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檀君)은 신화(神話)아닌 우리 국조(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천(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天)을 군장(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開天節)은 즉 「군
장(君長)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開國), 건국(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開天)은 즉 최고(最古) 시조인 단군(檀君)의 즉위와 개국(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제1권의 「왕검조선(王儉朝鮮)」條에 의하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
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桓雄)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理念)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
게 하니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神檀樹下)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桓雄天王)
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風伯(風神)) 우사(雨師(雨神)) 운사(雲師(雲神))의 삼신(三神)을 거느리고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
형(主刑) 주선악(主善惡)등 무릇 인간 삼백육십여사를 주관(主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
장으로 관념(觀念)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百事)를 주관하는 수호신적(守護神的)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수호신(守護神)의 주처(住處)는 곧 신단수(神壇樹)로 이것은 지금 민속(民俗)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서낭당(仙王堂)은 즉 천왕당(天王堂)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神壇樹)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神
壇_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신단(神壇)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신시(神市)였던 것이다.
신단수(神壇樹)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樹木)자체가 神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신
단수(神壇樹)는 천신(天神) 천왕(天王)의 강하계단(降下階段), 혹은 천왕(天王)의 주처(住處)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
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국호(國號)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阿斯達)이 정작 국호였고 조
선(朝鮮)은 후에 이르러 「아사달(阿斯達)」을 아역(雅譯)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大 논문집(社會科學)제2집에 「아사달(阿斯達)
과 조선(朝鮮)」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古記)에 전
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古記)에는 곰(熊)이 여신(女神)으로 화(化)한 것이라 하나 이는 熊(곰) 토템족(族)의 여자로 해석하여
야 옳다고 나는 연래(年來) 주장해 오고 있다.
즉 웅(熊)을 신성시(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
상족(地上族)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天上族), 천신족(天神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
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개천절(開天節)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일(開國日)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시월절(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시월절(十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
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季節祭
)(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낙종(落種(下種))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神)에게 연사(年事)의 풍등(豊登)을 기원하
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
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落種期)의 주곡(祭典)을 오월(五月)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天神)에게
제사하고 가무(歌舞)와 음주(飮朱)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이 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
에 5월단오(端午)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시월(十月)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
이 신(神)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시제(時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월제(五月祭) 시월제(十月
祭)의 유풍(遺風)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上), 고(高), 산(山), 신(神) 등을 의미하는 고어(古語)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譯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夫餘)의 영고제(鈴鼓祭), 고구려(高句麗)의 동명제(東盟祭
), 동예(東濊)의 무천제(舞天祭)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燃燈大會), 팔관대
회(八關大會)도 춘추이기(春冬二期)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중동팔관(仲冬八關)이었다. 그런데 최근
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고속(古俗)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입국(檀君立國)의 개천절(開
天節)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不安定監)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두계잡필(斗溪雜筆)」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정회이사 이희수(李喜秀)씨가 1977년 10월 「현정지(顯
正誌)」에 「사서상(史書上)에서 본 국조단군(國祖檀君)」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일연(一然)이 지금은 없어진
「고기(古記)」와 「구삼국사기(舊三國史記)」와 현존 위서(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魏書)의 단군기사(檀君記事)에서 인용하였
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대(事大)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사기(史記)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記載)를 제외하였지만 동서권십칠(同書卷十七) 고구려본기오(高句麗本紀五) 동천왕이십일
년봄 이월(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에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이라
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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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윗 삼국사기 기사 부분 해석 - 인용자 주.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
왕은 환도성이 난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그곳으로] 옮겼다.<평
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 다른 기록에는 『[그가]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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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운(惑云)이하의 왕지(王之)는 왕(王)노릇을 하였다는 동사(動詞)로 읽어야 하고 「도왕검성(都王儉城)」의 도(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왕지도왕검(王之都王儉)」이라고 연서(連書)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평양(平壤)은 지금의 평양(平土良)이 아니라
고구려의 황성(黃城(皇城, 즉 환도성)의 대안(對岸)인 동황성(東黃城(今江界))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樂浪郡)
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인왕검지택(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양은 후일의 평양(지금의 평양)의 지칭이므로 전후자(前
後者)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金富軾)과 같은 사가(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古城基字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선인왕검지택지(仙人王儉之宅
也)라고 한 것은 김부식(金富軾)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선인왕검(仙人王儉)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이었기 때
문이었을 것이다. 내외사서(內外史書)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양을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고기(古記)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史記地理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來本則
紇升骨城 ②(삼국)사기 지 1 제사조(史記 志一 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상(史
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 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
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古記)에는 단군기사(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高句麗)에 김춘추(金春秋)가 갔던 서
기 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이십년 이월조(史記 高句麗本紀 東川
王二一年書二月條)에서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택(宅)」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古記)이거나 단군기(檀君記)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신라(新羅)의 육촌(六村)도 조선(朝鮮)의 유민(遺民)이
산간(山間)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1신라본기 제1(卷第一新羅本記第一)에 보면 「始祖姓 朴
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 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一然)이 인용한 고기(古記)의 단군기재(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金富軾)이 평양
이 선인(단군)왕검(仙人(檀君)王儉)의 택(宅)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古記)가 단군기사(檀君記事)를 실재(實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古記)를 들먹여서 단군기사(檀君記事)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國難)을 겪으면서도 단군묘(檀君廟)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단
군(檀君)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무신(戊申)6월 조(條)에 유관(柳寬)의 상서(上書)를 보면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 동령(東嶺)허리에 신
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北壁)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文
化縣) 사람들은 이를 삼성(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聖堂里)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柳寬)은 그 상서(上書)중에서
「구월산(九月山)은 현(縣)의 주산(主山)이던 단군조선(檀君朝鮮) 때에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으며, 신라(新羅)에 와서 궐
산(闕山)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문화현(文化縣)을 궐구현(闕口縣)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高麗)때에 유주감무(儒州監務)로 하
고 후에 또 문화현(文化縣)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궐(闕)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九月山)이라고 부른다.
두 수(首)의 시에 나타나
문화(文化)의 동쪽에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父老)들이 전하기를 단군(檀君)의 도읍지(都邑地)라고 한다‥」하였으
며 「구월산하(九月山下)에는 단웅(桓雄)을 남면(南面)으로 모시고 동서향(東西向)으로 환인(桓因)과 단군(檀君)을 모신 삼성당(三聖
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檀君)이 립도(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세종18년 병진(丙辰) 12월 정해조에 유사눌(유관의 조카)의 상서(上書)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
土良)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基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등無所처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
存與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고기(古記) 단군기(檀君記) 외에 가사(歌詞)형식으로 된 단군기사(檀君記事)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세년
가(世年歌)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檀君記載)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柳思訥은 한성부사(漢城府使)를 지냈는데 또 상
서하기를 「신(臣)이 단군세년가(檀君世年歌)를 보니 단군(檀君)은 조선(朝鮮)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몰(沒)함에
신(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조선세종대(朝鮮世宗代)까지 단군세년가(檀君世年歌)가 남아있었고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유관(柳寬)의 상서(上書)에 따르면 삼랑성(三聖堂)은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동관(東嶺)에 있다. 유관(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父老)들로부터 단군사적(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랑성(三聖堂)에 환웅천왕(
桓雄天王)을 상좌(上座)에 모셔서 남면(南面)하게 하고 동벽(東壁)에는 환인천왕(桓因天王)을 모셔서 서향(西向)하게 하고 서벽(西壁)
에는 단군천왕(檀君天王)을 모셔서 동향(東向)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三聖堂)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
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文獻備考) 권(卷)64 찰고(札考)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三聖祠)는 황해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
에 있으며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을 모셨으며 춘추(春秋)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 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李芮之)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九月山)에 삼성묘(三聖廟)를 세우고 평양(土良)의 단군묘(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卷)42 문화현사묘조(文化縣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三聖祠)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사(祠)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卷)51 평양
조(平良條)」에 보면 두 수(首)의 시(詩)를 통하여 「개국(開國)한 지가 멀고 먼 단군(檀君)은 조선여조(朝鮮始祖)이다. 단군(檀君)의 역
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堯)와 함께 개국(開國)하였다고 들었으니 법금(去今) 사천년(四千年)이며 단군묘(檀君廟)를 남겼다」고 하
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主體思想)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廟)
를 세우고 제사(祭祀)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國祖)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사당(祠堂) 지어
문헌비고(文獻備考) 권(卷)13 여지고(輿地考)1 역대국계(歷代國界)1에서는 단군조선국(檀君朝鮮國)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遺事 - 삼
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백악(白嶽)은 지금의 문화현(文化縣)이며 구월산(九月山)의 본명은
궐산(闕山)인데 단군(檀君)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闕山)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闕山)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
산(九月山)의 장당경(藏唐京)은 또 장장평(藏藏坪)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은주부 鄭陟(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양의 기자사당(箕子祠堂)에 가보니 기자(箕子)의 입패(位牌)는 북쪽에 있어서 남
향(南向)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西向)하였습니다. 신(臣)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唐堯)와 같이 입국하였고 기자(箕
子)는 무왕(武王)의 명으로 조선(朝鮮)에 봉하여졌으니 제왕역년수(帝王曆年數)로 보더라도 제요(帝堯)에서 무왕(武王)까지는 1230여
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자(箕子)가 북향하여 남면(南面)하고 기자(箕子)보다 앞서서 립국(立國)한 단군(檀君)을 동(東)쪽에
배향하는 것은 입국전세(立國傳世)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신(臣)이 본조(本朝)의 제사의식(諸祀儀式)을 고찰해보니 단군제(檀君祭)의
진설도(陳設圖)에 이르기를 「신위(神位)는 당(堂)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南面)토록 되어있으며 신(臣)이 기자사(基子詞)에서 본 서향(
西向)의 좌(坐)는 진설도(陳設圖)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箕子)와 나란히 남향(南向)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상좌(上座)에 기자(
箕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입국(立國)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箕子祠堂)인데 단군?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臣)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檀君祠堂)을 지어서 단군을 남향(南向)하게 하고 제
사를 받들면 사의(祀儀)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찰조(札曹)에 명하여 정척(鄭陟)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國祖)
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기자(箕子)보다는 상위(上位)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단군(檀君)의 제향(祭享)
이 끊어진 것은 일제(日帝) 때부터였다고 본다.
단군조선(檀君朝鮮) 연구 숙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기재(檀君記載)는 타서(他書)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일연(一然)의 창작
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연(一然)이 인용한 고기(古記)도 김부식(金富軾)의 인용고기(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古記)
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金富軾)도 선인왕검(仙人王儉)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古記)에는 단
군사기(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단군(檀君)의 세년가(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단군(檀君)의 사묘제천단(祠廟祭天壇)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享檀君陳設圖)가 세전(世傳)되어 왔고 그
것은 단군제의(檀君祭儀)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선(朝議)에 의하여 건묘(建廟) 봉제사(奉祭祀)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檀君)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
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단군(檀君)과 단군조선(檀君朝鮮)에 관한 기재(記載)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
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단군기재(檀君記載)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金富軾)의 사대적(事大的)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
이외에는 夫餘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
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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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30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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