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뜨즐'은 12월 7일 D-day를 위해
밝고 즐거운 교회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매주 유머를 통해 교회를 밝고 즐겁게 만들려 노력해 주시고
이에 필요한 설교를 올립니다.
저희 교회에서 '힘뜨즐'에 맞춰 지난 주에 행했던 설교입니다.
* 참조로 이 설교에 대한 ppt를 쏘아 주실 분은
새일산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ppt 자료를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충만함을 빕니다. 샬롬!
“기쁨의 공동체를 만듭시다!”(빌 4:4)
지금 세상의 화두는 재미와 즐거움이다. 즐겁게 일하라고 한다. 그때 효율성이 높아진다. 좋아하는 이성형도 유머가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아이들의 선택 기준이 재미로 바뀌었다. 즐거워야 하고 웃음이 있어야 한다. 기쁨은 우리의 삶을 밝게 해주고, 활력을 줄 뿐만 아니라, 엔돌핀을 생산해 건강에 유익을 준다. 특히 웃음이 암치료에도 탁월하다는 것이 알려진 후 ‘웃음치료’라는 치료법까지 등장한 상황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쁘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기쁨을 얻는가? 일반적으로 네 가지 경우에서다.
(1) 소유의 기쁨 : 무엇을 얻거나 소유할 때,
(2) 인정의 기쁨 : 남에게 칭찬이나 호평을 받을 때,
(3) 승리의 기쁨 : 남과 경쟁해서 승리할 때다.
(4) 유머의 기쁨 : 유머와 개그 등을 통해 얻는 기쁨.
그런데 사실 이런 기쁨에는 문제가 있다. 소유의 기쁨은 상실될 때, 인정의 기쁨은 무시당할 때, 승리의 기쁨은 패배당할 때 쉽게 사라져버린다. 특히 승리의 기쁨은 건전치 못하고 도덕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의 패배와 상실에 근거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머의 기쁨은 너무 순간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뿐 아니라 기독교도 기쁨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다.
I. 기쁨의 종교 :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동시에 기쁨의 종교다.
1)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2) 성령의 열매 중 두 번째가 희락(갈 5:22).
3) 성경에 웃었다는 기록이 한 번도 없지만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하셨다.
4) 그리스도인의 힘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다”(느 8:10).
5) 성탄절 천사들의 메시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
6) 지상의 천국인 에덴동산, 에덴이란 말의 의미가 ‘기쁨’이다.
보살 시어머니와 은혜 넘치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며느리의 정성에 교회를 몇 번 나간 시어머니가 개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절에 갈 때는 평안함이 있었는데, 교회에 나가니까 기쁨이 있구나.” 기독교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II. 기쁨의 단계
1. 기뻐하라 : 즐겁게 웃으면서 살라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세상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을 다 알고 있다. 지금 세상과 성경의 가르침이 기쁘게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좋다는 것을 다 안다.
따라서 신앙인은 기쁘게 즐겁게 살아야 한다. 세상 사람보다 더 즐겁게 살아야 한다. 성경이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물론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즐거워한다. 그러나 염려와 어려움이 있으면 즐겁게 살지 못한다.
흔히 기뻐하지 못하는 세 이유가 있다.
1) 염려 : 걱정, 근심, 염려에 사로잡힐 때 기뻐할 수 없다.
2) 환경 : 환경이 좋지 않을 때 우리는 기뻐하지 않는다. 건강이 좋지 않고, 집에 돈이 없고,
직장이 없고, 여러 환경이 좋지 않을 때 기뻐하지 못한다.
3) 비교의식 : 남과 비교해서 뒤떨어지면 즐겁지 못하다.
그럼, 그럴 때는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런데 성경은 한걸음 더 나간다.
2. 항상 : 항상 기뻐하라는 것이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기쁘게 즐겁게 사는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때, 신날 때만 기뻐하지 말고 모든 상황에서 기뻐하라고 한다. 이 ‘항상’이란 단어에서부터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생겨난다. 신앙인들은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는 술 담배 이상이어야 한다. 그중 하나가 ‘항상 기쁨’이다.
* <너는 왜 항상 웃니?> : “너는 왜 항상 웃니 슬퍼도 눈물 나도 남들은 모를 거야 왠지 좋아 항상 좋아” “너는 왜 기뻐하니 마음이 괴로워도 남들은 모를 거야 웬지 좋아 항상 좋아.”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명령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항상 기뻐하겠습니다’라고 반응해야 한다. 그러데 항상 기뻐하는 방법이 문제다. 어떻게? 그것이 ‘주 안에서’다.
3. 주 안에서 : 세상 조건과 환경 '안'에서가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1) 바울은 : 육체에 가시, 심지어 사단의 가시라 불리는 어려움이 있어도
‘육체에 가시가 있어도 도리어 기뻐함은’(고후 12:9)
2) 하박국 : 모든 노력과 소유가 다 사라지는 상황이 와도
"무화가나무 잎이 마르고..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합 3:17-18)
3) 야고보 : 여러가지 시험들이 닥쳐 와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약 1:3).
4) 세례 요한 : 자존심이 상하고 남에게 뒤쳐지는 일이 벌어져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런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환경을 따라 기뻐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기뻐했다. 합력해 선을 이룰 것을 믿기에, 감당할 시험 밖에서 주시지 않음을 믿기에, 현재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음을 믿기에,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 축복의 도구가 될 것을 믿기에, 나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믿기에.... 신앙인은 예수 안에서 즐거워한다.
헨리 나우웬은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쁨은 영성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흔히 슬플 때에는 기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슬픔과 기쁨은 공존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기쁨은 우리에게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계속하여 기쁨을 선택해야 한다.” 즉, 단순한 감정적 문제라면 어려울 때는 기뻐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 신앙으로, 믿음으로 선택하기에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4. “다시 말하노니” : 그래도 기뻐할 수 없는가? “다시 말한다. 기뻐하라.”
* 유명한 심리학자인 레오 버스카글리아(Leo Buscaglia)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에서 어머니에 대해서 추억을 소개하고 있다. 아버지 파산 소식 들었을 때, 어머니는 보석 목걸이를 팔아 저녁 잔치를 여셨다. 이 소식이 가족들에게 알려지자 비난의 말이 쏟아졌다. 그때 어머니의 말씀. “그날 저녁이야말로 우리 가족에게는 다른 어떤 때보다 기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그날 일에 대해 아버지의 소감을 물었을 때 아버지는 “나는 그날 다시 용기를 갖고 내 인생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단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쁨의 길을 의도적으로 선택한 삶의 스타일, 우리가 배워야 한다. “주님, 기뻐할 조건도 상황도 아니지만, 주께서 다시 말씀하시니 기뻐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 그때 기쁨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것이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 이 말은 진리며, 주의 말씀에 순종해 기뻐할 때, 환경을 초월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III. 공동체의 기쁨 :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다.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런 신앙인이 모인 공동체의 분위기는 어떠하겠는가? 당연히 밝고 즐겁고 기쁨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예수로 인해 구원받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럼, 우리 교회 분위기를 보자.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가? 아니면 장례식과 같은 모습인가? 우리 예배와 공동체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야 한다. 만약 교회를 처음 방문한 불신자의 눈에 비친 교인들의 모습이 무표정하고 무뚝뚝하다면 다시는 그런 딱딱한 분위기에 오고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반겨주는 성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뿐 아니라 다시 오고 싶은 마음도 가지게 될 것이다.
* 대전의 한 교회 : 예배 후 성도들의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 없음. 지나가는 택시 기사들, 왜 저렇게 밝고 기쁠까? 그래서 교회 와봄.
* 송탄제일교회 : 오래된 교회, 연세 드신 분들이 많음. 그러다보니 너무 무겁고 쳐지고 굳은 모습의 예배 분위기. 그래서 예배와 교회 분위기를 밝고 즐겁게 만들려고 애씀. 그 결과 교회에 가면 이전과 분위기가 다름. 이런 분위기의 변화 중요하다.
우리 교회 처음 찾아오는 사람들, 교인들의 밝고 환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저들은 왜 저렇게 기쁠까? 세상 사람들도 우리들 보고 “왜 항상 웃을까?” 이런 궁금증을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복음은 종이에 붓으로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생활 속에 기쁨 가득한 삶으로 써내려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그래서 백성들에게 칭송받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했다.
기쁨의 공동체를 만들자. 교회에 와서는 모든 염려과 걱정 근심, 하나님께 내려놓고 우리 마음에 위로부터 내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충만하게 채우자.
IV. 결론 :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그런데 그런 주님을 믿는 우리 신앙인들의 얼굴 표정은 어떠해야 할까? 그리고 그런 자들이 모이는 교회의 분위기를 어떠해야 할까?
오늘 말씀 기억하자. 앞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올 때, 우리의 모습, 우리 교인들의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도전을 받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분위기를 바꾸자. 예수 안에서 즐겁게 활짝 웃으며 즐거움으로 살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