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말 잘 지내고 계시지요... 여유있게 어디 가까운 교외에라도 나들이 다녀오신 분들도 많을 것 같아요... 푸르른 하늘마저도, 그 아래 뭉실뭉실 피어오른 흰 구름마저도, 그리고 그 아래 대기의 기운마저도 맑고 투명한 하루였지요...
한 해 가운데 이 맘 때가 자연의 선물도 제일 풍요롭고 넉넉하며, 덩달아 우리 마음도 제일 여유롭고 너그러워지는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올 초부터 흙 갈고 씨 뿌리고 자식처럼 돌보던 결실을 선물 받는 농부님들에겐 더더욱 그렇지요... 모두모두 좋은 결실 있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오랜만에 모두들 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3.6~1564.2.18)의 그 유명한 그림, "천지창조"를 함께 감상하려고 합니다. 그의 약력과 초상은 두산백과사전과 "토우아트", 그리고 "http://www.thais.it" 을 참고하였으며, 감상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이 그림들을 준비하면서 미켈란젤로의 더 많은 작품들과 아름다운 조각작품들도 감상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의 그림을 감상해보시지요...
르네상스의 3대 화가 가운데 하나인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 화가, 시인으로서, 피렌체 근교 카프레제에서, 아버지 로도비코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0세때 피렌체 시내 프란체스코 울비노 학교에 들어가나 학교 공부보다 지옷토나 마사치오 그림을 모방해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의 부친은 그들 가문에서 예술가가 나온다는 것을 가문의 수치라 여겼기 때문에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공방(工房) 도제(徒弟)가 되었고, 14세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작풍을 배웠습니다. 또 고대 조각도 연구하고, '계단의 성모', '라피타이족의 싸움', 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1496년 로마로 가서 1499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완성했습니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다윗'을 제작하고, 팔라초 베키오 대평의회 회의실 벽화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작의 형태로 위촉 받아, '카시나의 전투'의 바탕그림 소묘를 그렸으나, 미완성하였습니다. 1505년 로마에 가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묘(廟墓)의 주문을 받아, 3층 건조물에 40체의 조상을 배치하는 장대한 계획을 구상하고 조상제작에 착수하였으나, 율리우스 2세로부터 다시,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 '창세기'(1508~12) 제작을 명받고 중단하였으며, 피렌체에서는 산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가 묘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내의 '피에타' ,로마에서는 '모세'(성 베드로 인 빈콜리 성당)와 '노예'(루브르 박물관), 다시 만년에 '론다니니의 피에타'(밀라노, 스포르차 미술관) 등을 제작하였습니다.
화가로서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벽화 '최후의 심판'(1536~41), 바티칸 궁전 파올리나 예배당의 벽화, '바울의 개종'과 '베드로의 순교'(1542~49)를 완성했습니다. 건축가로서는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설계(1524년 이후),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의 정비 계획(1537년 이후), 성베드로 대성당 건조(1546년 이후) 등의 역사(役事)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렇게 다 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던 그는 1564년 2월18일,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죽기 이틀 전 플로렌스에 묻히기를 원하였기에, 로마의 성 아포스톨리 교회에서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플로렌스로 가서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린시절 친구로 부터 입은 코의 상처가 그를 평생 독신으로 살게한 동기가 되었을 정도로 편협하고 외곬수적이었으나 자신의 생김새에 대한 열등감으로 오히려 아름다운 인체를 생명력이 넘치게 표출해 내는데 정열을 쏟아부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양식은 조각, 회화, 건축 각 분야에 걸쳐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완성에 기여하는 동시에, 특히 후반생(後半生)에 있어서는, 내면적 정념 표출을 강조하는 육체 표현과 복잡한 구성으로, 마니에리슴, 바로크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젊을 때, 사보나롤라의 사상과 피렌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1530년대 이후 점차로 신비주의적 경향을 더한 사상 편력의 흔적이 시나 서간 가운데 많이 남아 있고, 거의 500점에 이르는 데생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과 함께 동시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담의 창조 (1), 1510년 프레스코 280*57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부분
큰 폭의 구름과 천사들에 떠받들려 하늘에 부상하는 하나님이 오른손 끝으로 땅위의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이 정적 속의 긴장을 가득 담고 그려져 있습니다. 500년 전의 그림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생동감있고 신비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아담의 창조 (2), 1510년 프레스코 280*57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부분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또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라(창세기 2 - 26~28) "
아담의 모습은 이 창조물을 보고 천사들이 놀랄 만큼이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가까워진 생기와 생명의 근원이 창조되는 순간입니다. 그 생명력이 느껴지는지요...
이브의 창조, 1509~10년 프레스코 170*260cm,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부분
"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창세기 2-21, 23) "
커다란 망토에 둘러싸인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나무 밑에 자고 있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듯한 이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신과 인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여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처럼 참 다정해보입니다.
주위의 나체상은 인체 속에 흐르는 네 가지의 액체 내지 네 가지의 인간의 기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혈액으로서의 다혈질(右下), 황담즙으로서의 담즙질(右上), 점액으로서의 점액질(左下), 흑 담즙으로서의 우울질(左上) 을 의미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