 없는 인산(人山)을 이루고 낙산(駱山) 위 병원 언덕까지 흰 옷을 입은 시민들의 산이 되고 말았다. 임이 가시니 산 모습도 변하였다.
▶백범 선생을 마지막 보내는 군중들
오관수 다리 위에 청계천(淸溪川)이 고이 흐르고 물 위에 한없는 애도를 품은 시민들의 도열이었다. 가난한 이 겨레의 살림을 걱정하여 선생이 친히 오르내리던 청계천의 빈민들도 조기(弔旗)를 들고 영구에 배례한다. 그칠 줄 모르는 시민의 애도 속에 민족의 거성(巨星)은 말없이 간다. 여기 서울운동장 일대는 이른 아침부터 선생의 서거를 슬퍼하고 마지막 배웅을 드리려는 백만 시민이 한결같이 모여들어 상오 11시에는 특별구장(特別球場)까지 꽉 차버렸으나, 미처 입장하지 못한 군중들은 운동장 앞으로부터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이르는 연도에 엄숙히 도열하였다. 뱀새 흐렸던 검은 구름도 아침 10시에는 어느덧 개고 정돈된 영결식장은 아침 11시에 경교장을 출발한 영구차를 기다리고 있다.
‘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 白凡金九先生國民葬永訣式’이라고 쓰인 오른편에는 ‘七十四年大業如山爲國家棟樑’, 왼편에는 ‘三千萬衆哀淚成海失民族指針’이라고 먹자국도 싱싱하게 씌어 있었으며, 선생의 관을 모실 목대(木臺) 좌우에는 국회의장이 보낸 조화(弔花)가 놓여있고, 그 가운데 왼편에는 대통령, 우편에는 내무장관의 꽃다발이 놓여있다. 식장 맨 앞줄에 배치되어 있는 내빈석에는 국무총리 이하 각부장관,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회의원 등이 정부 고관들과 정계요인들, 그리고 UN위원들의 얼굴이 엿보이고 각계각층으로부터 보내온 명정(銘旌) 중의 이채(異彩)는 웅대한 그 모습을 자랑하는 듯, 식장 정면 좌우에는 중국 망명 때 친교가 있는 화교(華僑)들로부터 보내온 것으로 ‘氣壯山河’ㆍ‘乾坤星沈’ㆍ告復巨星‘ㆍ’模範千秋‘ㆍ’英烈堪仰‘ㆍ’民族先覺‘ 등,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조객들 사이에 중국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선생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목 놓아 우는 장례식장
시시각각 마이크로부터는 경교장을 출발한 영여(靈轝)의 통과 지점을 보고하고 있으며, 도착 예정시간인 12시에 뒤늦게 1시간 후인 오후 2시에 이르러 기마경관을 선두로 한 영여는 드디어 식장에 입장하기 시작하였다. 영결식은 예정보다 한 시간을 지나 2시 정각 박윤진(朴允進)씨 사회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먼저 육군 의장병의 손으로 세 발의 조총(弔銃)과 국기 경례, 애국가 봉창과 육해군 합병군악대의 조악(弔樂)에 이어 동족상잔을 피하며, 선생의 유업을 계승하자는 장의위원장 오세창(吳世昌)씨를 대신하여 조소앙(趙素昻)씨의 장중(莊重)한 식사와 칠십 평생을 통하여 조국독립만을 위하여 투쟁한 고인의 약사(略史)를 유림(柳林)씨가 보고하였다.
다음 학생연합합창단의 조가(弔歌)는 참례자의 가슴을 여이는 듯하였으나, 장의부위원장 조완구씨의 분향, 장의부위원장 김규식 박사의 헌화가 있었고, 제문(祭文)을 부위원장 이 국무총리가 낭독하였으며 일동배례가 있은 후 끝으로 이 대통령(공보처장 대독)을 비롯하여 이 부통령(이 비서실장 대독), 김 부위원장, 한독당을 대표하여 엄항섭씨, 그리고 UN한위(韓委) 싱씨, 외국사절의 조사가 있었는데, 특히 엄씨의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선생님의 죽음을 통탄하는 소리에 식장은 울음의 도가니로 변하였다. 계속하여 한없이 흐르는 눈물 속에 올리는 상주(喪主) 김씨의 마지막 분향과 일동 묵상으로 이 나라의 지도자 고 김구 선생을 영영 보내는 영결식은 눈물과 눈물, 평화통일의 유혼을 맹세하는 맹세 속에 끝을 마치었다. 일동은 곧 뒤를 이어 묘지 효창공원(孝昌公園)으로 향하여 연도 수만 시민의 애도 속에 서울운동장을 뒤로 을지로, 한국은행 앞, 연병장, 용산경찰서 앞을 거쳐 오후 6시경 효창공원 묘지에 이르렀다.
▶효창공원(孝昌公園)에 안장(安葬)되다.
짙은 녹음도 뒤흔들어 우는 효창공원 속 삼열사(三烈士)의 묘에서 좀 떨어진 고 백범 선생의 장지에는 열흘 전부터 동지들의 손으로 깨끗이 묘터가 이루어졌으며, 공원 속 구석구석까지 말없이 엎대인 백의(白衣)의 겨레들로 뒤덮여있다. 한층 더 높은 애곡소리에 발맞추어 영구는 소리 없이 장지에 이르렀다.
하오 8시 반부터 하관식(下棺式)은 박윤진(朴允進)씨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애국가의 봉창에 이어 육해군악대의 비장한 조악(弔樂)이 연주되었고, 국민장 부위원장 조경한(趙擎韓)씨의 분향, 동 부위원장 이윤영(李允榮)씨의 헌화 때 영전의 흐느낌은 드높아갔고, 위원장 조소앙씨의 제문(祭文) 낭독은 한없는 비애와 통분을 품어 식장의 일동은 제문의 한절 한구절마다 애절한 울음소이와 몸부림으로 변한다. 상주 김씨 부처의 애처로운 분향에 이어 군악에 의한 마지막 조악이 비장하게 연주된다. 장내는 닥시 고개를 치밀고 하관하시는 마지막 모습이라도 우러러 보려든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막다 못해 터져 나오는 겨레들의 통곡 속에 바로 지금 선생의 영구는 하관하신다.
▶관(棺) 위에 덮히는 말없는 황토(黃土)
임은 가시다, 붉은 석양을 안고 민족의 애통 속에 어둡고 먼 길을 영영 가시다. 다시는 볼 수 없이 선생의 영구는 녹음 우거진 효창공원 삼열사의 분묘 옆에서 통천곡지(恫天哭地)하는 강산의 비통 속에서 고이 관은 내리어졌다. 임이 가시니 이 겨레는 어찌하오리. 애석하게도 임이 홀홀히 가시다니! 관 위로 한줌 또 한줌 가는 황토(黃土)가 선생의 몸을 사뿐히 덮는다. 눈물에 어린 배례에 이어 합창대들은 목메인 목소리로 조가(弔歌)를 부른다. 이 강산 겨레들 천년 만년 애곡시킬 조가는 울리고 석양은 재 넘어 기운 지 오래고, 어언 어제 진 달도 돌아왔다. 구슬픈 풀벌레소리가 더 한층 애끓는다.
선생이시여! 삼천만 겨레의 품안에 안기어 편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