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1914-1993)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13세 시절이던 1926년에 시인으로 첫 등단한 그는 ‘시인부락’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에 자극을 받아 “시는 하나의 회화이다”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후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집에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등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시작 활동은 1952년에 중단되었다. 죽은 동생의 사업을 맡아 경영하면서 실업가로 변신하여 국제상사중재위원회 한국위원회 감사, 무역협회 부회장, 한일경제협력특별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말년 가까이 떠났던 시단 복귀의 신호이듯 이전에 간행한 시집을 정리하여 『와사등』(근역서재, 1977)을 출간하더니, 1982년 「야반(夜半)」 등 5편의 시작을 『현대문학』에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 뒤 문집 『와우산(臥牛山)』(범양사, 1985)과 제4시집 『추풍귀우(秋風鬼雨)』(범양사, 1986) 등을 간행하였다.
김광균은 정지용(鄭芝溶) · 김기림(金起林) 등과 함께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을 선도한 시인으로 도시적 감수성을 세련된 감각으로 노래한 기교파를 대표하고 있다. 그는 암담했던 30년대의 사회현실로서 도시적 비애의 내면 공간을 제시하여 인간성 상실을 극복하고자 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지적이고 이지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시인으로 고독과 슬픔 속에서 실존의 중요성을 확보하고 생의 의미를 긍정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감각적 이미지와 신선한 비유가 낭만적 정조와 융화되어 서정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김광균은 문학이 정치의 진보세력과 손잡고 문학이 진보의 논리만을 획일적으로 펼치는 것에 반대했다. 문학이 예술성을 저버리면 문학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 문학이 한 시대의 정치ᅟᅥᆨ 요구를 암시할 수는 있을 수 있으나, 앞장 서서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도구가 될 때는 문학이 위기에 빠진다고 생각했다.
김광균 시인이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한 1930년대에 한국시는 내용과 형식적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흐름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사상, 형식, 문체를 벗어나 이미지를 중시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비추는 모더니즘은 감각보다는 정서를 중시했다.
이 무렵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가 바로 김광균 시인의 ‘와사등’이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라는 첫머리로 시작하는 시는 당시 도시 문명 속에서 방향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과 비애를 잘 담고 있다.
와사등, 즉 가스등은 모든 곳을 밝게 비추진 못하지만, 그 주변은 환하게 비춘다. 빛의 범위가 넓지 않은 만큼, 낭만적이면서도 따뜻한 정서를 전달하는 사물일 수 있다. 그러나 김광균이 그려내는 와사등은 로맨틱한 대상이 아닌, 슬픔의 정서를 전달하는 매개체다. ‘창백한 묘석같이’, ‘무성한 잡초인 양’ 등 사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표현을 통해 ‘와사등’이 갖는 고독함과 우울함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유성호 교수는 “시 속에서 ‘나는 슬프다’라고 직접 말하기보다 사물에 정서를 입혀 드러냄으로써 누구나 자신의 슬픔을 시에 이입해서 감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