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현대자동차의 탄생 비화
현대자동차가 2022년도 세계 자동차 판매량 3위에 올랐다. 가슴 벅찬 일이다. 2022년 기준, 자동차684만대를 판매하여 도요타와 폴크스바겐에 이어 글로벌 판매 물량으로 3위에 오른 것이다. 내가입사할 때 우리나라 고유 모델 포니의 연간 생산 물량은 고작 5만 6천대였다. 현대자동차에서 직업평생 일했던 사람으로서 나와 감동을 공유한 선후배들이 많았을 것으로 확신한다.
판매 물량으로따지면, 2010년 포드를 제치고 세계 5위에 올랐고 10년 뒤인 2021년 GM을 넘어 4위를 기록했다. 그러다가 불과 1년만에 3위를 거머쥔 것이다. 눈 부신 발전이고 혁혁한 공이다. 1976년 에콰도르에 5대 수출한 이래 45년만에 꿈 같은 일이 벌어졌다.
최근 현대차 그룹은 반도체 등 공급망 관리를 잘하는 기업, 하이브리드 전기차 등 가성비가 뛰어난 차를 생산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운전자의 니즈를 신속하게 파악하여 능동적으로 모빌리티 체계를 연구하는 한편,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선행연구원을 설립하여 원천기술 확보에전력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의 통찰력 있는 리더십에 따라 임직원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리라.
차량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는 브랜드 이미지, 품질 사후관리, 차량가격, 다양한 라인업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국의 이미지 향상과 K 문화 확산도 차량 판매 증대에 분명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쯤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돌이켜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대자동차가 탄생한 것은 1967년 12월이다. 한국에서 자동차 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은 6.25가 끝난 직후인 1955년이며,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1955년 ‘시발자동차㈜’라는 한 소규모 공업사가 “시발자동차”를 만든 것이 최초의 “국산” 자동차로 기록된다. 1960년대에는 자동차 생산이 가속화되어 1962년에는 일본 닛산으로부터 Blue Bird 부품 모두를 수입하여 조립하였다. 또 기아 산업은 일본 마즈다와 기술 제휴하여 1962년 삼륜차를 생산하고 1967년 12월에는 삼륜 덤프 트럭을 생산하였다. 1965년 7월에는 아세아 자동차가 설립되었다. 1965년 11월 우리나라 유일의 자동차 조립공장인 신진공업사가 새나라 자동차를 인수하여 이듬해 상호를 신진자동차로 바꾸고 일본 도요타와 기술 및 부품 도입을 하여 코로나를 생산하였다. 1967년 12월에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현대차는 어쩌면 후발 주자인 셈이다.
사실 현대가 자동차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경제부흥 정책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1962년 자동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한 소규모 조립공장을 통합하는 자동차공업 육성 계획을 발표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자동차 국산화 방안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본격화하였다. 고속도로에는 자동차가 달려야 한다. 정주영 회장은 그 전부터 자동차 공장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은 건설에 전념하고 아우인 정세영 회장에게 자동차 사업을 맡겼다. 꼼꼼한 아우의 성격이 자동차에 어울린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세영 회장은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나 미국에서 유학한 탓에 서구 문화에 익숙하고 영어도 자유스럽게 구사할 수 있어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체결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마침 1967년에 미국의 포드는 한국 시장 진출 타당성을 조사하였다. 이 정보를 접한 정주영 회장은 그 당시 포드를 못 만나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던 정세영 회장에게 포드를 방문하라고 지시하였다. 포드는 한국 시장 조사를 한 후 자동차 조립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1967년 4월 자동차 제조 공장 허가 기준을 공포하였는데 선진 외국과 기술 제휴하는 등 성능을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업체에게 자동차 제조 공장을 허가한다고 하였다. 그런 만큼 현대는 어떻게 해서라도 포드와 인연을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정세영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지시에 따라 디트로이트에 있는 포드 본사를 방문하여 큰 형님의 뜻을 전달하였고 포드는 그후 한국을 방문하여 본격적인 협상을 벌였는데 이 때 둘째인 정인영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포드가 현대 쪽으로 기울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튼튼한 신용을 기반으로 한 현대가 포드와 자동차 기술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현대는 포드와 해외조립자계약을 한 셈이다. 이로써 현대자동차는 자동차 조립으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게 되는 역사적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자동차에 대한 정주영 회장의 꿈이 실현되는 시발점이었다.
절반은 노력, 절반은 운으로 출발한 현대자동차 사업은 1969년 9월 태풍으로 1만여평이 넘는 공장이 침수되어 자동차 판매에 큰 타격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포드는 현대자동차의 자금능력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포드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현대와 조립기술은 유지하되 자본의 부담 없이 한국에 포드 조립 자동차만 팔려고 했던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이에 불만을 품고 아우 정세영에게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 보도록 지시하였다. 현대자동차의 진정한 출발이자 포드사와의 결별 선언이었다. 문제는 한국 고유의 모델을 우리 기술과 부품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대 자동차는 이탈리아 설계용역회사인 이탈 디자인사에 차 설계용역을 120만 달러에 계약하고 주지아로 자동차 설계 디자이너에게 한국 고유모델 포니 디자인을 의뢰하였다. 울산시 양정동 700번지에 자동차 공장을 건설하고 자동차 전문 경영인 조지 턴블과 계약하였다.
자동차 설계와 경영진 구성을 마친 현대자동차는 1974년 연산 5만6천대 규모의 국산 종합 자동차 공장을 착공하였다. 자동차 이름과 설계는 유명 자동차의 디자인 전문가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공장 건설 및 운영은 경험 많은 전문인력을 확보하였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엔진과 부품 조달이 큰 문제였다.
종합 자동차 회사 이름에 모터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포드는 Ford Motor Company GM은 General Motors 모두 motor가 들어 간다. 현대가 자동차 공장을 지으려면 엔진이 필요한데 당시 현대에는 엔진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미쓰비시의 Lancer 엔진을 제조 허가를 받아 엔진 생산을 하였다. 자동차에는 또한 2만여개의 부품이 필요한데 자동차에 걸음마 수준인 우리 기술로는 다 충족할 수 없어 주요 부품은 일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요즘 좌파들은 반일몰이를 선동하지만, 현대자동차 초기에는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1976년 현대자동차는 울산에서 고유 모델 포니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시장 규모로는 5만 6천대 물량을 소화할 수 없어 생산된 차량을 외국에 수출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애당초 우리 고유 모델을 꿈꾸던 정세영 회장은 수출 의지가 대단하였다. 정세영 회장의 꿈은 수출로 세계시장을 개척하며 세계 10대 자동차에 드는 것이었다.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의지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제품을 팔려면 수지타당성도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주요 부품을 수입하는 상황에서 이익 실현은 불가능하였다.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국내에서는 제값을 받아 이익을 내고 수출에서는 저가격으로 “출혈 수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현대차가 해외에서 경쟁하는 대상은 대부분 일본 자동차였다. 나는 1970년 하반기 해외 영업부서에서 근무하며 해외 대리점(주로 중남미)의 판매 증진을 목적으로 1년에 길게는 9개월씩 체류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 말 일본 엔화의 달러 대비 환율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낮아 인지도와 품질측면에서 열세인 현대는 가격 경쟁을 하기 위해 출혈 수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턴블 부사장이 이사회에서 수출 반대를 역설하였고 그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문건을 제출하였다. 회사의 수익성 면에서는 턴블 부사장 의견이 맞는 말이었고 합리적이었다. 결코 틀린 의견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의 경영진은 수출을 통하여 세계시장에 진출하고 경쟁하면서 큰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턴블 부사장과 의견이 충돌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턴블 부사장과 현대와의 인연은 그 즈음에서 끝이 났다.
1970년대 말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매우 어려웠을 때 생산라인을 돌릴 일거리가 부족하였지만 회사는 생산직에 종사하는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고 공장 마당의 풀을 뽑게 하며 일자리를 유지하도록 했다. 현대자동차가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는 데는 전임 회장들과 직원들의 노고가 말할 수 없이 컸다.
정주영 회장이 자동차 사업의 기반을 만들었다면, 정세영 회장은 종합 자동차 공장의 틀을 갖추고 수출을 통해 세계 시장을 열었으며 우리나라가 IMF관리체제하에 있을 때 기업구조조정을 통하여 재도약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정몽구 회장은 품질 향상과 시장 확대 정책을 폈고 정의선 회장은 시대에 맞춰 현대차를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키웠다. 현대자동차의 모든 구성원이 꿈은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지고 글로벌 현대를 만들어냈다.
참고자료.
1. 포니 정 나의 삶 나의 꿈. 정세영 지음 2015 5 펴낸 곳 포니 정 재단
2.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국내 최초의 “조립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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