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도가 어려운 부여 여행
백제의 문화유적을 찾으러 가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선 백제라는 나라가 멸망한 게 660년이라 거의 1,4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한반도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 때문에 망국의 유산은 점차 파괴되게 되었다. 현재 부여에 남아있는 유적은 부여의 수도였던 사비성의 중심지인 토성 부소산성과 가장 컸던 사찰인 정림사지의 절탑, 그리고 부여 왕릉원이 사실상 전부라 할 수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유홍준 씨가 부여 문화유산 답사는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부여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곳이다.
백제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물도 많이 나온 곳인 부소산성도 부여의 다른 유적과 다르지 않다. 멀리서 부소산성을 보면 야트막한 산에 불과하며, 입구를 통해서 산성에 진입해도 산성이라는 느낌보다 동네 공원 같은 느낌이 든다. 부소산성의 발굴 조사를 통해 숱하게 많은 유물이 나왔지만, 출토된 유물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이 중요한 곳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던 공산성은 석성이라 성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부소산성은 옛 모습 그대로 토성이라 숲이 우거진 상태면 그 모습을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부여의 유적 대부분이 이러한 상황이라 부여를 관광 도시로 만들기 위해 백마강 북쪽에 큰 관광단지가 들어섰다. 백제의 궁성과 마을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를 비롯해 롯데리조트와 롯데아웃렛이 있는 이곳은 경주의 보문단지를 연상시키는 곳이다. 오래된 경주 시내 대신 화려한 호텔 단지를 만들어 엄청난 수의 관광객을 유치한 경주처럼 부여를 관광 도시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빈약한 부여의 유적은 이런 관광단지를 만들어도 경주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최소 2박 3일은 있어야 신라의 유적을 다 둘러볼 수 있는 경주와 달리 부여의 유적은 하루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32 - 황산벌 전투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김유신(金庾信)과 흠춘(欽春)·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신라군은 육로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급보를 접한 의자왕은 군신을 모아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때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達率) 상영(常永)은 신라군을 먼저 쳐서 예봉을 꺾은 뒤에 당군을 막자고 해 의견이 갈렸다. 그리고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가 왕의 요청에 응해,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白江)을 지켜 당군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탄현(炭峴)을 막아 신라군이 넘지 못하게 해 양 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하였다.
반면에 대신들은 당군이 백강에 들어오고 신라군이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백제 조정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신라군은 그 해 5월 26일 왕경을 출발해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에 이른 뒤, 7월 10일 백제의 도성인 사비에서 당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은 7월 9일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탄현을 진수하지 못한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게 해 신라군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출병에 즈음해 계백은 “처자가 적국의 노비가 되어 살아서 욕보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며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병하였다.
황산벌에 먼저 이른 계백은 험준한 곳을 가려 3개의 영채를 세우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김유신도 신라군을 3도(道)로 나누어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죽기로 싸우는 백제의 5,000 결사대는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군은 기력이 다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이때 신라의 장군 흠춘이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아들 반굴(盤屈)로 하여금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하게 하고, 장군 품일도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을 백제군 속에 뛰어들어가 싸워 죽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청년 화랑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신라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총공격을 가하였다. 백제의 결사대는 여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상영 등 20여 명은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황산벌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소정방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한 신라군이 기일을 어겨 도착했다고 해 신라독군(新羅督軍)인 김문영(金文穎)을 참하려 했을 때, 김유신이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다만 기일을 어긴 것으로 죄를 주려 하니, 기필코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격파하겠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다.
부여의 옛 모습 부소산성에서 현재인 백제문화단지까지
부소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 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 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1978년 금강 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고,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木柵址)와 수혈식(竪穴式)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을 위한 기초조사에서 4층의 토층 단면이 확인되었다. 1982년부터 부소산성 일대를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 조사하여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 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부소산성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土築)으로 축조하였다.
부소산성 내부에 있는 여러 목조 건물은 모두 백제 시대가 아닌 후대에 건축된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자 궁녀들이 물로 뛰어들었다는 전설이 얽힌 낙화암과 백마강 바로 옆의 사찰인 고란사에서 타는 유람선이 그나마 볼 만하다. 나머지 목조 건물은 규모도 작고 후대에 건축된 것이라 부소산성의 역사와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부소산성이 눈으로만 보면 안 되고 상상을 하면서 걸어야 하는 성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전투는 부소산성이 아닌 황산벌에서 벌어졌기에 부소산성이 백제의 최후는 아니었고 수도인 사비를 방어하려는 시설이었다는 사실만 명심하면 된다.
부소산성을 보고 난 뒤 농어촌 버스를 타고 부여 왕릉원으로 갔다. 부여 왕릉원은 부여 능산리 산의 남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백제 무덤들이다.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씩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능산리의 고분군은 오래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져 왔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1∼6호 무덤까지 조사되어 내부구조가 자세히 밝혀졌고, 7호 무덤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고분의 겉모습은 모두 원형봉토분이고, 내부는 널길이 붙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뚜껑돌 아래는 모두 지하에 만들었다.
내부구조와 재료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호 무덤(동하총)은 네모형의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진 단실무덤으로 널길은 비교적 길고 밖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나팔형이다. 널방의 네 벽과 천장에는 각각 사신도와 연꽃무늬, 그리고 구름무늬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2호 무덤(중하총)은 무령왕릉과 같이 천장이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호 무덤(서하총)·4호 무덤(서상총)은 천장을 반쯤 뉘어 비스듬히 만든 후 판석을 덮은 평사 천장이고 짧은 널길을 가졌다. 이 형식은 부여지방에 많으며 최후까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능산리 무덤들은 일찍이 도굴되어 두개골 파편·도칠목관편·금동투조식금구·금동화형좌금구 등 약간의 유물만 수습되었다. 무덤들 서쪽에서는 절터가 발굴되어 백제 금동대향로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되었는데, 이로 인해서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 지역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부여 왕릉원은 무령왕릉과 달리 도굴되지 않았던 무덤이 없어 화려한 유물 또한 발견할 수 없다. 전시관이 있긴 하지만 굴식 돌방무덤 내부의 구조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에 도굴이 된 무덤이라 유물의 행방도 묘연하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 가루베 지온에 의해 대부분이 도굴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백마강 북쪽의 백제문화단지였다. 대중교통이 불편해 택시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상상으로만 보았던 백제의 수도 사비의 모습을 재현한 곳이다. 하지만 문헌에도 나와있지 않은 백제 도시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건 상상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일본의 절에서 볼 수 있는 목탑이 백제문화단지에도 건설된 건, 일본에 불교를 전래한 것이 백제이기 때문이다. 아직 남아있는 목탑을 통해 백제의 절 또한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화려한 왕궁과 절 뒤편에는 백제의 일반인이 살았을 법한 마을이 있다. 초가집으로 건설된 이곳에서 당시에 사용되었을 법한 시설을 만날 수 있다. 조선 시대 마을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백제 마을 또한 상상하여 만들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문화단지 내에 건설된 백제역사문화관은 규모에 비해 내실은 없다. 백제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잘 보여주고 있지만, 그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유물이 너무나 부족해 대부분이 복제품에 불과하다. 백제의 역사부터 시작해 백제의 문화, 백제의 사후 생활과 불교문화, 백제의 문화 교류가 순서대로 등장한다. 비록 오래된 유물을 만날 수는 없지만 백제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 가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