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지
III. 치화(治化)의 시대
치화의 시대의 계기가 된 것은 [오행의 화]이나 이때 치화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만들어 진 것이지 이때부터 치화의 시대는 아니다. 본격적인 치화의 시대는 47대 고열가단제의 폐관 이후로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부터 오행의 화에 대해 나오는데 부도지의 내용중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다.
오행의 화란 하늘에 대한 인간의 반란으로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흐름을 바꿔 놓았고 결국 그것이 조선의 막을 내리며 부도의 법이 끊어 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제 5 장 :오행(五行)의 화(禍)
第十七章
이 때에 도요(陶堯)가 천산(天山)의 남쪽에서 일어났다. 일차로 출성(出城)한 사람들의 후예였다. 일찍이 제시(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보(堡)의 간(干)에게서 도(道)를 배웠다. 그러나 원래 수(數)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9수5중(九數五中)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중5(中五) 이외의 8은, 1이 즉 8이라고 생각하고, 내(內)로써 외(外)를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오행(五行)의 법을 만들어 제왕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요가 곧 관문 밖으로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다.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有因)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壬儉)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나갔기 때문에, 비어 있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서북의 삼방(三方)으로 흩어졌다. 요가 곧 9주(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중에 사는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와 대립하였다. 때에 거북이 등에 지고 나왔다는 부문(負文)과, 명협(蓂莢)이 피고 지는 것을 보고, 신의 계시라 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역(曆)을 만들고, 천부(天符)의 이치를 폐하여 부도(符都)의 역을 버리니, 이는 인세 두번째의 큰 변이었다.
第十八章
이 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로 하여금 환부(鰥夫)와 권사(權士)등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업(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 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第十九章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순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요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의 무리 우(禹)가 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우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한다고 말하고, 상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第二十章
우 가 마침내 부도를 배반하고 도산(塗山)에 단(壇)을 설치하였다. 서남 제족을 정벌하여, 제후(諸候)라 하고, 도산에 모이게 하여, 조공을 받았다. 이는 부도 제시(符都際市)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으나, 폭돌(暴突)한 것이었다. 이에 천하가 시끄러워, 부도로 도망하여 오는 자가 많았다. 우가 곧 수륙(水陸)의 길을 차단하여, 부도와 연락을 끊고, 내왕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감히 부도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에 유호씨가 서벙에 살면서, 묘예(苗裔)를 수습하여, 소부와 허유가 사는 곳과 통하고, 서남 제족과 연락하니, 그 세력이 심히 왕성하여, 스스로 읍(邑)을 이루웠다. 유호가 곧 권사(權士)를 보내, 우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요 는 천수(天數)를 몰랐다. 땅을 쪼개서 천지를 제 멋대로 하였다. 기회를 틈타 독단(獨壇)을 만들고, 사사로이 개나 양을 기르기 위하여, 사람을 몰아낸 후, 자칭 제왕이 되어, 혼자서 처리 하였다. 세상은 토석(土石)이나 초목처럼 말이 없고, 천리(天理)는 거꾸러 흘러, 허망에 빠져버렸다. 이것은 거짓으로 천권(天權)을 훔쳐, 사욕의 횡포를 자행한 것이다. 제왕이 만약 천권을 대행하는 것이라면, 능히 일월(日月)을 개폐(開閉)하여, 만물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제왕이란 수의 요체(數諦)요, 사람이 거짓으로 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으로 칭하면, 다만 사기와 허망의 나쁜 장난이 될 뿐이다. 사람의 일이란 증리(證理)요, 세상의 일이란 그 증리한 사람의 일을 밝히는 것이니, 이 이외에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도의 법은 천수의 이치를 명확하게 증명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무(本務)를 수행하게 하고, 그 본복(本福)을 받게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비록 선후는 있으나, 높고 낮음이 없으며,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비록 친숙하고 생소한 것은 있으나, 끌어들이고 몰아내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해가 평등하며, 제족(諸族)이 자행(自行)하는 것이다. 오직 그 오미(五味)의 죄책을 보속(報贖)하는 것과, 대성의 일(大成之業)을 회복하는 것은, 언제나 일인 희생의 주관아래 있는 것이요, 여러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이 일은 예로부터 세상 일(人世之事)에 섞이지 아니하였다. 황궁(黃窮)씨와 유인(有因)씨의 예가 바로 이것이다.
第二十一章
또 그 소위 오행(五行)이라는 것은, 천수(天數)의 이치에 이러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방위(方位)의 중앙 5는 교차(交叉)의 뜻이요, 변행(變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1로부터 9까지 이므로, 5는 언제나 중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9가 윤회하여, 율(律)과 여(呂)가 서로 조화를 이룬 후에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니, 이는 기수(基數)를 이르는 것이요, 그 57이 크게 번지는 고리(大衍之環)에 이르면, 그 자리가 5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47이 있는 것이다. 또 그 순역(順逆) 생멸(生滅)의 윤멱(輪冪)은 4요, 5가 아니니, 즉 원수(原數)의 9는 불변수이기 때문이다. 또 윤멱이 한 번 끝나는 구간은 2X4=8 사이의 7이요, 5가아니다. 또 그 배성지물(配性之物)은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다섯 중에서 금(金)과 토(土)를 왜 따로 구별하는가. 그 약간의 차이 때문에 구별을 하고자 한다면, 기(氣)풍(風)초(草)석(石)따위는 어찌 같이 들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 들자면, 수가 없는 것이요, 엄별해서 들자면, 금목수화 혹은 토목수화의 넷이요, 다섯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 물성(物性)을 어떤 이유로 수성(數性)에 짝지우는가, 수성지물(數性之物)은 그 원수가 9요, 5가 아니다. 그러므로 5행의 설은, 참으로 황당무괘한 말인 것이다. 이로써 인세를 증리(證理)하는 일을 무혹(誣惑)하여, 곧 천화(天禍)를 만드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第二十二章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못하고, 거북이나 명협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는 또 무슨 속셈인가. 천지의 만물이 다 수에서 나와, 각각 수를 상징하고 있는데, 하필 거북과 명협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물사(物事)에, 각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이라는 것은 역사(歷史)다. 그러므로, 요의 역제는, 즉 거북과 명협의 역이요, 인간의 역이 아니니, 그것이, 인세(人世)와 불합(不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삼정(三正)을 번복하여, 구차스럽게 맞추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하늘의 죄를 끌여들였다. 역(曆)이라는 것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이므로, 그 수는 몸소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가 증합(證合)하여 복이 되고, 역이 바르지 못하면, 천수에 어긋나 화가 되니, 이는 복은 이(理)가 존립(存立)하는데 있고, 이는 정증(正證)에 존립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은, 인세 화복(禍福)의 발단이니, 감히 삼가 하지 않을 것인가. 옛날, 오미(五味)의 화(禍)가, 한사람의 미혹에서 나와서, 만대의 산사람(生靈)에게 미치고 있는데, 지금 또 다시 역의 화가, 장차 천세(天世)의 진리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기만 하구나.
第二十三章
천 도(天道)가 돌고 돌아, 종시(終始)가 있고, 종시가 또 돌아, 4단씩 겹쳐 나가, 다시 종시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를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니, 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에는 28일이 있으며, 다시 4요(曜)로 나뉜다. 1요에는 7일이 있고, 요가 끝나는 것을 복(服)이라 한다. 그러므로, 1사에 52요복이 있으니, 즉 364일이다. 이는 147성수(性數)요, 매 사의 시작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으니, 단과 1은 같기 때문에 합하여 365일이 되고, 3사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이 있으니, 판은 사의 2분절이다. 이는 258법수(法數)요, 달이 긴 것이 1일과 같기 때문에, 제 4의 사는 366일이 된다. 10사의 반(半)에 대회(大晦)에 구가 있으니, 구는 시(時)의 근원이다. 300구가 1묘(?)가 되니, 묘는 구가 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묘를 지내서 각(刻), 분(分), 시(時)가 1일이 되니, 이는 369의 체수(體數)다. 이와 같이, 끝나고 또 시작하여, 차차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쳐서, 이수(理數)가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저 요의 이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僞)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 실위(實爲)의 도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허위는, 안에서 이(理)가 불실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실위는, 이(理)가, 나를 언제나 만족하게 하여, 스스로 함께 존립한다.
第二十四章
유 호(有戶)씨가 이와 같이 단단히 타일러서, 제법(諸法)을 폐지하고, 부도로 돌아 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반대로 위협이고, 모욕이라 하여, 곧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수차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모산(茅山) 진지(陣地)에서 죽었다. 이에 하중(夏衆)들이 비분하여, 죽기를 원하는 자가 수 만이였다. 이는 거의가 우와 함께 치수(治水)를 한 무리들이었다. 우의 아들 계(啓)가 이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으로 진격하여 오니, 유호씨의 군은 불과 수 천이었다. 그러나, 하군(夏軍)이 싸우면 반드시 패하여, 한번도 전적을 거양하지 못하였다. 계가 마침내 두려워서 퇴진하고, 다시 공격하지 못하자, 그 무리가 격양되었다. 이에 유호씨가 하중(夏衆)이 눈이 먼 것을 보고, 고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차 서남제족(西南諸族)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제 8 부 : ‘오행(五行)의 화(禍)’가 주는 의미
부도의 법에서는 기(氣)화(火)수(水)토(土)라는 4대 원소로 만물이 구성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 4가지의 구성 요소가 오행 목(木)화(火)토(土) 금(金)수(水)의 5가지 구성 요소와 차이는 무엇일까?
부도지(符都誌)에서는 이 구절에서 상당히 많은 자리를 할당을 하여 설명을 하였다.
물론 상당부분은 내용에 대한 설명이긴 하지만 그만큼 중요하게 다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도지에 나오는 4대 원소는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면을 보충하며 완성으로 나가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 아이와 어른, 밤과 낮과 같이 서로 상반되는 개념끼리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만물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는 높고 낮음, 잘나고 못남, 귀함과 천함이 없이 모든 것에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고 그것이 서로 어울러져 조화를 이룰 때 완성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개념이다.
실제 고대 우리나라의 국가는 완전평등을 실현한 공산주의 국가로 높고 낮음이나 귀천의 개념이 없는 완전한 평등 사회라 한다.
이 는 우리의 음식문화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외국의 경우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거나 주된 맛 뒤에 첨가하여 맛이나 향을 첨가하거나 보조해 주는 형식인데 반하여. 우리의 음식은 여러 가지 재료가 어울어져 새로운 맛을 만드는 이른바 비빔밥으로 대표가 되는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행의 원리에서는 토가 중앙에서 다른 네가지 원소의 균형을 제어하는 형상으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통재하며, 희생을 받거나 희생을 하는 관계등으로 이루워져 있다.
이는 지도층의 절대 권력을 형상화 시킨 것으로 계급사회, 투쟁을 정당화 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水)는 화(火)를 이기며, 토(土)에게는 지며, 목(木)을 생(목을 위해 희생)하고, 금(金)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성이 된다.
목은 토(土)를 이기며, 금(金)에게는 지며, 화(火)를 생(화을 위해 희생)하고, 수(水)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성이 된다.
또한 토(土)는 중앙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니 중국의 황제(皇帝)나 지배층을 형상화 하여 만들어진 개념이라 하겠다.
결 국 모든 것이 하늘에서 나온 산물이며 만물이 서로의 부족한 면을 서로 메워주며 이들의 조화에 의해 세상이 만들어 진다는 이론이 서로 생하는 힘에 의해 생성이 되고 극하는 힘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어 폭주하는 것을 막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론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로 인해 지배자(상극하는 힘)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권력에 대한 욕망에 의해 투쟁이 일어나니 오미의 화에 의해 생긴 관념에 오행의 화로 인한 투쟁의 힘이 보태져 세상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제 9 부 : 부도의 역(曆)
부도의 역은 마야나 잉카의 역과 유사하다. 마야나 잉카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태양력을 사용을 한다.
우리민족도 역시 광명을 숭상하여 국가 이름도 밝음을 상징하는 환국이나 배달국이니 그들과 같은 태양력을 사용을 한다고 가정을 하고 이를 보는 것이 유사 할 것 같다.
서양 역시 태양력을 사용한다고 하나 자연의 주기에는 관계가 없이 1년이라는 단위에 날자를 끼어 맞춰 실지 자연의 주기와는 맞지 않는다.
우리의 역은 천부경의 원리에 따라 시작과 끝이 하나(시작과 끝의 주기로 여기서는 1년을 뜻한다.)이니 이것이 한번 돌아가는 것을 소력(小曆)이라 하고 소력의 1회를 사(祀)라 한다.
1사에는 13기(期)가 있고, 1기는 4요(曜)가 있고, 1요에는 7일이 있어, 1사는 52요복(13기X4요)이 있으니 합이 364일이다. 여기서 1사(년)의 시작에 단이 있으니 시작에 1을 합하여 365일이 된다.
또한 여기서 4번째 사에 다시 1을 보태니 366일이 된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1년은 13달이 있고 1달에는 4주가 있고 1주일은 7일(그러니까 1달은 28일)이고 1월달은 하루가 더 있어 29일이 있다. 그래서 1년은 365일이 되고 4년에 한번 윤년이 오면 366일이 된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1년이 13개월이 너무나 과학적인 방식이므로 2000년부터는 이 방식을 취하자 하며 주장을 하는 것으로 봤을 때 우리 조상님들은 너무나 과학적인 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 6 장 : 잃어버린 부도의 법
第二十五章
이 로부터, 천산(天山) 남쪽 태원(太原)의 지역이, 뒤숭숭하고 떠들썩하며, 주인이 없는 것과 같아서, 소위 왕이란 자는 눈이 멀고, 소위 장님은 백성이 되어, 암흑이 중첩하였다. 강자는 위에 있고, 약자는 아래에 있어, 왕과 제후를 나라에 봉하고, 생민(生民)을 제압하는 풍폐(風幣)가 만연하여 고질이 되고 마침내 서로 침탈하기에 이르니, 헛되게 생령(生靈)을 죽이고, 한가지도 세상에 이로운 것이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하은(夏殷)이, 다 그 법으로 망하고서도, 끝내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이는 스스로 부도에서 떨어져 나가, 진리의 도를 들을 수 없게 된 까닭이었다. 어느덧 유호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성생(月息星生)의 땅에 들어가니, 즉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잊지 아니하고, 고탑(高塔)과 층대(層臺)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이유를 깨닫지 못하여,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마고(麻姑)의 일은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지니, 유호씨가 두루 제족의 지역을 돌고, 마고와 천부의 이(理)를 설(說) 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 전고자(典古者)가 송구스럽게 일어나서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유호씨가 본리(本理)를 술회하여, 그것을 전하였다.
第二十六章
임 검씨가 유호씨의 행상(行狀)을 듣고, 그 길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族)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게 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때에, 임검씨가 하토(夏土)의 형세를 심히 걱정을 하고, 마침내 입산(入山)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專修)하였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가 되는 것을 증명하여, 인생이 일족(一族)이 되어, 크게 부조(父祖)의 도를 일으키고, 널리 <천웅(天雄)의 법을 행하여, 인세 증리(證理)의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운해족(雲海族)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하토(夏土)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이도(異道)가 점차 성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를 아들 읍루씨(?婁氏)에게 전하고 입산하였다. 읍루씨가 날 때부터, 대비(大悲)의 원(願)이 있어, 천부삼인을 이어받고, 하족(夏族)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진리가 사단(詐端)의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에 천부를 봉쇄하고, 곧 입산하여, 복본의 대원(大願)을 전수(專修)하며, 백년 동안 나오지 아니하니, 유중(遺衆)이 통곡하였다.
임 검씨가 후천(後天)의 말세의 초에 태여나, 사해의 장래를 미리 살피고, 부도 건설을 시범하니, 천년 사이에 그 공업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에 이르러 천부의 전해짐이 끊어져, 마고 분거(分居) 이래로, 황궁(黃穹), 유인(有因), 환인(桓因), 환웅(桓雄), 임검(壬儉), 부루(夫婁), 읍루(?婁)의 7세에 천부가 전해진 것이 7천년이었다.
제 10 부 : 잃어버린 부도의 법
상고사에 있는 우리 고대국가를 보면 큰 의문점이 하나가 있다.
한단고기나 기타 다른 상고사에 관련된 서적을 보면 우리민족의 영토가 너무나 거대했다.
그 영토를 어떻게 관리를 했을까?
조선시대 인구 조사를 한 것을 보면 1억8천만의 인구가 있다 했다.
이것으로 봤을 때 당시의 영토는 지금의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부분을 차지를 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통신기기나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지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중앙에 어떤 일이 있는지 알기가 힘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지방에 어떤 세력을 지닌 지방 호족이 나쁜 마음을 먹고 은밀히 세력을 모은다면 중앙에서는 알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예를 봐도 국가의 크기가 어느 정도 이상 커지면 관리의 어려움으로 통제력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중국 같은 경우를 봐도 역사가 200년 이상 되는 나라가 없다.
앗시리아제국, 사라센제국, 원나라 같은 경우도 그렇다.
로마 같은 경우는 교통망을 엄청 강화시켜(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교통망에 엄청난 에너지를 쏳았다.)그래도 그나마 오래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고대 국가는 그러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가 유지를 할 수 있었을까?
당시 환국은 3301년, 배달국은 1565년, 조선은 2096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잉카제국의 국가 형태를 보면 답을 알 수가 있다.
잉카제국도 우리와 같은 우리와 같은 공산주의 체제 였다.
그들은 강력한 종교의 힘으로 국민을 묶어 일을 하지 않음은 죄악 이였기에 특별한 통제 수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우리 고대국가가 공산주의 사회라는 말을 했었다.
우리는 환인, 환웅, 단군을 한얼님이란 말로 자주 불렀다.
이것은 큰 얼을 가진 님이란 뜻이니 이들이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는 말이다.
부도의 법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었기에, 천손족의 문화로써 정신적으로 모두가 한 울타리안에 있었기에 국가가 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 고성의 시대는 본성만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이다. 그렇기에 그때는 우리 모두가 신성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오미의 화로 욕망이 생기고 관념이 생겨 본성에 막이 생겨 신성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마고성에서 나오게 되었고 12명의 천인(天人)에 의해 민족은 여럿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궁씨(黃穹氏)에 의해 그 법이 잘 지켜져 주변의 다른 나라의 정신 지도국으로 그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었다.
다시 오행의 화가 있고 이에 의해 지나족은 혼란한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이들은 안정된 조선으로 흘러 들어 오게 되고 이들에 의해 이민족의 저급한 문화에 의해 문화 침투를 당하게 되어 우리가 오히려 오행의 화를 입게 된다.
이 오행의 화에 의해 지배욕이 생기게 되고, 투쟁심이 생겨 민족을 이루고 있는 정신적 고리가 끊어지며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결국 부도의 법을 잃어 버리고 국가가 분열하게 된다.
고열가 단군 때에는 더 이상 통제를 하기 어려운 법이 통하지 않는 시대까지 가서 결국 법을 안고 폐관을 하게 된다.
제 7 장 : 삼한에서 삼국으로
小 符 都 誌
第二十七章
은 (殷)의 망명자 기자(箕子)가, 패군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당우의 법을 행하고, 오행 삼정(五行三正)을 써서, 홍범 무함(洪範巫咸)을 시행하였다. 천웅의 도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은의 군민(軍民)이 무력으로 부도의 유중(遺衆)을 억압하므로, 유중이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壇)을 봉해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의 사례벌(斯禮筏)의 공지(空地)였다. 사해벌은 긴 기(長旗)니, 광야(曠野)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 먼곳에서 살면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곧 육촌(六村)을 설치하고, 입접의 제족과 분담하여, 함께 지키되, 각각 한(韓)이라 하고, 보위(保衛)하였다. 한은 보위의 뜻이다.
북 의 마한(馬韓)과, 남의 변한(卞韓)과, 동의 진한(辰韓)의 삼한이 부족의 자치를 행하고, 선세(先世)의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 사이에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 때 하토(夏土)의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와 혼란이 삼한에 파급되므로,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고,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여, 보수(保守)하기가 장차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要塞)를 세워,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어(統御)하는 일을 위임하였다. 남은 백제(百濟)요, 북은 고구려(高句麗)였다. 고구려가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하여, 서침(西侵)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보위하였다.
제 11 부 : 열국시대로
앞 에서 얘기를 한 것처럼 오행의 화에 의해 혼란진 중국의 여러 국가(夏, 殷)의 유민이 삼한으로 흘러 들어옴으로써 삼한의 백성들이 꺼꾸로 문화 침투를 당하여 부도의 법이 끊어지고 의식의 고리에 틈이 생겨 국가의 통제력의 한계를 맞게 된다.
특히 44세 단군 때부터는 삼한은 통치는 받으나 군사권은 각각 나눠 가졌으며, 47세 고열가 단군의 폐관 이후는 실질적인 법통을 잃어 삼한이 여럿으로 분열이 되니 그 여러 제후국 중 가장 강한 나라에서 단군이 나왔다.
이 때문에 실질적인 법통을 가진 진한의 후예가 이러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권력 쟁탈전에 회의를 느껴 이 들의 세력이 닿지 않는 구석진 자리에 가서 나라를 세우니 이가 신라가 되었다.
그리고 삼한의 여러 나라 중 고구려와 백제가 있어 다른 여러 나라를 병합 하여 커지니 후세 사람들이 삼국시대라고 부르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렇게 생성 되었다.
제 8 장 : 잃어버린 역사
제 12 부 : 한사군의 허구
70년대 중반 재야 사학자 임승국은 한사군의 명칭이 사마천의 ‘사기(史記)’ 115권 조선열전(朝鮮列傳)은 물론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지극히 단순한 이사실 하나를 발견하는데 2000년이 걸렸다면 과연 믿겨질 만한 일인가?
한 말 친일어용 사학 단체인 청구학회의 공동 대표 였으며 해방 후 반세기 동안 남한 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는 사기(6권)에 한사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으나 임승국에 의하면 사기 그 어느 곳에도 그러한 기록이 없다.
일연스님조차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한사군을 논한 것을 보고 군의 수도 명칭도 틀리다 하였으나 어찌 2000년 동안 한번의 의문도 없이 이를 받아드렸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또 한 한무제가 보낸 수군제독 양복은 열수를 거슬려 올라가다 조선 수군의 습격을 받아 패전하여 배는 가라앉아 버렸고 상륙하여 도망다니는 치욕을 치렀다. 또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무제에 의하여 사형이라는 극형을 당하고, 사체는 찢겨 사대문에 걸리는 기시(棄市)에 처해 졌던 것이다. 육군 사령관 순체(筍?)도 같은 기시를 당했다. 이 전쟁의 주역이였던 양군의 사령관이 모두 기시에 처해 졌다는 것은 이들이 승전의 주역이 아니라 패전의 주역 이였다는 말 일 것이다.
만약 이들이 승전고를 울렸다면 이들은 승전의 영웅이지 결코 이렇게 죄를 물어 처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패전한 나라가 한사군을 설치를 할 수 있었겠는가?
실지 위만조선으로 알려진 우거 정권이 구테타로 무너진 뒤 그곳에 설치된 사군은 한나라사람이 다스리는 사군이 아니라 조선사람 참최음협이라는 네 사람이 다스리는 평주홰청추저날양이라는 4군이였다.
사기에서는 조선이 평정되어 4군이 되었다고 하며 평주홰청추저날양이라는 4군을 소개 했고, 이 사군의 행정 통치 책임자들을 조선족인 최음참협이라는 네 사람이라 했다. 또 그 4군의 위치를 발해 연안에서 산동반도까지라 했다.
그러면 우리 역사의 기록에서 흔적을 보면 낙랑국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많은 사학자들이 낙랑군과 낙랑국을 같은 존재로 봤으나 이들 둘은 서로 다른 존재이다..
삼 국사기에서의 낙랑국에 대한 이야기는 저유명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 져 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서기 32년)때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낙랑왕 최리(崔理)가 낙랑군의 태수가 아니라 왕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낙랑이 멸망을 한 시기가 강단사학자의 말을 빌리면 미천왕 14년(서기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을 하였다 하니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서기 32년)에 멸망을 한 낙랑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또 한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3년조의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양국(兩國)이 귀복하였다”는 기사 역시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이야기가 되었고, <삼국사기>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조에도 ‘낙랑은 신라와 이웃나라이다’라 했다.
이 낙랑국의 위치는 앞서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의 남쪽이라 했고 남해차차웅조에서는 신라와 이웃나라라 했으니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있는 작은 국가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여러 자료에서 보듯 낙랑군은 그 이름만이 보이지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유령국가 이다.
제 9 장 : 어둠속으로
第二十八章
이 보다 먼저, 육부(六部)의 촌장(村長)들이 약(藥)을 캐는 날에 모여서, 선도산 단묘(仙桃山壇廟)의 성모(聖母)가 알을 낳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가서 보았다. 동쪽의 우물을 보로 덮어 가리고, 껍질을 벗겨서, 남아를 얻었다. 몸에서는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곧 박(朴)으로써 성을 삼고,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박은 단의 어음이 박달이기 때문에, 그것을 취하여 성을 삼았으며, 혁(赫)은 빛이니, 즉 광명으로써 암흑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육 촌의 사람들이 함께 양육하니, 점차 자라면서, 신기(神氣)가 수명(秀明)하고, 대인(大人)의 도가 있었다. 13살에 여러 사람이 추거(推擧)하여, 거서간(居西干)이 되니, 거(居)는 거(据)요, 간(干)은 방(防)이요, 장(長)이다. 즉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防禦長)의 뜻이다. 서방은 즉 저들 서침하여 사도(詐道)를 행하는 자들이다.
第二十九章
혁 거세씨는, 천성(天性)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도 같았다. 또 현비(賢妃) 알영(閼英)을 맞이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가르켜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사 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儀式)을 행하고,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금척(金尺)의 이치에 따라, 천지시원의 근본을 증리(證理)하여, 옥관(玉管)의 음을 내서, 율여화생법(律呂化生法)을 수증(修證)하였다. 해마다 10월에 백의제(白衣祭)를 행하였으니, 이는 황궁(黃穹)씨의 속신백모지의(束身白茅之義)를 따르는 것이었다. 달구(達丘)에 조시(朝市)를 배풀고, 율포(栗浦)에 해시(海市)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항상 순행(巡行)하여, 농상(農桑)과 방적(紡績)을 권장하니, 들에는 노적(露積)이 쌓이고, 집에는 베(布)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착한 일을 크게 일으켜, 여러 사람과 함께 그 고락(苦樂)을 같이 하고, 밖으로 방패와 창을 쓰지 아니하며,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보존하였다. 한 마음으로 복고(復古)하고, 중건(重建)하는 일에 전념하니, 경내가 도가 있어, 옛날과 흡하사였다. 이 때에 변진(弁辰) 제족이 합동하여 협력하니, 비록 경계를 두고 방비하나, 나라를 칭하지 아니하고, 또 왕을 칭하지 아니하였다. 경내를 다스리는 일은 선세(先世)의 법을 준수하여, 제회(祭會)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가지의 일도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영수계위법(領首繼位法)이, 역시 혈계(血系)를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현명한 사람을 택하여 영수를 삼았다.
第三十章
남 아 나이 20살이 된, 아름답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택하여 마랑(馬郞)이라는 직을 주고, 명령을 받들어 원행(遠行)하게 하였다. 혹 성생월식의 옛 땅에 나아가며, 혹 운해천산의 여러 지역에 가니, 이 원행은 부도 수신(修身)의 유제(遺制) 였다. 동해에 피하여 산 지 천여년사이에 제시의 회(祭市之會)를 열지 못하여, 서로 내왕이 오래 끊어지고, 또 봉국쟁탈(封國爭奪)의 풍조가 사해에 만연하여, 제족이 각자 나라를 칭하고, 오랜 세월에 전란이 반복하니, 겨레(族)가 종횡으로 나뉘고, 말이 잡다하게 변하였다. 천부는 거의 망각하기에 이르고, 혹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도, 다 변형(變形)하여, 음이 다르니, 마랑들의 원행이 심히 어려워, 순절(殉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랑들이 만리 원행에서도 절조를 지켜, 능히 굳은 뜻을 가지고, 백난을 극복하여 사명을 완수하니, 그 거룩한 인격이 진실로 호매(豪邁)하였다. 장하게도 귀환하면, 반드시 직사(職事)에 임명하여,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와 역수(曆數)와 박물(博物)을 공부하게 하니, 이는 즉 선세에 사해를 통화하여, 인세(人世)를 하나의 법에 맞추는 유업이었다.
第三十一章
서 례벌(西禮筏)을 창도(創都) 한 후로, 어느덧 삼세(三世)를 지나니, 백여년이 되었다.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여 보수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왕(國王)을 세워, 대권을 행사 하게 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고 시끄러웠다. 그 반대자들은 선세의 유법이 밝고 밝게 천부를 비추니, 지금 비록 시대가 어려우나, 보수하고 튼튼히 방비하여,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어찌 사단(詐端)에 굴종하여 스스로 소자(小子)가 되어, 패리지중(悖理之中)에서,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와 같이 된다면, 의롭게 목숨을 바쳐, 진도(眞道)를 뚜렷하게 나타내어, 후세에 남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 찬성하는 사람들은, 외세가 긴박하여 파동이 격심하니, 어떻게 방비를 하겠는가. 담장 안에서도 이반하여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보수한단 말인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같이 경쟁하는 마당에 뛰어들어, 부강하게 된 후에, 유업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지금 사해 제족이 사도에 미쳐 날뛰어, 봉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우리가 지금 자멸하여 버리면 누가 진도를 현창하며, 후세에 누가 있어, 이를 알 것인가. 만약 능히 방비하여, 보수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고립되면, 새 백마리 가운데 백로 한 마리가 되어, 오히려 이도(異道)가 되고 세상에 존립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장차 또 그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 같은 것은 다 옳지 못하여, 오직 택할 바는, 나라를 세우고 왕을 높여, 대권(大權)을 집행하며, 군마를 호령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부도 전역을 회복하는 것 뿐이다. 부도를 다시 세워, 그 근본을 명시하면, 제족이 비록 완강하더라도, 반드시 각성하여, 근본으로 돌아올 것이다.
第三十二章
이 에, 마침내 중론(衆論)이 결정되었으므로 인망(人望)이 왕국 수립을 주장하는 석(昔)씨에로 돌아 왔다. 석씨는 동보(東堡)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해빈(海濱)에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있었으므로, 남해씨(南海氏)가 딸을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여망에 따라, 자리를 이어 탈해왕(脫解王)이라 칭하니, 즉 보수(保守)의 질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또 서라국(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경내(境內)를 평정하였다. 용병(用兵)을 과도하게 하여, 필경은 배척당하였다. 중론이 다시 박씨의 보수계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에게로 돌아 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니, 이가 벌휴씨(伐休氏)였다. 석씨 4세 사이에 정벌을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김씨의 중화(中和)로 돌아왔다. 김씨는 원래 부도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살던 비족으로, 온양덕후(溫讓德厚)하여, 지마씨(祗摩氏)가 손녀를 주어 아내가 되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자리를 이으니, 이가 미추씨(味雛氏) 였다. 이 때를 당하여 서북의 환(患)이 계속해서 일어나되,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다시 석씨에게로 복귀하였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정사(征事)가 허다하여, 민물(民物)을 탕진하므로, 크게 시대의 배척을 받았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第三十三章
오 직 우리, 근본을 지키는 족들이 동해에 피하여 살면서, 방비하고, 보수한 지 삼백여년 사이에, 중론의 번복이 이와 같으니, 가히 역외(域外) 풍운이 어떠함을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또 가히 천부의 진리가 사단의 세상에서도 의연하게 살아 있음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세 중론이 반드시 이 도가 무너지지 않는 것에 근거하여, 역대 영수가 오히려 중론의 소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과격하지도 느슨하지도 않게 능히 조절하여, 보수를 크게 전하였으니, 마침내 오늘의 사람들로 하여금 가히 천부의 실재를 알게 하며, 또 장차 후인으로 하여금 때를 만나 그것을 행하게 하여, 능히 부도를 다시 건설하고, 사해를 통화하며, 인세가 복본하여, 진리를 명증(明證)하게 하면, 당시 석씨의 논이 과연 불행 중에서 행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題詩
[아지랑이 초초(??)하게
흐르는 걸 바라보니,
나그네의 마음도
가을처럼 지는구나.
세간(世間)의 견백(堅白)도
유유(悠悠)한 일도
징강(澄江)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잊는다.]
觀雪堂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 계속 출간중. 편찬자 백영해 박씨 대종회
제 13 부 : 어둠속으로
조선의 정통성을 이은 진한(眞韓)의 후예가 서라벌로 옮겨오면서 박혁거세를 거서간(居西干)으로 삼는다.
혁거세씨는 부도의 법에 맞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금척(金尺)의 이치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오행의 화가 그 주변에 미쳐 세상의 풍조가 크게 어지러워 지자 신라의 재계층 역시 따라 흔들려 여러가지로 의견이 분분하였다..
결 국 박(朴),석(昔),김(金)씨로 번갈아 가면서 왕권이 바뀌어 본래의 뜻(부도의 법을 수호)과는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시달림에 지친 신라가 당과 연합을 하면서 많은 유학자나 심지어는 왕족 조차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오면서 부도의 법을 잊어 버리고 문화 침투를 당해 오행의 화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면서 정통은 수호 하였으나 이미 이들은 오행의 화에 노출이 되어 있었기에 결론적으로 민족의 정기에 큰 손상을 가져 온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영향을 받아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 학자는 그 뿌리를 잊어버리고 모화사상에 쌓여 우리의 역사를 왜곡을 시켜 후세 사람들이 제 역사를 알고자 해도 알 수가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 마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